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49)

“…뭐 하는 겁니까? 가이딩 안 받을 거예요?”

“바들고에요.”

이를 다문 채 입술만 움직여 답을 하느라 발음이 형편없었다. 그러나 그 이빨 빠진 애 같은 발음과는 달리 금세 몸을 일으킨 한태화는 어른스러운 손놀림으로 운전석 시트를 휙 하고 젖혀 사람을 눕게 만들었다.

어허. 요놈 봐라?

“키스 말고요, 지난번에 나랑 약속했던 그거 하게 해줘요.”

“…내가 무슨 약속을 했습니까?”

“좆은 다음에 빨게 해준다면서요. 그때 나랑 그렇게 약속했잖아요.”

“…….”

“빨고 싶어요.”

‘요한 좆이요,’ 라고 뒷말을 덧붙이며 볼을 곱게 물들인 한태화는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부끄러우면 하자고 하질 말던가! 이게 어디서 자꾸 가증을 떨지? 그리고 우리 엘리제가 어떤 아이인데… 여기서 뭘 하자고?

“…그래요, 내가 그런 말을 했었죠, 참.”

“네, 그랬어요.”

폭주 중이라 이성도 없었을 놈이 그런 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분명 그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그리고 그걸 굳이 우리 리제 안에서 빨… 아니, 하겠다고 덤비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놈 대가리엔 뭐가 들은 걸까. 진짜 꽃만 처들었나. 답답함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근데… 내가 가이딩률이 낮잖아요? 그래서 어딜 가이딩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일단 입부터 맞춰서 그 부분을 좀 확인하고 본 게임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동의해요?”

“…….”

대놓고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내오는 한태화의 모습에 일부러 길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술을 핥았다. 그러자 순간 놈의 눈빛이 가라앉더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전히 생긴 거답지 않게 순진했다. 은근 귀엽다니까.

“뭐, 그 김에 한태화씨랑 입도 좀 맞춰보고 싶고. …싫어요?”

“…아니요, 좋아요. 너무.”

“그럼 입 좀 벌려보라니까요.”

슬슬 어르고 달래며 한태화의 뒷머리를 잡아 끌어내렸다. 그러자 순순히 딸려오던 한태화가 떨려 죽겠다는 듯 속눈썹을 떨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귀여운 모습에 작게 웃음 짓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곧바로 혀끝을 마주 댄 채 살살 움직이며 휘감자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간신히 웃음을 참고 조금씩 움직이는 범위를 넓혀 뾰족하게 세운 혀로 입천장을 살살 긁었다. 그러자 팔 아래로 한태화의 어깨가 움찔움찔 튀어 올랐다. 녀석은 금세 작은 신음과 함께 숨을 할딱였다. 다음엔 숨 쉬는 법도 알려줘야겠네. 손이 많이 가는 놈이야.

“읏, 흐!”

내 혀의 움직임을 외우듯 가만히 키스를 받던 한태화의 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듯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때만을 노리고 있던 나는 얼른 손톱만 하게 어긋난 부분을 가이딩 해버린 후, 한태화를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밀려난 한태화가 “요한?” 하고 멍청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차에서 내려 기관 건물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요한?! 요한, 자, 잠깐만요! 약속이랑 다르잖아요!”

“뭐가요? 가이딩은 무사히, 완벽하게 다 끝냈는데. 가이딩 해달라면서요?”

“요한!”

나를 따라 다급하게 차에서 내린 한태화가 금세 따라붙어 앞을 막아섰다. 아깝다. 세 걸음만 더 가면 유리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너무해요! 빨게 해준다고 했잖아요!”

빨… 그 말에 얼른 주변을 살폈다. 혹 누가 들었을까 봐 겁이 다 났다. 이 미친 또라이가, 내 체면은 생각도 안 하고! 성질 같아선 빽하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화를 누르며 목소리를 낮췄다.

“왜? 아주 방송실로 가서 마이크에 대고 얘기하지? 서요한은 빨게 해준다던 약속을 지키라고?”

“그-.”

“그러기만 해봐. 임시 가이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확 퇴사해 버릴 테니까. 네가 그따위로 내 체면 따윈 생각 안 하고 행동하면, 나도 네 가이딩 따윈 안 해. 그럴 거면 딴 사람을 알아봐야 할 겁니다. 내 말, 알아듣겠습니까, 한태화씨?”

