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49)
  • “…….”

    와 씨발. 그새 소문에 살이 붙은 거 봐. 이건 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시계를 봤다. 퇴근까지 한참이나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가고 싶다, 정말.

    ***

    청산팀으로 보냈던 한태화는 금세 쪼르르 달려올 거란 예상에서 벗어나 외근을 나갔다. 샐러맨더의 송치 문제로 천안 쪽에 있는 에스퍼 전용 구치소로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덕분에 지원 3팀은 안정감 있게 하루를 마감했다. 퇴근 무렵, 갑자기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만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누구시죠?”

    낯선 인물이 지원팀 문을 열고 들어오자 팀원들을 대표한 최선배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났다. 어쩌다 보니 지원 3팀엔 여자 팀원이 없었고, 그래서 타 부서로 지원을 나가지 않는 이상 이성을 대할 일이 적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여성이었다.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최선배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팀 전체를 살피던 여자는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우리 팀 사람들은 모두가 당황한 모습들이었다. 나 역시 갑자기 내게서 시선을 멈춰 세우더니 아예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여자의 모습에 무척 당황한 얼굴로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저, 무슨 일로 오셨는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에스퍼 차수경이라고 합니다.”

    “…예?”

    차수경? 기관 내 단 둘뿐인 S등급 에스퍼 중 한 명인 그 차수경??

    “어, 와… 진짜 차수경이다.”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던 상원이가 감탄하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다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까지 완전히 벌겋게 변한 것이 소녀 팬이 따로 없었다. 아니, 소년 팬인가. 애가 얼마나 당황했으면 평소 덕질을 하고 있던 사람도 몰라봤을까. 금세 수선스러워진 상원이를 보다 차분히 앞에 선 사람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자 정말 상원이가 보여주던 사진 속의 인물이 눈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사진 속에선 매번 웃고 있었던 사람이 지금은 무표정에 가까워 보일 만큼 표정이 없어서 그 둘이 동일인임을 한 번에 눈치채긴 어려운 일이었다.

    “…서요한씨 맞으신가요?”

    “어, 예. 맞긴 한데…, 무슨 일이시죠?”

    상원이를 잠시 무표정하게 돌아봤던 차수경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하는 것을 보며 긴장감에 몸을 굳혔다. 정신계열 중 최고라는 S등급의 차수경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 한 번도 안면을 터본 적 없는 인물의 방문에 당황스럽게 눈만 꿈벅이는데 문득 그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깐만… 차수경이라고?

    “수혁이 일로 상의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무례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뵙게 됐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

    차수혁. 그리고 차수경.

    아… 수혁이가… 차수경과 가족이구나. 허. 심지어 남매가 둘 다 정신계열 에스퍼였다. 왜 이걸 눈치 못 챘지?

    차수경의 뒤에서 눈을 부라리며 당장 시간이 있다고 대답하라고 온갖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는 상원이를 곁눈질하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요새 정말 왜 이러지? 어째 주변에서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것도 다 붕어 대가리 때문이 아닐까? 조만간 하늘이 파란 것도 한태화 탓이 될 것만 같았다.

    아, 피곤해.

    ***

    아침의 일로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진 나는 차수경씨를 데리고 기관 밖으로 나와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차수경씨는 자신의 볼일로 찾아온 만큼 자신이 대접해야 한다며 계산대로 향했다. 수혁이의 일로 찾아왔다는 얘길 듣긴 했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으려니 테이블 위로 따뜻한 커피가 한잔 놓였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표면이 따뜻한 잔을 쥐고 앞으로 끌어오면서도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차라리 찾아온 용건을 빨리 말해줬으면 싶었다. 이 불편한 분위기에서 좀 벗어나게.

    그러나 차수경씨는 여유로운 태도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기듯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이 자리를 불편해하는 건 나뿐인 듯했다.

