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49)

“알았어요.”

대강 대꾸하면 문을 열고 나섰다.

…뭔가 방금 좀… 관계가 역전됐던 거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엘리베이터 앞에 선 한태화의 눈치를 보며 슬쩍 목덜미를 문질렀다. 어째 영… 찝찝했다.

***

어머님이 보내주셨다던 기사 딸린 차를 타고 한태화의 본가에 도착했다. 이미 앞서 범상치 않은 규모의 한태화의 집을 봤던지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음에도 태화그룹 회장님 댁의 모습에는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대문을 지나고 나서도 차로 더 들어가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현대식 미술관을 축소해 놓은 듯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집의 외관을 살피다 어색한 몸짓으로 한태화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줄줄이 늘어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 부담스러운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는데, 그나마 안면을 한 번 튼 적이 있는 회장님을 뵈니 긴장이 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요한군, 어서 오게. 다시 보니 반갑군.”

“예, 건강히 잘 지내셨어요.”

“그럼. 나야 잘 지냈지. 건강도 여전하고. 근데 자네야말로 코는 괜찮나? 그날 그러고 가서 걱정이 많았는데.”

회장님, 쉿! 아니, 이분이 보기보다 눈치가 없으시네!

“하하, 예. 그럼요. 괜찮고말고요. 제가 좀 심히 건강체라.”

억지로 웃으며 눈에 힘을 주자 작게 웃음을 터트린 회장님께서 뚱하게 선 한태화를 대신하여 가족들을 소개해 주셨다.

“저놈 할머니이자 내 아내는 지금 외국 출장 중이라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했네. 아쉽다고 전해달라더군. 그리고 여기가 내 아들 내외네.”

“아, 안녕하세요. 서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먼저 살갑게 인사를 받아주는 한태화의 어머님을 보며 든 생각은 한태화가 어머니를 빼다 박았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이목구비에 진한 인상이 딱 한태화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서 계신 무뚝뚝한 얼굴의 커다란 키와 체격을 지닌 아버님은 한태화에게 그 골격을 물려주신 듯했다.

“여기는 태화 큰 형인 태준이. 작은 형인 둘째는 외국으로 출장을 나갔다가 지금 들어오고 있는 중이니 곧 도착할 게야.”

“반갑습니다. 한태준이라고 합니다.”

“예. 서요한입니다.”

반갑게 악수를 청해오는 남자를 보며 마주 손을 뻗으려는데 빠르게 내 손을 낚아챈 한태화가 뚱한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당황한 얼굴로 그런 한태화를 돌아보다 얼른 엄한 얼굴로 눈을 흘기자 잠시 눈싸움과 함께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한태화가 먼저 단단히 토라진 얼굴로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서요한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러든가 말든가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청하며 최대한 선량히 웃으려 노력하자, 놀란 얼굴로 한태화를 보던 한태준씨가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악수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쯧쯧. 속 좁은 놈.”

회장님의 추임새에 가볍게 동의를 표하며 얼른 옆으로 와서 서라는 의미로 눈짓을 했다. 그러자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한태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던 태화 아버님께서는 작게 헛기침을 하셨고, 사모님께서는 인자하게 웃고 계시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셨다.

“그럼 배고플 텐데 저녁부터 들어요. 태현이는 아까 비행기에서 내렸다고 연락 왔으니 곧 도착 거라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 저 때문이신 거면 기다렸다가 함께 드셔도-.”

“요한, 빨리 와요. 점심도 건너뛰어서 배고프잖아요.”

“잠깐만, 한, 한태화씨-.”

“빨리요.”

손목을 잡아끄는 힘에 당황한 얼굴로 딸려가다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당황한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 이놈 새끼가 진짜!

“야, 내가 내 사회적 체면 좀 세워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던 거 같은데?”

“…요한, 배고프잖아요.”

곁에 다가서며 작은 목소리로 야단치자 놈이 불퉁한 얼굴로도 눈치를 살폈다. 배야 당연히 고팠다. 늦게 일어나 아침도 건너뛰고, 점심도 건너뛰었다. 한 끼 굶은 걸로도 난리를 치는 한태화 때문에 네가 옷을 사러 간 사이 간단히 챙겨 먹었다고 거짓말하긴 했지만, 사실 어제 죽을 먹은 이후 내도록 빈속이었다. 배가 안 고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저 뒤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해 보이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밥으로 달려들 만큼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고.

