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49)
  • “왜요. 집에 가면 약속 지키라고 덤벼들려고요? 그 김에 한태화씨 것도 빨아주고?”

    또다시 집 타령을 시작한 한태화를 흘겨보며 대놓고 빈정거리자 놈이 순진한 얼굴로 순하게 눈을 깜박였다.

    “아뇨. 엄마가 요한한테 고맙다고 저녁 한 끼 대접하고 싶다셔서….”

    “……네?”

    …엄마? 거기서 왜 엄마가 나와?

    “요한, 제 좆 또 빨고 싶어요?”

    “…….”

    “나한테는 이런 데서 그런 말 하지 말래놓고… 요한이 그러면 어떡해요. 부끄럽게.”

    발그레하게 볼을 붉힌 한태화가 ‘말만 들어도 설 거 같아요-.’ 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러니까… 대가리에 든 게 그거밖에 없는 쓰레기는 나였던 거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쪽팔리면 죽고 싶다는 자살 충동이 생기는 거고. 아… 너무 쪽팔리니까 욕도 생각이 안 나.

    할 수 있는 거라곤 죽어라 담배를 피워대는 것밖에 없었다.

    #34

    “올 거죠?”

    “……예.”

    “그럼 엄마한테 연락해 둘게요. 아주 좋아하시겠네요.”

    지금까지 애처럼 삐죽대던 놈은 어디 갔는지 놈이 아주 어른스러운 얼굴로 여유롭게 웃었다. 그에 반해 나는 쪽팔림을 이기지 못하고 다 피운 담배꽁초를 버리고 새 담배를 꺼냈다.

    이제부터라도 교회를 다녀보든가, 절이라도 알아봐야지. 이제 믿고 기댈데는 기도 밖에 없지 싶다.

    아… 씨발, 좆 됐다.

    ***

    한태화네 집으로 가기로 한 약속은 이번 주말 저녁으로 정해졌다. 최대한 가족 모두가 모이는 시간으로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단다. 나는 그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붉어지는 요상한 병에 걸려 그냥 무조건 고개만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한태화는 세상 뿌듯해하는 얼굴로 해사하게 웃곤 했고.

    날 비웃는 거다. 삐뚤어진 내 눈엔 그렇게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주 내내 약점을 잡혀 지내던 중 샐러맨더가 숨어있다는 위치를 알아냈다는 연락이 왔다. 그 생각보다 빠른 연락에 기관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청산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알아냈어? 그럼 가지 뭐. 딱 이런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작전 수행 날이다.

    샐러맨더가 숨어있다는 건물을 에스퍼 요원들이 포위했고, 인턴 요원들이 인근의 주민들을 대피시키며 차량을 통제했다. 한태화는 자신의 청산팀 팀원들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만을 전달한 채 건물에서 한참 떨어진 곳의 허공에 뚱하게 떠 있었고. 수혁이는 안 왔냐고 물었더니 삐쳐서 저런다. 애도 아니고.

    어쨌든 그렇게 모든 준비가 마쳐지자 무전으로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고, 한태화는 혼자 건물 안으로 침입했다. 조용히 들어가 샐러맨더 한 놈만 끌고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힘을 쓰기 시작한 한태화는 현재 1:4의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보조 가이드로 끌려 나와 현장 팀장님의 옆에 서서 그 꼴을 전부 구경하고 있었다. 작게 천막을 쳐놓고 모니터 3대만을 들여놓은 임시 작전 본부에 서서 말이다.

    “와, 저 괴물 같은 새끼는 뭐야.”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제 막 인턴으로 들어온 듯 어린 티가 나는 남자가 입을 벌린 채 화면 속 한태화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1:4의 불리한 싸움은 4인 쪽이 불리했으니까. 한태화는 어중간한 등급의 에스퍼 3명은 공중으로 띄워 힘으로 짓누른 채 샐러맨더 하나와만 싸우고 있었다. 심지어 온몸에 불을 두르고 싸우고 있는 샐러맨더가 밀리는 형세였고.

    한태화는 이번에도 건물 부숴서 구상금 청구서를 받게 되면 기관장 명령이고 뭐고 가이드 해지 통보서를 받게 될 테니 알아서 하라는 내 엄포에 정말 최대한 얌전히 싸우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기세가 밀리지 않았다. 에스퍼의 등급 차이란 가이드와 달리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대체 능력이 몇 개야?”