    “…저, 어떤 용건으로 찾아오신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결국 먼저 애가 닳은 쪽에서 입을 열자 고민에 잠긴 얼굴로 시선을 내리고 있던 차수경씨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 죄송합니다. 먼저 찾아와 놓고, 말이 없어 불편하셨겠네요. 사실 동생이 걱정돼서 무턱대고 찾아오긴 했는데… 너무 실례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뭐라고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고민하다 보니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 아뇨. 저야말로 너무 조급하게 채근을 해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려는데, 그런 내 말을 자른 차수경씨가 서요한씨- 하고 이름을 불러왔다. 그에 말을 멈추며 고개를 들자 진지한 얼굴의 차수경씨가 천천히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수혁이는… 어릴 때부터 좀 어른스러운 아이였습니다. 말수도 없고, 뭐든 혼자서 잘하는 아이라 손이 많이 가지 않아 그렇기도 했지만, 제가 발현 때 여러 문제가 있어 부모님이 수혁이에게 신경을 많이 못 쓰셨기도 해서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었죠. 근데 그런 아이가 정신계열의 에스퍼로 발현을 하고 나자 생각이 더 많아져서… 속을 알 수 없는 아이가 되더니 저렇게 내도록 혼자 지내 마음이 많이 쓰였고요. 근데… 그 애가 얼마 전 처음으로 제게 부탁이란 걸 해오더라고요. 바로 서요한씨의 일로요.”

    “…예? 제 일이라니….”

    “기관장으로부터 한태화 팀장의 임시 가이드 발령서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46

    “아, 예… 그, 그렇긴 한데요.”

    “생전 아쉬운 소리 한번이 없던 애가 갑자기 찾아와 그 일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하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처음으로 부탁받은 거라 관심도 갔고요.”

    아. 그제야 임시 가이드 발령서를 받았던 날, 제 나름대로 알아보겠다던 수혁이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냥 이리저리 물어보고 다니는 수준이겠거니 했는데, 곧장 차수경씨를 찾아갔던 모양이다. 안 그러던 동생이 갑자기 찾아와 이상한 부탁을 하니 차수경씨 딴엔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고.

    “근데 그랬던 수혁이가… 요사이 갑자기 집에만 틀어박혀 연락도 잘 안 되고, 찾아가도 괜찮으니 돌아가라고 문전박대만 해서요. 누나 된 입장에서 걱정이 되는데… 문득 서요한씨가 떠올랐습니다.”

    “…그게 저 때문인 것 같아서 말입니까?”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서요한씨라면 수혁이가 저러는 이유를 아시지 않을까 해서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가 수혁이에 대해 모르는 게 많습니다. 살가운 남매 관계도 아니었고,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부딪치는 경우도 있어서 일반적인 남매 관계라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서요한씨를 탓하거나 추궁하겠어요. 그런 오해를 하실까 봐 찾아오기 전까지 고민도 많이 했고, 찾아와서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던 거고요. 그러니 혹시라도 그런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까지 숙여 보이는 차수경씨를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가족이란 다 이런 걸까. 다른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무리를 해서라도 해결해 주고 싶고, 평소엔 하지 않았을 행동까지 하게 되는 걸까. 문득 회장실로 조용히 불러 금빛 봉투를 건네주던 한태화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러자 어쩐지 입안이 무척 써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오해도 하지 않을 거고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수혁이가 그런 상태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고, 마땅히 해드릴 조언도 없네요.”

    “…그렇군요.”

    차수경씨가 정중하지만 조금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정말로 마음이 편치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뒷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 도움이 된다면 제가 수혁이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만나기 싫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 주실 수 있을까요?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애가 많이 걱정돼서요.”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수경씨가 다급히 말을 이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 마음이 묻어나는 행동에 벙긋대던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처음으로 웃어 보인 차수경씨가 감사 인사와 함께 허리를 굽혔다. 그 웃음은 상원이가 보여주던 사진 속의 미소와는 또 달랐다. 진짜 웃음이기 때문일까. 자신의 일도 아니고, 동생의 일에 몰래 나서서 허리까지 숙여 보이는 차수경씨를 바라보다 참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이 자리가… 못 견디게 불편했다. 정말 이상하게도 한태화의 할아버지인 회장님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 그게 무척 이상하고 묘했다. 확실한 것은 불편하다는 감정, 그 하나뿐이었다.

