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49)
  • “…….”

    좀 아까 애교스럽게 굴던 남자는 어디 갔는지, 차수혁의 눈앞에는 기관에서 최악의 명성을 자랑하는 괴물이 서 있었다. 그 괴물은 입술을 깨물며 반항적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차수혁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 주워 먹을 거 있나 싶어 그러나 본데, 어차피 넌 죽었다 깨어나도 요한 못 가져. 내가 부스러기 하나 안 넘길 거니까. 그러니까 주인 잃은 개처럼 주변 배회하는 짓은 그만하고, 좀 꺼지라고. 눈에 거슬리니까”

    그 순간 한태화가 상체를 숙여 차수혁 가까이로 얼굴을 내리더니 길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전에 없이 차가웠다.

    “내가 나서서 정리하기 전에.”

    “…….”

    “이만하면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고, 그럼 차수혁씨, 나중에 사무실에서 보죠.”

    그렇게 제 할 말만 마치곤 허리를 세운 한태화는 낮잡아 보는 태도로 가볍게 인사를 끝낸 후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차수혁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를 잡아 세웠다.

    “내가… 요한 형의 기억을 조작해서라도 갖겠다고 하면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거 힘을 써서라도 한태화씨의 손에서 빼앗아 오겠다고 하면, 그럼 어쩔 겁니까?”

    우뚝 걸음을 멈춰 세운 한태화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차수혁의 자세가 무너지며 철제 의자와 테이블이 프레스 기계에 눌린 것처럼 납작하게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물리 계열이 아닌 차수혁은 어깨를 부서뜨릴 듯 강하게 눌러오는 압력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간신히 버티며 숨을 골랐다.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이었지만, 딱 그 정도에서 멈추는 믿기지 않는 컨트롤이기도 했다.

    “그 힘을 왜 너만 쓸 거라고 생각해.”

    차수혁의 앞으로 돌아와 삐딱하게 선 한태화가 구경이라도 하듯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그 꼴을 비웃듯 대놓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힘으로 기억을 조작해서 갖겠다고? 재밌는 소릴 하네. 차수혁. 평소엔 시끄럽게 바른 소리만 하던 게.”

    “크-읏!”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한번 해봐. 나야 너보다 강한 정신 계열의 에스퍼 붙잡아다 요한의 기억을 다시 찾아주면 되지만, 너는… 글쎄, 어쩔까? 일단 살려둬야 하나?”

    “…큭!”

    무서운 압박감이 더 강해지더니 결국 팔에서 힘이 빠진 차수혁이 바닥을 짚으며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살려두겠다는 말과는 달리 한태화는 지금 당장 죽일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 눈만 빼고, 다 망가뜨린 후에, 숨만 붙여둘까? 그래서 알게 해 줘? 요한이 선택한 사람이 결국 나라는 걸.”

    그 순간 약해진 압박감에 숨을 몰아쉬던 차수혁이 고개를 들고 새파랗게 독기가 선 눈으로 한태화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젖 먹던 힘을 짜내 손을 뻗었다. 그에 아하- 하고 웃으며 발랄한 목소리를 낸 한태화가 눈 깜짝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재밌다는 시선으로 차수혁을 내려다보더니 뻗어진 손의 손목부터 어깨 부근까지를 서늘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어느 부분을 잘라야 다신 저런 건방진 소릴 못 할까. 그가 미소를 지은 채 균형 있게 근육이 잡힌 차수혁의 팔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얼굴의 한태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다시 돌아온 요한이 단단히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일 얘기는 개뿔. 일도 개떡같이 하는 사람이 무슨 일 얘기를 하나 했더니, 결국 이러고 있습니까?”

    화가 난 듯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요한을 향해 억울하다는 듯 툭 하고 입을 내민 한태화는 자신을 지나쳐 곧장 차수혁에게 가려 하는 요한의 어깨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으며 이마를 묻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요한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나부터 혼내요? 쟤가 먼저 저를 막 비웃고 협박했단 말이에요.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어깨를 끌어안기는 바람에 차수혁에게 다가가지 못한 요한은 대신 몸을 돌려 장갑 낀 손으로 한태화의 어깨를 세게 내리쳤다.

    “당장 힘부터 풀어요! 저쪽이 말로 협박해 왔으면, 한태화씨도 말로 해야죠. 왜 대뜸 힘부터 씁니까! 그 입은 장식이에요?”

    “…무서워서 그랬단-.”

