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49)
  • 가이딩을 하느라 콘돔을 쓰지 않았던 덕분에 뜨거운 사정액을 생생하게 느끼며 숨을 몰아쉬던 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개 같은 한태화!

    “이, 이,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가, 지 혼자 가고, 씨발, 난…, 뭐 이런 개 같은 일이….”

    “미,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요한이 갑자기 이름을 부르니까, 너무 좋아서!”

    그래서 미안하다는 놈이 몇 번이나 허리를 추켜올리며 끝까지 안에다 전부 배출을 해? 씨발씨발, 욕밖에 떠오르는 게 없다.

    “너, 비켜! 내가 너, 다신 가이딩 해주나 봐, 이 개새끼야! 비켜! 안 비켜?”

    “잘못했어요! 진짜로요!”

    “이, 씹! 비키라― 아!”

    “다시, 다시 세워서 싸게 해줄게요. 이번엔, 읏, 진짜 세게 박아서, 금방 싸게 해줄 테니까!”

    “하, 하지 마! 그, 으-, 하, 하지 마, 좀!”

    그러나 내가 뭐라든 이미 만회할 생각으로 눈이 맛이 간 놈은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로 탄탄하게 복근이 잡힌 허리를 깊게 들이밀며 거칠게 삽입을 이어갔다. 그 덕분에 홍조가 핀 하얀 얼굴이 느끼는 표정을 바로 눈앞에서 아주 생생하게. 가감 없이 내보였다.

    “아, 너무 좋아요, 좆만 떼다, 평생 이 안에 박아두고 싶을 만큼, 읏, 너무 좋아.”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한태화가 깊이 묻었던 허리를 세우더니 내 다리를 잡고 훌쩍 몸을 접었다. 그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수치스러운 자세 변화에 당황할 새도 없이 허리를 움켜쥔 한태화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 아! 읏, 아-!”

    “조, 아요, 응? 좋아요, 요한? 나도요! 나도, 너무-.”

    아니야! 아파! 아프다고! 빠르게 들이치는 성기에 쾌감은 고통처럼 변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신경 줄이 타들어가는 듯 찌릿거렸다. 내벽은 흡사 두들겨 맞는 것처럼 얼얼했고, 그 얼얼함은 이내 아랫배 부근까지 번져갔다. 누가 주먹을 박아 넣으며 어퍼컷을 퍽퍽 쳐올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좋아요? 안이, 막, 경련하는데?”

    “아-냐, 아파!”

    “거짓말. 안이 막 떨린다니까요.”

    아니라는 의미로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연신 달아오르기만 하는 감각에 온몸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링크는 됐다 풀리기를 반복했고, 아랫배는 불타는 듯 뜨거웠다. 그럴수록 더 세게 밀어붙이던 한태화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스스로 강약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밀어붙이기만 하는 행위엔 내가 별로 못 느끼자 그새 또 혼자 배운 것이다. 이 미친놈이.

    “그만! 끝! 그만- 으- 해!”

    “네, 요한이 싸면요.”

    #22

    길게 미소를 베어 문 한태화가 길게 빠져나갔다 깊게 파고들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나는 아래로 손을 내려 스스로의 것을 쥐고 몇 번 흔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전신으로 쾌감이 내달리며 온몸이 경직됐다.

    “흣!”

    “아, 요한… 설마, 벌써 쌌어요?”

    아쉬운 목소리에도 아무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탈력감에 완전히 뻗어 버린 채 숨만 몰아쉬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안에서 꽉 조여드는 감각을 느끼던 한태화는 여전히 발기한 채 안쪽 깊은 곳을 채우고 있었고 그것은 쉽게 나가 줄 낌새가 아니라서 나는 애원하는 눈으로 놈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요한, 그런 표정은 지금 지으면 안 되는데….”

    “개소리 그만하고! 제발, 그만하자, 응? 나 너무 힘들어. 나 싸면 그만한다며-.”

    “알았어요. 요한이 힘들다고 하면 하는 수 없죠.”

    “…정말?”

    의심이 들긴 했지만 일단 밝아진 얼굴로 상체를 들어 올리는데, 그런 내 상체를 꾹 눌러 일어나는 것을 막은 한태화가 축 늘어져 있던 내 한쪽 다리를 잡고 제 어깨 위로 걸쳤다. 이게, 무슨!

    “지금 뭐 하는, 윽!”