“참을 만해요. 그러니까 서두르지 맙시다.”

“…알았어요.”

팔을 잡아끌며 앞장서던 놈이 마지못해 자리에 멈춰 서더니 제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놈은 여태껏 가족들과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잘 지내셨죠?”

“그, 그럼. 너는?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예. 요한 덕분에요. 가이딩을 받아서 어느 때보다 좋아요.”

서로의 건강을 챙기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 모두가 흐뭇하게 표정을 풀었다. 그 따뜻한 분위기에 나만 혼자 끼지 못하고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툭툭, 아들의 어깨를 다정히 쓰다듬는 손길에는 오래도록 눈이 갔다.

그렇게 한태화와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눈 사모님의 얼굴에는 생기가 피어올랐다. 기분이 좋아지신 듯 활기찬 목소리와 밝은 얼굴로 앞장을 서 식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하셨고. 일반 가정집과는 사뭇 다르게 바닥에 대리석이 깔린 곳을 슬리퍼를 신고 걷자 넓은 거실을 지나 이어진 식당으로 커다란 식탁이 보였다. 한정식 집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음식들을 살피며 눈을 크게 키우자 앞서 걷던 사모님께서 수줍게 웃었다.

“태화한테 물어보니 한식 위주의 식사를 좋아한다고 들어서요.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아, 아뇨. 엄청난데요.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 뿐이라 놀랐습니다.”

진심으로 답하자 사모님께서 다행이라는 듯 웃으셨다. 그 해사해진 얼굴 위로 커다랗던 눈이 곱게 접히며 한태화와 닮은 얼굴이 더욱더 도드라졌다.

“와서 얼른 앉아요. 점심도 건너뛰었다니, 배가 많이 고프겠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사모님이 안내해 주신 곳으로 가서 앉자 그 옆으로 당연하다는 듯 한태화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맞은편으로는 한태화의 부모님과, 형인 한태준씨가 앉았고, 상석엔 당연히 회장님께서 앉으셨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작된 식사 자리에 눈치를 살피느라 앞에 있는 반찬만 깨작거리고 있는데, 그 모습을 힐끔대던 한태화가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맛있는 반찬을 집어다 나르기 시작했다. 얘가 어제부터 이런 거에 재미가 들린 것 같다.

“요한, 이것도 먹어봐요.”

“…그만하고 한태화씨도 먹어요.”

“저는 먹고 있어요. 그거 먹어봐요. 그러고 나면 이것도-.”

“알아서 먹을 테니까 너 먹으라고.”

이게 나만 먹으라고 차려놓은 상이겠냐? 당연히 네 어머님이 너 잘 먹이고 싶어서 차린 상이지? 이놈은 꼭 이상한 데서 눈치가 없다니까?

#42

슬쩍 분위기를 살피다 그만하라는 의미로 놈의 허벅지를 툭 하고 쳤다. 그럼에도 놈은 모르는 척 열심히 반찬을 집어 날랐다. 더 이상 뭐라 하기도 눈치가 보여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밥그릇 위로 올라온 반찬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러자 한태화의 뿌듯하다는 시선 외에도 여러 곳에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안 드세요?”

“어머, 미안해요. 우리가 너무 빤히 쳐다봤죠? 어서 들어요. 우리도 먹을 테니. 그나저나 찬은 입에 맞아요?”

“네. 아주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활짝 웃어 보이신 사모님께서는 드디어 수저를 드시고 식사를 시작하셨다. 그러자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듯 쳐다보고 계시던 태화 아버님과 형이라는 사람도 식사를 시작했다. 회장님이야 이미 진작부터 식사하고 계셨고.

“임시 가이드엔 관심 없다고 딱 자르고 돌아서던 놈이 무슨 마음으로 다시 하기로 한 게야?”

“켁, 콜록콜록!”

콕 집어 오는 말에 넘기던 밥알이 잘못 넘어가며 사레가 들렸다. 그러자 한태화가 바로 물 잔을 건네주며 자신의 할아버지를 아주 불손하게 흘겨보았다. 불손한 건 저놈인데 가시방석엔 나만 앉아 있었고.

