그런 수혁이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 아직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그리곤 입을 열어 수혁이를 불렀다.
“야.”
“…….”
“차수혁.”
“…예, 형.”
“손 줘봐.”
“…예?”
“손 달라고.”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놈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왔다. 리트리버 같은 순한 눈이라고만 생각했던 까만 눈동자가 깊게 침잠한 채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굳어 있는 놈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먼저 몸을 움직였다. 녀석의 옆으로 다가가 앉아 무릎 위로 올라와 있던 수혁이의 손을 향해 맨손을 뻗자 놀란 녀석이 얼른 어깨를 뒤로 물렸다.
“형?”
“가만있어 봐.”
“자, 잠시만요, 형-.”
당황한 얼굴로 방어 자세를 취하는 녀석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기자 금세 기운이 얽히며 당장에라도 링크가 될 것처럼 서로의 기운이 일렁였다. 그래서 링크를 닫으며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자, 놀란 얼굴로 쳐다보던 수혁이가 저도 모르게 링크를 열고 싶은 듯 기운을 풀면서 더 세게 손을 잡아왔다. 그러나 제가 힘을 주고도 놀랐는지 얼른 손에서 힘을 풀며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형, 지금 뭐 하는-.”
“해봐.”
“…뭘, 요?”
눈썹이 모이며 찌푸려진 미간을 사이에 두고 꿈틀거렸다. 그 주름진 미간을 바라보며 나는 선뜻 대답했다.
“정신 조작이라던 네 능력, 그거 나한테 한번 써 보라고.”
#48
“…형!! 미쳤어요?”
만난 이래 처음으로 험악한 얼굴을 해 보인 수혁이는 소리를 지르며 손을 풀어내려는 듯 손목을 흔들었다. 그래서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끌어당겨 녀석의 신경을 돌렸다.
“해 보고 네가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되지. 그러니까 한번 해보라고.”
“형!! 하지 마요! 내 말이 기분 나빠서 이러는 거라면 차라리 욕을 하고, 때려요! 이게 지금 무슨 짓이에요!!”
“수혁아.”
“내가 어떻게 형한테 그래요!! 제발 좀 그만둬요!”
노성으로 소리를 지르던 놈이 단단히 표정을 굳힌 채 사납게 노려봐왔다. 그러나 흔들리는 눈동자만 봐도 녀석이 내 행동에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음만 약한 게 기억 조작은 무슨. 그 호기로운 패기에 작게 웃음이 터졌다.
“거봐. 넌 못했을 거야.”
“…뭐라고요?”
“네가 했다던 그 나쁜 생각 말이야. 넌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거라고.”
“…….”
떨리는 눈동자만큼이나 파랗게 질린 입술을 파르르 떨던 놈이 이내 입술을 사려 무는 것을 보며 녀석의 차가워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긴장한 탓인지 커다란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스스로를 얼마나 괴롭혀왔는지가 느껴져서.
“누구나 살면서 나쁜 생각 정도는 해. 근데 착하고 나쁘고를 가름 짓는 건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냐 안 옮기냐의 차이지. 내가 아는 넌, 그런 행동을 했을 놈이 아니야. 그러니 네가 내 기억 따윌 조작할 리도 없고.”
“…그걸 형이 어떻게 장담해요. 내가 순간 욱해서 무슨 짓을 할지 알고요.”
그 욱도 해본 놈이나 하는 거란다. 그 성질에 욱은 무슨.
“물론 사람이 욱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지. 너와 한태화는 비슷한 또래인 데다가 능력도 거의 상반된 편이라 네가 한태화한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던 와중에 나까지 그놈을 선택하니까 욱할 수도 있어. 그래서 평소 안 하던 짓을 할 수도 있다고 치자고.”
“형!”
“근데 내가 아는 너라면 그런 '실수'를 저질렀어도 금세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 노력했을 거야.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은 가짜란 걸 아니까. 그것 때문에 자신의 능력이 싫어서 평생을 고민해 오던 네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대체 나도 아는 사실을 왜 너만 몰라. 나는 그게 더 이해가 안 간다.”
“…….”