    “4개.”

    “어? 4개요?”

    “어. 육체강화, 불, 중력, 염력, 이렇게 4개일걸.”

    혼잣말을 하는 인턴 요원에게 친절히 설명을 해주자 와- 하고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인턴 요원이 이내 질렸다는 표정으로 한태화를 괴물 보듯이 바라본다.

    “와, 진짜 장난 아니네. 근데 저 괴물 같은 놈이랑 아는 사이세요?”

    “어. 내가 저 괴물 같은 놈 가이드라.”

    대강 귀찮다는 듯 대답하자 인턴 요원놈 얼굴이 요상하게 찌그러졌다.

    “…네?”

    이 쉬운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아 다시 한번 친절하게 알려줬다.

    “쟤가 내 에스퍼라고.”

    “……어-.”

    “왜, 괴물 같은 새끼의 가이드가 말 걸어서 기분 나빠?”

    “혹시… 소문의 그 서달- 으앗, 아니, 그… 시, 실례했습니다!”

    경악한 얼굴을 해 보이다 좆같은 별명을 입에 담으려던 놈이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모습을 뚱하게 바라보는데, 옆에 서 있던 현장 팀장님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며 나를 흘겨보았다.

    “남의 귀여운 신입 병아리한테 뭐하는 짓이야. 왜 괴롭혀?”

    “방금 그 댁 귀여운 신입 병아리가 남의 에스퍼 까는 건 못 보셨어요?”

    “…좀 까면 안 되냐? 까일 만한 놈인데?”

    “까도 내가 까요. 별것도 아닌 놈한테 까이면 열 받죠.”

    한태화가 있는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대꾸하자 담뱃갑을 내밀고 흔들어 보이던 팀장님의 얼굴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그런 현장 팀장님을 향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마주 흔들어 보이며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요사이 알아서 붙을 붙여주던 놈이 있었어서 그런가, 라이터를 켜는 게 무척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언제부터 그렇게 친하셨다고?”

    “우리 친해지는 거 제일 처음 본 사람이 팀장님이실걸요?”

    담배 연기를 뱉으며 힐끔 쳐다보자 마찬가지로 담배를 피우고 계시던 팀장님이 아, 하고 그때를 회상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내가 그 별스런 광경을 직접 봤지. 이 짓도 그만해야 되나 싶었는데.”

    “남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너무하시네요.”

    “…너도 진짜 뻔뻔하다. 남들 다 보는 데서 한태화 끌고 모텔 들어갔던 거 기억 안 나냐? 좀 부끄러워해 보지?”

    “부끄러워하면 놀리실 거잖아요.”

    어깨를 으쓱하며 연기를 내뱉자 현장 팀장님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원래 이럴 때일수록 사람이 뻔뻔해져야 한다. 그때 현장 팀장님의 손에 들려있던 무전기에서 칙- 하는 노이즈 음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A좁니다. 슬슬 끝날 조짐인데, 저희도 들어갈까요?

    “아, 여기는 본부. A조 들어가고 B조랑 C조는 A조 엄호하면서 빠져나가는 놈 없나 감시해.”

    현장 팀장님의 지시에 예- 하고 응답하는 각 조장들의 대답을 들으며 건물 옥상을 비추고 있는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질이 선명한 화면 안에서 쓰러진 샐러맨더에게 다가가고 있는 한태화가 보였다. 그 뒤로는 금세 도착한 A조 에스퍼들이 축 늘어진 채 허공에 떠 있는 다른 3명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어찌나 호흡이 척척 맞는지 지원팀에서는 나설 일도 없어 보였다.

    그저 팔짱을 낀 채 뚱하게 서서 쓰러져있는 샐러맨더를 바라보다 끝이 드러난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며 발로 짓이겼다. 갑자기 클럽에서의 일이 떠올라 울컥했다. 저 새끼, 내가 한 방 먹여줘야 하는데. 억지로 링크당했던 일이 떠올라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야, 누가 저 새끼 좀 말려!”

    뭐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모니터 안의 샐러맨더가 공처럼 차여 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놀라서 달려가 모니터 화면으로 코를 박았다. 이거 설마.

    한태화는 한번 걷어찬 걸로는 성질이 풀리지 않는지 구석에 처박힌 샐러맨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주변에서 일을 수습하고 있던 A팀 요원들이 그런 한태화에게 달려들어 팔이며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에 뭐라뭐라 입을 여는 한태화가 보였는데, 소리까진 들리지 않았다.

