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49)
  •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당황한 것 같은 거친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러나 나도 당황스러웠다. 한태화의 가이딩 거부에 관한 소문이 아무리 세가 내의 공공연한 소문이래도 설마 오성파 놈들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김동원이 말을 하라는 듯 거칠게 내 목을 잡고 흔들었다. 아프잖아, 이 개새-.

    “크윽!”

    그 순간 목을 잡고 흔들던 김동원의 손이 떨어져 나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엎어졌다. 갑작스럽게 풀려난 것이 의아해 엎어진 채 고개를 들자 김동원의 멱살을 움켜쥔 한태화의 가라앉은 시선이 나를 스쳤다. 성인 남자를 한손으로 들어 올린 모습에 놀라기도 잠시, 갑자기 터진 불기둥에 놀라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엎드려야 했다. 그리고 그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순간, 갑자기 억지로 몸이 일으켜 세워지더니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수혁아?”

    “요한형, 빨리요!”

    어디에 숨어있던 것인지 갑자기 튀어나온 수혁이가 내 팔목을 잡아끌며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에 당황하여 따라가다 제 자리에 멈춰 서며 잡힌 손목을 반대로 힘주어 잡았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빨리 따라와요! 지체하면 더 위험해요.”

    #17

    또다시 다짜고짜 팔을 잡아끄는 수혁이에게 끌려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김동원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린 모습 그대로 불길에 휩싸여있는 한태화가 보였다. 놈은 새카맣게 가라앉은 고요한 시선으로 멀어지는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제 몸을 태우며 터지는 불길 속에서도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은 채 서 있는 한태화를 보는 순간 어쩐지 가슴이 불안하게 술렁였다. 결국 그 모습이 눈에 밟혀 앞서 달리고 있는 수혁이의 팔을 잡아당겨 멈추게 했다.

    “수혁아, 한태화씨가 김동원을 붙잡았잖아. 우리도 가서 도와줘야지!”

    “돕고 자시고, 한태화 기운이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이 건물에서 나가야 한다고요!”

    “…뭐?”

    정신이 없는지 다다다 말을 쏟아낸 수혁이는 다시금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또다시 끌려가며 불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허공에 떠올라 있던 물건들이 사납게 날아들며 이리저리 벽에 가서 처박히기 시작했다. 딱히 나나 수혁이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힘이 과해 넘친 것처럼 아무 방향으로나 날아가 처박히는 물건들의 모습에 놀라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숙였다. 그러자 수혁이에게 잡혀 끌려 내려가고 있던 계단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싶더니 그 일부분이 부서져 내렸다.

    “차수혁!”

    수혁이가 서 있는 부분의 계단이 부서져 내리더니 금세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놀라서 중간이 끊어진 계단에 매달려 바닥을 확인하자 부서진 계단의 잔해더미를 헤치고 일어난 수혁이가 몇 번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곧장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형, 뛰어요. 내가 잡아줄게요!”

    “…….”

    일반 건물보다 훨씬 높은 천장을 가진 클럽은 2층의 높이 역시 일반 건물보다 훨씬 높았다. 그 어중간한 위치에서 끊어진 계단의 높이조차도 수혁이의 머리 위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선뜻 그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 높이를 가늠해 보다 눈살을 찌푸리는데 뒤에서 갑자기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요한.”

    “…한태화씨.”

    멱살을 잡고 있던 김동원은 어디로 내팽개쳤는지 홀로 남은 한태화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단정한 손은 엉망이 된 주변과 대비되어 유달리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잡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진 않았다.

    “이리 와요.”

    “…….”

    “제발요.”

    그 얼굴로 애절해지지 말라고! 저건 반칙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도 잡기 싫던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히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고 끊어진 계단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은 정신을 차리곤 있었지만, 불기둥이 사라졌음에도 한태화에게선 열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놈이 얼마 전까지도 폭주의 전조 증상을 보이며 공룸을 찾았던 사람이라는 것이 떠올라 낭패감이 들었다. S등급이 공룸을 찾았을 정도면 급한 상태였다는 의미고, 실제 가이딩을 위해 링크했던 그의 세계 역시 금방이라도 망가져 버릴 것처럼 위태롭지 않았던가.

    그 이후 당연히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한태화의 가이딩 거부는 방금 전 확인했던 것처럼 아주 유명한 일이니까. 그래서 재회한 이후에도 계속 가이딩을 해달라고 한 거였나…. 거기까지 생각하다 후회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가이딩은 제대로 받았냐고 물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이드로서 너무 안일했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가 지금 폭주 중인 S등급의 에스퍼로, D등급의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상대라는 점이다. 이 자리에서 가이딩이랍시고 섹스라도 할 게 아니라면 나는 이만 손을 떼고 물러나야 한다는 의미고.