    “되도 않는 개소리는 그만하고 힘 풀라고.”

    “…….”

    요한이 계속해서 차수혁의 편만 들자, 진짜로 삐친 한태화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팩- 하니 돌렸다. 그 어린애 같은 모습에 크게 한숨을 내쉰 요한은 차수혁 쪽을 걱정스럽게 힐끔거리다가 다시금 한태화를 불렀다.

    “한태화, 말 안 듣지?”

    “…칫.”

    ‘치잇? 허. 스물다섯 먹은 남자는 입으로 그런 소리 내는 거 아니야.’ 라고 나무라는 요한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던 한태화는 점점 굳어가는 서요한의 표정에 하는 수없이 힘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휘청하고 몸이 쓰러질 뻔했던 차수혁이 간신히 몸을 세우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32

    그렇게 힘겹게 일어나다 비틀거리는 차수혁에게로 다가간 서요한이 얼른 그의 몸을 부축했다. 그 상냥한 손길에 자연스럽게 어깨로 몸을 기댄 차수혁은 무거운 얼굴로 서요한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런 차수혁이 걱정됐는지 여러 차례 괜찮냐고 물어오는 요한을 바라보며 수혁은 자신을 부축해 주고 있는 어깨를 감싸며 올려뒀던 손을 움찔거렸다. 그러다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에 슬쩍 한태화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

    얼굴에 아무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한태화가 사람의 속을 꿰뚫을 듯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빛을 한 채 차수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나운 표정과는 달리 놀라울 만큼 그 기운은 잠잠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 와중에도 서요한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눈을 피해 차수혁을 노려보던 한태화는 요한의 어깨 위로 둘린 손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한.”

    “너 진짜 괜찮, 예?”

    연신 차수혁에게 괜찮냐고 묻던 서요한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양 볼을 부풀린 채 멀뚱히 서 있던 한태화가 떼를 쓰는 아이처럼 발을 콩콩 굴렀다.

    “요한은 왜 자꾸 걔 편만 들어요? 내 가이든데!”

    “…….”

    그러나 말이 좋아 콩콩이지, 별로 힘도 안 들어간 것 같은 한태화의 발구름에도 테라스의 나무 바닥이 부서지며 깨진 조각이 튀어 올랐다. 서요한은 질린 얼굴과 짜증난 얼굴 사이에 놓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한태화가 다시금 발을 구르려 무릎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 차수혁를 바로 세워주며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스톱! 멈춰! 그거 하지 마요! 지금 부숴 먹은 것도 변상해야 되게 생겼으니까 그만하라고! 생돈 나가잖아!”

    다급하게 한태화에게 다가온 요한이 한태화의 허리를 잡아챘다. 그에 얼른 팔을 벌려 어깨를 끌어안은 한태화가 저보다 작은 서요한의 몸을 품에 안고, 턱으로 머리를 꾹 누른 채 차수혁을 노려보았다. 사람 하나 정도는 쉽게 죽일 듯 새파랗게 서슬이 선 눈빛을 한 채 한태화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요한을 타일렀다.

    “돈은 썩어 넘치게 많다니까요.”

    “안 됩니다! 그거 다 나 준다면서요? 그럼 이제 내 건데 함부로 쓰지 마요.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면 나 진짜 화낼 겁니다!”

    세게 끌어안겨 한태화의 목 부근에 얼굴을 묻게 된 서요한이 답답한지 자꾸 고개를 들려 했다. 그러면서도 작게 ‘내 사회적 체면 좀 세워 달라니까? 놔 봐요.’ 라고 투덜대며 주변의 눈치를 봤다. 그 순간만큼은 진짜 웃음을 지어 보이던 한태화가 금세 표정을 가라앉히며 요한의 정수리를 턱으로 꾹 찍어 눌러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새파랗게 독기가 떠오른 눈으로 한쪽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건 전속 계약 맺으면 준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아직 요한 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 합니까? 임시 가이드 계약이면 이미 반쯤은 내 거죠! 이렇게 나올-.”

    “그래요, 요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요. 그냥 나랑은 전속 계약만 해주세요.”

    그 말에 서요한이 말을 멈추더니 좀 놔보라는 듯 등을 툭툭 쳤다. 그러나 요한의 옆머리에 뺨을 댄 채 애교스럽게 비비던 한태화는 굳은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차수혁을 보며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다만 그 웃음은 손이라도 잘못 댔다가는 물려 버릴 듯 아주 사나운 웃음이었다.

