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49)
  • 근데 그 쉬울 것 같았던 일이 이렇게 어그러질 줄이야. 한태화는 제 예상과는 너무 다른 상황에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분노로 싸늘해진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렇게 가이드에 대해 떠들어 대더니, 이러려고 그랬나.”

    분노가 담긴 한마디에 식당 안에 남아 있던 가족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진성현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러나 분노로 머릿속이 들끓는 한태화의 눈에 그런 것이 들어올 리 없었다. 제 가족들이 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놈과 서요한을 두고 줄타기를 한 것이다. 감히 요한을 두고, 누가 더 나을지를 쟀다는 사실에 한태화는 화를 넘어서 황당함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터졌다.

    성질 같아선 진작에 식탁을 뒤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옆에서 겨우 한술 뜨는 서요한의 모습에 참고 참았다. 근데 그 노력의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왜 이 자리를 피하는 사람이 요한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서늘해진 가슴에서 차가운 불길이 일었다.

    “…저도 이만 갑니다.”

    “태화야!”

    한태화가 몸을 돌려 요한을 따라나서려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진성현이 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식탁을 돌아 나와 한태화에게 다가왔다. 진성현은 슬픈 표정으로 한태화를 올려다보더니 잠시 말을 고르듯 입술을 괴롭혔다. 그 머뭇거리는 태도에 가뜩이나 작은 몸집이 더 작고 왜소해 보였고, 안쓰러울 만큼 애처로워 보였다.

    “…가지 마. 미안해. 나도… 네가 자꾸 날 밀어내기만 하니까 마음이 상했어. 그래서 홧김에 유학길에도 올랐던 거고. 그렇지만… 네가 죽길 바랐던 건 아니야.”

    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린 진성현이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너와 다시 잘 지내고 싶-.”

    “손, 치워.”

    “…뭐?”

    차가운 목소리에 다가오려던 손이 멈칫하고 허공에서 멈추며 움찔거렸다. 그 손을 노려보며 한태화는 비웃음을 흘렸다.

    “나한테 손대지 말라고. 역겨우니까. 그리고 다시 잘 이라니. 우리가 언제 잘 지낸 적이 있었나? 내 기억이 맞다면 사이는 시작부터 안 좋았던 것 같은데.”

    “…….”

    “네가 돈을 받고 강제로 내 가이딩을 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와 내 사이가 좋았던 적은 한 번이라도 있었냐고.”

    애처롭게 내려가 있던 눈가가 움찔하고 떨리더니 점차 굳어가는 모습을 보며 한태화는 비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크게 관심 둔 적이 없어 흐릿한 기억이지만, 한태화에게 진성현은 저런 이미지였다. 서요한 앞에서 보인 친한 척 다가오는 꼴은 참고 보기가 힘들었을 만큼, 지금의 모습이 가장 진성현다웠다.

    “너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긴 한데, 이런 식으로 밀고 들어와 어깃장을 놓을 줄은 몰랐지. 받을 걸 다 받긴 했어도, 이제야 떨어져 나가줘서 고맙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는데.”

    “…….”

    “참 할 짓도 없어. 형, 너는 눈치도 없는 것 같고.”

    한태화의 싸늘한 시선이 진성현을 지나 식당에 들어섰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 자리에 서 있던 한태현을 향했다. 그러자 태현의 어깨가 움찔하며 튀어 올랐다.

    “아니, 그게 나는… 널 위해서….”

    한태현은 억울했다. 그가 한 행동은 정말 오롯이 동생을 위한 일이었다. 한태현이라고 저 진성현이 절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만난 진성현에게 억지로 비위를 맞춰줘 가며 집으로 데려온 까닭은 정말 단 한 명, 한태화를 위해 한 일이었다. 그 일의 결과가 이렇게 참담할 줄을 몰랐지만.

    그러게 어떤 식사 자리였는지를 미리 알려주지! 한태현도 나름 정말 억울했다. 물론 제 동생은 그걸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렇게 날 위한다면 요한이 가게 내버려 두질 말았어야지.”

    “…….”

    그 말엔 태현도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서요한이 식당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한태화의 가족들은 서요한과 진성현을 비교해가며 효용가치를 따졌다. 그래서 잡지 않은 것이었고, 한태화는 그 점이 가장 참을 수 없었다.

