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49)
  • “-흐읏!”

    “아, 요한, 좋아요? 여기가 또 막 움찔거리는데.”

    가슴을 문지르던 손이 이번엔 성기가 꽉 맞물린 입구 주변을 쓸더니 회음부 주변을 꾹꾹 눌렀다. 그때마다 안이 저절로 수축했다 풀어지며 드나들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으-, 제발, 입은 좀 닥치고 하, 음-.”

    “…그럼 좋은지만 알려줘요. 좋아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다 슬쩍 고개를 끄덕여주자 뒤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났다. 성기를 훑는 손 역시 본격적으로 움직여 좀 더 살만해졌다. 쓸데없이 힘이 들어간 부분에서 힘이 풀리자 긴장으로 굳어있던 근육들도 따라서 풀리기 시작했고, 멈춰있던 한태화의 성기도 천천히 삽입되기 시작했다.

    “으흑!”

    “조그만, 조금만 더 참아요, 거의, 다, 아-.”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으며 앞을 만져주던 손이 약한 귀두 부분을 스치며 넓게 문질렀다. 예민해져 있던 감각이 확 살아나며 순간 확 조여들었던 아랫배가 다음 순간 확 하고 풀리더니 그대로 한태화의 것이 뿌리까지 박혀왔다.

    “흐- 악!”

    “요한, 링크-.”

    그때를 맞춘 듯 링크가 열리며 모든 감각이 열리더니 기운이 섞여들었다. 그 오묘한 감각에 숨이 차오르며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입을 벌린 채 숨을 몰아쉬다 힘겹게 고개를 드니 예의 그 꽃밭 위였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바로 코앞에 한태화의 힘의 근원인 나비가 투명한 벽에 동화된 채 가이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 번에 바로 가이딩이 가능하다니, 언제 이렇게 됐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을 들어 나비가 녹아든 부근의 투명한 벽을 짚었다. 그러자 천천히 세상이 돌아가며 땅과 하늘이 여러 번 뒤집혔다 제자리를 찾더니 점차 그 속도를 빨리했다. 동시에 멀미가 날 것처럼 속이 울렁이며 머리가 핑글핑글 어지러워졌다.

    “요한, 괜찮아요?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뒤에서 열심히 허리 짓을 하고 있던 한태화가 턱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아프게 목을 꺾은 채 깜박깜박 눈을 깜박이는데, 서서히 정신이 드는 사이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근데… 그게 왜 내 입에서 나고 있지?

    #39

    “아, 읏, 흐-!”

    “요한, 정신 좀, 차려봐요. 괜찮아요?”

    나 정신 차렸는데? 근데 왜… 순간 제멋대로 튀어나간 높은 교성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바람에 혀끝이 조금 깨물렸다.

    “아!”

    “요한? 봐 봐요, 혀 깨물었죠?”

    “읏, 하, 하지 마, 아, 아!”

    순간 엎드려져 있던 몸이 강제로 세워지며 무릎을 꿇은 채 상체가 들렸다. 그 자세 탓에 입구가 좁아지며 성기의 생김새가 생생히 느껴질 만큼 내벽이 조여들었다. 깊은 곳에 놈의 성기를 품게 되자 허리에 힘이 풀려 상체가 뒤로 넘어가며 한태화의 힘에만 의지해 매달렸다. 그사이 기다란 손가락이 입안으로 들어와 멋대로 남의 혀를 잡고 문지르며 상태를 살폈고. 놈은 내 등과 제 상체가 딱 달라붙은 자세를 이용해 귓바퀴로 입술이 닿았다. 차오른 숨에 입에선 연신 더운 숨이 터졌다.

    “혀는 괜찮아요?”

    “…….”

    “아, 요한, 너무 조이지 마요.”

    “손, 으, 좀-.”

    “아, 요한. 그렇게 좋아요? 아, 안이 또 경련하는데.”

