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수혁: 요한형, 괜찮아요? 오후 2:17]
[차수혁: 나중에 시간 되면 연락 한 번만 주세요. …저도 제 선에서 한번 알아볼게요. 오후 4:52]
수혁이에게 와있던 메시지를 확인하고 난 뒤, 고맙다고 답장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팀원들의 안쓰럽다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오늘 내도록 기관 건물의 각 부서를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면서 받았던 시선들과 비슷했다.
“괜찮냐? 어떻게 됐어?”
“…그냥 뭐, 다들 기관장님 명령이라고만 하죠. …팀장님은요? 왜 오늘 내도록 안 보이세요?”
피곤함에 마른 세수를 하며 불이 꺼진 팀장실을 눈칫하자 강선배가 혀를 작게 찼다. 나로선 이제 믿고 비벼볼 데가 팀장님밖에 없었다.
“오늘 팀장급 전체 회의 있으셔서 지방 내려가셨어. 내일이나 오실 거야.”
“…….”
“한태화는 뭐래요? 연락은 해봤어요?”
최선배의 설명에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리자 옆으로 다가온 후배 놈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저 어린놈이 보기에도 내 상황이 퍽 안 되어 보이긴 하나보다.
“…전화 안 받아.”
“거 진짜, 나쁜 새끼네.”
“무슨 소리야. 걔도 팀장이니 당연히 팀장 회의에 참석해 있을 텐데. 그럼 연락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예?”
덧붙여진 최선배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더니 옆에 서 있던 강선배가 몰랐냐는 듯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뭐가 ‘예?’야. S등급인 애가 팀장직 맡고 있는 건 당연하지. 아니라는 게 더 이상하겠다.”
일단 불만스러움에 입을 꾹 다물긴 했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세가에서 걔를 그냥 놀릴 리가 없었다.
“걔가… 어느 팀 팀장인데요?”
“청산 특별팀 팀장이 걔잖아. 원래도 특수 활동팀이었고.”
“…아, 씨발, 이 새끼를 진짜….”
그날 클럽에 왔던 건 진짜 다 알고 온 것이었다. 청산 특별팀이면 이번 작전 수행의 지원을 요청한 바로 그 팀이었으니까. 차수혁이 속한 바로 그 팀. 그날 수혁이가 한태화를 보고 왜 그렇게 표정이 썩어들어갔는지가 이제야 이해됐다. 내내 껄끄러워하던 이유도. 그리고 나 역시 그 날 일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일이 꼬이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화가 났다.
“…선배, 술이라도 한잔하러 갈래요? 오늘 같은 날은 무조건 한잔해야죠. 제가 살게요.”
“…….”
그 말에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두 선배가 말없이 옷과 지갑을 챙겨 드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먹고 죽어야 할 날인가 보다.
***
그러나 팀 회식은 기관의 정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앞으로 다가온 차에 막혀 무산되었다. 고급스러운 세단의 문이 열리고, 조수석에서 내린 남자가 명함을 건네주며 시간을 내어달라는 말에 팀원들의 머리가 손에 들린 명함 위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TH그룹 비서실장 김도환」
질 좋은 명함의 글자를 살피다 명함을 한 번 비서실장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는데, 날카로운 시선을 안경알 속에 감춘 남자가 사람 좋은 척 웃어 보였다.
“회장님께서 잠시 뵙길 청하셨습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가급적 오늘 시간을 내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회장님. 비서실장 입에서 나온 이질적인 단어에 몸을 굳히자 두 선배들 역시 화들짝 놀라며 나와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위로해 주며 어깨동무를 하던 선배들의 팔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며 모르는 사람인 척 고개를 돌리는 행동에 이를 득득 가는데, 아직도 내 손에 들린 명함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후배 놈이 갑자기 딱! 하고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내더니 내 어깨를 잡아끌고 몸을 돌렸다.
“기회예요, 선배!”
“뭐?”
“회장님 만나보고 와요.”
“…너, 네 일 아니라고 신났냐? 미쳤어? 내가 한태화 놈 가족을 왜 만나!”
