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49)
  • “여기서 중요한 건 '나'보다 좋은 할애비가 있냐, 없냐네.”

    “…없겠죠.”

    “아니 그럼 대체 왜!”

    분개한 듯 소파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쾅하고 내리친 회장님께서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몸을 부들거리셨다. 본인 말대로 정말 아직 팔팔하신 듯했다.

    “선약이라니까요.”

    “돈 앞에 순서가 어딨나! 명품 예약도 돈 많으면 새치기가 가능한 세상에!”

    이분… 너무 똑똑하신데? 지극히 타당한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릴 뻔했다.

    놀이공원을 가도 비싼 패스권을 끊으면 기다리지 않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시대였다. 저 말 그대로 돈 앞에서 귀하게 여겨지던 가치들이 힘없이 사라지는 그런 삭막한 시대인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나라고 특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일리 없었다. 물론 이 상황에서 저 말에 동조하면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고.

    “그래도 사람 도리가 그게 아니죠.”

    “…그리 도덕적으로 보이진 않네만?”

    뭣이? 그게 벌써 티 났어?

    “아니 제 어디가요? 뭘 보고요?!”

    “오래 살면 다 보이네.”

    “…무속인이세요?”

    “그보다 용한 CEO네.”

    “아-.”

    돈이 보이는 투자의 귀재. 손닿는 곳마다 대박을 치는 미다스의 손. 젊은 시절의 저 회장님을 따라다니던 별명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떤 면에선 무속인보다 용하긴 하셨다.

    “큼큼, 어쨌든 제 말은 그래서 한태화씨와 가이드 계약을 맺을 일은 없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건….”

    자태도 아름다운 금빛의 돈 봉투를 내려보다 슬쩍 손을 뻗어 그것을 손에 쥐었다.

    “태화 할아버님의 성의도 있고, 제가 한태화씨의 폭주를 막아준 것도 맞으니 이번만 잘 받겠-.”

    “뭐 하는 겐가, 요한군? 그거 다시 내려놓게.”

    쌀쌀맞은 목소리에 테이블 위로 죽 끌고 오던 봉투가 움직임을 멈췄다. 어쩐지 좀 억울한 기분에 차마 봉투를 놓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저 주시는 용돈 같은 거라면서요?”

    “다른 놈이랑 가이드 계약 맺는다는 사람한테 용돈은 무슨 용돈? 됐으니 이만 가보게. 쯧.”

    “…좋은 할애비는 어디쯤에…?”

    “좋은 할애비는 내 손주의 가이드한테만 좋은 할애비일세. 아니면 우리 손주랑 가이드 계약을 맺을 텐가?”

    “안녕히 계십시오.”

    곧바로 봉투를 놓고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자 에잉- 하고 못마땅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팩- 돌린 회장님께서 인사 받길 거부하셨다. 아까와는 너무도 다르게 상반되는 태도에 기분이 상해 일부러 발을 쿵쿵 구르며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기세 좋게 문을 열었던 것이 무색하게 콩-하고 코를 박고야 말았다. 윽 하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코를 감싼 채 허리를 숙이자 익숙한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괜찮아요, 요한?”

    #27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그건 제가 물어야 할 질문 같은데요. 여긴 우리 할아버지 사무실이니까. 그나저나 코는 괜찮아요? 코피는요? 코피 나는 거 아니에요? 좀 봐 봐요.”

    “이 정도에 코피는 무슨! 그보단 여긴 어떻게 알고-!”

    그 순간 무언가가 쭉 하고 코에서 흘러내렸다.

    “-어라?”

    “…요한!”

    “요한군, 자네 코피 나네!”

    압니다, 회장님. 근데 쪽팔리니까 그렇게 크게 소리 지르지 말아주시겠어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손으로 코를 감싸 쥔 채 회장님을 돌아볼 때였다.

    “누굽니까! 누가 코피가 나죠?”

    구급상자를 손에 든 비서실장이라던 차가웠던 인상의 남자가 여전히 차가운 인상으로 회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리고 심하게 쪽팔렸던 나는 열린 문을 통해 쌩하니 도망갔다. 우주 밖의 먼지가 되고 싶을 만큼 쪽팔렸다.

    일이 잘 풀리기는 개뿔. 망했다. 완전히, 퍼-펙트하게.

    ***

    “아픕니다! 대체 어디까지 쑤셔 넣을 생각입니까?!”