    ***

    차수경씨로부터 주소를 받아 들고 택시를 탔다. 그리고 기관이 있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동네에 위치한 깨끗하면서도 비싸 보이는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905호.

    오피스텔의 주소가 나와 있는 쪽지에서 다시 한번 호수를 확인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으로 갔다. 그리고 905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다 결심을 굳히며 차임벨을 눌렀다. 잠시 후 인터폰이 켜지는 기척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요한 형?! -

    “어, 수혁아, 난데. 문 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 안쪽에서 쿵쿵대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아, 깜짝이야. 뭘 이렇게 급하게 열어. 놀랐잖아.”

    “…진짜… 형이네요?”

    엉망인 몰골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수혁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어깨를 살살 밀었다.

    “뭐, 그럼 가짜 형도 있어? 헛소리 말고 비켜봐. 좀 들어가자.”

    “어, 아, 형, 자, 잠깐만요, 집 좀 치우고-.”

    “…어, 그래. 좀 치우고 살아라. 이게 뭐냐. 좋은 집이 아주 엉망이네.”

    거뭇한 안색에 듬성듬성 수염까지 올라온 얼굴을 확인했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수혁이를 밀치고 들어선 집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 수건이며 옷가지가 널려 있었고, 종류도 갖가지인 술병들이 굴러다녔다.

    당황한 얼굴로 뒤따라 들어오던 수혁이는 얼른 몸을 움직여 여기저기 널려 있던 옷가지들과 수건을 집어 품에 안더니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이, 이게 그러니까, 펴, 평소에도 이런 건 아니에요. 제가 며칠 휴가를 받아서….”

    “수혁아.”

    “…네.”

    “일단 치우고 얘기하자. 환기도 좀 시키고. 집 안에서 술 냄새가 진동해서 냄새만으로도 취하겠어. 아니면 원래 이런 게 취향이야? 알코올 향을 방향제로 쓰는 게?”

    일전에 모텔에서 당했던 일을 떠올려 놀리듯 묻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놈이 품 안 가득 수건과 옷가지들을 안고서 원망스럽게 흘겨보았다. 원래라면 사고를 친 후 주인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 같았을 그 모습은 거뭇해진 안색 탓인지 제법 매섭게 보여 어쭈, 싶었다. 잘하면 물겠다?

    “…형, 이 와중에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수혁이의 타박에도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바닥을 구르던 술병들을 집어 한 곳으로 모았다. 그러자 품에 안고 있던 것들을 베란다 밖에 있는 빨래통에 넣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던 녀석이 민망한 듯 내 손에 들려있던 술병들을 빼앗아 재활용품을 모으는 곳으로 날랐다.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수혁이와 함께 꽤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을 때쯤 술병 정리가 끝이 났다.

    그렇게 대강 정리를 마친 집안을 둘러보다 편하게 소파로 가서 앉으니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 있던 녀석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근데 형,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그 전에 수혁아.”

    “아…, 네.”

    “가서 면도도 좀 하고, 사람다워진 몰골로 돌아와라. 이 꼴이 대체 뭐야. 제대로 씻긴 한 거야?”

    이건 뭐 완전히 버려진 유기견의 몰골이라 쯧쯧 하고 혀를 차는데, 간신히 제 색을 되찾는 듯 보이던 수혁이의 얼굴이 도로 빨갛게 물이 들었다.

    “그럼요! 매일 매일 씻었어요!!”

    “…그래? 그럼 그렇다고 믿어 줄 테니까 한 번 더 씻고 와.”

    “아, 형!!!”

    힘주어 빽 하고 소리를 지른 수혁이의 목소리가 넓은 집 안에 메아리쳤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돈 자랑하던 놈들답게 집들이 참 크고 좋았다.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왜 자꾸 주변에 있는 놈들이 늘어나는지 모르겠어서 길게 한숨만 나왔다.