    어딜 감히. 누가 감히 서요한을 두고 제게서 효용가치 따위를 따진단 말인가. 발치에 엎드려 빌어서라도 곁에 잡아두고 싶은 단 한 사람을, 어떻게 감히. 저딴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사람 때문에.

    “태화야, 진정하고-.”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한태화의 아버지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태화를 말렸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태화의 사나운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원망마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믿었던 가족들이 요한을 이리 대할 줄 몰랐다는 원망.

    “진정?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이대로 요한이 날 버리고 돌아설까 봐 겁이 나서 죽겠는데? 임시 가이드고 뭐고 다 그만두자고 할까 봐 무서워 죽겠는데, 진정이요? …이대로 요한을 놓치면 나는 말라 죽어요, 아버지. 폭주 뭐 그따위 게 아니라, 그 자체로 그냥 말라 죽을 거라고요!!”

    내내 차분하려고 노력하던 한태화가 소리를 치며 자신의 가족들을 원망스레 돌아보았다. 간신히 꾹꾹 누르고 있던 불안감이 터지며 부들부들 몸이 떨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갈 곳을 잃은 눈동자는 엄마를 찾는 아이 같은 간절함을 담고 어지럽게 배회했다. 그 불안정해 보이는 아들의 모습에 한태화의 아버지는 당황한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터트린 한태화는 숨을 몰아쉬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서요한의 앞에선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 참았던 마음은,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터져 나왔다. 한태화는 곧장 식당을 빠져나와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요한은 따라 나오지 말랬지만, 화풀이를 당하든 맞든 그런 게 무서울 리가 없었다. 한태화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서요한이었다. 언제나 요한의 앞에선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한태화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아득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좋아질수록 더 그랬다. 단지 서요한이 곁에 있다는 이유로 안정을 찾는 것과 비례하여 그가 언제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공포는 어느새 한태화를 집어삼킬 것처럼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곁을 맴돌며 기회를 엿보던 그 감정은 가끔 서요한과 함께 있는 순간에도 한태화를 집어삼킬 때가 있었다. 그러다 서요한이 저를 보고 손을 내밀어 잡아주어야 저를 다시 뱉어내곤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공포가 자신을 집어 삼켜졌음을 느끼며 한태화는 다급히 요한을 쫓아나갔다.

    그런 한태화를 진성현도 더이상 붙들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좇을 뿐이었다. 자신에겐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마음을 내보인 한태화를 보는 진성현의 눈빛이 독기를 품은 채 빛났다.

    #44

    지나치다 싶게 넓은 집안을 빠져나와 현관 앞에 서서 저 멀리에 있는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 저기까진 또 어떻게 가나. 결코 짧지 않은 거리에 한숨을 내쉬다 다시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에서부터 뻗어 나온 손이 팔을 잡아챘다.

    “서요한씨, 잠시만요.”

    “…어, 네.”

    급하게 따라 나오신 듯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계시던 사모님이 잠시 숨을 돌리더니 난처함에 가까운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 얼굴이 곤란해 하는 한태화의 모습과 너무 닮아서 순간 멈칫하며 걸음을 물렸다. 가족이면 원래 이렇게 닮는 건가? 곁에 가족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없다 보니 그런 것까지 모두 생소하게 다가왔다.

    “여기서 택시 잡는 데까지 나가려면 힘들어요. 기사분께 말씀드릴 테니까 그 차 타고 가요.”

    그 다정한 말에 잠시 눈을 깜박이다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 난감하면서도 싫지는 않아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이렇게 따라 나와 붙잡아 주는 것도 이상하게 …좋았다. 당황스러웠지만,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니, 그… 괘, 괜찮습니다. 제가 체력이 좋아서요. 이 정도는 걸어서 가면 됩니다.”

    “타고 가요. 내가 마음이 쓰여서 그래요. 고마운 사람을 이렇게 보내는 게 너무 미안해서요.”

    “…예?”

    뭐가요? 저는 고마울 일을 한 적이 없는데요. 욕먹을 짓은 많이 했어도. 방금도 걸게 욕이나 하다 뛰쳐나온 참이라 어리둥절한 마음에 눈을 깜박이고 있자, 팔을 잡고 계시던 사모님이 팔뚝 위를 작게 도닥이셨다.