    “구멍이 좁아서 그래요.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아, 아프다고요! 아픈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이거보다 작은 구멍으로 더 큰 것도 물어봤잖아요? 그러니까 이것도 참을 수 있어요.”

    뭐? 이 새끼가 뭐래!?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옵니까!”

    “그러니까 잠깐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요. 너무 속상해서 화가 나려고 한단 말이에요.”

    한태화의 마지막 말에 머쓱하게 입을 다물며 고개를 좀 더 치켜들었다. 그러자 코를 지혈해 주기 위해 솜으로 콧구멍을 틀어막아 주고 있던 한태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각도에서 봐도 한태화의 미모는 여전했다. 문제는 고개를 치켜든 내 엉망일 얼굴이었다. 남한테 콧구멍이나 보이고 있는 것도 창피한데, 이런 각도라니, 한태화가 치를 떨며 떨어져 나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회장실을 뛰쳐나와 도망치는 나를 끝까지 쫓아온 한태화는 어느새 비서실장님의 손에서 가로채 온 구급상자까지 든 채 비상구 계단으로 나를 끌고 와 이렇게 치료까지 해주고 있었다. 기관 내에서도 성질이 더럽기로 악명이 높은 그 한태화가 말이다.

    “대체 왜 이렇게 연약해요. 고작 가슴에 코 좀 박았다고 코피라뇨.”

    “고작 가슴? 이봐요 한태화씨, 장담컨대 이게 회장실의 그 두꺼운 나무문보다 강할 겁니다. 강철보다도 강할걸요? 그거에 부딪히고도 코피만 난 정도면 내가 아주 튼튼한 편인 거죠.”

    한태화의 단단한 가슴 근육을 검지로 꾹꾹 눌러가며 코맹맹이 소리로 대꾸하자 남은 솜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있던 손이 멈칫했다.

    “…요한은 정말 너무 야해요. 지금 나 또 꼬시는 거예요?”

    또? 왜 또야? 그 부사가 왜 거기 붙어?

    “미쳤어요?”

    “아뇨.”

    “그럼 돌았습니까?”

    “…아니라니까요.”

    “근데 멀쩡한 사람이 왜 그렇게 받아들여서 미친 소릴 합니까?”

    “그럼… 그냥 미친 걸로 하고 여기서 한판 할까요?”

    세다. 이 새끼. 그래, 만만한 놈이 아니지, 그렇지.

    “…안 미쳤다면서요.”

    “안 미쳤어도 요한이 미쳤다고 하면 미친 걸로 해야죠.”

    “그럼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겠네요.”

    그 말에 한태화가 피식 웃으며 열려 있던 구급상자를 정리해 뚜껑을 닫았다. 그러나 내내 네, 네, 하던 놈이 이번만큼은 분명 대답을 피했다. 급격하게 밀려드는 위기감을 느끼며 한 계단 위로 몸을 물리자 한태화의 손이 내 팔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또 어딜 도망가려고요.”

    “일단… 놓고 얘기합시다.”

    “아파요?”

    “안, 아니, 예.”

    아프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애매한 내 대답에도 손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놓아 주진 않아서 찝찝한 눈으로 그 손을 힐끔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태화씨, 이게 이런 데서 할 말은 아닌 걸 아는데 말입니다.”

    “그럼 하지 마세요.”

    예쁘게 입 꼬리가 올라간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단호한 답변이 떨어졌다.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었다.

    “그럼 이런 데서 할 만한 말을 해야겠네요. 임시 가이드 발령서요, 그거 한태화씨가 그런 겁니까?”

    “…그렇다고 하면 왜요.”

    “좀 무르죠.”

    “싫은데요.”

    너무 간단하게 싫다고 해오니 할 말이 없었다. 대꾸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작게 한숨을 내쉰 한태화가 여전히 내 팔을 단단히 부여잡은 채로 진지하게 물어왔다.

    “요한은 내가 싫어요?”

    “…예.”

    그 순간 잠시 숨을 참는 기척이 느껴졌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모든 움직임을 멈췄던 한태화는 한참 만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요, 뭐가 그렇게 싫은데요.”

    “한태화씨는 자꾸 내 콤플렉스를 자극합니다. 그래서 싫습니다. 내가 못나 보여서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까 풀어서 해줘요. 콤플렉스라뇨.”

    언제나 능글맞게 휘어지던 눈매가 진지하게 단단해지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한태화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남들보다 더 가진 게 없어요. 근데 한태화씨는 아니죠. 걱정해 주는 가족도 있고, 부자에 직급도 높아요. 남들보다 더 가진 게 많죠. 그에 반해 나는 고아인 데다, 가난하고, 고작해야 D등급의 보조 가이드죠. 근데 그런 내 꿈이 뭔지 압니까?”