쉽게 말하는 상원이의 태도에 화가 나서 이를 악문 채 타박하자, 녀석이 제 검지를 세워 내 앞으로 내민 채 휙, 휙, 휙, 세 번 저어댔다. 그 꼴이 어느 연예인을 따라 하듯 느끼해서 재수가 없었다.
“선배는 드라마도 안 봐요?”
“…드라마?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후배 놈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던 선배 둘이 슬금슬금 다가와 귀를 여는 게 보였다.
“아, 선배, TV 좀 보고 살아요! 이런 일에 회장님이 선배를 부른 이유가 뭐겠어요!”
“모르겠는데?”
뚱하게 대답하자 후배 놈이 답답하다는 듯 고릴라처럼 제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두들겨 댔다.
“뻔하잖아요. 척하면 척, 알아먹어야지! 회장님께서 왜 부르시겠어요. 돈 봉투 주면서 내 손주와 넌 안 어울리니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응? 그러려고 부르는 거죠, 당연히!”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한 번에 말귀를 못 알아먹고 인상을 찌푸리고만 있자, 상원이 놈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제 이마를 한 손으로 짚고 개폼을 잡았다.
“하-, 선배, 선배 가이딩 등급이 몇 등급이죠?”
“…D.”
“그럼 그 괴물, 아니, 한태화의 등급은?”
“S.”
뻔한 걸 굳이 묻는 후배 놈의 질문에 떨떠름하게 대꾸를 하니 옆에서 듣고만 있던 선배들도 갑자기 머리를 모으며 그럴싸하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나만 빼고 상원이의 개소릴 다 알아들은 모습들이라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뭐냐고, 대체.
“심지어 한태화는 우리나라에서도 알아주는 대기업의 금수저. 선배는?”
“뭐 이 새끼야?”
“아니, 화내지 말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자는 말이죠. 선배가 가진 게 뭐가 있어요.”
“……없지.”
가진 것만 없나, 집도 없고, 부모도 없다. 남들보다 더 가진 게 없는 심히 미천한 삶이었다.
“거봐요. 이게 딱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설정이라니까요? 재벌 집 철없는 도련님과 사랑에 빠진 낮은 등급의 가난한 가이드 아가씨.”
“누가 사랑에 빠져? 너 자꾸 헛소리할래?”
“아니, 선배야말로 자꾸 손가락만 보지 말구요, 달을 봐요, 달을! 생각해보라고요. 이렇게 차이 나는 둘이 가이딩 계약을 맺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보통 드라마에선 집안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게 되어 있다구요! 대체 회장님이 왜 부르는 거겠어요!”
“…왜 부르는 건데?”
“와, 선배 진짜 드라마 안 보시는구나. 드라마 3편 중에 한편은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뭐? 이게 그렇게나 흔한 소재야? 놀란 얼굴로 후배 놈을 보자, 분기별 드라마 제목을 줄줄이 외워대던 후배 놈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가면 돈 봉투 주시면서 이러실걸요? ‘자넨 우리 집안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우리 아이와 헤어져 주게!’ 라고.”
“…정말?”
그러고 보니 언제가 틀어놨던 TV 화면에서 그런 장면을 언뜻 본 것도 같았다. 그때 여자 주인공이 어떻게 했더라? 앞에 있던 물 잔을 들어 물을 뿌리더니 이런 취급받을 이유 없다고 화를 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나선 엄청난 항의 전화에 남자 주인공 대신 부잔데 착한 가족들까지 둔 남자 조연이랑 이어져 기사까지 났었던 것 같다. 거기까지 떠올리니 정말 후배 놈의 말이 진짜 그럴싸했다. 그러니까 정말….
“확실해요. 그러니까 가서 돈도 받고, 그 김에 임시 가이드 발령장도 철회해 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TH그룹 회장님 명령 한 방이면 이번 건은 해결되게 되어 있으니까. 기관장님도 얌전히 물러나실 거고, 한태화 그놈한테 할 말도 생기고, 이건 기회라니까요?”
“…그러네? 이건 정말….”
기횐데?