    ***

    드디어 깔끔해진 행색의 수혁이가 마실 것까지 챙겨 나오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훑어보았다. 그러자 테이블 위로 주스 잔을 내려놓던 녀석이 작게 투덜거렸다.

    “이젠 좀 사람다워요?”

    “응.”

    “…….”

    주스 잔을 들고 마시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한 수혁이가 한숨을 내쉬며 소파로 가서 앉더니 천장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긴장으로 내내 굳어 있던 어깨가 그제야 풀어지는 것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자 뾰족해진 눈이 사람을 흘기듯 가늘어졌다.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냥 뭐, 어쩌다 알게 됐어.”

    “…한태화, 그놈이 알려줬을 리는 없고….”

    의심스럽다는 얼굴의 수혁이에게 당연하다는 듯 웃음을 흘리자 잠시 더 고민하던 놈으로부터 정답이 나왔다.

    “혹시 우리 누나 만났어요?”

    “음… 엄청 미인이시던데. 그렇게 유명하신 분인 줄도 몰랐고.”

    “…아, 못 살겠다, 진짜.”

    가늘어진 눈초리로 쳐다보던 놈이 부끄럽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귀 끝이 붉은 게 정말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아서 웃음을 터트리자 슬쩍 손을 내린 놈이 웃고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냐, 그 부담스러운 눈빛은.

    “…왜 그렇게 봐?”

    “그냥 좀… 신기해서요.”

    “뭐가 신기한데?”

    “쪽팔리긴 한데… 형이 우리 집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 좀…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복잡하네요.”

    하여튼 저 과하게 솔직한 새끼. 웃던 얼굴 그대로 표정을 굳히며 작게 한숨을 토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화제가 나온 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너는 왜 이러고 있는데?”

    “…그냥 휴가예요. 밀렸던 휴가 한 번에 써서 쉬고 있는 거죠.”

    지랄한다. 대수롭지 않은 말들로 넘기려 드는 게 짜증 나 자연히 표정이 굳었다.

    “그러니까 그 밀어놨던 휴가를 왜 지금 이렇게 한 번에 써서 술만 처마시고 있냐고.”

    “처마시다뇨. 너무하네요. 그냥 쉬는 거라니까.”

    “지랄. 그냥 쉬고 있는 건데 네 누나가 날 왜 찾아와?”

    그 말에 차수혁이 시선을 피하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제 와서 저렇게 폼 잡아 봐야 아까 그 산적 같던 모습은 잊히지 않을 거란 사실을 모르나 보네. 저 등신이.

    “그건 그냥… 누나가 오버한 거예요. 저도 누나가 형을 찾아갈 줄은-.”

    “오버는 네가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끊어내는 말에 멈칫하던 놈이 허리를 세웠다. 이유도 없이 눈썹 부근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그 위를 긁으며 이번엔 내가 소파로 등을 기댔다.

    “이해가 안 가서 그래.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뭐냐고 욕먹을 각오로 하는 말이기도 하고. …너랑 내가 알게 된 게 이제 2주쯤 됐지? 심지어 같이 지낸 건 이틀밖에 안 되고. 근데 네가 이러고 있는 게 이해가 안 가고 오버하는 거 같다고. 너 진짜… 이러는 게 나 때문이야?”

    “…….”

    내 말에 진지하게 표정을 굳힌 수혁이가 사람이 무안해질 만큼 오래도록 응시해왔다. 그러다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리를 꼬며 그 위로 편하게 깍지 낀 손을 올렸다. 그 자세가 긴장이 풀어진 듯 자연스러워서 나도 자연히 자세가 풀어졌다.

    “형, 그거 알아요? 에스퍼들 중에서도 정신계열 에스퍼들의 가이드 의존도가 가장 높은 거?”

    #47

    “…아니, 처음 듣는 소린데?”

    “그래요? 이거 제법 유명한 얘긴데, 이상하네요. 원래 정신계열 에스퍼들은 타인 접촉에 민감한 편이에요. 자칫 관계를 어그러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크고. 그래서… 가이드에 대한 의존도가 제일 높대요. 그만큼 가이드와 트러블이 있을 때 발생하는 범죄율도 높고요.”