    “…뭔데요.”

    “첫 D등급 팀장이요. 근데 나에겐 그 까마득한 꿈이 한태화씨에겐 무척 쉬운 일이더라고요. 청산팀 팀장이라면서요?”

    “…….”

    “내가 오늘 그 이야길 듣고 어떤 감정이 들었는 줄 압니까? 화가 나고 짜증이 났어요. 어떤 놈은 일을 개떡같이 해도 돈 많고 등급도 높아서 쉽게 팀장질을 하는데, 나는 그게 죽기 살기로 실적을 쌓아야만 가능한 꿈에 가까운 일이니까요. 물론 사실 알고 보면 한태화씨가 그에 맞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요. 그런데 그런 이성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한태화씨는 내게서 유치한 질투를 끌어냅니다. 내 자신도 들여다보기 싫을 만큼 추악한 감정을 자꾸 들춰요.”

    “…….”

    “그래서 되도록이면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아예 안 봤으면 하고요.”

    솔직한 내 대답에 한태화는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너무 말이 심했나? 조용해진 한태화를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눈치를 보고 있을 때쯤 녀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해가 안 가요.”

    …뭣이? 이 쉬운 말이 왜 이해가 안 가? 눈앞에 있는 게 S등급의 에스펀지, 붕어 새끼인지 모르겠네. 답답한 마음에 입을 꾹 다물고 입매를 내리자 한태화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가 그런 생각이 안 들게 만들어 주면 되잖아요. 요한이 남들보다 못 가진 그거, 내가 다 줄 수 있는 건데, 왜 날 싫어해요?”

    “예?”

    뭔 소리야. 다 줄 수 있다니? 내 멍청한 표정을 본 한태화는 갑자기 요망한 얼굴로 웃어 보이더니 하나씩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생각해봐요, 요한. 직급? 우리 집이 기관 최대의 후원사인데, 요한이 원하면 아무 일 안 해도 기관장까지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어… 예?”

    “돈? 나랑 가이드 계약만 맺으면 내 돈이 요한 돈이죠. 막 써요. 써도 써도 안 마르는 화수분이란 걸 보여줄 테니.”

    “……어?”

    “가족은… 나랑 전속 가이드 계약을 맺으면 되잖아요. 그게 거의 혼인신고 같은 건데, 그럼 내가 바로 요한의 가족이고, 내가 가족이면 우리 가족도 요한의 가족이죠.”

    이 새끼 이거… 천잰데? 내가 왜 저 생각을 못 했지? 멍해진 머리로 한태화가 얘기한 것들을 하나씩 나열하다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다 준다고? 나한테? …정말?”

    갑자기 짧아진 말에도 한태화는 길게 눈을 접어가며 화사하게 웃어 보이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시선을 내려 살피니 차 키였다. 그것도 유명한 엠블럼이 박혀있는 외제차 키.

    “다 가져요. 집에 가면 비슷한 걸로 몇 대 더 있는데 그것들도 전부 다 줄게요. 돈이든, 차든, 집이든. 원한다면 기관도요.”

    기관은 쫌 오바다. 얘가 아직 어려서 그런가 허풍이 좀 있었다.

    “…차 키만? 명의는?”

    멍하니 물어보자 잠시 고개를 갸웃해 보이던 한태화가 씨익 하고 웃었다.

    “그건 나랑 전속 계약을 맺으면 바꿔 줄게요. 차도, 집도, 전부 다요.”

    이 용의주도한 새끼. 이 와중에 그걸 조건으로 걸다니. 그러나 그걸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무척 불공정한 계약이었다. 가이드 계약만 해주면 한태화의 이름으로 된 모든 재산이 내 꺼가 되는 것이다.

    “…음, 그러니까 이걸 받아들이면… 나는 완전 땡잡은 거네요?”

    “아뇨, 땡은 내가 잡았죠. 광땡이라면서요, 요한 별명.”

    예쁘게 웃고 있는 한태화를 멍하니 쳐다보자 놈이 잡고 있던 팔을 잡아끌어 그대로 목을 끌어안았다. 커다란 몸이 품 안으로 들어오며 은은한 향수 냄새가 기분 좋게 코끝을 간질였다.