    “저 미친놈이!”

    “…그 미친놈 가이드도 옆에 있는데, 말조심 좀 해주세요.”

    “네가 제일 미친놈이야! 저거 당장 안 말려?!”

    “…제가 왜…?”

    속이 다 시원한데, 뭐 하러? 사람을 인질로 잡아놓고 산 채로 태우네 마네 했던 놈을 굳이? 내가 그 정도로 선량한 사람은 아닌데. 심지어 산채로 태워질 뻔했던 사람이 나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고.

    “이거, 이놈도 미친놈이네?!”

    “권선징악, 인과응보, 사필귀정. 더 해요? 이만하면 안 미친 거 증명된 거 같은데.”

    “안 됐어, 이 새끼야! 그럼 권선징악에서의 ‘선(善)’이 한태화냐? 개소리 말고, 너 저거 당장 안 말리면 내가 내 계급장을 걸고 니들 다 징계위원회에 고발해 버릴 거야!”

    멱살을 잡고 소리를 치는 현장 팀장님은 얼마나 격분하셨는지 말끝마다 침이 튀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침을 피하다 다른 에스퍼들에게 팔과 허리가 붙잡힌 채로도 샐러맨더를 몇 번 더 걷어차는 한태화를 확인했다. 어이구, 잘한다, 내 새끼. 마음속으로 몰래 응원을 하며 천천히 팀장님의 손에서 무전기를 받아들었다. 저놈 발차기가 얼마나 센지는 익히 알고 있다. 물어준 카페테라스의 바닥 값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나무가 그렇게 비싼 나무인 줄 누가 알았겠어.

    “한태화씨.”

    무전기를 통해 한태화를 부르자 다시 한번 긴 다리를 들어 올렸던 한태화가 얼른 다리를 내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 들어 올렸던 다리는 한 번 더 차고 끝내지, 쟤도 참 패기가 없어.

    “그만하면 됐으니까 내려와요.”

    다시 한번 목소리가 나자 화면 속 한태화가 제일 가까운 에스퍼로부터 무전기를 빼앗아 들더니 카메라가 달린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주 해사하게 웃으며.

    -요한! 또 나 걱정돼서 보고 있었어요?

    쟤는 ‘또’라는 부사를 아무 데나 붙이는 나쁜 습관이 있다. 그래도 다행히 삐친 건 풀린 거 같다만.

    “…예. 걱정되니까 그만하고 이리 와요. 상태 좀 보게.”

    “미친놈들.”

    옆에서 들려온 욕설에 팀장님을 흘기자 담배 필터를 잘근거리고 있던 팀장님이 뭘 보냐는 듯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다. 저분이 질투를 하시나. 듣기로 현장 팀장님이 A급 가이드라고 들었던 것 은데.

    -요한….

    “예.”

    계속해서 팀장님과 눈싸움을 하다 무전기로도 느껴지는 떨리는 목소리에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놀란 듯 멍해진 한태화의 얼굴이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쟨 진짜 생긴 건 인정해 줘야 한다. 화면에 뜬 얼굴이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나았으니까.

    -나 가이딩 해줄 거예요?

    #35

    하여튼 귀신같기는. 예쁜 짓 좀 하길래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

    “봐서요. 상태 별로면 해야죠.”

    -…….

    놈은 말이 없었지만, 화면에 나타난 얼굴에는 기쁨으로 환하게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음. 이 맛에 다들 에스퍼를 키우나 봐.

    -얼른 갈게요! 꼼짝 말고 기다려요!

    아무렇게나 들고 있던 무전기를 내던진 한태화가 곧바로 몸을 띄웠다. 나는 악! 저게 또! 하고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가 땅으로 떨어지기 전 다른 에스퍼가 받아드는 것을 보며 안도했다. 다행히 생돈이 깨지는 일은 막아진 듯했다.

    “저놈 대체 뭐 하는 거야?”

    잠깐 무전기로 정신이 팔린 사이 옆으로 다가온 팀장님이 다른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팀장님의 시선을 따라 다른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얼른 온다는 말과는 달리 공중에 몸을 띄운 채 가만히 멈춰있는 한태화가 보였다. 응? 하고 화면으로 다가가는데, 갑자기 화면 속 사람들이 전부 허공으로 떠올랐다.