    “요한.”

    그러니 저토록 애절하게 내 이름을 불러오더라도 나는 저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유혹을 뿌리치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며 고개를 돌려 계단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넓게 팔을 벌린 수혁이가 아직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태화씨.”

    “…….”

    매번 이름을 부르면 어느 상황에서든 ‘네,’ 하고 대답하던 남자가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며 단단하게 표정을 굳혔다.

    “기다리세요. 나가서 제대로 된 가이드를 데려오겠습니다.”

    “…….”

    “잠시만 기다려줘요. 한태화씨 폭주하게 안 둡니다. 나는 절대 내 눈앞에서 그런 꼴 안 봐요.”

    “요한….”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금방 다시 올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자세를 잡고 1층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혁이가 그런 내 몸을 받으며 함께 바닥으로 쓰러져 나뒹굴었다.

    “으- 수혁아, 괜찮아?”

    “네, 형. 저는 괜찮아요.”

    벌떡 일어나 제일 먼저 수혁이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이 보이지 않는 멀쩡한 모습에 수혁이의 손을 잡고 바닥에서 일으켜 세워주자 툭툭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제 몸을 살피던 놈이 씨익 하고 웃는다. 쓸데없이 이런 상황에 멋있어 보이고 지랄이야.

    “현장 지원팀은? 연락했어?”

    “네. 아까 바로 연락해 뒀어요. 지금쯤 도착했을 거예요. 현장팀 지부가 이 동네랑 가까우니까요.”

    “그래, 그럼 빨리 나가자. 가서 제대로 된 가이드를 데려와야 해.”

    “…한태화씨 때문에요?”

    “응. 빨리 따라와.”

    이번엔 내가 마음이 급해져 수혁이의 손을 무작정 잡아끌며 클럽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러자 그사이 출동해 있던 현장 지원팀의 차량들이 클럽 앞에 멈춰 서 작전을 짜고 있었고, 저 멀리에선 좁은 골목길을 헤집으며 들어서고 있는 소방차의 모습도 보였다. 한태화의 폭주 때문이 아니라 샐러맨더가 불을 사용하니 혹시 몰라 부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될 것 같았다.

    “가이드! 지원팀에서 나온 상급 가이드분 안 계십니까?”

    앞으로 달려나가며 지원팀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뒤따라온 수혁이가 그런 내 어깨를 부여잡고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것을 막은 채 현장 담당 관리자에게 끌고 갔다. 수혁이는 차분한 목소리로 현장 팀장에게 한태화의 상태를 알렸다. 그가 현재 폭주 중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한태화씨라면 분명 가이딩을 거부할 겁니다.”

    “끄응, 하필 저 안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게… 그 한태화라고? 심지어 폭주 중이고?”

    현장팀 팀장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감싸며 대기해 있던 에스퍼들을 향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상급 가이드를 찾아 바쁘게 움직이던 고개가 수혁이의 손에 잡혀서야 그 움직임을 멈췄다.

    “형, 일단 진정부터 해요.”

    “그치만 저 안에서-!”

    “한태화씨의 가이딩 거부는 유명해요. 폭주 증상이 있다고 해도 가이딩은 쉽지 않을 거고요. 그러니 일단 제압부터 하는 게 1순위라고 봐야 해요.”

    “…제압이라니. 설마-.”

    “현장에는 에스퍼들이 먼저 들어갑니다.”

    옆에 서 있던 현장 팀장이 끼어들더니 담배를 빼 문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에스퍼라니? 가이드가 아니라? 아직 정신도 있는데?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마주친 현장 팀장이 담배를 권하듯 담뱃갑을 흔들어 보였다.

    이 심각한 상황에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수혁이의 말대로 진정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담뱃갑을 받아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불을 붙인 후 담뱃갑을 돌려주자 그것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은 현장 팀장이 골치가 아프단 눈으로 클럽을 바라봤다.

    “후우-,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네. 에스퍼 팀을 몇 팀 더 불러야겠어. 샐러맨더 하나 잡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 이 인원으론 될 일이 아니야.”

    현장 팀장의 말이 끝난 시점이었다. 클럽의 건물 외벽을 감싸고 있던 불투명한 검은 판넬로 쩌억쩌억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얼굴의 현장 팀장이 수혁이를 향해 물었다.

    “안에 남은 사람은?”