    “…….”

    그 말에 수혁이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악수라는 평범한 인사에도 유독 머뭇거리던 수혁이었다. 단순히 가이드와의 접촉에 예민한 편인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심했던 거였나?

    손끝만 닿아도 예민하게 굴며 눈썹을 꿈틀거리던 수혁이를 떠올리며 시선을 맞추자 놈이 열없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 저는 유독 더 예민한 편이에요. …제 능력을 싫어하거든요. 정신 조작이라는 건 좀… 기분 나쁜 능력이니까요. 거짓으로 상대의 기억을 망가뜨리고, 감정을 만들어내고…. 사실 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짜를 만들어내는 일뿐이에요. 그래서 지금까지 가이드를 만나는 것도 피해왔던 거고요. 이런 기분 나쁜 능력을 누가 진심으로 받아들여 줄까 싶기도 했고, 제가 혹시라도… 제 가이드에게 그 가짜 감정을 주입 시킬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어요. 그렇게 평생을 능력에 대해 고민해 왔는데… 첫 만남에서 형이 그랬죠. 이미 중심을 잘 잡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고. 능력은 그 사람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쓰냐에 따라 다른 거 아니냐고. …제가 평생 고민해 오던 걸 알아주고, 인정받은 기분이었어요.”

    “…….”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흘러가듯 한 말이라 한 사람은 기억도 잘 안 나는 말이었다. 그러니 그 말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을 줄도 몰랐다. 수혁이는 잠시 그때를 떠올리듯 추억에 잠긴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형 말대로…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은 짧아요. 근데… 제가 형한테 반한 시간은 훨씬 더 짧아요. 거의 초 단위에 가까울 테니까. 그러니 얼마 동안이나 알고 지냈는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요.”

    “…….”

    그러니까 이건… 고백인 거지? 잠시 눈을 깜박이다 당황하여 고개를 돌린 채 열이 올라오는 것 같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어쩐지 얼굴로 조금씩 열이 몰리는 게 금세 붉어질 것만 같았다. 침착하자!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그러니까… 진짜 나 때문에 이러고 있던 거라고? 나한테… 차여서??”

    “아뇨.”

    응? 개단호하네. 개새낀줄?

    “…아, 아니라고? …나한테 반했다며? 나 좋다는 거 아냐, 지금?”

    지금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이상한 표정이긴 했나 보다. 수혁이로부터 갑자기 웃음이 터진 것 보면.

    “뭐예요, 형. 아니라니까 서운해요?”

    “뭐래, 미쳤냐? …그만 웃지?”

    “아, 진짜, 이 형을 어쩌지? 왜 그렇게 귀여워요? 기껏 마음 정리 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누가 그렇게 귀여우래요?”

    “…응, 그래. 내가 좀 귀엽지. 그럼 그 귀여운 사람 주먹맛도 좀 볼래? 봐봐, 주먹도 존나 귀엽지?”

    최대한 귀엽게 웃어 보이며 주먹을 들자 아예 크게 웃음을 터트린 수혁이가 허리까지 접은 채 큭큭대고 웃었다. 그런 놈을 웃음기가 전혀 없는 눈으로 노려보며 몇 대를 때릴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그새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까지 닦아낸 녀석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 귀여운 주먹은 내려놔요. 형, 과거에 좀 노셨다면서요. 전 모범생이었어서 싸움 잘 못해요.”

    “…남의 흑역사로 대체 언제까지 놀릴래? 그리고 싸움을 못 하긴. 등치를 봐라. 덤벼봐야 내가 더 맞게 생겼지.”

    그 말에 차수혁이 순진한 척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싸움은 덩치가 아니라 깡이랑 스킬이라던데요? 우리 누나가.”

    “……누님도 좀 노셨니?”

    “아뇨. 누나 전 남친이 그랬대요. 선빵필승이라고.”

    “필승까진 아니고…. 우리가 무슨 얘길 하다 이 얘길 하고 있는 거냐?”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빠진 화제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보이자 수혁이가 짙은 미소를 지은 채 시선을 똑바로 맞춰왔다.