“회식은 내일 선배가 사야 할 듯요.”
#25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씨익 웃는 후배 놈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회식이 다 뭔가. 정말 이번 건만 물릴 수 있다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최고급 코스로 쏠 수 있었다. 점차 환하게 웃으며 후배 놈을 바라보는데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강선배가 네 어깨를 손을 올리며 무섭게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존심 상한다고 돈 봉투 두고 오지 말고, 꼭 받아와라. 응?”
“제가 그럴 자존심이 어딨어요.”
“그건 또 그래. 음.”
“그럼요. 우리 서선배가 어떤 선밴데. 자존심 때문에 돈을 마다해요.”
팀원들의 응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몸을 돌려 떳떳하게 비서실장을 바라보며 가자고 나섰다. 그러자 뒤에 남아 미심쩍은 표정을 하고 있던 최선배로부터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좀… 찝찝한데.”
어허, 어디서 부정 탈 소릴. 최선배의 말을 들은 귀를 손으로 털어내며 번쩍번쩍 빛이 나는 차에 올라탔다.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었다. 돈은 얼마나 주시려나? 설마 태화그룹 회장님 손이 작을 리도 없고, 내가 한태화 폭주도 막아 줬는데 적진 않겠지?
그럼 마음에 상기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깊게 고민했다. 공무원 뇌물죄 형량이 얼마더라?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판례를 검색하며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일이 이렇게 풀리려나 보네. 하루 종일 고민하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
비서실장이란 사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자 어느새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태화 그룹 본사 회장실에 서 있었다. 그에 잠시 당황하여 주춤거리고 있자, 커다란 원목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던 희끗한 머리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TV나 신문을 통해서만 본 진짜 그 ‘회장님’이셨다.
“편히 앉게.”
“아, 예.”
익숙한 얼굴에 친밀감을 느끼며 회장님이 눈짓으로 가리킨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부담스러울 만큼 푹신한 소파가 하체 전체를 감싸오며 편안하게 몸을 받쳐주었다. 단연코 지금껏 앉아왔던 그 어떤 소파보다 착석감이 좋았다.
“뭐 마시겠나?”
“아, 전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주문인데… 마침 좋은 차가 들어온 게 있다니 차는 어떤가?”
“좋습니다.”
황공한 마음에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하자 나직하게 웃어 보인 범상치 않은 기운의 회장님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비서실장님께 차를 부탁했다. 그렇게 비서실장님이 문을 닫고 나가자 잠시 회장실 안으로 적막감이 감돌았다. 괜히 긴장이 돼서 마른 침을 삼키는데 가만히 앉아 나를 살피던 회장님께서 먼저 입을 여셨다.
“이름이?”
“아, 서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그럼 요한군이라고 불러도 되겠나?”
“예.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이름이 뭐가 중요합니까. 앞으로 우리가 나눌 얘기가 더 중요하지. 이놈 저놈, 이 새끼 저 새끼 하셔도 상관이 없었다.
“듣기로 가이드라고 들었는데.”
“예. D등급 가이드입니다. 지원팀에서 보조 가이드로 일하고 있습니다.”
혹여나 D등급임을 모르실까 봐 확실히 짚어 알려드리니 회장님께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저건 비웃음이야! 그런 마음에 기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갸웃했다. 예상과는 달리 회장님께선 나이에 맞는 아주 인자한 미소를 짓고 계실 뿐이었다. 응? 뭐지?
“고생이 많았겠군. 이번에 우리 태화를 도와주었다는 얘기도 들었네. 감사 인사나 할까 해서 부른 거니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돼.”
“…….”
아뇨. 그럼 안 되는데요. 막 노발대발하시면서 고함도 지르시고, 아무거나 얼굴로 집어 던져도 주시고, 그러셔야 하는데요?
예상치 못한 부드러운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눈을 깜박이는데 그때 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비서실장님이 쟁반에 차를 담아 내왔다. 앞에 놓이는 고급스러운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게 아닌데- 싶어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먼저 차를 한 모금 마시던 회장님께서 소파 옆 협탁에서 금빛의 네모진 봉투를 꺼내셨다.