    강제로 무릎걸음으로 서 있으려니 허벅지가 달달 떨려왔다. 그 탓에 조절할 새도 없이 아랫배가 멋대로 조였다 풀리며 안이 멋대로 날뛰는 게 느껴졌다. 힘들어! 힘들어서 그런 건데! 그렇게 소리를 치고 싶은데 놈이 멋대로 입안에 처넣은 손가락에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느릿한 허리 짓이 시작돼서 놈의 상체에 기댄 채 고개를 젖혔다. 가이딩 속도가 벅찰 만큼 빨라지며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게 뒤에서 박히는 성기 탓인지 억지로 효율이 끌어올려진 과한 가이딩 탓인지를 모르겠다.

    “요한, 읏, 좋아요? 네? 나는, 좋아요- 흣!”

    한 손으로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장골을 잡은 놈은 점차 세게 안을 파고들었다. 집요하게 느끼는 곳을 노리는 거대한 성기는 내벽을 모두 짓뭉개듯 안을 벌렸다. 그 빠른 속도에 배 속이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고 화끈거려 손을 내려 아랫배를 감싼 놈의 팔뚝에 손톱을 박았다. 아랫배를 압박해 오는 팔 아래로 거대한 귀두 끝이 아랫배를 뚫고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공포에 혼탁했던 머릿속이 더욱더 엉망이 되어갔다.

    “흣, 커, 응, 너무, 커서- 아!”

    평소라면 입에 담지 않았을 말들도 멋대로 흘러나왔다. 진탕으로 흐려진 머리로는 이성적 계산이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거센 감각에 가이딩조차 집중할 수가 없었으니 얼마나 엉망인지 알만했다. 폭풍우에 휘말린 것처럼 몸이 종잇장처럼 나부끼다 곧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 생경하다 못해 두려운 감각에 입을 벌려 신음을 쏟아내며 동시에 눈물 역시 쏟았다.

    “아, 링크 싫, 읏!”

    “네? 요한? 뭐라는 건지 모르, 아, 씨발, 진짜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좋은가? 그런가? 한계치를 벗어난 쾌감에 머리가 백치가 되어버린 듯해 아무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놈의 상체에 등을 기댄 채 뭔지도 모를 말들을 잔뜩 쏟아내다 가이딩이 끝났을 무렵 간신히 사정을 한 번 했을 뿐이었다.

    그때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온갖 감각 속에서 숨을 몰아쉬다 오싹오싹 쾌감이 오른 몸을 떨었을 뿐이었다.

    기억이 돌아온 것은 가이딩이 끝나고도 한참 후에, 아직도 몸이 쿵쿵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

    한태화는 서요한의 무릎을 잡고 깊게 몸을 묻은 후 일정하게 몸을 움직이며 집요하게 얼굴을 살폈다. 가이딩이 말끔히 끝나 정신도 맑고 몸의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그래서 요한의 눈에서 이성이 살아나는 장면 역시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욕심 사나운 얼굴로 한시도 쉬지 않고 그 몸을 탐하고 있던 한태화는 얼른 순진하게 표정을 바꾸며 황홀한 눈빛으로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서요한을 살폈다. 서요한이라는 존재가 숨을 쉬고, 표정이 바뀌고, 그 예쁜 입에서 소리를 만들어 낼 때마다 매번 느끼던 익숙한 황홀감이었다.

    “안- 그만! 아, 이게. 무슨!”

    지금껏 흐린 눈빛으로 자신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던 요한의 몸이 뻣뻣해지자 한태화는 길게 눈웃음을 치며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자극이 멈춘 내벽이 참지 못하고 한태화의 좆을 사납게 물며 안으로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감각을 스스로도 느낀 듯 요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눈가 끝에 눈물이 맺혔다. 한태화는 그 아까운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입술을 묻고 혀로 눈물을 핥았다. 머리가 아찔해질 만큼 달콤했다.