“…….”

억울한 듯 입술이 툭 나온 얼굴이 시선을 맞춰왔다. 어딜, 싶어 표정을 풀지 않자 찔끔한 표정을 지어 보인 얼굴이 푹하고 숙여졌다.

“대답.”

“…예,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화내지 마요, 요한. 잘못했어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한태화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에스퍼를 들인 건지 애를 하나 키우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데…. 답답했지만, 그래도 반성하고 있는 놈의 얼굴에 화를 풀며 목소리를 누그러트렸다.

“그리고… 다신 이렇게 쓸데없이 능력 남발하다 와서 아무 데서나 가이딩 해달라고 하지 마요. 한태화씨가 남의 눈치 안 보고 살던 거는 알겠는데, 나는 못 그래요. …대신 집에서 해줄게요,”

“…집.”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불만 서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한태화가 조용한 혼잣말로 연신 집, 집, 거렸다. 난감하게 바라보다 유리문을 열고 먼저 들어와 문을 잡고 기다리니 놈이 기가 팍 죽은 얼굴로 슬금슬금 걸어 들어왔다. 처음 사무실에 쳐들어와 거칠 것 없이 굴던 싸가지는 어디 갔나 싶은 모습이었다. 가끔씩 송곳처럼 찌르던 뾰족했던 말투도 사라졌고.

“그럼 한태화씨, 오늘 하루도 일 열심히 하십시오.”

“요한?”

한태화의 부름에도 팀장님이 걱정돼서 얼른 걸음을 옮기려는데 또다시 팔이 잡혔다. 짜증을 내며 뒤를 돌아보자 그새 기운을 회복한 놈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한쪽 고개를 기울인 채 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디 가요?”

“사무실요. 빨리 출근해야죠.”

“아니, 요한은 내 가이드니까 나랑 같이 있어야죠. 왜 혼자 가요?”

아아. 무슨 말인가 했네. 진짜 어지간히 가이드 계약 쪽으론 관심을 안 두고 살았구나.

“한태화씨, 가이드와 에스퍼 간에 부서 이동이 발생하는 건 전속 가이드 계약을 맺었을 때뿐입니다. 임시 가이드 계약의 경우 부서 이동까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얼른 본인 팀으로 출근하십시오.”

“네? 그럼 따로 출근한다고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한태화는 끈질겼다. 나는 팀장님 때문에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어디 있긴요, 기관 내부 규정서를 찾아보면 잘 나와 있죠. 나는 늦을 것 같으니까 그건 혼자 알아서 찾아보시고, 이제 그만 손 좀-.”

“그럼 안 되죠.”

이게 진짜! 바쁘다니까!

“대체 뭐가 안 된다고 이럽니까, 자꾸!”

“내가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날 혼자 둬요? 진짜 방송실에라도 가면 어쩌려고요.”

뭐? …와, 나 지금 소름 돋았어. 놀란 눈으로 한태화를 바라보다 천천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팔을 잡고 있는 한태화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아무 생각이 없다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아, 이 새끼, 없던 싸가지가 생긴 게 아니라… 진화를 한 거였구나. 이건 뭐 말투만 부드럽지 이전에 해오던 협박보다도 무서웠다. 혼자 두면 반드시 사고를 치고야 말겠다는 말보다 무서운 말을 내뱉은 놈은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얼굴로 연신 생글거렸다.

신이 날 버렸다는 사실을 잊고 잠시 나댔던 것을 반성하며 원망스레 건물의 천장을 바라보다 하는 수 없이 놈을 뒤에 달고 사무실로 이동했다. 말을 잘 듣기는 개뿔. 어젠 정말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거다.

미쳤지, 씨발. 하-.

***

당장 기관장님을 찾아가 따지겠다고 노발대발하시던 팀장님은 말리는 팀원들을 뒤로하고 당당히 기관장실을 찾았다. 그리곤 아주 정중한 태도로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기관장실을 나왔다.

그래, 믿은 내가 바보고, 걱정한 내가 병신이지.

그런 마음으로 뚱하니 기관장 실에서 나온 팀장님을 바라보는데 머쓱한 얼굴로 다가온 팀장님께서 한태화에게 기관장실을 가리켜 보였다.

“기관장님이 한팀장 좀 불러달라더군요. 들어가 보세요.”

“내가 왜요? 볼일 있는 사람이 오라고 하세요.”