회장님, 나이스 샷! 좋아요, 완벽해! 퍼펙트 해! 너무 기뻐서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저 좋아하시는 거라고 오해할 뻔했잖아요, 회장님!
“오늘 우리 태화의 임시 가이드 발령서를 받았다고 들었네.”
“네에….”
금빛의 때깔부터가 다른 봉투에 잠시 정신이 팔려 좀 모자란 사람처럼 대답이 늘어졌지만 그럼에도 회장님은 인자하게 웃어 보이시며 테이블 위로 봉투를 올려놓으셨다. 그래서 순간 울컥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터질 뻔한 것을 참으며 후배 상원이를 떠올렸다. 그 징그러운 놈 뺨에 뽀뽀를 백 번쯤은 날려 줄 수 있을 것처럼 가슴이 설��다.
“받아두게.”
“…음… 이게 뭔지 잘….”
차를 타고 가려던 내 어깨를 붙잡은 상원이가 강조했었다. 너무 좋아하는 티는 내지 말라고. 곤란해하면서 모르는 척 능청도 좀 떨다 최대한 가련하게 받아야 발령서 철회 부탁도 쉬울 것이라며 연기 지도까지 해주던 상원이를 떠올리며 비실비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올라가려는 입매를 굳히자 회장님께서 다시 차를 마시며 본론을 꺼냈다.
“내가 주는 용돈이라고 생각하게.”
“예, …예? 용돈요?”
웬 용돈? 대가가 아니라?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
“…회장님께서 저한테 왜 용돈을 주시는데요?”
“…….”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 조심히 묻는데, 그 순간 회장님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내려갔다. 너무 건방졌나 싶어 아차 하고 후회를 하며 앞니로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자 깊게 심호흡을 하시던 회장님께서 다시 입을 여셨다.
“우리 태화가… 계속해서 가이딩을 거부해오던 것은 알고 있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모르는 기관 사람이 있을까.
“예. 한태화씨의 가이딩 거부에 대한 소문은 워낙 유명해서요.”
심지어 눈으로도 확인했다. 폭주 증상 중에도 가이드 몇을 날려버리지 않았던가. 폭주하는 에스퍼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성향이 아니었더라면 뒷짐 지고 물러났을 만큼 당시 한태화의 기세는 험악했다.
“그래, 유명하지. 심지어 폭주 증상을 보인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라네. 몇 번 더 있었지. 열두 살에 능력 발현을 해서 지금 나이까지, 한 여섯 번쯤 일으켰던가.”
“…여섯 번이요?”
말이 안 되는 횟수였다. 폭주 증상은 일반적으로 에스퍼들이 일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보통은 그 전에 가이딩을 받으면 해결되기 때문에 전조 증상까지 가는 경우도 잘 없으니까. 근데 그게 벌써 여섯 번이나 된다고?
“그 직전까지 갔던 것을 포함하면 사실 셀 수도 없지. 그렇게 우리 태화는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네.”
“누가요, 한태화씨가요?”
저희 지금 동일인을 주제로 대화 중인 거 맞죠? 매번 능글맞게 웃으며 질척거리던 한태화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리는데, 이미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계신 회장님은 회한에 젖은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한 채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회장님? 여기요- 앞에 사람이 있거든요?
“우리 태화가 가이딩에 대한 혐오가 크다네. 정신과 상담도 받아봤지만 나아지지 않더군. 외려 자꾸 나빠지기만 해서 어렸을 때부터 수면 마취제로 재워야지만 가이딩이 가능했어. 그러고 나서도 깨고 나면 몇 번이고 속을 게우고, 한동안은 수면장애에 식이장애까지 일으키곤 했지.”
“잠시만요, 저기, 회장님?”
“아까부터 불편하게 회장님이 뭔가. 편히 부르게. 앞으로 자주 볼 사이 아닌가, 우리.”
우리가 왜요? 뭐지? 지금 이 상황은?
“한태화씨의 가이딩 거부가 그렇게 심하다고요? 아니, 분명 어제는….”