    “저도 이번 한 번만 싸고 그만할게요.”

    “…뭐?”

    “넣어놨던 건 마저 빼야죠. 금방 쌀게요.”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어깨에 내 다리를 걸친 한태화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이자 다리가 가슴 쪽으로 굽어들었다. 그에 한층 더 깊어진 삽입에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눈앞에 있는 미친 새끼가 새초롬하게 웃어 보였다. 이, 이, 이 미친 동정새끼가!

    “하지 마! 너, 내가 진짜 가만 안 둘-!”

    “딱 한 번만 하고 끝낸다니까요.”

    저 변태 새끼가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아나 보다. 이미 아래를 파헤치며 느끼는 부분만을 집요하게 자극해 오는 한태화의 성기부터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문제는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너무 그곳만을 노리니까 정말로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는 점이다.

    “그만, 태화야-.”

    “아… 요한이 이름 불러 주는 거 너무 좋아요. 요한… 더요, 더 불러줘요.”

    “읏, 그만, 아!”

    “이름, 부르라고요. 네?”

    순간 쾅하고 들이친 성기에 퍼뜩 몸이 튀어 올랐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며 허리를 세운 채 몸을 굳히자 한태화로부터 만족스러운 숨이 터져 나왔다.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

    “태화야, 흣, 한태화.”

    “네, 요한. 저예요. 제가 요한의 에스퍼예요.”

    요령 좋은 한태화 새끼는 섹스도 무척 빨리 배웠다. 결국 한태화로부터 벗어나길 포기한 채 나는 조금씩 놈을 따라 허리를 들썩거렸다. 미칠 것 같은 감각에 온몸이 잠식당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하나였다.

    나, 이쪽으로 꽤 소질 있구나- 라는.

    ***

    눈을 뜨고도 한참을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폭풍처럼 몰려든 후회와 걱정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슬쩍 고개를 돌리자 내 쪽을 바라본 채 잠들어 있는 한태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숱이 많고 길게 뻗은 속눈썹이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 선 고운 얼굴은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그래도 처음으로 누군가의 가이딩을 온전히 해봤네. 그것도 무려 S등급 에스퍼의 가이딩을. 이제껏 응급처치조로 가이딩을 해 준 것 외에 이렇게 누군가를 제대로 가이딩해 본 것은 한태화가 처음이었다. 그것은 몰려든 걱정과 후회 속에서도 묘하게 뿌듯함을 낳았고, 우습게도 좀 자랑스럽기도 했다. 나도 엄연한 가이드라는 사실을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온몸을 처참하게 다 바쳐야 했지만.

    “…근데 지금 몇 시지?”

    비록 새벽까지 시달린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푹 자고 일어난 만큼 머리는 상쾌했다. 그러나 문제는 매일 아침 정시에 출근해야 하는 공무원이 느낄 수 있는 흔한 기분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낯선 기분에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하다가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오후 1시?

    어제 그 난리를 부렸으니 작전은 이미 물 건너갔다 봐야 했고, 그러니 오늘쯤엔 출근을 해서 경위서를 작성해서 올렸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시말서 감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후 1시라고? 무단결근까지 하고? 내가 진짜 미쳤구나.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자 벗은 몸을 덮어주고 있던 이불이 내려가며 얼룩덜룩한 몸이 드러났다. 다행히 자는 사이 대충 닦아 놓기는 한 것인지 몸은 깨끗했다.

    문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곳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몸의 근육통이었다. 침대를 내려가기도 벅찬 몸 상태를 느끼며 억지로 꾸물꾸물 몸을 움직이자 등 뒤로 식은땀이 다 흘렀다. 아, 뿌듯이고 자시고, 저 처자는 새끼를 한 대만 쥐어박았으면 소원이 없겠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한 뼘씩 커지는 폭력성을 욕으로 눌러 참으며 침대 아래로 몸을 내렸다. 그러자 온몸의 근육들이 제각기 비명을 질러댔다. 무리하게 꺾인 채 박히느라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벗어 놓은 옷가지들을 향해 기어가는데, 그 짧은 거리에도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훔치며 옷가지를 헤쳐 휴대폰을 꺼내 들자 역시나 엄청난 수의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 알림이 떠 있는 화면이 나타났다. 그에 이번엔 다른 의미로 손이 떨렸다. 아 씨발, 불길해.