“왜 먹을 때 말을 시켜요. 요한이 곤란해하잖아요.”

“궁금해서 물은 걸 뭐. 왜, 찔리나?”

“아뇨, 찔리는 게 아니라, 큼, 그냥 뭐 어쩌다 보니 임시 가이드만 잠시 해보기로 했습니다.”

“임시 가이드만? 그럼 전속 가이드는?”

거침없이 물어오는 질문에 곤란하게 웃자 한태화가 무시하고 밥이나 먹으라며 밥그릇 위로 또다시 반찬을 날랐다. 그새 얼마나 쌓아놨는지 탑처럼 쌓인 반찬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전속 가이드 계약은 임시 가이드가 끝나면 한태화씨와 상의해 보기로 했습니다. 서로 잘 안 맞을 수도 있고, 그사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문제없는데요? 요한보다 더 맞을 사람도 없고.”

“…조용히 하고 밥 먹어요, 한태화씨.”

“그거 닥치고 먹으라고 하려던 거 순화한-.”

“아하하. 자, 이것 좀 먹어봐요. 엄청 맛있네요. 그죠?”

진짜 그 입 좀 닥치란 의미로 밥그릇 위에 쌓여 있던 반찬을 여러 개 집어 그 입으로 넣어줬다. 그러자 차마 싫다곤 못하고 넙죽 받아먹은 한태화가 꽉 찬 입안에 말을 하지 못하고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채 음식을 씹었다. 그러게 가족들 있다고 누가 까불래? 머릿수로 밀어붙이려고 하네, 이 요망한 놈이.

“사이가 좋은 게 아주 보기 좋구만.”

“…예?”

이게… 사이가 좋아 보이세요? 거의 싸우기 일보 직전인데? 당황한 얼굴로 회장님을 바라보다 가족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 가족들 역시 흐뭇하단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적응이 안 되는 분위기에 당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셔서 간신히 그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모님, 작은 도련님 들어오세요.”

“그래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요. 식당으로 바로 안내해 주세요.”

“예. 근데 손님하고 같이 오셨는데요.”

바로 나갈 줄 알았던 아주머니께서 덧붙이신 말에 사모님이 의아한 얼굴을 해 보이시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버릇조차 한태화와 비슷했다.

“태현이가요? 누구지? 친구라도 데려왔나?”

“태현이 오늘 서요한씨 오는 거 모르지 않아요?”

“응. 그냥 저녁 식사 자리인 줄만 알걸? 바빠서 자세히 알려 줄 시간이 없었거든.”

그렇게 한태준씨와 사모님이 하는 얘기를 들으며 도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자 또다시 반찬 나르미가 된 한태화의 손길이 부산스러웠다. 그만 좀 하라고. 툭툭, 허벅지로 놈의 허벅지를 치며 눈싸움을 벌일 때였다. 식당 입구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엄마, 저 왔어요. 그리고 제가 누구랑 왔는지도 좀 보세요.”

“응. 태현이 왔니? 손님 계시니까 일단 이리 와서 인사 먼저…….”

사모님의 말이 묘하게 끊어지는 순간, 식당 안이 조용해졌다. 입구를 등진 채라 상황을 알 수 없어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단정한 차림에 키가 작달막한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봬요. 다들 잘 지내셨죠?”

활기찬 목소리를 내던 한태화의 형만큼이나 자신감이 깃든 목소리에 남자의 차림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자 당황으로 굳은 어머님께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부르셨다.

“…성현이구나.”

“예, 어머님. 오랜만에 봬요. 건강히 잘 지내셨죠?”

“…그래.”

“식사하고 계셨나 봐요. 저도 마침 배가 고팠는데, 같이 해도 될까요?”