    “할아버지한테 들었죠? 제가 가이딩 거부 반응이 심하다는 얘기. 분명히 내 불쌍한 얘기를 잔뜩 늘어놓으면서 구질구질하게 매달렸을 텐데.”

    “아니, 뭐… 그 정도는 아니고… 조금?”

    아예 아니라곤 할 수 없어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어깨 위로 한태화가 웃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한태화가 작게 ‘근데 그거 나도 하려고요.’ 라고 말하더니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요한이 없으면 죽어요. 요한의 가이딩 외에는 받을 생각도 없고, 받지도 못할 테니까요. 폭주로 미쳐서 결국엔 죽겠죠. 그러니까 요한이 나 좀 봐줘서 데리고 살아주면 안 될까요? 진짜 잘할게요. 요한이 하라는 대로 다 하면서요.”

    아씨. 이 눈치 빠른 새끼가 내가 이런 말에 약한 걸 어떻게 알았을까. 약점을 들켰다는 생각에 저절로 말투가 불퉁해졌다.

    “…뭐, 말 잘 듣는다고 하면 생각은 해볼게요.”

    “내가 언제 요한 말을 안 들은 적 있어요? 그 조건은 이미 의미가 없어요.”

    말을 들은 적보다 안 들은 적이 셀 수도 없이 더 많았다. 근데 이게 왜 조건이 안 돼? 어이가 없어 작게 헛웃음을 터졌지만, 일단 토를 달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다만 품 안의 이것이 당첨된 복권인지, 아니면 복권인 척하는 똥인지가 구분 되지 않아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둘 중의 뭐라도 무척 구미가 당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절로 손끝이 움찔거릴 만큼 말이다. 그래서 아마 그런 말이 나간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임시 가이드로 지내면서 생각을 좀 해볼까요?”

    그 애매모호한 허락에도 한태화는 온몸이 울리도록 크게 웃으며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아 왔다. 답답하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얌전히 안겨있자 행복하다는 듯 내내 웃기만 하던 한태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요한, 내가 일을 개떡같이 해요?”

    “…예?”

    “아까 그랬잖아요. 일을 개떡같이 해도 돈 많고 등급도 높아서 쉽게 팀장질하고 있다고.”

    내가 잠깐 미쳐서 너무 솔직했구나. 그러나 불리한 질문에 답할 마음이 없었기에 모르는 척 한태화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트린 한태화가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문득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는… 아니, 괜찮다 못해 차고 넘치도록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구나, 나.

    #28

    2. 임시 가이드로 산다는 것은

    어제는 진짜 잠시 미쳤었던 게 틀림없다. 순간 꼬임에 넘어가 선택해선 안 될 것을 선택한 거 보면. 돈에 눈이 멀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확실했다.

    뒤늦은 후회를 하며 한태화가 준 외제차의 시동을 끈 뒤, 차에서 내리자 주차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확실히 윙 도어 방식의 자동차는 시선을 좀 많이 끌었다. 자랑스러운 얼굴로 반짝이는 차를 내려다보다 보닛을 소중한 손길로 쓸었다. 그래, 리제 너는 아무 잘못이 없지. 순진하게 밟으면 밟는 대로 속도를 올려주는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그치? 너도 한태화가 주인인 건 싫잖아? 응? 너도 내가 더 좋지?

    “…광땡아… 너 거기서 혼자 뭐 하냐? 그 차는 또 뭐고?”

    그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멈칫하며 몸을 굳혔다. 그러나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 그래. 좋은 아침인지 아닌지는 네 대답을 들어보고 결정하기로 하고, 저 차는 뭐냐니까? 왜 내 눈엔 저 차가 한태화가 끌고 다니던 그 정신 나간 차랑 똑같아 보이지?”

    정신 나간 차라니. 우리 리제 들어요!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작게 심호흡을 했다. 침착해야 한다. 여기서 잘못하면 완전 나가리니까.

    “그래요? 한태화씨가 차 보는 안목이 참 좋네요. 우리 엘리제랑 같은 차종이라니. 아, 엘리제는 얘 이름이에요. 엔진음이 클래식처럼 우아하길래-.”

    “뭐래, 이 미친놈이. 번호가 똑같다고! 한태화 차랑!”

    “…….”

    거, 눈 침침하다고 서류 작업도 싫어하는 양반이 이럴 땐 꼭 눈이 좋더라? 당황으로 슬쩍 시선을 피하자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팀장님이 대뜸 내 멱살을 잡았다. 아니, 이분이!