    “좆만한 게 좆 같이 군다고.”

    “-예?”

    아니, 저 고운 입에서 저 말이 왜 나와?? 당황으로 입이 벌어지자 그 표정이 웃겼던지 사모님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셨다. 그 모습이 너무 고와 도저히 방금 전 좆 어쩌고 하신 분 같지가 않았다. 내가 선 채로 꿈을 꿨나?

    “많이 놀랐어요? 근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이 너무 시원했어요. 내가 정말 많이 참았거든요.”

    “…….”

    “자식 목숨 맡겨놓은 입장이라 한 번씩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도 다 알아요.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 우리가 가진 돈 때문에 태화 가이딩을 해주고 있다는 거. 근데… 그거에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고 어떻게 살아요. …요한씨에게 이런 마음을 이해해 달라는 게 정말 미안하긴 한데, 이번 한 번만 이해해 주면 안 될까요?”

    “…예. 그럼요. 이해하죠. 전 정말 괜찮습니다.”

    사근사근하게 웃는 얼굴 위로 오랜 시간 겹겹이 쌓인 흉진 상처가 보이는 것 같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연신 내 팔을 도닥여 주던 사모님은 고마워하는 얼굴로 표정을 풀면서도 쓰게 웃었다.

    “그래서 저렇게 밀고 들어와도 뭐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서요한씨한테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서. 언제 또 태화는 가이딩이 필요할지 모르니까…. 미안해요. 내가, 아니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었어요. 그 자리에서 바로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이렇게 서요한씨를 돌려보내고야 마네요.”

    “아,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그보단 제가 너무… 무례했죠. 어르신들도 계신 자리에서 욕이나 하고…. 제가 그냥 민망해서 도망 나온 거니까 진짜로 마음 쓰지 마세요.”

    계속되는 사과가 부담스러워 민망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사모님은 도로 미안해하는 얼굴로 돌아갔다. 그 상황이 반복되자 나도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런 분위기는 정말 감당이 안 되는데, 어쩌지. 공연히 손으로 턱 부근을 긁으며 어색하게 서 있을 때였다.

    “대신 욕해 준건 정말 속이 다 시원했다니까요. 그러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마요. 그리고….”

    “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

    말을 하다 멈추며 눈을 크게 키웠다. 사모님이 갑자기 내 몸을 끌어안았다. 분명 나보다 한참이나 작은 몸인데, 그 품은 예상외로 넉넉하고 푸근했다.

    “마지막까지 우리 태화 손을 잡고 살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때 영상, 봤어요. 모두가 도망가는데, 서요한씨 혼자 태화한테 가주더라고요. 고마워요, 요한씨. 정말로요.”

    “…….”

    “내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 일도 너무 미안하고요. 미안해요, 정말.”

    그 순간 내 발로 걸어 나오면서도 잡아주는 이가 하나 없어 작게 맺혀있던 서운함이 모두 사라졌다. 그 꽁한 마음마저 너그럽게 품어주는 따뜻한 품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보육원 원장님 외에 이런 식으로 안아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저 눈만 깜박이고 있자 안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어낸 사모님이 양손으로 내 팔을 잡고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다음에 다시 한번 초대할게요. 마음 풀고 한 번만 더 와주면 안 될까요?”

    “어…, 아뇨, 오늘도 충분히-.”

    당황으로 바보처럼 어버버 거리는데, 그럼에도 사모님은 여전히 미안하다는 얼굴로 웃고만 계셨다. 어쩐지 얼굴로 열이 몰리며 더운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이거. 처음 느끼는 감정이라 이게 뭔지를 모르겠다.

    “정말로 고마워서, 내 손으로 지은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어서 그래요. 물론 요한씨가 마음이 상해서 안 내킨다고 하면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응? 잠깐만, 이분의 말하는 화법에서 어쩐지… 한태화의 향기가 좀…. 아니, 뭐 가족이니까 그렇겠지만…. 갑자기 찝찝한 마음이 들어 조금 망설이다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네, 마음 상해서 다신 안 오고 싶습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러자 사모님의 얼굴이 꽃같이 환해지며 기쁘다는 듯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 얼굴이 최고조 홧홧해졌다. 아마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민망한 마음에 열이 오른 뺨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 분위기는 정말 감당이 안 됐다.