“그러니까 삽질 그만하고 평소 하던 대로 살아. 주변에 걱정도 그만 끼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 말에 수혁이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반대로 잡고 세게 끌어당겼다.
“어? 으-, 야!”
끌어당기는 힘에 균형을 잃고 쓰러진 몸이 수혁이의 몸을 덮치며 소파 위로 쓰러졌다. 얼른 팔을 뻗어 녀석의 머리 위에 위치한 팔걸이를 붙잡긴 했지만 쓰러진 몸 아래로는 이미 수혁이가 누워있었다. 당황스럽게 아래를 바라보자 수혁이가 그대로 한쪽 어깨를 끌어안고 얼굴을 기대왔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어, 음, 수혁아? 이게 지금 무슨-.”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요. 저를 그 정도로 믿어 주시는 것도 감사하고요.”
그 말에 일단 입을 다물긴 했는데 황당함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감사하다는 놈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겹쳐진 몸은 심히 부담스럽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감사하면 좀 놓지?
“근데 제 마음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저는 너무 슬퍼요. …맞아요. 형 말대로 한태화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없다곤 못하겠지만, 그런 것 때문에 형을 좋아한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놈한테 형을 뺏겼다고 생각해서 포기 못 하고 있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애초에 제가 형한테 반했을 땐 형이 한태화가 찾던 그 가이드라는 것도 몰랐다구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이 말을 믿어 주실까요.”
“…….”
팔걸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준 채 고개를 돌리자 어깨 부근에 이마를 묻고 있던 수혁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심이 담긴 진득한 시선을 마주하며 잡혀 있던 손을 풀어냈다. 그리고 바로 녀석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몸을 바로 세웠다.
“아야.”
“한번 깠으면 재깍 알아들을 일이지, 뭘 계속 들이대. 그리고 내가 언제 진짜 그렇대? 네가 자꾸 우기니까 해본 말이었지. 한국 놈들이 말귀를 더럽게도 못 알아먹어요.”
“…아파요, 형.”
뭘 얼마나 세게 쳤다고 차수혁이 이마를 문지르며 원망스럽게 쳐다본다. 그럼 누가 미안해할 줄 알고?
“엄살떨지 말고 일어나라. 다음엔 손바닥이다.”
“…너무해요. 한태화 엄살은 다 받아 줬으면서. 한태화가 힘으로 저 찍어 누르던 날에도 은근슬쩍 한태화 편만 들- 악!”
나를 따라 몸을 세우면서도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수혁이를 내려보다 그대로 손바닥을 들어 녀석의 이마를 찰싹하고 내리쳤다. 그러자 이번엔 진짜 아팠는지 억울한 표정의 놈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눈썹 끝을 내렸다.
“진짜 아파요!”
“그러게 경고했을 때 주둥이를 닫지 그랬어.”
“…형 진짜 양아치였나 봐요. 손부터 나가는 거 보니….”
“하하. 미쳤네, 얘가.”
마른 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보여주자 그제야 조용해진 놈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살피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아니, 현관문으로 향하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형…. 저는….”
“수혁아.”
“…….”
“이런 말 미안한데, 네 누나가 다시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그거, 좀… 별로더라고.”
“…죄송해요. 누나한테는 잘 말해 둘게요…. 근데 동생이랑 친한 형을 누나가 찾아가 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는 네 친한 형이 될 생각이 없어요.”
은근슬쩍 다시 관계를 이어보려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자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일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친한 형, 동생 정도는!”
“아니지. 그걸 허락해주면 그건 한태화에 대한 기만이지. 네가 무슨 마음으로 내 곁에 남은 건지를 뻔히 알 텐데, 친한 동생이란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널 만나고 있으면 걔 마음이 어떻겠냐.”
“걔는… 그 정도 마음고생쯤은 해도 돼요.”
“내 앞에서 내 에스퍼 욕할 생각하지 마.”
“…….”
미련스러울 만큼 손목을 붙들고 있던 손이 천천히 풀어졌다. 어찌나 세게 잡혔던지 아픈 손목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운이 빠져있는 수혁이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쓰다듬어 주고 싶은 안쓰러운 모습에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지만 그 일은 내 몫이 아니었다.