순간 말을 이어나가려던 것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 얘기를 꺼내서 뭐 어쩌게. 그런 생각에 얼른 말을 멈췄지만, 이미 그 말을 알아들은 듯 회장님은 아주 만족스럽게 웃어 보이셨다.
“그래, 신기하게도 자네의 가이딩을 받은 후엔 아주 멀쩡하더군.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네. 알아보니 한동안 우리 태화가 가이딩을 해달라고 졸졸 따라다니기까지 했다지?”
“…아뇨, 그, 따라다닌 게 아니라-.”
협박 비스무리한 거였는데요, 그건. 차마 할 수 없는 말이 목 안으로 삼켜졌다.
“자네에겐 정말 고맙네. 하마터면 이번 폭주로 우리 태화를 잃을 뻔했는데, 자네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어. 그래서 이것도 주는 걸세.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언제든 가이딩을 해 준 후엔 나를 찾아오게. 그럼 내 매번 이렇게 용돈을 준비해 두지.”
“…….”
윤상원 이 개새끼. 드라마가 뭐 어쩌고 어째? 어금니를 꽉 깨물며 금빛의 돈 봉투를 내려다보다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다 좋다. 예상이 빗나간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치고, 근데 가이딩 해 줄 때마다 돈을 주겠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지?
가이드가 죽어가기 직전의 에스퍼를 살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형사법적으로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였다. 헤어져 달라, 떨어져 달라에 대한 대가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는 의미다.
“가이드가 에스퍼의 폭주를 막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에스퍼 개인의 생명이 걸린 문제고, 그에 발생할 부차적인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도요. 근데… 이 돈은 뭘까요?”
“임시 가이드를 거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분쟁 조정 위원회까지 찾아가 철회해 달라 했다고.”
“아니, 그건 제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D등급이고, S등급인 한태화씨의 가이딩은 제게 부담되는 일이라… 근데 제가 왜 이걸 회장님께 설명하고 있어야 하죠?”
#26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나가다 이건 아니다 싶어 인상을 찌푸리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회장님께서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그러다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리셨다.
“하하하, 이런, 내가 자네를 오해했나 보군.”
“…예?”
회장님, 우리 같이 좀 웃죠? 제가 지금 무척 소외감이 느껴지려고 하는데….
“아, 내가 아직 이야기를 마저 못 끝냈군. 이 이야길 먼저 했어야 했는데.”
“…무슨 이야기요?”
“우리 태화가 고등학교 때에 이미 피티스트를 찾았다는 이야기 말일세.”
“피티스트… 요? ―예?!”
피티스트(Fittest). 어떤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서 가이딩률이 100%가 나오면 그 상대를 피티스트라고 부른다. 그저 손만 잡아도 완벽한 가이딩이 가능하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에스퍼가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피티스트였다.
그러나 한태화의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고, 무엇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난밤 가이딩을 해줄 때까지 한태화의 상태는 도저히 피티스트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금세 부서져 내릴 것처럼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던 그의 세상을 떠올리며, 그 상태로도 미소를 짓고 있던 한태화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아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태화의 가이딩을 해주는 조건으로 태화 그룹의 전면적인 장학 지원을 요구했네. 피티스트라고 해서 태화가 그 아이의 가이딩을 편하게 받아들였던 게 아니었어. 여전히 가이딩 후 거부 반응은 심했고, 그 아이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지. 한 번씩은 가이딩을 해주다 내쳐지기도 일쑤였고. 그랬더니 그 아이가 위험수당 조로 돈을 요구했지. 우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
가이딩의 조건. 그건 그래,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였다. 그래서 상대를 비난하고 싶진 않았다. 그럴 자격도 없었고. 당장 나만 해도 저 돈 봉투를 받을 생각에 신이 나서 달려온 거니까.