“…….”

“건방지게 누굴 오라 가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가느스름해진 눈으로 웃으며 대답한 한태화가 내 어깨에 뺨을 부비며 팀장님 몰래 목 뒤로 이를 세웠다. 그에 움찔한 내가 시선을 내리자 잔망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인 놈이 귓가에서 작게 속살거렸다.

“약속은 언제 지킬 거예요?”

저 망할 놈의 약속. 속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이 삼켜졌다. 이거 이러다 버릇 되겠어.

“…한태화씨, 기관장님이 부르신다잖아요. 안 가봅니까?”

“그런 건 원래 아쉬운 사람이 찾아오는 거예요. 가끔 보면 요한은 너무 착한 것 같다니까요.”

그 말에 나는 말을 잃었고, 팀장님은 턱이 빠졌다. 그래, 살면서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착하다니. 그걸 수긍할 만큼 내 양심은 털 나지 않았다.

“태화야.”

“읏, 요한, 치사하게!”

“갔다 와. 중간에서 팀장님이 곤란해지시잖아.”

“……싫은데.”

입을 삐죽이던 한태화가 못 들은 척 다시 내 어깨로 얼굴을 박더니 ‘팀장님이에요, 나예요?’라는 새로운 헛소릴 지껄였다. 여전히 성인이 하기엔 적절치 않은 짓들을 위화감 없이 소화해 내는 한태화를 보며 작게 눈살을 찌푸리다 결 좋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말 잘 듣는다며.”

“…요한, 진짜 치사한 거 알아요? 꼭 이럴 때만 반말하고, 이름 불러주고.”

“치사한데 착해서 그래. 발로 까버릴 짓이나 하는 놈을 착하게 달래주잖아. 그러니까 진짜 까버리기 전에 얼른 가보라고. 기관장님 기다리시겠다.”

“…대신 나 올 때까지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30

“그래.”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미련이 남는 듯 제 뺨을 몇 번 더 문지르던 한태화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이 딱 주사 맞으러 병원엘 가는 애 같은 모양새라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런 내 곁으로 다가온 팀장님이 넋이 빠진 목소리로 한탄했다.

“미쳤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내 잘못인가? 응? 그때 공룸에서 온 가이딩 지원 요청서를 개무시했어야 하는데.”

아직도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신 팀장님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탄식했다. 그런 팀장님을 웃으며 바라보다 툭 하고 팔을 쳐 사무실 쪽을 가리켜 보인 후 걸음을 옮겼다. 설렁설렁 걷기 시작하자 그 뒤를 팀장님이 쫄래쫄래 따라오는 것을 보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래서 기관장님께선 뭐래요?”

“…뭐라긴 뭘 뭐래. 퇴직해서 치킨집 차리고 싶냐고 물으시지.”

“그거 협박 아니에요?”

“협박이지. 근데 너도 알잖아? 나 물 능력자라 불 싫어하는 거. 불 앞에서 닭 튀길 자신이 없어서 그냥 입 다물고 나왔다.”

쯧쯧쯧. 그럼 그렇지. 혀를 차며 고개를 젓자 뒤따라오던 팀장님이 걱정스레 물으셨다.

“근데 한태화 놈 기다리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이렇게 가도 돼?”

“예, 돼요. 서서 기다리려니 다리가 너무 아파서 사무실로 돌아왔다고 하면 별말 안 할걸요? 걱정을 하면 걱정을 했지.”

그 순간 비난의 눈빛이 날아들며 팀장님이 경멸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뭐요, 그렇게 보시면 어쩔 건데요?

“순간 한태화가 불쌍했다. 어쩌다 너 같은 놈이랑….”

“걔 팔자가 더러운가 보죠. 그래서 전 기회도 많이 줬어요. 그러지 말라고.”

가볍게 대꾸하자, ‘그래 똑같은 놈들끼리 잘 만났네. 괜히 걱정했어,’ 라며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저 멀리 지원 3팀의 사무실이 보일 때쯤 팀장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임시만 하다 끝낼 거지? 응?”

“…….”

글쎄요.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한 채 멀리 시선을 던졌다. 그건 나도 궁금했다. 내가 어디까지 가고 싶은 것인지가. 뭐, 솔직히 집이랑 차도 탐이 좀 났고.