“나 간다. 그만 복귀해서, 평소처럼 잘 지내.”
“술은요…. 마음 정리되면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셨잖아요.”
“…너랑은 이제 술 안 마셔, 새끼야. 그러니까 그냥 잊고 살아. 짧았던 만남인데 잊는 게 뭐 그렇게 어렵겠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든 놈이 사람을 빤히 쳐다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형. 그래도 전… 형이 한태화의 임시가이드까지만 하고 그만두셨으면 좋겠어요.”
“뭐?”
갑작스러운 말에 몸을 돌려 나가려다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허탈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그만두고 저한테 와줬으면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형을 위해서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이야, 그게?”
“…그냥요. 그냥, 그렇다고요.”
“…….”
“…….”
더는 입을 열 생각이 없는지 말이 없어진 녀석을 내려다보다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기 전, 다시 한번 무슨 소리냐고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그냥 문을 닫고 나왔다. 어차피 지금 무슨 말을 하든 녀석에겐 상처를 줄 말들뿐이었다. 그러니 여기까지만 해야 했다. 녀석도, 나도.
그렇게 오피스텔의 넓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자 12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금방 도착해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며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어딥니까? 오후 8:49]
언제나처럼 상대의 답은 빨랐다.
***
집에 있다는 한태화의 연락에 택시를 잡아타고 녀석의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정문 앞에 도착하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놈이 대뜸 손부터 뻗어와 어깨를 끌어안았고, 그 덕분에 아주 민망한 모양새로 택시비를 지불해야 했다.
여전히 나랑만 있으면 척추뼈가 없는 사람처럼 흐물거리며 안겨 오는 놈을 귀찮게 매단 채 집으로 올라가자 한껏 들뜬 표정의 한태화가 집 안을 부산스럽게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저녁은 먹었어요?”
“시간이 몇 신데. 대충 챙겨 먹었어. 너는?”
퇴근 무렵 차수경을 만나느라 저녁을 건너뛴 채 먹은 거라곤 커피 한잔과 주스 한잔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걸 사실대로 말하면 끼니를 걸렀다고 지랄해 댈 것을 알기에 대충 먹었다고 에둘러 대답하자 한태화가 잘했다는 듯 예쁘게 웃었다.
“저도 대충 때웠어요. 그래도 입 심심하면 간식으로 드실만한 걸 내올게요. 아니면 차라도 마실래요? 이제 잘 때니까 커피는 좀 부담스럽죠?”
“…….”
내 방문이 기쁜지 놈은 연신 냉장고 문이며 찬장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부산스러웠다. 활짝 만개한 꽃처럼 웃고 있는 놈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태화야.”
그 부름에 멈칫하며 등을 굳힌 놈이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기쁘던 표정은 금세 가라앉아 있었다. 근데 그게 왜 아쉬울까.
“요한?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건 아니고,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잠시 이리 와서 좀 앉아봐.”
“…무슨 일이에요? 많이 심각한 일이에요?”
하얀 아일랜드 식탁 앞에 놓인 스툴 의자에 앉아 식탁 위 맞은편을 툭툭 두드리자 진지한 표정의 한태화가 가리킨 곳에 앉았다. 다리가 얼마나 긴지 높은 스툴 의자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가 바닥에 닿고도 남는 것을 뚱하게 바라보며 의자 발걸이에 다리를 올린 채 불만스럽게 휙휙 의자를 돌렸다. 쓸데없이 의자가 높네.
“내가 방금 누굴 좀 만나다 왔는데… 그 사람이랑 얘기하다 보니 네 생각이 나서. 그래서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누굴 만났는데요?”
#49
벌써부터 못마땅하게 얼굴을 찡그린 놈이 미심쩍게 물으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얼룩 자국 하나 없이 새하얗기만 한 식탁 위로 올라온 손을 내려보다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짧은 순간을 못 기다리고 다가와 머뭇거리던 손을 잡아챈 놈이 채근하듯 손을 한번 세게 잡았다 놓는다. 그런데도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차수혁의 이름만 꺼내도 분위기가 대번에 험악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그?”