이미 앉았으면서, 굳이 처묻는 이율 모르겠네. 성현이라 불린 남자는 눈치가 없는지, 아니면 자신감에 넘쳐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모두가 당황해하는 분위기에서도 자연스레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는 어쩐지 예상이 되는 인물이 있어 뚱한 얼굴로 식사를 멈췄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태화가 나를 따라 수저질을 멈추더니 못마땅하게 눈가를 찌푸리더니 새로운 반찬을 밥 위로 가져다 날랐다. 그게 어서 밥을 먹으라는 신호라는 것을 알면서도 밥을 먹지 않자 놈이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놈도 심히 주변 눈치를 안 보는 놈이었지.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사정으로 말이 없어진 사이 멋대로 자리를 꿰차고 앉은 성현이라는 놈은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개수작을 부렸다.

“못 뵀던 분이 계시네요. 누구세요? 제가 이 집 분들은 다 아는데.”

개도 저따위로는 영역표시를 안 하겠다 싶게 유치하게 구는 놈을 비웃으며 나 역시 가볍게 웃어 보였다.

“한태화씨 임시 가이드, 서요한이라고 합니다.”

“아… 이번에 우리 태화를 도와줬다던 그분인가 봐요. 반가워요. 태화의 피티스트 진성현이라고 합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그 연락 두절의 먹튀 피티스트. 안 그래도 한 번쯤 그 얼굴을 보고는 싶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을 뿐.

그래도 설마 뻔뻔하게 우리 태화란 말을 지껄일 줄은 몰랐지. 힐끔 시선을 돌려 멀뚱히 앉은 한태화의 반응을 살피니 놈은 앞에 앉은 사람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내 남은 밥만 보며 얼른 먹으라는 듯 채근하는 시선만을 보낼 뿐이었다. 그래, 내가 얘한테 뭘 바랄까.

한숨을 내쉬니, 그런 한태화의 태도에 기운을 얻은 듯 신이 난 새끼가 발랄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근데 그럼 서요한씨는 몇 등급이세요? 저는 태화의 피티스트긴 한데 부끄럽게도 B등급밖에 안 되거든요.”

이제 보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온 건 아닌가 보네. 적어도 내 등급이 뭔지는 알고 온 것 같은 태도에 나 역시 편하게 입을 열었다.

“D등급입니다.”

“아… 혹시 그럼… 보조 가이드세요?”

“예. 세가의 지원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내 대답에 그놈의 면상 위로 비웃음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고, 놈은 밝게 웃으며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더니 그때까지 아무 말도 못 한 채 식사를 멈추고 계셨던 회장님을 돌아보았다.

“연락 주셨던데, 제가 잠시 봉사활동차 오지로 나가 있어서 연락이 안 됐어요. 많이 놀라셨죠? 저도 나중에야 연락받고 놀라서 달려온 참이에요.”

제 에스퍼야 죽든 말든 내팽개치고 오지로 봉사활동 간 게 저렇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일인가? 아주 성인(聖人) 나셨네. 짜증 난 시선으로 놈을 쳐다보다 그 시선을 따라 회장님께 시선을 돌리니 나랑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의 회장님이 마뜩잖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셨다.

“…그래, 그랬군.”

“예. 근데 한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태현형을 만나서 같이 왔어요. 이 정도면 진짜 인연이라니까요. 하긴, 피티스트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인연이 아니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

조잘조잘 말이 참 많은 놈이었다. 정작 저를 데려온 한태화의 둘째 형이라는 사람조차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아까 서 있던 그 자리에 아직도 서 있었는데, 저 진성현이란 놈은 그쪽으론 시선조차 안 두고 있었다. 하긴 저런 철판이니 먹튀도 가능하겠지.

“요한, 안 먹어요?”

얼굴 두껍기가 거북이 등껍질보다 더한 놈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물어 와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진성현이라는 놈만큼이나 얼굴이 두꺼운 한태화가 순하게 웃고 있었다.

“…먹어야죠. 한태화씨도 드세요. 왜 안 먹고 있습니까.”

“요한이 안 먹는데 어떻게 저 혼자 먹어요.”

네 입 따로, 내 입 따로, 다 따로 있는데 왜 그걸 혼자 못 먹냐.

“애도 아니고… 혼자 왜 못 먹어요. 나도 이제 먹을 테니, 어서 먹어요.”

“네, 요한.”

대답은 잘만 하는 놈이 그럼에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저를 들고 밥그릇 위로 올라온 반찬과 함께 밥을 퍼먹으니, 그제야 한태화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내내 굳은 얼굴로 보던 진성현이란 새끼가 서늘하게 표정을 굳히다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용쓴다, 용써.