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

기관장실로 불려갔던 한태화는 일이 제법 길어지는지 점심시간이 다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중간에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아요ㅠㅠ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 계세요, 요한ㅠㅠㅠㅠ’ 이라는 메시지를 받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무음으로 해놓은 휴대폰을 꺼내 살폈지만 딱히 더 온 메시지도 없었다.

뭐지? 이럴 놈이 아닌데.

그런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다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겉옷을 집어 들자, 다른 팀원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어디 가?”

“점심 먹고 오려고요.”

“우리랑 안 가고?”

최선배가 의아하게 물어왔지만 휴대폰을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서며 대충 대꾸했다.

“약속 있어요.”

“누구? 한태화?”

“제가 밥 먹을 사람이 걔밖에 없겠어요?”

내 뚱한 대답에 다들 궁금하다는 얼굴을 해 보이는 것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와 로비로 나가자 저 멀리 커다란 덩치로 서성이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뭐 마려운 강아지 같아 웃음이 났다.

“수혁아.”

“요한형!”

꼬리를 흔들 기세로 다가오는 차수혁을 보며 결국 웃음을 터트리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지냈지?”

“형은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한태화씨랑 진짜 가이드 계약-.”

“수혁아.”

뭐가 그렇게 급한지 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수혁이의 말을 자르며 이름을 부르자 금세 침착해진 차수혁이 시선을 가라앉히며 얌전해졌다.

“…예, 형.”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프다.”

내 말에 기운 빠진 미소를 지어 보이던 수혁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순한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선.

***

간단히 점심을 먹고 다시 기관으로 돌아와 2층 테라스에 마련된 야외 카페로 가 자리를 잡고 앉자 엄청난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있었나 싶을 만큼 수혁이는 궁금한 게 많았다.

“한태화씨랑은 어떻게 된 거예요? 임시 가이드 발령서는요? 기관장님은 찾아가 봤어요? 그거, 가이드 쪽에서 거부권 행사해서 철회된 사례도 있던데, 그건 찾아봤어요? 차라리 내가 기관장님을 한번-.”

“수혁아,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얘기는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요?”

못마땅한 표정의 수혁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며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뒤적거렸다. 근데 진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너, 경위서 작성은 했어? 그거 서로 말 다르면 이리저리 부서마다 불려 다니면서 개고생해야 하는 건 알지?”

“…….”

“시말서는? 너도 그거 쓰라디? 나는 쓰라던데.”

“…쓰라고 하더라구요. 현장 지원팀 부르고 빠졌어야 할 일에 나섰다고. 그러게 제가 그만두고 나오자고 했잖아요.”

수혁이의 힐난에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래, 내가 잠깐 실적에 눈이 돌긴 했었지.

“한태화가 그렇게 나올 줄 누가 알았나.”

나라고 한태화가 거기서 폭주를 일으킬 줄 알았겠냐고. 억울한 마음에 불퉁하게 대꾸를 하자 차수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친 표정을 지었다. 사람 미안해지게.

“그래서 한태화씨랑은 어쩌기로 한 건데요.”

그 물음에 잠시 말을 멈추고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쭉 빨았다. 여러모로 차수혁에겐 미안할 일들뿐이라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수혁아.”

“네, 형.”

“미안한데, 나 한태화씨 임시 가이드 하기로 했다.”

“…예?”

놀란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외면하며 테이블 위로 놓인 티슈를 손으로 잘게 찢었다. 음… 역시 정말 많이 미안하다. 미안하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술술 나갔다.

“차를 준대.”

“차… 요?”

“응. 차. 그것도 외제차로 여러 대.”

“…….”

저 황당함으로 아연해진 표정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미안했다. 그러나 차뿐만이 아니다.

“집도 준대. 돈도 주고. 가만히 있어도 직급도 올려준다네? 그래서 일단 임시 가이드를 해보기로 했어. 미안하다.”

“…진짜 그 이유가 다예요? 형이 한태화씨의 가이드가 되는 이유?”

얘가… 사람 물욕을 우습게보네? 고작 그런 이유냐는 의미가 포함된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두 개쯤 접어 보였다.

“다는 아닌데… 한 80%쯤은 되지 않겠어?”

“형.”

“응?”

“저도 돈 많아요.”

…뭐래. 이 갑작스러운 돈 자랑은 뭔데?

“어? …그래, 좋겠네. 부럽다고 해줘?”