“…수혁이를 잠깐 만나고 왔는데.”
“…….”
역시나 예상대로 찡그리고 있던 표정마저 사라진 한태화는 몇 도쯤 온도가 내려간 싸늘한 얼굴을 하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탁을 돌아 앞으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그 새끼가 무슨 짓을 했어요? 나랑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는 기억나요? 나, 가이딩 해준 건요? 나랑 전속 가이드 계약 맺기로 했던 건??”
“…야, 말끝에 사실이 아닌 게 붙어있는데? 내가 언제 너랑 전속 가이드 계약을 맺기로 약속했어?”
대체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저런 머리를 굴리지? 질린 얼굴로 놈을 흘기자 무표정하던 얼굴이 풀어지며 아쉽다는 듯 작게 어깨가 으쓱거렸다.
“요한이 괜찮은지 알아보려고 그런 거죠. 다행히 별일은 없었나 보네요.”
“당연히 괜찮지. 그리고 진짜 무슨 일이 있었으면 걔가 날 너한테 오게 내버려 뒀겠어?”
그 순간, 풀어진 얼굴로 한걸음 물러나던 녀석이 멈칫하며 시선을 내린다. 도로 싸늘해진 시선은 단번에 온몸을 훑었다. 뭐, 뭐지?
“…아예 일이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요한이 그걸 아는 거 보면. 왜요, 그 새끼가 그새 고백이라도 했어요?”
“…응?”
“…….”
날 바라보는 눈길이 평소완 다르게 무척 차다. 왠지 그게 억울하고 당황스러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거 아닌데?”
“그런 거 맞는데, 뭘.”
“…왜 갑자기 반말이지?”
어째서인지 궁지로 몰리는 기분이 들어 딴지라도 걸어 화제를 돌리려는데 놈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한태화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위험스럽게 시선을 가라앉혔다.
“휴가 처리해준 뒤론 연락도 안 된 채 잠적했다는 놈을 요한은 무슨 수로 만났을까요…. 설마 그 새끼 집까지 찾아갔어요?”
“…아니, 그게 그런 게 아니고-.”
뭐지, 귀신인가? 그걸 다 어떻게 알지? 얜 대체 정체가 뭐야?
“설마… 집에서 단둘이 만났어요? 그놈이랑? 거기서 고백도 받고?”
“…….”
얘가 정말 그쪽으로 능력이 없는 게 맞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 쪽집게지? 목 뒤로 느껴지는 소름에 시선을 들자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질거렸다. 그래서인지 한번 돋은 소름이 도통 가라앉질 않았다.
“그, 고백은… 거절했는데….”
“당연한 얘길 왜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해요? 아니면 내가 기뻐하면서 잘했다고, 요한을 믿고 있었다고 칭찬이라고 해줘야 해요?”
“…….”
이 새끼, 빈정거리는 거 봐.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으로 돌아간 모습에 작게 입을 벌리자 한태화가 요사스럽게 웃으며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내가 아무리 요한한테 정신이 나가 머저리가 됐다고 해도, 이건 아니죠.”
누가 누구한테 정신이 나가서 머저리가 됐는데? 억울한 기분에 허- 하고 숨을 내쉬는데, 그 사이 한 걸음 더 다가선 한태화가 의자 뒤편의 식탁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자 꼼짝없이 그 품에 갇힌 모양새라서 힐끔 시선을 돌려 퇴로를 차단한 손을 살피다 다시 놈을 올려다보았다.
“머저리라…. 그런 거로 따지면 내가 너한테 더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
“…요한이요?”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터진 말은 묘하게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발로 앞을 버티고 선 놈의 정강이를 까버렸다.
“윽!”
불시의 기습에 맞은 부위를 부여잡은 한태화가 두어 걸음 물러나면서 허리를 숙인 채 몸을 쪼그렸다. 앞을 막아섰던 방해물을 손쉽게 치워낸 나는 여유롭게 의자에서 내려와 몸을 숙여 녀석과 시선을 맞췄다.