    “저게…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하, 미친놈이 할 짓이 없으니 이젠 힘 낭비까지 하네. 평소엔 힘 좀 보태라고 악을 써도 들은 척도 안 하던 게….”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광경에 팀장님이 씁쓸하게 혀를 찼다. 그게 무슨 의미인 줄을 몰라 눈을 깜박이는데, 옥상에 있던 이들이 모두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아주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두고 지가 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문득 방금 전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상태가 별로면 가이딩 해주겠다는 말에… 일부러 힘을 낭비하고 있다는… 아, 저 또라이.

    “…….”

    “살다 보니… 별, 거지같은 꼴을 다 보겠네.”

    쪽팔릴 짓은 한태화가 하고 있는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팀장님의 말에 열이 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당황하여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지상으로 곱게 내려놓은 한태화는 지상으로 현신한 천사처럼 우아하게 착지하며 무언가를 찾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밝은 얼굴로 손을 크게 흔들었다.

    “요한!”

    부르지 마! 쪽팔려!

    “…야, 쟤 데리고 빨리 가라. 꼴도 보기 싫으니까.”

    “…….”

    부끄러움으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끄덕이자 현장 팀장님이 또다시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퇴직할 때가 된 거지. 하, 씨발.”

    “…….”

    가실 때 저도 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퇴사가 간절했다. 하… 아직도 쪽팔릴 것이 남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

    먼저 퇴근해 보겠다고 말하며 다가온 한태화의 손을 잡고 무작정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얌전히 따라오던 한태화가 어느 순간 손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안 옵니까?”

    잡고 있던 손을 놔주며 묻자 한태화가 냉큼 내 손을 잡아다 제 손목 위로 올려두며 입을 열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요, 오늘 현장으로 오면서 차를 가져와서요. 가져가야 할 것 같은데.”

    “차… 요?”

    한태화의 손목 위에 있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쳐내려던 손을 얌전히 잡고 큼큼, 잠기지도 않은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어디 있는데요?”

    “요 앞에 있는 주차장에요.”

    “가죠. 이런 데 차를… 두고 갈 순 없으니까.”

    절대 내가 새 차에 눈이 멀어 이러는 것은 아니고, 이런 위험한 지역에 차를 두고 갈 수 없을 뿐이라고 여러 번 못을 박자 놈이 작게 키득대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내 손에 제 손목을 붙인 채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일반적인 형태의 야외 유료 주차장에 도착하자 드문드문 놓인 차가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아이가 수줍은 자태로 주차되어 있었다.

    “…네티.”

    황홀한 자태에 자연스레 눈이 가늘어졌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닛을 쓸어보는데 옆으로 따라붙은 한태화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지난번에도 이상한 이름을 붙이더니, 또 이름 붙여주는 거예요? 얘는 왜 네틴데요?”

    “포세이돈은 넵튠. 그 넵튠에서 따와서 네티죠. 이 차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이 아이는 제 마음속에서 네티였습니다.”

    “…포세이돈 차 좋아해요?”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오늘부로 싫어질 것 같은 사람이라면 지금 바로 요한 눈앞에 있어요.”

    개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한태화가 가볍게 앞바퀴를 발로 찼다. 저런 천인공노할!

    “한태화, 하지 마!”

    “…….”

    “키 줘.”

    “…칫.”

    “키, 달라고.”

    꾸물꾸물, 사람 속이 다 터질 느린 행동으로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낸 한태화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키를 던졌다. 허공으로 높이 떠오른 차 키를 가볍게 낚아채며 눈을 흘기자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리고 토라진 놈이 입을 삐죽거렸다. 정말 눈앞의 우리 네티만 아니었어도 깠다. 한태화 이놈을.

    “타.”

    “…몰라요.”

    “모르긴 뭘 몰라. 차 문 열고 탈 줄도 몰라?”

    “몰라요!”

    또다시 성질이 난 것처럼 놈이 발을 콩콩 구른다. 그 작은 발구름에 금이 간 콘크리트 바닥을 내려다보다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내려 한태화의 팔을 잡았다. 사고는 치기 전에 예방해야 하는 법이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리 와.”

    “…….”