그러나 차수혁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차는 아직 한 대뿐이긴 한데, 더 있을 필요성을 못 느껴서 안 산 것뿐이지 사려면 더 살 수 있어요. 그것도 외제차로 여러 대.”

뭐야, 얘 진짜 왜 이래?

“저기, 수혁아?”

“그리고 또 뭐랬죠? 집? 집은 좀 여러 채네요. 집안사람들이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서. 저도 그거 다 줄 수 있어요.”

“…….”

의도를 알아채고 가만히 입을 다물자 수혁이 점차 얼굴을 굳히며 진지하게 말했다.

“직급? 물론 최대 후원사인 태화그룹 만큼은 아니더라도 돈 풀면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어요. 직급도 올려드릴 수 있어요. 그럼 이제 저랑 가이드 계약 맺으실래요? 성격 파탄자 소리 듣는 한태화보다 같은 조건이라면 제가 훨씬 낫잖아요.”

“야… 너, 왜 그래.”

좀 말려볼 요량으로 손을 뻗는데, 그 손을 가만히 잡아 내린 손이 장갑 낀 손등 위를 지그시 누르며 힘을 줬다. 그에 당황하여 시선을 들자 차수혁이 시선을 맞춰왔다.

“형이 거짓말을 하니까요.”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조건보고 가이드 계약 맺을 생각을 했다면서요. 그래서 같은 조건을 제시했는데, 형 지금 당장 하겠다고 안 하잖아요. 근데 뭐? 그 이유가 80%요?”

“…….”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대체 진짜 이유가 뭐예요?”

진짜 이유. 그 질문에 급격히 피곤함이 찾아오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 집, 승진. 그런 것이 아닌 진짜 이유. 근데 그걸 굳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한테 얘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 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무거운 한숨과 함께 오래된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했다.

“얘기가… 좀 긴데.”

머뭇거리며 꺼낸 말에 차수혁이 차분한 표정으로 듣겠다는 듯 잡고 있던 손등 위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내가 가이드 발현이 좀 빨랐어. 아주 어렸을 때 했으니까. 사실… 내 첫 가이딩 상대는 우리 엄마였거든. 가족 간에 가끔 그런 경우 있잖아. 가이딩률이 높게 나오는 경우.”

가족 간에는 기본적인 친밀감이 있기 마련이었고, 가족 중에 가이드와 에스퍼가 있는 경우 간혹 그들 사이에서의 매칭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경우가 있었다. 바로 나와 우리 엄마처럼.

“형 어머니가 에스퍼셨어요?”

“응. 근데… 그 어린애가 뭘 알았겠어. 그냥 엄마 손잡고 노는 거라고 생각하던 게 다였지. 그러다 하루는 엄마한테 화가 난 날이 있었는데… 가이딩을 해달라고 손을 뻗는 엄마를 무시했어. 엄마한테 화가 나 있었으니까.”

“…….”

어린아이의 무지에서 비롯된 순수함은 때론 그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결국 우리 엄마는 그날 폭주를 일으켜서 돌아가셨고, 그 길로 난 고아원으로 보내졌지. 그때의 충격이 컸는지 한동안 나는 내 이름이 뭔지도 다 까먹고 살았는데… 가이드라는 걸 자각하고 나니까 그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르더라고. 근데 그러고 났더니… 내가 폭주하는 에스퍼를 그냥 두고 못 봐.”

눈앞에서 그 꼴을 다시 볼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죄책감, 또 어쩌면 후회나 자책 같은 것. 뭐라 이름을 붙여도 한 가지만이 확실했다. 다신 그 꼴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

“형….”

#31

“그게 잘 안 되더라고. 그때의 충격이 컸는지. 근데 한태화는… 다른 사람한테는 가이딩을 못 받는다네? 가이딩 거부가 너무 심해서 문제가 많은가 봐. 근데 나는 된다고 하고… 내가 이런 거에 좀 약하다, 수혁아.”

“…….”

“고아로 자라서 그런가, 아니면 어릴 때의 기억 때문인가, 나만 특별하게 대해주는 뭐 그런 거 있잖아. 그 결핍이 심하기도 하고, 폭주하는 에스퍼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뭐든 그 부분이 진짜 소름 끼치게 약한데, 그걸 그 새끼가 첫 만남부터 콱 물었어.”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다 피식하고 낮게 조소하자 수혁이가 형, 하고 부르며 걱정스러운 낯빛을 했다. 그래서 일부러 기운찬 얼굴을 해 보였다. 누군가로부터 걱정 받는 건 딱 질색이다.