“이거 봐. 딴 놈이 이랬으면 다리 하나는 분지르겠다 덤벼들었을 일을 너는 그냥 한번 까고 말잖아. 이 정도는 돼야 머저리가 됐다고 할 수 있는 거지, 그치?”
“요한!!”
“그러게 왜 사람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화부터 내고 그래. 내가 네 생각 나서 왔다잖아. 차수혁을 만나고도 네 생각밖에 안 났다니까? 근데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섭섭하지 않겠어? 우리 태화, 형을 그렇게 못 믿어?”
툭툭,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뺨을 간질이다 장난스럽게 두드리니 매섭게 치켜 떠져 있던 눈매가 일순 유순하게 누그러졌다. 한태화는 한동안 그렇게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삐죽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정말 내 생각만 했어요?”
“어.”
“고백도 확실히 거절했고?”
“그렇다니까.”
“…나 몰래 다른 에스퍼 좀 만나고 다니지 마요. 불안하단 말이에요.”
그 어리광 섞인 투정에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내가 아는 녀석의 모습이었다.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질투 많은 우리 붕어 대가리.
“누가 38%짜리 가이드를 노린다고 불안해하기까지 해.”
“그런 수치랑은 상관없이 요한은 충분히 매력적이란 말이에요. 근데 그건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태화는 팔을 뻗어 목을 끌어 안아왔다. 얌전히 몸을 기울여주자 어깨로 얼굴을 묻은 놈이 곧장 뺨을 비볐다. 이제야 진짜 마음이 풀렸나 보네. 속으로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 그런 적은 없지만, 확실히 이놈은 한번 수틀리면 손대기가 까다로워질 놈이었다. 워낙 제멋대로인 놈이라.
“그건 평생 나만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걸 아는 네가 신기하다.”
달래듯 등을 다독이자 어깨 부근에서 바람 새는 소리를 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더 그러고 있다 슬쩍 어깨를 떼어내며 놈의 다리 부근을 살폈다.
“많이 아파?”
“네.”
“…이럴 땐 아니라고 선의의 거짓말도 좀 해주고 그러는 거야.”
“요한이 있는 힘껏 찼잖아요. 순간 저도 모르게 신체 강화하려다 요한 발이 부러질까 봐 참았는데.”
“…….”
음, 하마터면 발가락이 골절될 뻔했구나. 앞으로도 이놈을 다룰 땐 특별히 더 조심해야겠다. 녀석의 온몸이 무기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잠시 까먹고 있었다.
“어쨌든, 태화야.”
“네.”
“너는 왜 가이딩을 거부해 온 거야?”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놀랐는지 의아한 얼굴을 해 보이던 한태화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데요?”
“…그냥. 차수혁 얘기를 듣는 내내 네 생각이 났는데, 그러다 보니까 문득 궁금해지더라고.”
“…….”
그랬다. 수혁이의 얘기를 듣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이런 이야길 들어줘야 할 상대는 차수혁이 아닌데, 하는 생각.
임시긴 해도 현재 한태화의 유일한 가이드는 나였고, 녀석은 끈질기다 싶을 만큼 진심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 전력을 다한 진심에 나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그런 놈을 두고 다른 놈의 가이드 철학을 듣고 있으려니 어쩐지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더랬다. 그러다 떠오른 것이다. 한태화에겐 한 번도 가이딩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물론 녀석의 할아버지를 통해 대강 듣긴 했어도 그것은 한태화의 입을 통해 들은 내용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녀석의 입을 통해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 왜 나여야만 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내가 그 고백을 듣고 싶은 상대는 차수혁이 아니라 한태화였다.
“대체 그 새끼랑 무슨 얘길 한 거예요. 그 새끼도 매달렸어요? 요한 아니면 안 된다고?”
“그런 거 아니-.”
“혹시 그랬대도 믿지 마요. 내가 그 새끼 가이딩 받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으니까. 어디서 자꾸 수작질이야.”
“……”
너, 이 새끼… 오해가 아직 덜 풀렸구나.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들며 급격히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
한태화는 어렸을 때부터 심하게 예뻤다. 그리고 예쁜 만큼이나 예민했다.