“그새 많이 친해지셨네요. 우리 태화가 아무한테나 저러진 않는데, 서요한씨가 가이딩을 무척 잘해 주셨나 봐요.”

막 밥을 한 숟갈 더 퍼먹으려다 그 물음에 손을 멈추며 고개를 들자, 옆에서 인상을 찌푸린 한태화가 먼저 숟가락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밥 먹는 거 안 보여? 그만 좀 방해하지?”

#43

그제야 제게 시선을 맞춰주는 한태화를 보며 표독스럽게 표정을 굳히던 새끼가 금세 표정을 바꿔 불쌍한 척 눈썹 끝을 내렸다. 그 순간 박수를 칠 뻔했다. 휙휙 변하는 표정 연기력이 놀라워서.

“태화야… 네가 나한테 화났을 거 알아. …그래도 나는 너 걱정돼서 달려온 거야. 혹시라도 네가 잘못됐을까 봐.”

“…….”

“나는, 네가 진짜 잘못됐을까 봐… 너무 걱정돼서….”

놈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더니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그 말에 결국 참지 못하고 나는 들고 있던 수저를 식탁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말하던 놈의 입이 다물렸다. 그렇게 식당 안이 소름 끼치게 조용해졌다.

아, 참자, 참아야지. 지금까지 이 성질 누르고 잘 살아왔잖아. 비록 앞에서 별 개지랄을 다 떨고 있다지만, 내 일 아니다 하고 그냥 참으면….

참으면… 아니 근데, 저 새끼 하는 짓이 너무….

“아, 진짜, 좆만 한 게 좆같이 구네.”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못 들었어? 좆만 한 게 영 좆같이 굴어서 더는 못 봐주겠다고.”

“…….”

방금 전까지 울려던 놈이 입을 벌린 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한태화의 가족들의 표정 역시 똑같았다. 한태화 놈, 하나 빼고.

“야, 너, 돈 떨어졌어?”

“…지금 무척 무례하신 거 알고 계-.”

“까고 있네. 연금처럼 매번 따박따박 나오던 게 아쉬워져서 기어들어온 새끼가 무례는 씨발. 받을 거 다 받아서 아쉬울 것 없다고 손 털고 나니까, 아쉽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있던 게 없어지니까 원래 쓰던 씀씀이로는 생활비 감당이 안 됐을걸? 그래서 6개월 만에 다시 알아본 거 아냐. 한태화가 살았나, 죽었나. 그러다 살아있다는 말에 다시 돈이나 뜯어낼까 해서 기어들어온 거 맞잖아. 내 말이 틀려?”

“…….”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내쉬느라 놈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그러나 아무 말도 못 한 채 노려만 보는 것으로는 간지럽지도 않았다.

“그러면 나 죽었소 하고 기어와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피티스트니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하고 빌어도 모자를 판에, 뭐? 등급이 어쩌고 어째? 야, 너 지금까지 미안하다, 죄송하다, 그런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어. 알아?”

“…사과는 나중에 따로 드리려고-.”

울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던 놈의 목소리에 또다시 물기가 맺혔다. 생각대로 안 되니 이제는 약한 척, 피해자로 보이고 싶나 보다. 근데 내가 이 성질머리로 그런 놈을 한두 명 겪어 봤겠냐.

“하, 이 와중에 자존심도 챙겨? 그 자존심은 돈 받아 처먹을 땐 어디 잠깐 마실 나가냐? 내가 가이딩 했을 때 이 자식은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이건 됐고, 사람 죽여 놓고 사정이 있었어요, 사과는 나중에 따로 드릴게요, 하고 있는 거라고, 너. 근데 뭐? 우리 태화?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야, 너 같은 것들 때문에 가이드가 욕을 먹는 거예요. 열심히 의무감과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 때문에 욕을 먹는 거야. 나라고 대단히 뛰어난 사람은 아닌데… 진짜 그렇게 살지 마라. 쪽팔리지도 않냐? 나라면 한국으로 못 기어들어왔어. 이 새끼야.”

“…당신이 뭔데, 뭔데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시죠? 제 사정도 모르면서!”