    “이게 무슨… 내가, 왜? 이거 대체 뭐야?”

    “요한, 이제 정신이 들어요?”

    “너, 이, 뭐야! 가이딩이 끝났는데 왜 아직도!”

    “…요한이 좆을 물고 안 놔주는데, 어떡해요, 그럼. 더 세게 박아달라고 조르기까지 해놓고는.”

    노골적인 말에 얼굴을 붉히던 사람이 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말도 안 된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던 서요한은 한태화의 허리를 감싼 다리를 파들거리며 떨다 제 포즈에 놀라며 얼른 다리를 풀었다. 그래 봐야 이미 깊게 몸을 파묻은 한태화의 품에서는 조금도 벗어나질 못했다.

    “당장 비켜! 약속이 틀리잖아! 너, 분명 아까- 아!”

    정말로 이성을 차린 듯 약속을 따지고 드는 서요한의 모습에 한태화가 길게 성기를 잡아 빼다 금세 다시 세게 처박았다. 오랜 시간 자극을 받아 예민해져 있던 내벽은 어디를 어떻게 박아도 쾌감으로 조여들었다. 서요한의 몸 역시 마찬가지라 발끝이 곱아들며 온몸을 움츠린 채 덜덜 몸을 떨었다.

    “요한이, 먼저, 움직였는데. 기억, 안 나요?”

    “아- 아, 아! 읏, 흐읏!”

    천천히, 느릿하지만 제대로 허리 짓을 시작하자 움츠린 몸을 펼 생각도 못 한 채 요한이 쾌감에 자지러지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허리를 감고 있던 다리는 풀어져 뒤꿈치로 연신 시트를 밀어내며 쾌감을 감내하듯 무릎을 세웠다.

    링크로 모든 감각이 열리며 한계치 이상의 오르가즘으로 잠시 정신을 놨던 요한은 스스로 쾌감을 찾아 움직일 만큼 적극적이고 야했다. 한태화는 머릿속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며 그 모습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그러나 원래의 요한으로 돌아와 쾌감을 부끄러워하며 그걸 숨기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사실 서요한의 모습 중 그 어느 모습도 한태화의 심장을 울리지 않는 경우가 없기는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다 씹어 삼키고 싶을 만큼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작은 부분까지 그 무엇 하나 양보할 수가 없었다. 한태화는 가끔 그 입을 통해 내뱉어진 숨조차 아까울 때가 있었다.

    “요한, 좋아요? 네?”

    “아읏! 으-!”

    “요한, 대답해, 줘요. 좋아요?”

    “좋, 흣, 아, 좋아! 전부, 아!”

    “다행, 이에요, 그러니까, 가이딩은, 나랑만 해야 해요.”

    마지막 절정에 이르려는 듯 아치형으로 휘어지던 허리가 허공에 뜬 채 바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한태화가 답을 기다리듯 허리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자 눈치 빠른 사람답게 요한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좀!”

    “약속한 거죠?”

    제대로 이해도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요한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보던 한태화가 요한의 제일 깊은 곳으로 성기를 처박았다. 그 순간 허리를 뒤틀며 길게 목울음 소리를 낸 요한이 오래도록 사정했다. 물 같은 뿌연 액을 길게 토해내며 요한은 이리저리 허리를 뒤틀며 몸을 보챘다.

    그에 검은색 시트가 더 새까맣게 물들며 그 위로 작게 물이 고였다.

    “…요한… 많이 쌌네요.”

    “…….”

    정신이 없는지 멍한 시선을 한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요한이 그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내려 아래를 살폈다. 그러더니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거칠게 쓸다 슬쩍 한태화와 시선을 맞췄다. 이내 그 흐릿한 색의 옅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쌍꺼풀 없이 큰 눈가가 찡그려지더니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줌… 아냐.”

    “네?”

    “…아니, 이거… 아니, 씨발.”

    “…요한.”