    ***

    결국 그 소동이 있고 난 뒤, 카페테라스의 주인이 달려와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라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리고 수리비 영수증을 청구할 테니 반드시 변상하라는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광땡-….”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반가운 얼굴로 돌아보던 강선배가 뒤따라 들어온 한태화의 얼굴을 보더니 말을 멈추며 표정을 구겼다. 얼른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며 작게 욕설을 내뱉는 선배의 마음을 나 역시 십분 이해했다.

    내 자리로 가 앉으며 옆을 흘끔 보자 자연스럽게 보조 의자를 끌고 온 한태화가 옆으로 찰싹 붙어 앉는 모습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태화씨.”

    “네, 요한.”

    “사무실로 출근 안 합니까?”

    “요한이 있는 곳이 내 사무실이죠. 섭섭하게 왜 그래요.”

    오전 동안 작성했던 경위서를 모니터 창에 띄우며 한태화를 돌아보자 놈이 생글생글 처웃었다. 이쯤 되니 저 얼굴에도 내성이 생기고, 놈의 억지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기관장님은 한태화씨를 왜 불렀대요?”

    “…음… 귀찮은 일 때문이죠. 맨날 나한테만 귀찮은 일을 떠넘겨요. 진짜 너무 짜증 나요, 요한.”

    옆에 앉아 있던 놈이 허리를 굽혀 어깨에 얼굴을 비비더니 작게 칭얼거렸다. 그러자 그보다 더 짜증 난 사무실 팀원들의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여러모로 참 가시방석이다.

    “그… 무슨 일인데요? 말하기 곤란한 거면 안 해도 되긴 하는데-.”

    “샐러맨더 놓쳤으니까 나보고 다시 잡아오래요. 말만 들어도 귀찮죠?”

    ‘푼돈 받고 부려 먹혀 주니까 내가 진짜 호군 줄 아나 봐요.’ 속상하다는 듯 칭얼대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푼돈이라니. 이놈 연봉이 기관 내 연봉 중 Top5 안에 든다는 데 내 한 달치 월급을 걸 수 있는데.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어 허탈하게 웃다가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그 클럽은요? 완전히 다 무너졌던데, 어쩌기로 했답니까?”

    폭주한 힘에 의해 무너지던 클럽 건물을 떠올리며 묻자 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기관 쪽에서 알아서 처리한 후에 구상금 청구한대요. 귀찮아서 그냥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

    내 돈. 또 내 생돈이 나가는구나.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근데요, 요한.”

    “왜요.”

    “이거 뭐예요? 그 새끼랑 모텔도 갔어요?”

    한태화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모니터 화면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경위서가 띄워져 있던 화면엔 차수혁과 작전을 수행하면서 있었던 일의 진행 과정이 적혀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내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온몸의 땀구멍이 열리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 방은 서로 따로 잡았다고 써 있잖습니까.”

    “…….”

    “한태화씨?”

    불러도 답이 없는 모습에 불안감이 피어오를 때쯤, 별안간 모니터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팟- 하고 화면이 까매지며 전원이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이성을 잃고 옆에 있던 한태화의 멱살을 잡았다.

    “야 이 또라이야! 너 미쳤어?!”

    “헉!”

    “…선배가 미친 거 아닐까요….”

    놀라는 강선배와 작게 중얼거리는 상원이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멱살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내려다보자 한태화가 입 꼬리를 내리며 슬픈 척을 했다.

    “너무해요…. 나는 모텔 간 것도 요한이 처음이었는데… 요한은 막 아무나하고 다니고, 나한테 미쳤다고나 하고, 멱살까지 잡네요….”

    “…….”

    아… 이 새끼가 왜 자꾸 진화를 하지? 어? 너무 당황스러우니 손에서 힘이 풀렸다.

    멱살을 놓치며 슬쩍 뒤로 물러나자 이번엔 한태화 쪽에서 팔을 뻗어왔다. 그대로 내 허리를 휘감은 팔이 세게 잡아끌자 놈의 얼굴이 배 부근에 닿으며 불쌍한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 때릴 거예요?”

    “…내가 때리면 맞아는 줍니까?”

    “아뇨. 아픈 걸 싫어해서요.”

    “…하….”

    내 인생에 어쩌다 저런 게 걸려선. 하, 씨발.

    “근데 또 딴 새끼랑 모텔 같은데 갈 거예요? 응? 빨리 안 그런다고 대답해요.”