    “제가 형 좋아한다고요. 첫눈에 반했다고, 그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너 진짜 미쳤어? 왜 자꾸 이랬다, 저랬다야? 아깐 아니라며? 나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 아니라고-.”

    “형한테 차여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거지, 형한테 안 반했다는 말은 아니었거든요. 저, 형 좋아해요. 아직도.”

    “…….”

    와, 저 얼굴 두꺼운 새끼. 부끄러움도 모르나? 좋아한다는 말을 대체 몇 번이나 해대는 거야? 진짜 미친 거야?

    홧홧해지는 얼굴에 고개를 숙인 채 모로 틀었다. 도저히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 고백은 저놈이 했는데, 왜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냐고! 그것도 나만!!

    “…작작하고 왜 이러고 있는 건지나 말하라고, 좀.”

    불퉁한 목소리에 녀석이 피식피식 웃음소릴 내다 천천히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지금까지 웃던 게 모두 노력에 의한 것이었던 듯, 녀석에겐 굳은 표정이 더 잘 어울렸다. 그래서 힐끔대던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제가 이러고 있는 이유는… 저한테 실망해서 그래요. 화가 나는데… 화풀이할 데가 없어서.”

    “그건 또 무슨 소린야?”

    “제가 형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

    “근데 그 좋아하는 형을 놓치기 싫어서… 하면 안 될 생각을 했어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생각을, 제가 평생 혐오해 오던 생각을요.”

    저건 또 무슨 개소린가. 얘가 개처럼 귀엽다, 귀엽다 해줬더니 진짜 개소릴 지껄이는지 통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해댔다. 얘도 한국말을 못 하나 봐. 대체 왜 말이 안 통해.

    “무슨 소린지 좀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주면 안 될까? 하면 안 될 생각 뭐? 뭘 했다는 거야, 대체?”

    “…형 기억을 조작해서라도 갖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힘을 쓸 뻔도 했고요.”

    “…어? 뭐라고?”

    …기억을 조작하려고 했다고? 내 기억을?!

    목 뒤로 싸늘히 소름이 돋았다. 솔직히 놀랬다. 그런 생각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그 정도로 나를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호감 정도려니 했던 마음이 생각보다 크자 당황스러웠는데, 그보다 어쩌면 이미 기억이 조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먼저 거부감부터 들었다. 아마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더라면 뒤로 몸을 물렸을지도 몰랐다.

    “평생 고민해 오던 일이고, 그렇게나 혐오해 오던 일인데… 궁지에 몰리니까 저도 어쩔 수 없더라구요. 힘을 써서라도 형을 놓치기 싫다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근데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저도 제가 싫어져서…. 더럽고, 혐오스러웠어요. 형도 그렇죠?”

    “……야.”

    자조적인 웃음이 떠오른 서글픈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딱히 할 말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어서 수혁이를 불러놓고도 도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괜찮다고? 뭔가 그 말은 아닌 것 같고… 용서한다? 그 말도 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다물린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민을 눈치챈 듯 수혁이가 이해한다는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궁지에 몰렸다고 바로 그런 생각이나 하는 게…, 그럴 거면서 평생 고민하는 척 해오던 제가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본성은 이미 이렇게나 추악한데…. 근데도 착한 척, 양심적인 척, 위선이란 위선은 다 떨었더라고요. 그걸 깨닫자마자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비웃어도 돼요. 형이 보기에도 진짜 어이없죠?”

    억지로 웃고 있는 수혁이를 보며 표정을 굳히자 녀석도 억지로 짓고 있던 웃음을 허물어트렸다. 그리곤 괴로워 보이는 눈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평생토록 괴롭혀 왔을 중압감이 그를 더 깊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 그 정도밖에 안 되냐는 분노. 용서하지 못한 죄책감이 엿보였다. 그것들은 전부 나를 중심에 두고 돌아가고 있는 감정들이었지만, 그 화살은 모두 수혁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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