    “손님들은 모두 대피시켰는데, 직원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샐러맨더도 저 안에 있지 싶은데요.”

    “그 새끼야 어찌 되든 알 바 아니고. 내가 테러범 안위까지 걱정해 주게 생겼어? 내 새끼들이 죽어 나갈지도 모를 판에? 뭐 해, 이 자식들아! 에스퍼들은 당장 전방에 전열해!”

    담배 필터를 짓씹으며 내린 팀장의 사나운 명령에 현장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기운을 버티지 못한 건물의 외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잔해 사이로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오직 한태화 한 명뿐이었다. 커다랗게 쪼개진 시멘트 더미가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데도 한태화는 전혀 신경 쓰질 않았고, 실제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다. 제 능력으로 쏟아지는 건물의 잔해를 간단히 막아내며 놈은 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저 괴물 같은 새끼.”

    경멸이 담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싸늘한 시선으로 한태화를 바라보고 있는 현장 팀장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명백한 적의 속에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불안감과 공포, 그리고 자신과는 다른 이질적인 상대를 향한 경멸과 죽음을 앞둔 이에 대한 동정심이 사람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나 역시 이와 비슷한 감정을 알고 있다. 나와는 다른 존재에 대한 배척감과 경계심, 그리고 불쌍한 것을 보는 동정심. 그것은 고아로 자라온 내 삶을 내도록 따라다니던 감정들이었다. 낯익지만 죽어도 익숙해지지는 않던 그 시선들이 전부 한태화를 향해 있는 이 기묘한 광경 속에서 나는 차수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마 그 역시 사람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혁이의 얼굴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진한 안타까움이 떠올라 있었다.

    #18

    외로움에서 비롯된 동질감.

    내도록 차수혁과 내 사이에서 흐르던 좋았던 분위기가 이 감정에서 기인하고 있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갑자기 어마어마한 열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태화.

    시선은 이제 홀로 서서 버티고 있는 한태화에게 고정되었다. 그는 지금 저곳에서 홀로 죽어가고 있다. 저를 보호해주던 힘에 짓눌려 이제는 스스로가 위험해진 상황에서 곧 이성을 잃고 날뛰게 될 것이고, 그렇게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가슴에 들뜬 상태로 떠올라 있던 감정들이 삽시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찐득하고 어두운 감정들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복잡한 감정 속에서 다 태운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끈 채 한태화를 응시했다.

    서러웠다. 나도, 수혁이도, 현장에 있는 다른 모든 에스퍼들도. 그리고 저 부족한 게 없어 보이던 한태화도 모두. 이 순간만큼은 공평했다.

    ***

    폭주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한태화를 제압하는 일은 수월치 않았다. 에스퍼들은 그 힘에 튕겨 나가떨어졌고, 간신히 그 기운을 누른 채 가이드를 가까이 보내 봐도 한태화에 의해 집어던져졌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고개를 숙인 채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깜박이고 있는 한태화를 바라보며 나는 어쩐지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봐도 정신이 나질 않는지 미간을 찌푸린 한태화는 욕설을 지껄이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내가 아까 나오면서 뭐라고 했더라? 기다리고 있으라고, 다시 돌아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워낙 급박한 상황에 내뱉었던 말들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그런 맥락이었던 것 같다. 당신에게 맞는 가이드를 데려올 테니 기다리라고.

    그때 또다시 한태화에게 가이딩을 시도하려다가 그의 힘에 밀려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히는 상급 가이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바닥에 처박힌 그를 다른 사람들이 부축하여 간신히 일으켜 세웠고, 그들의 시선은 이내 한태화를 향했다.

    질린 눈으로 진짜 괴물을 바라보듯 보는 시선에도 한태화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럼에도 힘이 제어되지 않는지 곧 여기저기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질린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 위로 명백한 공포와 체념의 빛이 어렸다.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나 역시 비슷했다. 그저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릴 뿐이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은 채 점차 더 물러나 둥글게 커지는 공간을 바라보다 복잡한 마음을 다잡으며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위태로워 보이는 한태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러자 뒤에서 뻗어온 손이 그런 내 팔을 잡아챘다.

    “형, 하지 마요. …가지 마세요. 형도 위험해요.”

    “…수혁아.”

    “가지 마요, 형. 제발.”

    팔을 잡고 늘어지는 수혁이의 목소리가 애절했다. 내가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알아차린 표정의 차수혁과 한태화를 번갈아 쳐다보다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럴 줄 모르고 기다리라고 했거든. 저기서.”

    “…곧 기관에서 다른 에스퍼들이랑 가이드들이 나올 거예요. 그럼 금방 해결돼요. 그러니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형. 곧 다 해결돼요.”