    “그럼… 다음에 다시 한번 초대해 주세요. 전 언제든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요한씨.”

    “…그, 말씀도 편하게 하세요.”

    요한씨, 라고 불리는 게 어색해서 그렇게 말하자 사모님의 얼굴이 환해지며 정말로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습조차 한태화와 심하게 닮은 모습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정말? 그래도 될까, 요한아? 어쩌지?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

    …이미 잘하고 계신데요. 아니, 뭐 이렇게 적응이 빠르셔?

    사모님은 소녀처럼 웃으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탓에 편하게 ‘요한군’ 정도로 정리될 줄 알았던 호칭이 ‘요한아’ 가 됐어도 뭐라고 지적할 수가 없었다. 근데 그게 왜 자꾸 한태화를 대할 때의 느낌이 드는 걸까. 허허. 미치겠네.

    “요한, 거기서 뭐 해요.”

    그때 나타난 한태화는 이 분위기를 바꿔 줄 구세주처럼 보였다. 날 발견하자마자 활짝 웃으며 달려와 순식간에 곁으로 붙어서는 모습이 몹시 개 같은 구세주였다. 그게 퍽 반가웠지만 퉁명하게 얼굴을 굳히며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를 따라 나온 놈이 예뻐 보이는 게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서.

    “뭐야, 너. 내가 집에서 나가기 전까진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했잖아.”

    “요한 지금 집 밖으로 나와 있잖아요.”

    “뭐?”

    한태화가 내 발밑을 가리켜 보이며 하는 말에 고개를 내리자 현관문 밖으로 나와 있는 발이 보였다.

    “…이 말이 그 말이- 하아. 너 어릴 때 국어 못 했지? 아니면 외국에서 오래 지내다 와서 한국말을 모르던가.”

    비꼬는 말에도 한태화는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그리고 앞에서 그런 나와 한태화를 번갈아 쳐다보던 사모님도 똑같은 얼굴로 생글거리고 있었다. 모자의 생글생글 공격에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아직도 내 팔을 잡고 있던 사모님의 손을 정중한 손길로 떼어낸 후,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냥 얼른 도망치려고.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요한아. 태화 통해서 연락할게. 근데 그럼 차는 어쩌지? 걸어가긴 힘들 텐데.”

    “차고에서 노는 차 아무거나 끌고 가면 돼요. 저도 이만 갈게요.”

    어머니의 걱정에 가볍게 대꾸한 한태화가 저만 두고 갈 새라 냉큼 옆으로 붙으며 한쪽 팔을 붙잡았다. 너무 가까이 붙지 말라는 의미로 팔꿈치로 툭툭 쳐내고 있는데, 그 모습을 뿌듯한 얼굴로 보고 있던 사모님이 잘하고 있다는 듯 한태화의 등을 몇 번 다독이다가 내게 인사를 건네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

    뭔가… 폭풍을 이십 번쯤 맞은 기분이다.

    “…너는 안 들어가 봐도 돼? 가족들 다 모여 있잖아.”

    “요한이 없는데 제가 거기 왜 있어요. 그보다 요한, 점심도 건너뛰었잖아요. 뭐라도 먹어야죠. 자꾸 그렇게 식사 건너뛰면 저 너무 속상해요.”

    한 마디 더 보탤까 하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냉큼 따라 나온 놈이 예뻐 보이긴 했으니까. 사실 저 안으로 들여보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붕어 대가리라도 이 정도 의리는 있어야지, 암.

    “속상은 무슨. …그냥 집 가서 라면이나 먹을랜다.”

    “라면 그거 몸에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담배도 피우고, 대체 왜 그렇게 몸 생각을 안 해요?”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따라붙은 녀석이 뾰로통한 얼굴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거참. 왜 요새 얘가 하는 말마다 우리 보육원 원장님이 떠오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건강 빼면 시체인 사람이라, 괜찮아.”

    가진 거 없는 사람은 건강하기라도 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주기적으로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슬쩍 눈을 흘기니 시선이 마주친 녀석이 길게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주 불길하게.

    “에이. 사정 두, 세 번 만에 탈진해서 뻗는 사람이 어떻게 건강-.”