    한태화가 배 부근에 턱을 대고 허리를 잡아 흔들었다. 그 탓에 날렵한 턱에 배가 쿡쿡하고 찔려 불편했다.

    “…놔요.”

    “네? 대답해 주면 놓을게요. 빨리 다신 안 간다고 해요, 요한.”

    “…놓으라고 했습니다.”

    “응? 왜 자꾸 대답을 안 해요? 또 가려구요? 네?”

    “야, 한태화.”

    반말로 놈의 이름을 부르자 흔들리던 몸이 멈췄다. 사무실 팀원들도 놀란 얼굴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들 눈빛이 저러다 한 대 얻어터지지- 하는 눈빛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에서 갑을관계는 무척 명확한 편이다.

    “너는 내 일 존중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응? 너 나 지원팀이라고 무시하냐? 어?”

    “아야- 아, 아파요, 요한, 내가 왜 요한을 무시해요-.”

    콧대가 높은 코끝을 검지와 중지로 말아 쥐고 흔들자 잘난 얼굴이 요상한 각도로 흔들렸다. 그 모습에 사무실 안은 고요해졌고, 뭐가 이렇게 시끄럽냐고 문을 열고 나왔던 팀장님은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얼른 다시 문을 닫고 팀장실로 들어가버렸다. 그만큼 해괴한 광경이었다.

    “근데 이딴 짓을 해? 내가 저걸 하루 종일 얼마나 고심해서 썼는 줄 알아? 너는 이거 날아가면 가만 안 둔다, 진짜.”

    “아야- 잘못했어요, 요한. 너무 화가 나서- 아파요오-.”

    모두가 못 본 척 외면하는 분위기 속에서 한태화가 애절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근데 이게… 생각보다 재밌다. 재미 들리면 안 되는데.

    ***

    그 후 며칠 동안이나 기관이 들썩거렸다. 미친 한태화가 멋대로 지원 3팀으로 보내 달라는 부서 이동 신청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그 소문은 빠르게 퍼져 그의 부서 이동 원인이 임시 가이드 때문이고, 그 임시 가이드가 그 핑계로 승진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루머까지 퍼졌다. 그에 기관장님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휴가를 내고 외국으로 튀었다는 소문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핫한 이슈로 떠올랐다.

    덕분에 서데렐라는 유행 지난 별명이 됐다. 이제는 다들 뒤에서 ‘서달기’라고 수군거렸다. 누가 지어대는 건지 좆같이도 별명을 잘 짓는다. 이게 남의 일이라면 나도 같이 실실대며 농담 따먹기나 했을 텐데, 그 야망 넘치는 임시 가이드가 나라는 게 문제다. 덕분에 팀장님은 나만 보면 욕을 해대시고, 나는… 면목이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듣고만 있는 중이었다.

    하, 씨발.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오히려 차분해진다는 사실을 이번 일을 겪고 깨달았다.

    #33

    “인사팀에서 자꾸 부서 이동 신청서를 반려하라면서 처리를 안 해줘요. 짜증 나.”

    나는 네가 더 짜증 나요. 이 또라이야.

    “…….”

    “대신 요한이 부서 이동 신청을 하면 바로 청산팀으로 바꿔 준대요.”

    “…….”

    “청산팀으로 올 생각은 없어요, 요한?”

    응, 없어.

    한태화는 오늘도 내 곁에 찰싹 붙어 내 책상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괸 채 사람을 괴롭혀댔다. 근데…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매번 뒤나 졸졸 �i아다니던 게 어느 순간부터 바로 곁에 서선 친근하게 얼굴을 붙여온다. 그걸 깨달은 순간 어쩐지 위기감이 들었다.

    “강선배, 어제 관리팀으로 보낸 추가 구입 자재 목록, 인가 떴어요?”

    “…어? 아, 아니. 아직 확인 중이라고만 뜨는데.”

    “다행이다. 목록 몇 개 누락됐던데 전화해서 확인 절차 좀 중지시켜 달라고 해야겠어요.”

    “…그럼 그 전화 내가 할게. 그러니까 광땡아, 나한테 말 좀 그만 걸어라.”

    “…….”

    내가 말을 건넬 때마다 한태화의 시선도 따라붙으니 죽상을 하고 있던 강선배가 딱 잘라 말했다. 상원이와 최선배에 이어 강선배까지 말을 걸지 말라고 하니 더 이상 얘기할 사람이 없다. 아, 이런 게 직장 내 왕따라는 건가? 이거 확 인사 위원회에 찔러버려?