    “…….”

    “형, 저거 지금 사람 아니에요. 이런 말, 형이라면 싫어할 거 아는데, 이 사태를 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차수혁씨.”

    그때 찡그린 얼굴로 내 팔을 잡고 애원하던 차수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곤 멍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형?”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알면 말하지 말지 그랬어요. 지금 한태화씨는 그냥 아픈 겁니다. 그런데 아픈 사람을 두고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니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라, 그런 식으로 말할 겁니까? 본인도 에스퍼면서?”

    “…….”

    “그리고 등급이 뭐든 나도 가이듭니다.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죠. 가이드가 눈앞에서 폭주를 일으키고 있는 에스퍼를 두고 도망가서야 되겠어요? 그게 괴물이든 사람이든 말입니다.”

    내 손을 강하게 잡고 있던 차수혁의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이내 떨어져 나갔다. 차수혁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제 아랫입술을 괴롭히다 미련을 떨치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형이 이런 사람이란 거 한눈에 알아봤는데… 그래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리고….”

    “나도 시도해보고 안 되면 그냥 돌아올 겁니다. 근데 내가 기다리라고 했어요. 일이 이렇게 될지 모르고, 다른 가이드를 데려올 테니 기다리라고. …다른 가이드를 데려갈 수는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 나라도 다시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들어도 변명처럼 들리는 말에 차수혁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다 연거푸 세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제발 몸조심하시고요.”

    “…….”

    “대신 제가 매칭 검사해 보자고 했던 거, 그건 계속 유효하다는 거 하나만 기억해 주세요.”

    “뭐?”

    놀라서 되묻는 말에도 제 할 말을 마친 차수혁은 몸을 돌려 작전을 세우고 있는 기관 요원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다가 또다시 어딘가가 터져나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먼 거리임에도 느껴질 만큼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던 한태화가 힘 조절이 안 되는지 인상을 잔뜩 쓴 채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이제 진짜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내가 가이딩을 시도해본들 가이딩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보다 먼저 한태화에게 밀쳐져 나가떨어졌던 가이드처럼 될 수도 있었다. 사실 정말 놈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서 괴로워하며 폭주 중인 사람을 마냥 두고만 볼 수도 없었다. 나 역시 가이드니까.

    결국 다시 한태화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짙어지는 열기에 대체 저 상태로 어떻게 상급 가이드의 가이딩을 거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태화씨.”

    “저리- 꺼져!”

    “읏, 한태화씨!”

    갑자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과 거칠게 술렁이는 무형의 기운을 힘겹게 버티며 이름을 부르자 놀랍게도 한태화가 그 기세를 잠시 가라앉혔다. 그때를 노려 한태화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태화씨, 접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손을 뻗자 그 손을 쳐내며 다시금 힘을 쓰려는 한태화의 어깨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얼굴을 끌어내렸다. 그러자 이성이 흐려진 눈으로 눈동자를 떨던 한태화가 간신히 내게 눈을 맞췄다. 신기하게도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크게 부풀어있던 녀석의 근육이 부피를 줄이며 힘을 뺐고, 흔들리던 눈동자는 고요히 가라앉았다. 눈앞에서 일어난 그 마법 같은 변화가 믿기지가 않는 한편, 정말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가슴이 아플 만큼, 세게.

    “…요한…?”

    “네, 접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요한. 나, 이상해요…. 요한이 기다리래서 기다렸는데, 몸이, 머리가 너무….”

    갑자기 칭얼거리기 시작한 한태화가 내 어깨를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그에 허공을 배회하게 된 손을 어색하게 들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 등을 다독였다. 그 머뭇거리는 어설픈 손길에도 녀석의 긴장해 있던 근육들에선 힘이 빠졌다. 무척 의외지만, 어쩌면 진짜 가이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괜찮아요. 가이딩만 하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니까.”

    “가이딩… 싫어요. 다른 가이드 싫어요…. 요한….”

    칭얼칭얼, 평소처럼 애교 섞인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들뜬 목소리하며,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체온이 한태화가 정상이 아님을 알려왔다. 이제 어쩌지. 고민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기관 사람들이 모두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 놀란 얼굴들 위로 모두가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속마음이 읽혔다.

    네가 왜, 왜 쟤를!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그들의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안고 있던 한태화의 몸을 추슬러 안았다. 나도 이게 먹힐 줄 알았나.