    이 미친놈이!

    “야!! 이게 진짜! 이런 데서 그런 말 하지 말랬지! 그리고 그 정도면 누구나 다 뻗어! 이 동정 새끼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만 살아선-!”

    당황스러운 말에 걸음을 멈추며 주먹으로 한태화를 어깨를 때리자 놈이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맞은 자리를 문질렀다. 어느새 그 주둥이도 새 부리처럼 뾰족하게 나와 있었다.

    “아-, 아파요. 그리고 자꾸 동정이라고 놀리지 마요. 나 동정 뗀 지가 언젠데. 요한이랑 붙어 먹- 읍.”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고, 이 망할 놈아.”

    어깨를 때렸던 손으로 얼른 입을 막자 드러난 눈매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손바닥 아래로 미소 띤 입술이 느껴져서 천천히 손을 떼자 한태화가 여전히 능글맞게 웃으며 슬쩍 더 몸을 붙여온다. 이 새끼가 왜 자꾸 붙어. 징그럽게.

    “야, 좀 떨어-.”

    “차고에 가면 제가 여기 두고 간 차가 몇 대 있어요. 그중에 아무거나 하나 골라 타고 요한 집으로 가서 라면 먹어요. 배고프죠?”

    “…차? …여기에도 차가 있어?”

    “네. 가서 요한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기만 하면 돼요.”

    이 새끼 봐라…. 누가 봐도 훤히 보이는 미끼를 눈앞에서 요리조리 흔드네. 그걸 알고도 삼키는 나는 진짜 붕어만도 못한 놈이다.

    “응? 가요, 요한.”

    놈이 요사스럽게 눈웃음을 치며 손을 내민다. 그게 미끼라는 걸 아는데, 근데 그 미끼가 참… 비싸고 좋은 미끼라는 게 문제다.

    “…그, 그러지 뭐.”

    허공으로 마중 나와 있던 손을 맞잡자, 한태화가 잔뜩 풀어진 얼굴로 행복하게 웃는다. 그래, 나는 빠가사리하지 뭐. 어류끼리 잘 만났네.

    …젠장.

    #45

    3. 서럽고 어려운 일

    차고에 늘어서 있던 차들 중 꼭 한번 타보고 싶었던 브랜드의 세단을 끌고 나왔다. 찝찝했던 기분을 털어내려 시원하게 드라이브를 즐긴 후, 사옥 아파트에 도착하자 한태화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그만 가보라고 밀어내 봐도 배가 고프다고 들러붙어 오며 말을 듣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 안으로 들이면서도 라면만 먹고 가라고 엄포를 놓았다. 네, 네, 하고 대답만 잘하던 놈은 생각보다 잘 먹어 라면 4개를 게 눈 감추듯 해치운 후, 배가 부르다며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뻔한 개수작을 부렸다. 그런 놈의 어깨를 밀어가며 그만 좀 가라고 해봐도 이번엔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버티며 요지부동이었다. 그래놓고는 한눈에 봐도 심하게 어설픈 모양새로 설거지까지 했다. 그 엉성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결국 언제 사다 놨는지도 모를 쪼글쪼글한 사과까지 깎아 후식으로 먹었다.

    그렇게 은근히 엉덩이를 붙이며 눌러앉는데 성공한 한태화는 마지막으로 해본 가보라는 말에 눈을 땡그랗게 뜨고 어떻게 이 늦은 시간에 사람을 쫓아내냐며 사람 말로 개소리를 했다. 아닌 말로, 저놈이 어디 밤길을 무서워할 만한 놈이던가. 오히려 놈과 함께 밤길을 지나게 된 다른 사람들이 놈을 무서워하면 무서워해야지.

    그럼에도 위험한 밤길에 저를 내보낸다고 서럽게 울기 시작한 녀석을 골치 아프게 바라보다 하는 수 없이 손님용 이불을 꺼내 집어던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놈이 좋다고 이불을 깔고 누우며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물론 나는 그 꼴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콧방귀를 뀌어 준 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기분 좋게 눈을 떴다가 눈앞에 보인 얼굴에 도둑이야!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느새 침대로 기어 올라온 놈이 남의 몸을 멋대로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진짜 심하게 뻔뻔한 새끼였다.