“미안한데, 그래서 네 부탁은 못 들어줄 거 같아. 같이 매칭 센터 가자고 했던 거. 근데… 그때도 사실 좀 기뻤어. 고맙다. 근데 이렇게 돼서 더 미안하고.”

“…기다릴게요. 한태화랑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막상 지내다 보니 서로 안 맞아서 금방 끝날 수도 있고요.”

“네 말이 맞아. 금방 끝날 수도 있겠지. 근데 기다리진 마. 나 그건 싫다.”

그 말에 수혁이의 표정이 곧장 상처받은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불편한 마음에 시선을 피하며 수혁이에게 잡혀있던 손을 슬쩍 빼냈다. 진짜, 내 인생에 이런 민망하고 미안한 순간이 오리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좋게 풀어서 설명해 줘야 할지를 도통 모르겠다.

“…왜요? 제가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 거 아냐. 네가 왜 마음에 안 들어. 심지어 돈도 많다며? 집은 더 많고? 더 매력적이지. 근데… 그럼 내가 너무 쓰레기 같잖냐. 여기저기 다리 걸쳐 놓고 어장관리 하는 거 같아서 싫어. 그러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다른 더 좋은 가이드를 찾아봐.”

내 답에 차수혁이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굳히는 게 보였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양아치였다면서요. 그럼 쓰레기 좀 돼도 괜찮잖아요.”

그 순간 바로 무거운 마음이 날아갔다. 저 새끼가!

“야! 그걸 왜 여기서 써먹어? 내가 손 씻은 지가 언젠데! 너 진짜-.”

“요한, 여기서 뭐 해요? 설마… 바람?”

“…한태화씨?”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허리를 숙인 채 내 어깨 위로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있던 한태화가 길게 눈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세웠다. 천천히 그런 한태화의 몸 선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니 꺾듯이 추어올린 고개에 목이 아픈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어떻게 여기에….”

“요한이 여기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진짜 바람이에요? 내가 지금 바람피우는 현장을 잡은 건가?”

…저놈의 지긋지긋한 바람 타령! 저게 진짜 바람피우는 꼴을 봐야 저딴 말을 안 하지!

“아닌데요.”

“…흠, 믿을 수가…”

“내 말 잘 듣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라고요.”

“…뭐, 요한이 그렇게 나오면 일단 믿는 수밖에 없고요.”

‘내가 요한 말을 잘 듣잖아요,’ 라고 개소릴 내뱉으며 웃는 한태화는 심하게 찝찝했다. 일단이 뭐냐고. 일단 다음 이단은 뭔데? 대답이 영 별로라 미심쩍은 얼굴로 한태화를 쳐다보자, 녀석이 그런 내 어깨를 잡고 억지로 일으키며 귓가에 작게 속살거렸다.

“근데 저도 쟤랑 할 말이 좀 있어서요, 잠깐 자리 좀 비켜주시면 안 될까요?”

“…무슨 할 말요. 그냥 나랑 가죠?”

“제가 쟤랑 같은 청산팀이잖아요. 일 문제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 잠깐 자리 좀 비켜주세요, 요한.”

뭔가 좀 찝찝했지만 일 문제라고 하니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차수혁에게 인사를 하며 슬쩍 자리를 떠났다. 그럼에도 영 뒤통수가 당기는 것이… 엄청 찝찝했다.

***

“일 문제요? 일도 안 하시는 분이 무슨 할 얘기가 있으실지 궁금하네요.”

비웃음이 섞인 비난 어린 말투에 한태화가 눈썹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한쪽 입매를 끌어올렸다.

“빈정거리지 말지? 어차피 요한 문제 때문인 거 뻔히 알 텐데. 서로 괜히 시간 죽이지 말자고.”

요한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평소 태도로 돌아온 한태화의 모습에 차수혁이 하- 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태화가 눈 하나 깜박할 리 없었다.

“차수혁, 남의 거 넘보지 말고, 요한 옆에서 그만 좀 얼쩡거리지.”

“…요한은-.”

“그 입으로 우리 요한 이름도 부르지 말고. 짜증 나니까. 난 짜증이 나면 그냥 확 죽여 버릴까 싶어지거든. 이미 잘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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