    서요한은 고민하듯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을 굴렸다. 그리고 한태화는 아직도 요한의 안에서 성기를 빼지 않은 채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고민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안의 느낌이 좋아서 실은 이미 답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너무 좋아서 실금한 정도야 뭐. 평소 끔찍하도록 깔끔을 떨며 결벽증 증세를 보이던 한태화지만 정말 저것이 요한의 실금한 것이래도 상관이 없었다. 부끄러워해서 아니라고 한다면 아니라고도 기꺼이 믿어줄 것이다.

    사실 저 위에서라도 한 번만 더 할 수 있다면 한태화로서는 뭐든 상관이 없었다.

    “…….”

    할 말을 찾던 요한은 말없이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는지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만을 못살게 괴롭히며 잘근거릴 뿐이었다. 한태화는 그런 요한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갖다 대며 웃었다.

    아직도 교육용으로 수집해 놓은 동영상은 많았고, 그 안을 뒤지다 보면 여러 가지를 알게 될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에도 밤잠까지 아껴가면서 공부한 보람을 느꼈다. 확실히 실전과 이론은 많이 달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지난번과는 분명 달랐다. 한태화는 그게 뿌듯했다. 자신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요한과 함께 즐거울 수 있어서.

    그렇게 천천히 이 몸을 잠식해가야지.

    계획으로 눈을 빛내면서도 요한이 좋아하는 웃음을 흘린 한태화는 또다시 흐릿해지는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몇 번이고 눈앞에 있는 남자를 집어삼키고 싶었다. 이 허기만은 절대 채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40

    눈을 뜨니 벌써 한나절이 지나가 있었다. 다행이라면 오늘이 토요일이라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일까. 침대에 대자로 너부러져 옅은 하늘색 톤의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꿈뻑이고 있자 조심스레 문이 열리며 화려한 이목구비의 해사한 얼굴이 나타났다.

    “요한, 저 들어가도 돼요?”

    “아니. 꺼져.”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어진 말에 해사하던 얼굴의 안색이 꺼멓게 죽는다. 우울해진 얼굴의 한태화를 보자 그제야 꽁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그 단호한 축객령에도 놈은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물러나질 않았다.

    “밥은 먹어야죠. 밥만이라도 두고 가면 안 될까요?”

    “어. 안 돼. 누구 때문에 속이 엉망진창이라 생각 없어.”

    “…요하안-.”

    “…….”

    거짓말 조금 보태 맥주병만 한 게 밤새,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 들락날락했다. 그러니 그 속이 멀쩡할 리 없었다. 밥 생각이 없다는 말은 한태화를 괴롭히려고 내뱉은 말이 아니라 진짜 사실이었다.

    그렇게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마치자 우울해진 기색의 한태화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걸 확인한 후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어 게스트 룸의 침대에 뻗어 있다가 잠깐 선잠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벌컥하고 문이 열리는 기척에 눈을 떠 문가를 바라보아야 했다. 역시나 한태화 놈이었다.

    “요한! 제가 죽을 가져 왔어요. 죽은 먹을 수―.”

    “꺼지라고.”

    “…요한.”

    “내가 가? 이 몸으로 그냥 내가 집으로 갈까? 응?”

    “아, 아니요. 제가 잘못했어요…. 쉬어요, 요한.”

    또다시 우울해진 한태화는 힘없는 모습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닫힌 문을 사납게 노려보다 밖이 잠잠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눈을 감았다. 쉬어야 몸도 회복한다. 속도 속인데 허리며 다리며 당기지 않는 근육이 없었다. 내내 마찰당했던 입구도 잔뜩 부어 쓰라렸다. 잠든 사이 씻겨 놓은 한태화가 약을 발라 놓은 듯했지만 아픈 것까지 막아주진 않았다.

    씨발, 씨발.