    부재중 통화 수 48건. 받은 메시지 76건.

    대부분의 발신인이 차수혁과 팀장님이셨고, 그 외에도 사무실 팀원들과 기관 동기들, 심지어는 보육원 원장님에게서도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아니, 원장님은 또 왜?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럼에도 설마- 하는 희망으로 받은 메시지를 확인하자 난리가 났던 어제의 상황이 고스란히 보였다.

    [차수혁: 형, 괜찮아요? 제가 지금 갈까요? 오후 11:14]

    [차수혁: 전화는 왜 안 받아요. 저 들어가요? 오후 11:53]

    [차수혁: 요한형, 연락 좀 주세요, 걱정돼서 그래요. 오전 12:19]

    그런 류의 걱정이 담긴 수혁이의 메시지는 그나마 나았다.

    [팀장님: 야, 광땡아? 아니지? 지금 내가 좀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오후 11:48]

    [팀장님: 야, 너 어디야? 너 진짜 한태화한테 가이딩 했어? 오후 11:59]

    [팀장님: 서요한, 전화 안 받냐? 오전 12:07]

    [팀장님: 전활 왜 안 받아 이 새끼야! 오전 12:10]

    [팀장님: 야이미친놈아하지마하지말라고한태화가이딩하지말란말이다 오전 12:23]

    [팀장님: 서요한, 하지 마! 오전 12:31]

    [팀장님: 요한아… 너 지금 작전 수행하느라 연락 안 되는 거지? 응? 오전 1:18]

    [팀장님: 내 잘못이야… 그날 널 그 공룸으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제발 전화 좀 줘. 오전 1:56]

    [팀장님: …요한아. 오전 3:34]

    [팀장님: 힘들 텐데 내일은 쉬고 모레 나와라. 오전 4:43]

    [팀장님: 요한아, 한태화는 안 된다. 응? 오전 4:44]

    의심에서 시작해 분노로 발전했다가 현실도피를 거쳐 자기반성으로 이어진 메시지는 냉정한 이성을 되찾고서야 끝났다. 그 새벽까지 이어진 끝없는 메시지들을 살피다 마지막엔 결국 이마를 부여잡았다. 마지막을 장식한 원장님의 메시지가 더욱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요한아, 너희 팀장님이 술 먹고 전화하셔서 네 이름 부르면서 한숨만 쉬시는데, 무슨 일 있니? 걱정돼서 그러니 연락 좀 주렴. 오전 2:55]

    “…아, 좀, 제발요, 팀장님.”

    내가 아주 쪽팔려서 살 수가 없어요! 이대로 먼지로 변해 사라지고 싶을 만큼 쪽팔렸다. 아주 온 동네방네 소문이 났구나. 내일 출근을 어떻게 하냐고.

    그렇게 한참 동안 현실을 부정하며 쪽팔려하다, 걱정하느라 잠도 못 주무셨을 원장님께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말라는 말과 함께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메시지를 넣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많이 걱정했을 수혁이에게 연락을 남기려던 때였다.

    “요한? 거기서 뭐 해요?”

    “…일어났습니까?”

    “예. 요한이 없어서요. 근데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요?”

    자다 깬 모습도 일부러 세팅한 것처럼 화보스러운 한태화가 뚱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참… 무섭게 어울리긴 했는데, 어제, 아니 오늘 새벽까지 당한 게 많다 보니 사실 곱게 보이진 않았다.

    “…사무실에서 연락이 와서 답장해주고 있었습니다. 걱정하는 것 같아서요.”

    “우습네요. 내가 옆에 있는데, 요한 걱정을 왜 해요.”

    네가 내 옆에 있어서 다들 걱정하는 거라고, 이 말을 굳이 입 아프게 해야겠니? 그런 시선으로 한태화를 빤히 쳐다보는데, 갑자기 나체로 주저앉아 있던 몸이 둥실 하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 어어-?!”

    “이리 와요, 요한. 왜 찬 데 앉아 있어요. 마음 아프게.”

    헛소리를 하는 한태화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데, 공중으로 띄워진 몸이 침대 쪽으로 끌려가다가 한태화의 눈앞에서 멈춰 섰다. 발가벗은 몸의 어느 한 부분도 가리지도 못한 채 멍하니 한태화를 내려다보다 놀라서 얼른 다리를 오므리는데, 별안간 한태화가 활짝 웃으며 양팔을 펼쳤다.