    그렇게 함께 월요일 아침을 맞은 나와 한태화는 나란히 출근 준비를 하고, 같이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며 주차장에서 마주친 기관 사람들은 그런 한태화를 보며 흠칫하고 놀라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딱 봐도 네가 소문에 그 서달기구나- 하는 눈빛들이었다. 그럼 한태화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에 기분이 나쁘단 얼굴로 그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았고, 그럼 자동으로 시선이 거두어졌다.

    그게 편하기는 했지만, 그 시선의 이유 역시 옆에 선 이놈 탓이라 아침부터 피곤함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엘리제를 타고 출근을 해서 떨어지기 싫다고 매달려 오는 놈을 간신히 팀으로 출근시키고 난 뒤, 지원팀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정신적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태풍을 맞은 듯 넝마가 된 정신에 멍하니 의자에 너부러져 있는데 그 뒤를 이어 출근한 강선배가 자신의 자리로 가 앉으며 작게 혀를 찼다.

    “그새 한태화랑 살림 차렸어?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는 게 장난 아니던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의자에 기대 반쯤 누워있던 몸을 바로 하며 물으니 어깨를 으쓱해 보인 강선배가 대수롭지 않게 청천벽력 같은 소문을 전했다.

    “집에서 같이 나왔다며? 출근도 같이하고. 벌써부터 살림 차린 거냐고 난리던데?”

    “…어떤 새끼가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녀요? 누가 살림을 차려? 선배한테 그 얘기 한 사람은 누군데요? 아는 개새끼예요?”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강선배가 한심해 하는 얼굴로 가볍게 입을 열었다.

    “아는 새끼면 뭐? 오늘 아침에 같이 출근했다며. 아니야?”

    “…아니, 출근을 같이 한 건 맞는데-.”

    “집에서도 같이 나왔다며. 그것도 아니야?”

    “…….”

    “살림 차린 거 맞네. 그럼 집에서 나와서 같이 출근까지 해놓고 그런 소문이 날 줄은 몰랐어? 네가 숨만 좀 크게 쉬어도 일파만파 소문이 나고 있는데?”

    아오, 씨발.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자 또다시 쯧쯧하고 혀를 찬 강선배가 겉옷을 벗어 의자 등받이로 걸치며 한탄하듯 말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말릴 기운도 없고, 잔소리할 말도 없어. 그래서 그냥 응원이나 하려고. 그러니까 기운 내라, 우리 광땡이. 응?”

    “…응원은 무슨. 제발 누가 그런 이상한 소리하면 아니라고 편도 들어주고 좀 그러라고요! 같은 팀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내심 섭섭해서 한소리를 하니 막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던 강선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같은 팀이라서 아무 때고 쳐들어오는 한태화를 참아 주고 있는 거라곤 생각 안 하나 봐? 이 배은망덕한 새끼가… 한태화 아직 안 왔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다 눈치를 보듯 주변을 살피던 선배가 한태화의 부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뚱하게 보다 따라서 컴퓨터를 켜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곧바로 퉁명스러운 타박이 이어졌다.

    “입은 왜 그따위로 내미는데? 한태화 따라 하냐, 지금?”

    “아, 선배!!”

    “하지 마라. 그것도 한태화 얼굴이나 되니까 어울리는 거지, 넌 정말 못 봐주겠거든? 에잇, 눈만 버렸네.”

    어지럽혀져 있던 책상 위를 간단하게 정리하던 강선배가 더러운 것을 닦아내듯 눈가를 문질렀다. 대꾸할 말이 없어 씩씩대는 와중에도 나도 내가 왜 입을 삐죽거렸는지가 이해가 안 돼 공연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씨발, 진짜 버릇이 옮았나? 다 늙어서 입을 왜 내밀어. 당황스럽네, 진짜.

    강선배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최선배와 상원이가 같이 들어왔다. 둘 역시 오자마자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다짜고짜 소문부터 확인하려고 들었다. 그 모습에서 더럽게 따뜻한 동료애가 느껴졌다.

    “야, 너 진짜 한태화랑 살림 차렸어? 엄청 다정한 모습으로 집에서 나왔다던데?”

    “선배, 한태화랑 진짜 전속 가이드 계약 맺었어요? 그래서 같이 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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