    “설마, 훔쳤냐? 훔친 거야? 이 미친놈아, 아무리 갖고 싶었어도 어떻게 훔칠 차가 없어서 한태화 차를 훔쳐! 당장 도로 못 갖다놔?!”

    “후, 훔치긴 누가 훔쳐요?! 누가 들을까 겁나네? 내가 막 차나 훔칠 그런 사람이에요?”

    “훔치고도 뭘 더 남길 놈이지! 아니면 한태화가 저 차를 주기라도 했어? 미치지 않고서야-.”

    “안 미쳤고, 제가 요한 준 거 맞는데요?”

    그 순간, 팀장님 뒤로 허공에서 뚝 하고 떨어진 한태화가 나타나 내 멱살을 잡고 있던 팀장님을 손을 간단히 떼어내며 곰살맞게 웃었다. 그러자 여러모로 당황한 팀장님이 놀란 듯 심장께를 부여잡으며 뒤를 돌아봤다.

    “어, 아하하, 이게 누구야, 한태화씨를 여기서 또 보네? 어제 팀장 회의에서 보고 또… 이상하게 요새 들어 자주 보네?”

    말하다가 깨달았는지 심히 떨떠름해 하는 팀장님을 무시하고 지나친 한태화는 그대로 내게 걸어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요한, 어젠 잘 잤어요?” 라고 다정하게 묻는 한태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면서도 열심히 팀장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저분이… 내가 한태화를 가이딩 해줬다는 사실만 알지 아직 어제 일에 대해선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요한, 어젠 너무했어요. 시승식만 해본다고 해놓고 그대로 집에 가버리는 게 어딨어요? 나, 진짜 상처받았어요.”

    그러나 놈은 애초에 가자미눈을 해서 노려보고 계신 팀장님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한태화는 눈치 따윈 개나 갖다 줬는지 상처받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뺨을 비벼올 뿐이었다. 그게 상처받았으니 달래달란 의미 같았는데,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눈이 왕방울만 해진 팀장님이 내 팔을 잡아당겨 한태화로부터 떼어놓더니 무척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허, 남이 보면 오해하겠네. 지금도 말들이 많은데, 응?”

    “…….”

    내 팔을 붙잡아 자신의 뒤로 숨기는 팀장님을 가만히 살피던 한태화의 시선이 팀장님이 잡고 있는 내 팔을 위를 스치는 순간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때 뭔가 불길한 느낌이 강하게 오면서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뭐지? 오싹한 기분에 눈을 크게 뜨고 깜박이는데, 한태화가 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오해요?”

    “…어? 아니, 우리 요한이가 보조 가이드다 보니 해줬던 응급 가이딩으로 여러 말들이 돌더라고. 전속 가이드 계약을 하는 거 아니네, 마네, 별 소문이 다 돌고 있으니 두 사람도 조심 좀 해야지.”

    아…, 진짜 아직 임시 가이드 발령서에 관한 얘기는 못 들으셨나 보네. 하긴 어제 내도록 지방에 내려가 계시다 오늘 출근하신 것일 테니 그럴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하나 싶어 도록도록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데 한태화가 다시 내 팔을 잡아당겨 그대로 어깨를 끌어안더니 팀장님을 향해 생글거렸다. 아주, 아-주 불길하게-.

    “임시 가이드 계약이 끝나고 나면 당연히 전속 가이드 계약도 진행해야죠. 그죠, 요한?”

    “…그건 생각해 보기로 했던 것 같은데….”

    그럼 그렇지. 이걸 노린 거였구나. 대체 왜 사람의 불길은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 걸까. 목 뒤로 돋은 소름이 가실 줄을 몰랐다. 놈의 말에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슬쩍 팀장님의 눈치를 살피는데 순식간에 창백해진 팀장님이 멍한 얼굴로 한태화를 빤히 바라보셨다.

    “…임시 가이드 계약이라니? 지금 무슨 소릴….”

    “저랑 요한 말이에요. 임시 가이드 계약 맺었으니 당연히 전속 가이드 계약도 맺어야죠. 그럼 뒤에서 오해할 말도 안 돌 거고요.”

    “…누구? 누구랑 임시 가이드 계약을 맺었다고?”