    “자, 이리 와요.”

    “…이게 무슨 개수작입니까?”

    당연히 말이 곱게 나올 리 없었다.

    #23

    “왜요? 몸 컨디션 별로잖아요. 잠들기 전에 아프다고 계속 칭얼거릴 만큼 안 좋은 것 같아서 편하게 옮겨준 건데요.”

    칭얼이란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그만하라고 빌었던 게 네놈 눈엔 칭얼거리는 걸로 보였구나. 아하, 뭐 이런 개호로새끼를 봤나.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뚱하니 화난 표정을 짓고 있자 놈이 웃으며 펼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몸이 놈의 품 안으로 곱게 안착했다.

    “편하죠?”

    “…뭐, 조금?”

    그래, 개호로새끼의 말이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편하다고.”

    한태화는 거 보라며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일이 떠올라 빈정이 좀 상해 애교를 부리듯 비벼오는 뺨을 손으로 밀어냈는데, 그 탓에 잘난 얼굴이 눌린 찐빵처럼 찌그러졌다. 뭐, 그럼에도 못 봐줄 얼굴은 아니었다.

    “힘들게 가이딩 해놓은 거니까 좀 아껴 써요. 그렇게 막 쓰다 또 폭주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럴 리가 없죠. 앞으로는 요한이 계속 가이딩 해줄 거니까.”

    “…무슨 소립니까? 내가 왜요?”

    “요한은 이제 제 가이드니까요.”

    뾰족한 내 대답에도 놈의 웃음을 사라질 줄을 몰랐다. 거참 꿈도 크지. 어쩐지 정신세계가 꽃밭이더니만, 해맑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제가 왜 한태화씨 가이듭니까? 그게 왜 그렇게 되죠?”

    “…요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해 보인 놈이 미려하게 근육이 붙은 팔로 좀 더 세게 끌어안아 왔다. 켁, 이놈이 마음에 안 드는 말 좀 했다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드네?

    “아픕니다, 이것 좀 놔 봐요!”

    “…요한? 요한이 자꾸 이상한 소릴 하니까….”

    이상한 소리는 무슨. 이성적인 소리겠지. 이상해 보이는 것은 바로 한태화였다.

    “우리가 가이딩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이번 건 그냥 응급 처치 같은 겁니다. 나는 지원팀 보조 가이드니까요.”

    그 말에 한태화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요한 나는 이렇게 말끔히 가이딩 받아 본 적이 처음이에요. 가이딩 후에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처음이고, 누구랑 키스를 해본 것도 처음이고, 섹스를 한 것도 처음이에요. 제 모든 처음을 가져갔으면서, 절 버릴 생각인 건-.”

    “잠, 잠깐만요! 잠깐 그 입 좀 다물어 봐요.”

    과도한 처음 퍼레이드에 질려 손으로 입을 막자 놈의 눈매가 불만스럽게 가늘어졌다. 그러나 나야말로 억울했다. 누군 처음 아니었냐고! 그런 마음으로 한태화를 노려보는데 입을 막고 있던 손바닥이 세게 물렸다. 악! 이 개새끼가!

    “읏! 아프잖아!”

    “요한, 전 어제가 처음이었다니까요.”

    아,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마음이었다. 그리고 나도 처음인데 왜 자꾸 제 처음만을 강조하는지 몰라 뚱하게 쳐다보니 놈이 어울리지도 않게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 처음을 이렇게 강렬하게 가져가 놓고, 버리려는 건 아니죠? 그죠, 요한?”

    “한태화씨.”

    “네.”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네?”

    “나도 처음이었다고!”

    화가 나서 한태화의 머리칼을 잡아채며 냅다 소리를 질렀는데, 놈은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내 손에 머리채를 내어준 채 맹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뭐가요?”

    “뭐긴 뭐야! 남자랑 잔 것도, 누굴 이렇게 가이딩 해 준 것도, 나도 전부 다 처음이라고! 심지어 대준 것도 난데, 왜 나만 따먹고 버리는 나쁜 놈으로 만들고 지랄입니까?!”

    “요한?”

    “뭐요!”

    “…….”

    갑자기 말이 없어졌던 한태화가 내 몸을 으스러트리려는 것처럼 세게 끌어안았다. 악- 하고 놀라 단단한 어깨를 손바닥으로 내리쳤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악, 아파! 아프다고!”