심지어 저 성질머리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한태화의 곁에서 가이딩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을 테니 별도 위험수당 정도야 요구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럼 돈 받아먹은 놈은 지금 어디 있단 말인가? 애 상태는 또 왜 그랬고?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제가 가이딩한 한태화씨의 상태는 벌써 몇 달 이상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손끝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유리처럼 깨져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애처롭기까지 했던 세계의 모습이 다시금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런 내 물음에 회장님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아이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유학을 요구했네. 대신 태화의 가이딩이 필요할 땐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 그런데 한 2년 전부터는 연락을 해도 불퉁하더니, 반년쯤 전부터는 연락조차 받질 않고 있어. 사실 이제는 우리도 반쯤 포기했네. 받을 거 다 받아서 떠난 사람 마음을 무슨 수로 잡겠나.”
“…유학요? 혹시… 이번에도 연락해 보셨나요?”
“했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도 했네. 연결조차 되지 않았지만 말이야. 이제는 마취 총으로 재운 뒤 강제로 가이딩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라서 우리도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고. 그런데 자네가 나타나 준 걸세. 기적처럼 말이지.”
“…….”
찡그려진 미간이 펴지질 않았다. 피티스트가… 그것도 계약 조건으로 받을 것을 다 받아간 놈이 유학을 가서 연락을 끊었다는 것은 에스퍼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이름하여 먹튀. 그로 인해 한태화의 가족들은 놈이 폭주로 죽을 것을 기다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가족의 죽음을 준비하며 정리하던 마음은 뭘까. 가족이 없는 나로선 예상할 수 없는 마음이지만… 가족을 잃을 때의 슬픔 정도라면 알고 있었다. 그 감당할 수 없이 미칠 것 같은 슬픔을. 결국 한 번 더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 그런 개새끼가….”
“…응? 자네 방금 뭐랬나?”
“아뇨,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순간적으로 나온 욕에 아차 싶어 모르는 척을 하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시던 회장님이 고개를 돌리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셨다가 얼른 다시 표정관리를 하며 나를 바라보셨다. 그러나 이내 다시 풋- 하고 웃음이 터지신 회장님은 한참만에야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멈추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회장님께서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고.
“흠, 어쨌든 자네가 임시 가이드 발령을 거부하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단 소릴 들어서, 그래서 오해했네. 돈을 바라고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뇨, 잠시만요. 그건 좀 기분 나쁜-.”
“아네. 지금 보니 그럴 깜냥은 못되겠지 싶어. 그리 솔직해서 사회생활은 어찌하나 걱정까지 되는걸.”
“…잘하고 있습니다. 사실 엄청 잘해요.”
“그렇군. 다행… 흠, 이야.”
중간에 다시 웃음이 터지려던 회장님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잠시 말을 멈추셨다. 그에 따라 나도 말을 멈춘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들고 회장님을 쳐다보았다.
“근데요, 회장님.”
“어허, 딱딱하게 회장님이 뭔가. 편히 부르래도.”
“…그럼 어르신.”
“어르신이라니! 아직 팔팔하네만?”
어디가요. 희끗한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태화 할아버님.”
“…진정 그게 최선인가?”
“예.”
“…말해보게.”
실망한 듯 홱- 하고 고개를 돌리신 회장님께서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셨다. 그 처음과는 달리 심하게 편해지신 모습에 잠시 고민하다 중요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미 매칭률을 맞춰보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요. 그 부탁을 들어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
“이미 선약한 사람이 있다고요.”
“그럼 지금… 우리 태화를 두고… 다른 사람이랑 가이드 계약을 맺겠다는 말인가?”
“일단 매칭률을 좀 봐야겠지만,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내 말에 회장님께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벙하게 입을 벌리셨다. 지긋한 연세에 그러고 계신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으니, 금세 쌀쌀맞은 눈빛으로 변한 회장님이 상체를 앞으로 쭉 뺀 채 다급히 입을 여셨다.
“그 사람이 우리 태화보다 잘생겼나?”
아니, 뭘 저런 걸 갑자기 물으시지? 의아했지만 일단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우리 태화보다 돈이 더 많아?”
“한국에 그럴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요. 아닙니다.”
“그것도 아니면, 나보다 좋은 할애비라도 있어?”
“…그건 모르겠네요. 가족관계를 잘 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