“네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얘처럼 어디서 죽을 뻔했다 살아 돌아온 거 아니면 그냥 입 다물고 있어. 그리고 네가 내 앞에서 뭣같이만 안 굴었어도 가만히 있었어. 안 보이는 곳에서 하든가, 왜 사람 밥 먹는 앞에서 그 지랄을 떨어서 밥맛이 떨어지게 만들어. 응?”

“…….”

입술을 깨물며 새빨개진 눈으로 노려보는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의자를 뒤로 끌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나를 따라 자리를 일어나려고 하는 한태화의 어깨를 손으로 잡아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따라오지 마. 지금 따라오면 열 받아서 너한테 화풀이할 거니까. 괜히 불똥 얻어맞지 말고, 여기 있어.”

“저는 화풀이해도 괜찮-.”

“말 듣지?”

“…네.”

“내가 이 집 떠나기 전까지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라. 응?”

“…네, 요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한태화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네. 칭찬의 의미로 놈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다 천천히 놈의 가족들을 돌아보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굳은 채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살피다 마찬가지로 굳어 계신 회장님을 돌아보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화를 못 참았습니다.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곤 한태화의 가족들에게도 차례대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 뒤 몸을 돌려 식당을 빠져나왔다. 또다시 성질을 못 참고 사고를 쳤다는 자각은 있었는데, 속은 시원했다. 그래도 한태화랑 전속 계약은 텄지. 임시 가이드나 잠시 하다 끝나겠네. 그 순간, 그깟 화를 못 참아 기어이 이 꼴이다.

씁쓸하게 웃으며 홀로 집을 빠져나오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둘이 들어갔다 혼자 나오는 기분은 끝내주게 더러웠다.

***

요한이 식당을 떠나는 모습에 자리에 앉아 있던 한태화의 어머니가 급히 일어나 그 뒤를 따라 나갔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식당으로는 기묘한 적막감이 내려앉았고, 그 적막감은 이내 날카로운 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하.”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 듯 코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쉰 한태화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던졌다. 접시들 위로 아무렇게나 흩어진 젓가락들이 낸 소리에 단박에 시선이 몰렸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온기가 사라지자마자 한태화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는 반도 비우지 못한 요한의 밥그릇을 살피다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내가 그리 어려운 부탁을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혼잣말하듯 작게 말을 내뱉은 한태화는 천천히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하게 고압적인 태도였다.

“평소 하던 대로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밥 한 끼 먹어주면 된다는 부탁이 뭐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라고.”

숨길 수 없는 화가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서요한은 평생을 가족적인 것들을 그리워하며 산 사람이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요사이 지겨우리만치 요한 곁을 껌처럼 붙어 다닌 한태화는 그것을 금방 눈치챘다.

서요한은 길을 걷다가도, 혹은 운전을 하다가도 문득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오랫동안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곤 했다. 그 자신도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의 눈길 속엔 분명한 아쉬움과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강한 열망과 동경 역시 함께 담겨 있었고.

임시 가이드를 받아들인 이유도 차나 집이 탐나서라고 했지만, 그날 회장실에서 나온 뒤, 비상계단에 앉아 나눴던 이야기 중에서 서요한이 가장 눈을 빛냈던 부분은 사실 ‘가족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손자에 대한 걱정으로 주책 맞게 나선 할아버지를 눈앞에서 보고 나온 서요한이 가장 흔들렸던 부분이기도 했다.

말하는 내내 그에게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던 한태화는 그 사실을 쉽게 눈치챘다. 그리고 음험하게 웃었다. 그 자신을 빼놓고 본다면 한태화의 집안은 유독 더 그 가족적인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폭력과도 같은 간섭에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왔던 한태화는 처음으로 그런 제 집안의 분위기에 감사해 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청한 저녁 식사 자리도 쉽게 수락했던 것이다. 요한을 꼬여낼 좋은 미끼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 가이딩에 대한 일로 화를 내면서도 서요한은 그 자리를 쉽사리 거절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나왔다. 이것만 봐도 그가 가족이란 단어에 얼마나 약한지 알 수 있었다. 그가 견고하고 두르고 있는 방어막을 깨부술 유일한 약점이라는 의미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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