    “요한, 역시 우린 운명인가 봐요!”

    이 또라이가 점점! 운명은 개뿔, 무슨 운명!

    “운명 같은 소리 하네! 놔, 놓으라고! 사람을 한시도 못 쉬게 괴롭혀 놓고, 운며엉? 개소리하지 말고 놓으라고!”

    “요한, 사랑해요.”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이 미친놈아!”

    그러나 미친놈이 왜 미친놈이던가. 사람 말이 안 통하니 미친놈이지.

    “어젠 내내 ‘태화야’라고 불러줬잖아요, 계속 그렇게 불러줘요, 요한.”

    순간 얼굴로 열이 몰렸다. 정말, 진짜, 진심으로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그렇게 안 부르면 계속해서 아프게 괴롭히니 원하는 대로 불러줬던 것뿐이다!

    “그, 그건 한태화씨가 자꾸- 으악, 미치겠네, 씨발!”

    “왜 욕을 하고 그래요. 요한도 좋아했잖아요. 태화야, 거기 좋아, 빨리, 더 세-.”

    “…….”

    이 새끼가, 진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노려보자 그 위로 보이는 눈이 가느스름하게 접히며 심술궂은 빛을 띠었다. 그리곤 제 입을 막고 있는 내 손을 손쉽게 붙잡아 떼어낸 한태화가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추며 능글맞게 웃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할게요. 요한이 알려주면 더 잘할 수 있어요.”

    “…….”

    뭘? 애가… 왜 자꾸 사람 말로 개소릴하지? 하하하. 마른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촌극이 이어졌다.

    ***

    세상의 행복이란 행복은 다 가진 것처럼 굴며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한태화를 간신히 떼어놓고 집으로 돌아와 쉰 다음 날, 굳은 마음을 먹고 출근을 하자 기관 정문에서부터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런 뒤 이어진 자연스러운 수군거림에도 얼굴 근육을 굳힌 채 모르는 척 걸음을 옮기는데 수군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씨발.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 사무실 문을 열자 나인 것을 확인한 팀원들이 멍한 얼굴로 시선을 보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금세 다시 문이 열리며 후배 놈이 뒤따라 들어왔다.

    “좋은 아침- 우어억! 선배!”

    “…말 걸지 마라.”

    “아니, 저, 선배 정말-.”

    “상원아.”

    말을 걸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굳이 말을 붙여 오는 버릇없는 후배의 말을 자르고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후배 놈이 눈치를 보듯 시선을 굴리며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네, 선배.”

    “입 다물라고.”

    “…네.”

    찔끔한 얼굴의 후배가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평소 하던 대로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는데 그새를 못 참고 이번엔 강선배가 말을 붙여왔다.

    “요한아, 나도 입 다물어야 해?”

    “…예.”

    “나 네 선밴데?”

    “그럼 선배는 입 좀 닫아주세요.”

    “개새끼.”

    “멍멍.”

    여유로운 척 말을 받아치며 개소리까지 내어주고 나서야 선배는 못마땅한 얼굴로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최선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광땡이 저놈 성깔 좀 봐. 위아래 없는 건 여전하다니까.”

    “…….”

    “요한아, 멍 해봐.”

    “…멍.”

    “오냐. 그 성의를 봐서 나도 입을 다물긴 하는데, 어차피 시간 지나면 네 입으로 말하게 돼있어. 알지?”

    “…….”

    선배의 말에도 입을 꾹 다물자 그제야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에 기계적으로 기관 내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 나. 아침부터 예민해진 신경에 벌써부터 피곤함이 몰려들어 가볍게 눈가를 주물렀다. 아직도 한태화를 가이딩했던 몸 상태는 최악의 컨디션을 찍고 있었다. 그런 데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몰려오니 더 힘이 들어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잘근잘근 엄지손톱을 씹으며 퇴근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를 초조하게 계산하다 한참이나 남은 시간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일이나 하고 있다 보면 시간이 빨리 갈까. 그런 마음으로 오늘치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할 겸 기관 내부용 메일함을 열었다. 쉬는 사이 온 관련 부서 문서들을 클릭하며 할 일을 꼽아보는데, 새로 창이 뜬 인사부 문서 창을 아무 생각 없이 살피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뭐야?!”

    “뭐, 뭐야? 놀랬잖아.”