    순간 새벽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리만 멀쩡했어도 이불을 300번쯤 걷어차 주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링크된 채 하는 게 아니라 삽입된 순간 링크를 여는 게 그렇게 위험한 건 줄 몰랐다. 한꺼번에 감각이 열린 상태에서 하는 섹스란 그토록 위험한 것이었다. 사실 드문드문 기억이 많이 끊겨 있어 제대로 기억나는 것도 없었다. 다만 새벽에 있었던 일이 좀 많이 선명할 뿐.

    “망했어…. 내 인생은 망했다고!”

    수치스러움이 한계를 넘어서니 오히려 멀쩡한 척이 가능했지만 이렇게 혼자 있을 때 떠오르면 딱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때 또다시 방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요한! 찜질을 하면 좀 나아-.”

    “야, 이 개새- 악!”

    꺼지라고 했음에도 말귀를 못 알아 처먹고 계속해서 문을 여는 한태화를 향해 베개를 던지다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로 쓰러졌다. 그러자 날아간 베개에 가슴을 맞고도 달려온 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침대가에 매달렸다.

    “요한, 괜찮아요? 허리 아파요? 약 먹을래요? 아, 약은 밥 먹고 먹어야 하는데… 주물러 줄까요? 찜질은요? 찜질은 싫-.”

    “좀, 닥쳐.”

    “요하안-.”

    곧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눈썹 끝을 내린 한태화가 엎드려있던 내 팔 하나를 조심히 쥐고 울먹거렸다. 그 한심한 꼴을 보고 있으려니 화가 피시식 하고 식는 기분이었다. 결국 화를 내는 것을 포기한 채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세우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한태화가 허리를 받쳐주며 그 사이로 침대에 널려있던 쿠션을 대주었다.

    “요한, 괜찮아요?”

    “아니, 전혀 안 괜찮아. 가서 저 베개나 주워와.”

    “아, 네!”

    놈에게 집어 던졌던 베개를 가리키자 한태화가 냉큼 가서 베개를 주워왔다. 쿠션 위로 베개까지 받친 후 허리를 기대자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저거, 찜질팩도 다시 가져오고.”

    “네, 요한!”

    나한테 달려오느라 방구석으로 내던져놨던 찜질팩을 들고 온 한태화가 얼른 허리로 따뜻한 팩을 대주었다. 그러자 진짜 한결 나았다.

    “나 목마른데.”

    “물 가져올게요!”

    주변을 얼쩡거리던 놈이 그 한마디에 달려 나가 컵과 물병을 통째로 들고 돌아왔다. 그리곤 내 앞에서 컵에 물을 따라 조심히 입가에 대주며 자진해서 시중을 들었다.

    음, 이거 제법… 괜찮은데?

    “죽은?”

    “먹을래요? 가져올까요?”

    “…가져와 보든가.”

    “잠깐만 기다려요, 요한.”

    표정이 확 밝아진 놈이 또다시 냉큼 달려 주방으로 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뭐 얼마나 서둘러 움직였는지 금세 쟁반에 그릇을 받쳐 든 놈이 게스트 룸 안으로 돌아왔다.

    “아직 따뜻해요.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요.”

    …죽이라며? 뭘 꼭꼭 씹어.

    황당하다는 얼굴로 올려다보았지만 진심인 듯 놈의 표정은 진지했다. 허- 하고 한심해하는 사이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둔 한태화가 그릇을 들고 바짝 다가와 앉았다.

    “…너는, 밥 먹었어?”

    “아뇨. 저는 요한이 먹는 거만 봐도 배불러요.”

    이제는 숫제 엄마처럼 구는 놈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수저를 빼앗아 드니 놈이 다시 수저를 빼앗아가 죽을 조금 떠 입가로 내밀었다. 입가에 닿은 수저를 무심히 내려보다 느릿하게 입을 벌리자 말한 대로 딱 먹기 좋게 식은 죽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죽이야?”