    어색하게 표정을 굳힌 채 주변을 돌라보자 번화가에 위치한 클럽의 뒤편으로 줄지어 들어선 모텔들이 보였다. 그중 제일 가까운 곳이 어느 곳인지를 살피며 한태화를 끌어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얌전히 안겨있던 놈이 의아하단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요한?”

    “한태화씨.”

    “네, 요한.”

    “가이딩률을 올리는 방법, 기억납니까?”

    혹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싶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부르르 어깨를 떨던 놈이 생각을 이어나가려는 듯 바쁘게 눈동자를 굴렸다. 점차 가까워지는 모텔 문을 바라보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느려진 사고 회로만큼이나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한태화가 모텔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으로부터 카드키를 받을 때쯤에야 입을 열었다.

    “섹스요?”

    그 말에 움찔하며 놀란 주인이 나와 한태화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런 일 하시는 분이 순진한 척은. 그런 마음으로 주인을 향해 입 모양으로 나가라고 일렀다. 만약 내가 한태화의 가이딩에 실패하면 당장 이 건물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나와 한태화를 쳐다보며 잠시 멍한 얼굴을 해보이던 모텔 주인이 부랴부랴 현금을 챙겨 데스크를 돌아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한태화가 강한 악력으로 내 턱을 잡고 자신 쪽으로 돌렸다.

    “요한, 왜 자꾸 딴 데 봐요? 저 새끼는 또 누군데요?”

    “예?”

    “저 새끼도 가이딩 해주려고요? 그래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본 거……. 저 새끼 죽여도 돼요?”

    평소와 다름없이 말을 이어나가던 한태화가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섹스였음을 떠올리더니 무섭게 표정을 굳히며 이미 문을 열고 나간 주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 심각한 와중에도 평소처럼 할 걸 다 하는 놈이 우스워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태화씨.”

    “네, 요한.”

    웃음기를 담아 부르자 착실히 대답 하면서도 한태화는 문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한태화의 턱을 잡고 그가 내게 했듯이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그러자 유리알처럼 반질반질한 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무엇이든 튕겨 낼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였는데 신기하게 나만은 담겼다. 그게 참 변태스럽게도 좀… 설��다.

    “가이딩 해줄게요. 매번 해달라고 노랠 불렀던 대로.”

    “…네?”

    “자자고요, 나랑.”

    #19

    “……네?”

    폭주로 정신이 돌아왔다, 나갔다 하는지 한태화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순진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엽기도 했는데, 데일 만큼 뜨거운 폭주열을 내고 있는 놈을 마냥 기다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놈의 팔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타며 쐐기를 박았다.

    “나랑 섹스하자고. 싫어?”

    “…….”

    띵- 하고 전자음 소리를 내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한태화를 올려다보자, 한태화가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그게 진짜 귀여워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아래층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 건물 내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대피시키려는 기관의 요원들일 것이다. 한태화의 손을 잡고 카드키에 적힌 호수의 방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싫어요?”

    떠보듯 묻는 말에 표정이 없어진 얼굴로 가만히 눈을 깜박이던 한태화는 그대로 달려들어 입을 맞춰왔다. 그 세찬 몸통 박치기에 밀려 벽으로 쿵 하고 몸이 부딪혔다. 벽에 박은 등이 아파 윽 하고 입을 열자 성급한 혀가 뱀처럼 입술을 타고 들어와 조급하게 움직였다.

    아, 진짜 더럽게 못하네.

    어설픈 움직임의 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툴게 입안을 훑어대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 이거 설마, 키스도 처음이야? 경악해 하면서도 손을 더듬어 카드키를 꽂자 전기가 들어오며 현관에도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한태화는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연신 급하게 입을 맞춰왔다. 이에 입술이 부딪치고, 앞니끼리 부딪쳐 딱딱 소리를 내는데도 놈은 달리기 시작한 말처럼 멈추질 못했다.

    가이딩을 거부해오며 타인을 배척해왔다는 한태화의 소문이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얼굴에, 저 스펙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키스를 못할 리가 없었다. 어설픈 혀 놀림에 작게 혀를 차며 놈의 혀를 입안에서 몰아내려는데, 꼴에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던 한태화가 혀뿌리로 뾰족하게 혀를 말아 문지르자 응- 하고 목울음 소리를 내며 그제야 혀를 말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곤란하다고.

    “한태화씨.”

    “하아, 네, 으, 요한.”

    더운 듯 뜨거운 숨을 뱉어낸 한태화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대답만큼은 착실히 해왔다. 그 모습이 나름 또 귀여워 그의 턱에 입을 맞춘 후 셔츠 단추를 풀어나가자 어설프게 멈춘 몸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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