    눈에 힘을 준 채 팀원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다 옆에서 샐샐 웃고 있는 한태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이 일의 가장 큰 문제이자 원인은 바로 너지.

    “한태화씨.”

    “네, 요한.”

    “안 갑니까? 나 지금 좀 바쁜데.”

    그 말에 바로 삐죽하게 튀어나오는 입이 불만을 표출한다. 근데 마음 같아선 내가 입을 내밀고 싶었다. 얘가 사람을 말려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이러면 안 되는 거다. 아니면 그걸 노리나? 말라 죽기 직전에 항복 받아내서 청산팀으로 끌고 가려고?

    “요한은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어요?”

    예, 싫어요. 근데 그렇게 말하면 또 들러붙어 우는 소리나 늘어놓겠지. 그 꼴을 본 동료들의 표정은 썩어들어갈 거고. 이제껏 몇 번이나 그걸 반복해 왔다.

    “싫은 건 아닌데… 일 좀 합시다. 한태화씨도 일해야죠. 기관장님이 샐러맨더 잡아오라고 했다면서요. 근데 언제까지 이렇게 놀기만 할 겁니까?”

    이 개떡같이 일하는 월급 루팡 새끼야. 차마 붙이지 못한 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태화는 길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은근히 얼굴을 붙여왔다. 어허, 이놈이 어디서 또 수작을 부리지?

    “숨는 덴 이골이 난 것들이라 맘먹고 숨으면 찾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그런 귀찮은 일은 정보원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요. 난 그냥 어디 있는지 알아낸 후에 움직이면 돼요. 근데 요한, 혹시 나 걱정해 준 거예요?”

    “…내 말의 어느 부분에서 걱정이 느껴졌습니까? 이게 지금 걱정 같아요?”

    “요한은 맨날 내 걱정하잖아요. 메시지 보낼 때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 집중해라, 그렇게 보내면서. …부끄러워서 그래요?”

    미친놈 아냐 이거? 그게 진짜 걱정해서 보낸 거겠어? 수백 통씩 오는 메시지를 차단하려고 보낸 거지? 아니, 이 붕어 대가리로 작전 수행은 어떻게 하지?

    뜨악한 얼굴로 한태화를 보고 있자 그 뒤로 상원이가 웩- 하고 토하는 척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눈에 거슬려 눈살을 찌푸리는데,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한태화가 사르르 웃으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진짜 토하게 해줘요?”

    “…아뇨. 아침에 먹은 게 소화가 잘 안 돼서….”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라고 투덜댄 상원이는 한태화의 시선을 피해 모니터로 얼굴을 처박는 척하며 컴퓨터 뒤로 숨었다. 그러고 보면 저놈도 간이 많이 커졌다. 처음엔 한태화의 그림자만 봐도 덜덜 떨더니 몇 번 보고 얼굴 좀 익혔다고 그새 편하게 군다. 저러다 크게 한번 데일 텐데. 작게 혀를 차다 입안이 까끌해져 담배 생각이 났다.

    “저 좀 나갔다 올게요.”

    책상 서랍으로 빼뒀던 담배와 라이터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태화도 자연스레 따라 일어났다. 그걸 마뜩잖게 보다 고개를 돌리니 반색하고 있던 최선배가 빨리 꺼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

    “요한, 가요.”

    놈에게 팔이 잡혀 끌려 나가는 동안 문득 삶이 참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태화를 뒤에 달고 흡연구역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데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라이터를 채가며 손가락 위로 작게 불을 만들어냈다. 떨떠름하게 불을 붙이며 고개를 돌리자 한태화가 칭찬해 달라는 의미로 부담스럽게 머리를 들이민다. 지가 좋아서 해놓고 나한테 왜?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해달라는대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좋아 죽겠다는 듯 눈가가 휘어졌다. 다른 것도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참 좋을 텐데. 이건 꼭 저 좋을 때만 말을 잘 듣는다.

    “한태화씨, 이제 제발 팀으로 복귀 좀 하면 안 되겠습니까? 다들 불편해 하잖아요.”

    “누가 불편하대요? 윤상원씨? 아니면 강세현씨나 최인우씨? 셋 중 누군데요?”

    …셋 다요, 라고 대답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순간 좀 혹했다. 원래 직장 내 왕따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다. 안 그랬던 사람이 독한 마음을 먹게 만드니까.