천사 같은 외모의 아이를 보자마자 탄성부터 터트리던 어른들은 무척 쉽게 한태화를 만지곤 했다. 뺨이든 머리든, 어린아이를 예뻐해 준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그들은 아이에게 양해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저들 맘대로 한태화에게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뿌듯해하는 얼굴로 바라보던 부모는 아이가 타인의 손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눈치챘다. 그리고 그 후로는 그것을 막아주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그들이 너무 바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어른들은 부모의 눈을 피해 저들 마음대로 어린 한태화에게 다가왔다.
그러니 원래도 예민했던 아이가 타인의 손길에 진저리를 치며 더욱더 예민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한태화가 열 살쯤 되던 해부터는 어른이든 또래 친구든 가리지 않고, 제게 다가오는 손길이 있으면 이부터 드러내며 피가 나도록 깨물거나, 발로 차고, 손톱을 세우기 일쑤였다. 예민했던 아이의 스트레스를 방치했던 결과였다.
그러던 것이 한태화가 열두 살 나이에 에스퍼로 발현하면서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처음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발현을 했어도 어렸던 한태화는 평소처럼 지냈으니까. 그러나 어린아이였던 만큼 힘이 불안정해 멋대로 능력이 써지는 경우가 많았고, 어린 한태화도 제힘이 신기해 한 번씩 몰래 써보기도 하면서 힘의 사용이 누적되자 문제가 생겼다.
한태화의 부모는 당연히 어린 한태화에게 최상급의 가이드를 붙여주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링크를 경험한 한태화는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가이딩을 거부했고, 아이의 파래진 입술에 그 날 가이딩은 무산되었다. 그러다 그런 날이 쌓여 폭주 직전에 놓이게 되자 더이상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 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의 부모는 하는 수 없이 가이드에게 부탁해 강제 가이딩을 시도했다.
한태화는 강제 링크를 당하는 끔찍한 감각을 느낀 후 제 세상에 들어온 가이드가 제 안을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감각을 버텨야만 했다. 한태화가 느끼기에 그것은 마치 제 몸속으로 오물이 묻은 신발을 신고 들어와 발자국을 내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더럽고 역겨운 일이었다.
결국 가이딩 중에 속을 게운 한태화의 어린 몸이 고꾸라졌다. 그럼에도 폭주를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가이드의 가이딩은 멈추지 않았다. 핀셋에 꽂힌 나비처럼 여린 몸이 파들거리고 떨렸지만 가이드 기운은 멋대로 제 세상 안을 휘저어댔다. 그 끔찍한 기분에 어린 한태화는 참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한태화의 첫 가이딩은 최악의 인상을 남기며 끝이 났다.
그러고 나서도 파랗게 질린 낯으로 눈을 떴던 한태화는 또 한 번 믿질 못할 광경을 보아야만 했다. 한태화가 깨어나자마자 걱정 어린 얼굴로 다가섰던 가족들이 제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가이드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것이다.
저를 강제로 가이딩했던 가이드 역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이며 어린 한태화에게 다가와 '괜찮니?'라고 물어왔지만 그에게서 미안해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가 너를 살려준 것이라는 우월감과 사람을 하나 살렸다는 자아도취적 감정만이 엿보였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한태화가 살아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기뻐하기만 할 뿐, 그가 느꼈던 감정이나 기분에 대해 사과를 하거나 위로해 주는 이는 없었다.
한태화는 또다시 빈속을 게워내야 했다.
***
#50
“보통… 일반적인 가이딩이 다 그렇지. 폭주 증상을 보였을 땐 정말 어쩔 수 없고.”
한참 동안 한태화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가 작게 인상을 쓰며 한마디를 거들자 곁에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한태화에게서 나직이 웃는 기척이 났다.
“그래서 그 일반적인 가이딩을 거부한 거죠.”
“…어렵네.”
지랄 맞던 성격은 어릴 때도 여전했구나. 그 유별난 성격 때문에 가이딩에 대한 첫인상이 나빠져 거부하게 된 건가 싶었다. 근데 그런 것 치곤 반응이 좀 과하긴 했다. 회장님께 듣기론 그 후로 수면 장애며 식이 장애까지 나타났다고 했던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