    제일 가까이에 앉아 있던 강선배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지만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큼 문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놀라서 굳은 내 모습에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던 팀원들이 슬금슬금 주위로 몰려들어 함께 모니터를 확인했다.

    “또 뭔 일인데 그래. 네가 한태화의 가이딩을 했다는 소식보다 놀랄 일은 없을 텐데.”

    “이게 뭔데? 임시 가이드 발령… 서? 응? 지원 3팀의 가이드 서요한님을 에스퍼 한태화님의 임시 가이드로… 어?”

    “…이게 가능한 거예요? 가이딩 계약은 원래 당사자 계약 원칙이잖아요. 발령서 형식으로도 가이딩 계약을 맺을 수 있나?”

    “그게… 잠깐만, 내부 규정서 좀 확인해 봐야겠다.”

    화면에 떠 있던 발령서를 읽던 강선배가 상원이의 물음에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책상 서랍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나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됐다. 나는 이미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으니까.

    “내부 규정… 부칙에 있어요. 특수한 상황으로 인정될 시 기관장의 판단에 따라 한시적으로 임시 가이딩 계약 명령이 가능하다고.”

    “…어?”

    “선배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에스퍼랑 가이드 수가 적은 지역에서는 가끔 있는 일이니까.”

    그러자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최선배가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감싸 쥐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 너, 강원 지부 쪽에서 2년 정도 있다 왔지?”

    모두의 시선이 문서의 가장 아래쪽의 부서명이 적힌 란으로 향했다. 그러자 진짜 기관장의 직인이 붉은색으로 커다랗게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을 당했던 가이드 선배 하나가 이걸로 헌법소원까지 갔었는데, 한시적 기간을 정한 경우까지 위헌으로 볼 수는 없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받는 것을 보고 서울로 올라왔었다. 그때는 그냥 남의 일이라 여겨 강 건너 불구경하듯 구경만 했었는데… 그 조용하던 선배가 생난리를 치던 게 생각나며, 그가 왜 그렇게까지 반응했는지가 이제야 이해됐다. 이래서 사람은 같은 상황에 처해 봐야 그 처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용감한 가이드 상을 주진 못할망정 똥을 주다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때 문득 어제저녁, 한태화로부터 받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24

    [한태화: 내일이 너무 기대돼서 잠이 안 와요ㅠㅠ 오후 10:20]

    [한태화: 요한, 자요?? 오후 10:38]

    [한태화: 잘 자요. 제 꿈 꿔요, 요한♥ 오후 10:39]

    잠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 메시지가 지금은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너는… 왜 오늘이 그렇게 기대됐던 걸까, 한태화 이 개자식아.

    “저 좀…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는데?”

    최선배가 당황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문을 열고 나가려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인사부랑 분쟁 조정 위원회 좀 다녀오려고요.”

    “…가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데. 기관장님 명령이잖아, 이거.”

    그렇겠지. 회의적인 최선배의 말에 우울하게 낯빛을 가라앉히자 선배도 걱정스럽게 안색을 굳혔다. 그러나 이대로 넋 놓고 있는 것도 성미에 안 맞는다는 게 문제였다.

    “…일단 다녀와 보고요.”

    문을 닫고 나서며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온 것이 없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줄기차게 메시지를 보내 사람을 괴롭히던 놈이 오늘따라 연락 한 통이 없다. 그래서 더 빡이 쳤다. 한태화 너, 두고 보자, 넌 죽었어, 이 새끼야.

    빠득하고 이가 갈렸다.

    ***

    하루 종일 종종거리고 뛰어다녀 봤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인사부에서는 기관장님의 명령이라는 말만 되풀이해서 해댔고, 분쟁 조정 위원회에서는 아직 임시 가이드로서의 활동도 없는데 분쟁 조정을 해줄 수는 없다는 기계적인 답변만을 해왔다. 그래서 신청한 기관장님 면담 요청은 당연히 거절당했다. 기관장님이 외부 활동으로 자리에 계시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도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버텨도 봤는데, 업무 방해하지 말란 말이나 들으며 기관장실에서 쫓겨났다.

    그사이 인사 발령 공고가 내려와 각 층의 게시판에는 내가 한태화의 2달짜리 임시 가이드가 됐다는 발령장이 붙었고, 나는 모든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발령장을 수거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통해 내려진 공고까지 삭제할 권한은 없어서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부재중 연락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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