    “저요. 제가 불편합니다.”

    한태화를 피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시선만 돌려 눈을 맞추자 깜박깜박 눈을 깜박이던 놈이 슬쩍 눈을 굴려 시선을 피한다. 잔소리 들을 타이밍인 걸 눈치채고 피하는 게 분명했다. 붕어 대가리답지 않게 눈치 하난 정말 기가 막히니까.

    “그리고 부서 이동 신청한 거 반려 좀 합시다. 나 진짜 그거 때문에 쪽팔려 죽겠어요. 다들 뒤에서 뭐라고 수군대는 줄 압니까?”

    “누가 뭐라고 해요? 누가 그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사는 데 간 정도는 없어도 지장 없나?”

    지장이 없겠냐? 매번 이 새끼랑 대화하다 보면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 든다. 그게 이제는 무척 익숙한 느낌이란 사실도 짜증나고.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그리고 한태화씨가 지원팀에 온들 대체 무슨 일을 할 겁니까?”

    네가 보조 가이드를 할 거냐, 서류 작업을 할 거냐. 아니면 기관 부서별 물류 관리를 할 거냐. 아니, 할 수 있다고 쳐도, S등급 에스퍼 데려다 그런 거 시키면 기관에서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러니까 요한이 청산팀으로 오면 되잖아요.”

    내 말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인 한태화가 신발 앞코로 땅을 팠다. 애도 아니고, 성인 남자가 저런 꼴을 하고 있으면 화가 나야 하는데… 이제는 그저 한숨만 나왔다.

    “내가 거기 가면 뭘 할 수 있는데요? 팀원들 보조 가이드라도 하면 됩니까?”

    “요한이 왜 딴 새끼들을 가이딩 해요? 누구 해주려고요? 설마 차수혁?”

    거기서 수혁이 이름은 왜 나와? 안 그래도 미안해 죽겠는 애 이름이?

    마음이 정리되면 술이나 한잔하자는 연락에 그저 짧게 예, 하나만 써서 보냈던 수혁이는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한 번씩 기분이 가라앉는데, 한태화는 또 반쯤 돈 눈으로 입매나 굳히고 있다. 아, 귀찮아. 한숨을 대신한 긴 담배 연기가 허공을 뿌옇게 물들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청산팀으로 가 봐야 할 일이 없다고요. 그런 거 외엔.”

    “요한은 내 가이드니까 나만 가이딩 해주면 돼요. 청산팀에서 요한이 할 일은 그거 하난데.”

    왜 같은 한국인인데 말이 안 통하는 기분이지? 저 새끼 한국말 못 하나 봐….

    “지금 그게 싫다는 말하고 있는 거잖습니까. 내가 일 못하는 등신도 아니고, 왜 거기서 당신 하나만 바라보면서 능력을 썩히고 있어야 합니까? 나는 지금 일이 좋아요. 남들에 비해 충분히 잘하는 편이라고도 생각하고. 편한 데 가서 놀고먹으면서 월급 축낼 생각 없습니다.”

    “…….”

    그 단호한 말에 고개를 푹 숙여 보인 한태화는 상심한 모습이었지만,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 단단히 표정을 굳혔다. 그때 놈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신이래….”

    “…….”

    아 나, 씨발. 상심한 게 아니라 부끄러워하던 거였어? 이 상황에? 왜? 대체 뭐가 문제지? 대가리 속이 어떻게 돼 있길래? 어?

    전생에 내가 공룡을 멸종시킨 존나 큰 운석이 아니었을까. 그 정도가 아니고서야 이런 놈한테 걸려 이 고생을 할 리가 없다. 답답한 마음에 뻑뻑 담배 연기를 피워대자 뺨을 붉힌 채 부끄러워하고 있던 한태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요한… 오늘은 그만 팀으로 복귀할 테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요?”

    죽어도 부서 이동 신청 반려한다고는 안 하지. 쯧.

    “…무슨 부탁이요.”

    “집으로 초대할 테니까, 와 주세요!”

    하… 또 그놈의 집이냐.

    요사이 한태화는 계속해서 자기네 집으로 놀러 오라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는 이유야 뻔했다. 가이딩을 빙자한 그거 때문이겠지. 동정 딱지를 간신히 뗀 녀석이라 그런지 요사이 머릿속에 든 거라곤 그런 거밖에 없는 듯했다. 한창때의 청소년도 아닌 놈이. 으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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