    팔이 잡히자 얌전히 끌려온 놈을 조수석에 앉히며 안전벨트까지 매어주자 귓바퀴로 쪽- 소리를 낸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삐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린 한태화가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삐죽대던 입이 얌전히 들어갔다. 고새 또 좀 풀렸네.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조수석 쪽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와 안전벨트를 매며 시동을 켜니 묵직한 엔진음과 함께 옅은 진동감이 시트를 타고 올라왔다. 소리조차 아름다운 이 완벽한 아이라니. 한태화만 아니었으면 찬사의 박수를 보냈을 거다.

    “요한은… 차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그닥.”

    환장한다. 중, 고등학교 때는 바이크에 빠져 미쳐 살았는데,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고 나니 자연히 그 관심이 자동차로 향했다. 스무 살 때부터 9년간 줄곧 뚜벅이 생활임에도 자동차 매거진을 사서 읽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아직도 입매가 내려간 삐친 놈 앞에서 냉큼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나랑 차랑 둘 중에 누가 더 좋아요?”

    뭘 묻냐. 차에 따라온 옵션이 너인 것을. 넌 차한테 백번 절해야 한다.

    “…어떻게 사람이랑 차를 비교합니까. 그런 질문엔 답하고 싶지 않네요.”

    “그럼… 차랑 내가 위험에 빠지면 누구 먼저 구할 거예요?”

    그 차를 위험하게 만들 놈이 너 같은데….

    “한태화씨가 위험해질 확률이 있긴 합니까?”

    “자꾸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줘요! 중요한 문제란 말이에요! 차랑 나랑 물에 빠졌어요. 누구 먼저 구할 거예요?”

    우리 네티가 왜 너랑 물에 빠져? 빠져도 나랑 빠져야지?!

    “둘 다 못 구해요. 저 수영 못 합니다.”

    “…….”

    슬슬 진짜 화가 나는지 여태껏 장난스레 삐친 척하던 한태화의 시선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고요해진 얼굴로 빤히 응시해오는 것을 보고 있어도 웃음만 나왔다. 전에는 저게 꽤 무서웠던 것 같은데… 열 받는다고 발부터 콩콩 구르는 애가 이제 와 무서워 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도 둘 중 하나를 구할 수 있다면 한태화씨를 구할 겁니다.”

    “…진짜요?”

    “예.”

    변죽도 좋아 그 말에 바로 표정이 풀리는 것을 확인한 뒤, 슬슬 악셀을 밟으며 핸들을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한태화씨를 구해주면, 한태화씨는 우리 네티를 구해주겠죠.”

    “…왜 나는 한태화씨고 얘는 우리 네티예요?”

    “우리 네티니까요.”

    “…절대 안 구해줄 거예요. 내가 그 물, 시멘트로 다 메워버릴 거야.”

    쯧쯧쯧. 우리 네티는 너랑 물가 갈 일이 없다니까. 왜 그 사실을 몰라. 그러나 이 얘기를 해봐야 귀찮아질 게 뻔해서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골목을 나오니 일반 도로가 나왔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에 가슴이 시원하게 트이는 기분이 들어 신이 났다.

    “근데요, 요한.”

    “예.”

    “…속도가 좀… 너무 빠른 거 아닐까요?”

    안전벨트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한태화의 말에 시선을 내리자 이제 겨우 시속 120km가 넘은 계기판이 보였다. 아직 150도 안 되는 숫자에 시선을 들어 앞을 살피자 뻥 뚫린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주민들을 대피시키느라 차량을 통제했기 때문에 도로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속도를 내기 완벽한 환경이었다.

    “걱정 마요. 우리 애가 300은 너끈히 나오니까.”

    “…300을 다 밟을 건 아니죠?”

    “하하하.”

    당연히 밟아야지. 액셀은 밟으라고 있는 거니까. 한태화는 점점 불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S등급이란 놈이 뭐 이런 걸로 쫄아.

    “저기, 요한, 즐거워 보여서 좋기는 한데요, 근데 벌써 150 넘었어요.”

    “그거밖에 안 됐어요? 확실히 승차감이 좋아 그런지 속도감이 잘 안 느껴지긴 하네요.”

    “요한, 속도 낮, 요한, 앞에요! 앞! 앞에!”

    다급한 음성과 함께 하얗고 긴 손이 앞을 가리켰다. 그러자 저- 멀리에 차량을 통제하느라 세워둔 노란 통행금지 입간판이 보였다. 계기판을 힐끔 살피니 현재 속도는 200을 넘긴 상태. 즉, 이제 와 차를 세울 순 없다는 의미다.