    부드럽게 입안을 감싸는 죽을 삼키며 물으니 또다시 적당량의 죽을 수저로 떠 대기 중이던 놈이 곱게 눈을 접었다.

    “타락죽이요.”

    “…맛있네. 너도 먹지?”

    고소하고 담백한 죽을 한입 더 받아먹으며 묻자 한태화가 환하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저어 보였다.

    “요한 다 먹으면요. 이따 알아서 챙겨 먹을게요.”

    “…그래, 그럼.”

    “요한, 아 해요. 아-.”

    정갈하게 적당량의 죽을 담은 수저가 입가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생각보다 한태화는 수발을 잘 들어줬다. 생긋생긋 귀엽게 웃기도 잘 웃었고.

    “이거 먹고 나서 약도 먹어요. 그럼 좀 나아질 거예요.”

    “무슨 약인데.”

    다시 한번 넙죽 죽을 받아먹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던 한태화가 다음 죽을 준비하면서도 성실히 대꾸했다.

    “근육 이완제요.”

    “…그런 거 먹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그런 것도 그 교육용 영상인지 뭔지에 나와?”

    “아뇨. 집안 주치의 분한테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좋은 약이 있다고 사람 시켜서 보내주더라고요.”

    “…너 설마… 나 왜 아픈지도 얘기했어?”

    “네. 왜요?”

    “…….”

    왜요? 그걸 정말 몰라 묻냐? 짜증 난 얼굴로 받아먹던 것을 멈추며 입을 꾹 다물자 맹하게 눈을 깜박이던 한태화가 금세 당황한 얼굴로 변해 죽 그릇과 다물린 내 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얼른 사과를 주워 삼켰다.

    “자, 잘못했어요. 다음부턴 얘기 안 하고 그냥 약만 달라고 할게요!”

    “…….”

    이미 다 알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 약을 또 달라 하면 아, 이 새끼들이 또 붙어먹었구나, 하겠지. 씨발. 아, 이 붕어 대가리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복장 터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요한-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돼요?”

    “…너, 그 영상은 지웠어?”

    “네!”

    고개가 떨어질 듯 크게 여러 번 끄덕이는 것을 바라보다 다시 얌전히 입을 벌렸다. 그제야 굳었던 안색이 풀어진 한태화가 얼른 다시 수저로 죽을 날랐다.

    “그거 추천해준 놈이랑도 연락하고 지내지 마. 절대!”

    “네.”

    “…어디서 또 이상한 거 배워오면 딴 놈이랑 바람피운 걸로 간주한다? 응?”

    “…네.”

    그 말에 입을 삐죽하게 내민 한태화가 머뭇머뭇 대답하며 입매 끝을 내렸다. 그게 귀여운 것과는 별개로 한심하기도 해서 작게 고개를 저으면서 피식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한태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대신 요한이 알려줄 거예요?”

    “…뭐?”

    “…요한이 계속 잘 알려줄 거냐고요….”

    “…….”

    바닥을 드러낸 죽 그릇을 치우는 척 시선을 피하던 한태화가 양손을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흰 눈으로 놈을 흘겨보다 꾸물꾸물 이불 안으로 파고들며 몸을 돌렸다.

    “약이나 가져와.”

    “네….”

    “그리고 내일 너희 집으로 가기로 했던 저녁 약속은-.”

    “아, 안 그래도 그거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요, 그거 그냥 다음으로 미루려고요. 요한 몸 상태도 별론데 무리하지 말고 그냥 다음에 가요.”

    “…됐어. 가기로 했던 거니까 가야지. 어르신들이 기다리실 텐데…. 몸이야 내일 저녁쯤엔 낫겠지.”

    “…무리해서 안 가도 되는데….”

    “됐다니까. 나가서 너도 밥이나 챙겨 먹어. 나는 한숨 더 잘 테니까.”