    “당연히 요한이죠. 저한테 요한 말고 누가 또 있겠어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연신 같은 물음을 반복하는 팀장님의 질문에도 놈은 기꺼이 대답해 주며 애교스럽게 뺨을 비볐다. 어깨에 닿아오는 무게에 평소 같으면 질색을 하고 쳐냈을 텐데, 어쨌든 받은 것도 있고, 녀석의 말대로 임시 가이드인 것도 맞아 차마 내치지 못하고 어색하게 굳어 있자, 그 모습을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고 있던 팀장님의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 요한이가 왜? …왜 자네 가이드야?”

    “어제 임시 가이드 발령서가 기관장님 명령으로 내려왔어요. 그것 때문에 전화도 몇 번 드렸는데, 팀장 회의 들어가셔서 그런지 연락이 안 되더라구요.”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물음을 끊어낼 요량으로 한태화를 대신해서 어제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자 팀장님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배신감이 섞인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넌… 그걸 허락했고?”

    “…뭐, 기관장님 명령이기도 하고요, 또 괜찮을 것 같기도 해서….”

    “그게 왜 괜찮아! 어떻게 괜찮아?!”

    순간 무시무시한 기세로 소리치는 팀장님의 말에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굳은 얼굴의 팀장님이 나와 한태화를 오랫동안 노려보다가 갑자기 엘리제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 차를 원수 보듯 쏘아보셨다. 그러더니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비난 섞인 눈으로 노려보시더니 이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기관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양반이 설마… 저대로 기관장님께 가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세의 팀장님을 말리려 따라가는데 어깨를 안고 있던 팔이 좀처럼 풀리질 않았다. 그리고 한태화가 풀어줄 생각이 없는 이상 나로선 이 팔을 풀어낼 재간이 없었고.

    “한태화씨? 손 좀-.”

    “요한,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날아왔더니 기운이 또 어긋난 것 같아요. 가이딩 좀 해주세요.”

    “…예?”

    한태화의 헛소리에 자동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게 누가 날아오랬나?

    “누가 날아오래요? 집에 차도 많다면서, 그중에 하나 끌고 오면 됐잖습니까.”

    “요한을 빨리 보고 싶어서요. 어제 그냥 그렇게 가버려서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시승식만 해보고 다시 온다고 해서 그 말만 믿고 엄청 오래 기다렸는데….”

    이 새끼 이거, 그새 진화한 거 봐라. 이제는 불쌍한 척도 한다. 여전히 지능적인 개새끼였다.

    “…그래서 당장 가이딩을 해달라고요? 어디서, 여기서?”

    어이가 없어 따지듯 묻자 내 상의 주머니로 슬그머니 손을 넣은 한태화가 멋대로 차 키를 꺼내 가더니 삑- 하고 차 문을 열었다.

    “저기, 마침 딱 좋은 곳이 있네요. 그죠?”

    “…….”

    아침 햇살 아래에서 해사하게 웃으며 점차 차 쪽으로 몸을 밀어붙이는 한태화를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내가 어제 정신이 나갔던 게 맞다고.

    ***

    결국 그 말도 안 되는 어리광에 밀려 운전석에 올라타자 냉큼 조수석으로 따라 탄 한태화가 눈을 반짝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을 흰 눈으로 흘기다 상태나 살필 요량으로 손을 잡았다. 그러자 곧바로 서로의 기운이 일렁이며 뭉그러지더니 서서히 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태화의 근원으로 링크되었다.

    여전히 한태화의 머릿속은 꽃밭이었다. 색이 고운 핑크빛 하늘의 총천연색의 꽃들이 살랑이는 풍경 좋은 곳에 서서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기분 좋을 만큼 산뜻하고 간지러운 바람에 어지간히 나를 반기는구나 싶어 웃음이 터졌지만 그 웃음은 몇 초를 못 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저 조그마하게 간 실금 하나 가이딩 해달라고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였다는 거지?

    분홍빛 하늘과 꽃밭이 맞닿는 중간 지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희미한 금을 살피다 한태화를 뚱하게 바라보았다.

    “한태화씨?”

    “네, 요한.”

    얌전히 앉아 기대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한태화의 모습에 한마디 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그래, 어쨌든 내가 저놈 가이든데, 어긋난 게 있으면 가이딩을 해줘야지. 하기로 결정한 일을 대충 하는 건 원래 성미에도 맞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한태화의 몸 위로 상체를 숙였다.

    “아- 해봐요.”

    #29

    “아요? 아아-?”

    치과 온 아이처럼 순하게 벌어지는 입에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맞추려는데, 그걸 눈치챈 놈이 도로 입을 꽉 하고 다문다. 혀부터 넣었으면 잘렸겠다 싶을 만큼 세게 다물린 입매에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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