    “태화야.”

    “예, 예, 요한. 속도요. 속도 좀-.”

    “차를 띄워.”

    “…예?”

    “차를 띄우라고. 할 수 있지? 응?”

    그 말에 한태화가 미쳤냐는 얼굴로 질린 얼굴을 해 보였다. 그게 참… 색다른 기분이었다. 내가 항상 저런 얼굴로 한태화를 봤던 것 같은데… 상대가 이러는 건 꽤 재밌네. 놈이 얼빵한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한 부탁에 끙거리고 앓는 것도 재밌고, 좀… 귀여웠다. 정말 재미 들리면 안 되는데….

    “요한, 차를, 아니, 앞에, 으- 요한!”

    #36

    잠깐 고민하는 순간,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노란 입간판에 한태화가 소리를 지르며 차를 띄웠다. 그러자 오르막길을 오르듯 공중으로 뛰어오르던 차가 사람 허리 높이의 입간판을 뛰어넘어 쿵, 하고 도로에 내려앉으며 차체를 출렁였다. 끼이익- 하고 스키드 마크를 남긴 차는 휘청거리다 다시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내가 아직도 액셀에서 발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하-, 장난 아니네. 우리 네티 좀 봐. 장난 아니다, 그치?”

    “…속도 좀 줄여요. 이제 진짜 일반 도로가 나온다고요.”

    지친 목소리에선 평소와 달리 애교가 아닌 짜증이 배어 나왔다. 근데 그것조차 귀여웠다.

    “그럼 네가 또 띄우면….”

    “요한!”

    “아, 알았어. 왜 이런 걸로 화를 내고 그래.”

    왁 하고 소리를 지르는 처음 보는 모습에 놀라 브레이크 페달 위로 발을 옮겼다. 그럼에도 한태화는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점차 줄어드는 속도에도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느끼며 쩝 하고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애가 영 속도 맛을 모르네. 이 맛있는 걸 왜 모르지? 하여튼 애가 가르칠 게 너무 많다.

    ***

    한태화가 알려주는 대로 운전을 해서 한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널찍널찍한 주차장 안으로 외제차 전시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비싼 차들이 줄지어 주차돼 있었다.

    “한 층 더 내려가요.”

    “예, 예.”

    기사가 된 기분으로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한층 더 내려가니 아까보다도 더 드문드문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널따란 주차 라인에 맞춰 주차를 마치자 한태화가 피곤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안전벨트를 푸는데 옆에 앉은 놈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깜박깜박 눈을 깜박이던 한태화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 어쩌라고?

    “…….”

    “…….”

    “…안 내려요?”

    “내려야죠.”

    근데 안전벨트는 왜 안 풀… 아, 씨발. 이 새끼가 설마.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흘겨보다 슬쩍 안전벨트를 풀어주니 ‘고마워요.’ 라는 말과 함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춘 놈이 그제야 차에서 내린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거… 앞으로도 계속 저럴 것 같은데. 나쁜 버릇이 든 거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어깨를 떨며 차에서 내리자 먼저 내려 기다리고 있던 놈이 제 손을 쭉 뻗어왔다.

    “뭐 해요, 요한.”

    “…….”

    “응?”

    허공으로 뻗은 손이 채근하듯 흔들렸다.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느릿하게 손을 뻗어 잡자 꽉 하고 힘을 준 놈이 걸음을 옮겨 주차장과 이어진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진짜 힘들었어요. 가이딩이 꼭 필요할 것 같아요. 상태도 아주 나쁠걸요?”

    “…….”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비밀번호를 입력한 놈이 손을 잡아끌어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상태야 당연히 안 좋겠지. 힘을 아주 펑펑 써댔으니까. 성질나기 전까진 최소한의 힘으로만 움직인다는 놈답지 않게 오늘은 아주 내내 날아다니더라.

    신이 난 놈을 흰 눈으로 흘기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올라탔다. 꼭대기 층을 누른 한태화는 그러고도 비밀번호를 한 번 더 입력하더니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내내 치대기 시작했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뺨을 비비다 잡고 있는 손을 들어 쪽쪽 입을 맞췄다. 그래 봐야 하얀 면장갑 위로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거였는데도 놈은 행복하게 웃었다. 뭐라고 할 기분도 안 나 네 멋대로 해라, 싶은 마음으로 가만두었더니 더 신이 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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