    따뜻한 찜질팩의 위치를 조정해 허리에 대며 바로 눕자 얼른 이불을 정리해 준 한태화가 계속해서 눈치를 보는 게 보였다.

    “…저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얌전히 있을게요.”

    “…….”

    “진짜 얌전히 있을게요. 네?”

    “그럼… 가서 밥이나 먹고 와. 신경 쓰이니까.”

    “…에스퍼는 며칠 굶는다고 안 죽어요.”

    꿍얼꿍얼 볼멘소리를 내뱉는 놈을 슬쩍 흘겨보자 찔끔한 표정을 해 보인 놈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금방 먹고 오겠다고 나갔다. 이제야 조용해진 주변에 눈을 감고 몸을 돌렸다. 끙 하고 앓는 소리가 저절로 터졌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가이딩에 대해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뭔가 새로운 방법을 찾거나, 좀 더 효율 좋은 방법을 찾거나. 연하의 에스퍼와의 가이딩은 생각보다 힘에 부쳤다.

    #41

    다음날까지 한태화의 집에 머물며 간호를 받았다. 새벽쯤 한숨 자고 일어나 움직여보니 좀 괜찮아져 있던 몸은 낮이 되자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한태화네 주치의분이 보내주셨다던 약의 효과가 진짜 제법 괜찮았다.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던 근육통도 한결 나아졌다. 다만 여전히 아래가 쓰라려 걷는 게 조금 어색할 뿐이었다.

    그렇게 상태가 호전되고 나자 이제는 입고 갈 옷이 문제가 되었다. 뭘 입고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한태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 오면 된다고 말하긴 했다. 집까진 갔다 오기 좀 모호한 시간이라 고민이 됐는데, 현장에 나갔던 상태의 옷을 그대로 입고 갈 순 없어서 놈의 말대로 옷을 사오라 시켰다. 그러나 그 미안한 마음은 빨리 갔다 오란 말에 능력을 써서 갔다 오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등짝을 몇 대나 내려치며 억지로 차 키를 손에 쥐여 준 후 꼭 차로 갔다 오라고 당부했다.

    누굴 죽이려고, 저놈 새끼가. 당분간 능력 사용은 금지다.

    한참 후 제가 잘 가던 편집샵에 가서 옷을 사 온 한태화 덕분에 깔끔해진 차림이 되자 어느새 시간이 오후 4시를 넘겨 있었다. 차가 막히는 걸 감안할 때 이제는 정말 출발해야 할 시간이라 서두르는데 갑자기 한태화가 뚱한 얼굴로 버티고 섰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 답조차 황당했다.

    “요한, 점심 건너뛰었잖아요.”

    “어차피 저녁 먹으러 가는 건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자 한태화 하- 하고 날카로운 숨소릴 냈다. 순간 어? 하고 긴장한 얼굴이 되어 한태화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평소와는 좀 다른 기세에 순간 신경이 예민하게 벼려졌다.

    “그 논리면 점심 먹는데 아침은 왜 먹어요? 어차피 죽을 건데 살아서 뭐하고? 숨은 왜 쉬지?”

    “…비약이 좀 심한데요?”

    “전 요한의 논리를 따라한 것뿐이에요.”

    평소엔 네네 거리며 웃기부터 하던 놈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딱딱하게 굴자 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고작 점심밥 가지고 이러는 게 좀 모양새가 안 날 뿐. 두 끼 굶었다간 살인 날 기세다.

    “가서 저녁을 맛있게 먹으면 되죠. 한태화씨 가족들을 처음 뵙는 자린데 늦기 싫어서 그럽니다.”

    “…우리 가족들은 좀 기다려도 되니-.”

    “가요. 빨리.”

    말이 길어질 것 같은 상황을 일부러 말을 끊어내며 손을 펼쳐 흔들자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한태화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잡아왔다.

    “약았어.”

    “…….”

    “앞으론 식사 건너뛰지 마요. 여기서 더 마르면 나 진짜 속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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