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49)
  • 클럽 뒤편, 간판 불빛들밖에 의지할 게 없는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건물을 끼고 돌자 인적이 없는 어두운 공터가 나타났다. 주변 건물들을 둘러보며 대강의 위치를 메시지로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느릿한 걸음의 한태화가 골목길 안으로 들어섰다.

    “요한, 보고 싶었어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혼자만 태평한 한태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 화병 날 것 같아.

    “한태화씨가 대체 왜 여기 있습니까?”

    “그야 당연히 요한이 어떤 에스퍼 새끼 하나랑 작전 나갔단 소릴 듣고 와봤죠. 걱정도 되고, 보고도 싶어서. 그래서 내가 어제 메시지도 보냈잖아요. 직접 보러 오겠다고.”

    무수한 점에 밀렸을 그 256개짜리 메시지? 와, 역시 이 새끼는 보통 개새끼가 아니야. 일일이 읽기 귀찮아 그냥 넘겼던 메시지를 떠올리며 기가 막혀 하자 한태화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랬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불행히도 그는 아주 지능적인 악질 개새끼니까.

    “이거 분명 대외비로 돌아가는 보안 작전일 텐데….”

    미심쩍게 내뱉은 말의 어디가 웃겼는지 한태화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낮은 웃음소릴 냈다.

    “요한, 내가 접근 가능한 보안 등급이 몇 등급일 거라고 생각해요?”

    “…….”

    기관 내 둘밖에 없는 S등급의 능력자면서 기관 최대 후원사 그룹의 일원인 사람의 보안 등급은 과연 얼마일까. 그래, 내가 정말 우스운 것을 물었구나.

    “맨날 놀고 계신 모습만 봐서 잠깐 깜박했네요. 그러고 보니 유능하신 분이셨죠?”

    “네.”

    일부러 비꼰 말을 상대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인정하자 원래 의도와는 달리 칭찬하는 모양새가 됐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한태화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움찔하며 뒤로 걸음을 물린 채 경계심을 끌어올리자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내 차림새를 살피고 있던 한태화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근데요, 요한.”

    “…예.”

    “장갑은 어쩌고 맨손이에요? 설마 또 딴 새끼한테 가이딩 해줬어요?”

    “예?”

    “나한텐 그렇게 튕기더니, 이렇게 쉬운 사람이었어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내가 친절하게 경고도 해줬는데? 헤프게 다니면 혼난다고.”

    얘가 자꾸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작전 수행하러 나온 거 다 안다며?

    순간 머리 회전이 느려져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한태화가 또 한 걸음을 다가왔다. 자꾸 가까워지는 거리에 머릿속으로 위험 경고등이 켜지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녀석을 제지하듯 손바닥을 내보였다.

    “잠깐만요, 안 했습니다! 장갑은 기관에서 나온 거 들킬까 봐 벗은 겁니다! 진짜로 안 했어요, 가이딩!”

    “…믿을 수가 없는데….”

    그제야 걸음을 멈춘 한태화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훑어오는 것을 보며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네가 안 믿을 거면 어쩔 건데?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의심 많은 사람 싫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이제부터라도 좋아해 보라니까요.”

    내가 왜?! 솔직해질 수 없는 상황적 무력감에 우울함이 찾아왔다. 벽이야, 벽. 눈앞에 벽이 있다고.

    “…한태화씨, 대체 여긴 왜 온 거냐니까요?”

    벽에 대고 말을 하는 기분으로 힘없이 묻자, 역시나 벽이 벽답게 대답했다.

    “손은 계속 그렇게 맨손으로 다닐 거예요?”

    “…….”

    그래, 우리 그 얘기가 아직 안 끝났구나. 아… 또라이 새끼. 속으로 별별 욕을 다하면서도 일단은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양손을 상의 주머니에 찔러 넣고 숙제 검사를 받는 초등학생처럼 배를 내밀었다. 그럼에도 한태화는 만족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됐습니까?”

    “아뇨. 그 정도로는 좀…. 아직 안심이 안 되는데.”

    작작해라, 이 미친 돌벽아!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최대한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자 이번만 봐주는 거라는 개소리를 내뱉은 놈이 샐쭉하게 웃는다. 누가 그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백 번쯤 뱉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요한이 귀여우니까 이번만 봐 주는 거예요. 두 번은 없어요. 알았죠?”

    “…….”

    아, 우리 보육원 원장님이 미친놈은 상대하지 말랬는데…. 원장님 말 들을걸. 똥은 피하랬는데….

    “제가 지금 세 번째 물어보는 건데요, 왜 왔냐고요.”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요.”

    환하게 웃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계속 보고 있다간 살인 충동이 날 것 같아서.

    “봤으니까 됐죠? 이제 가요, 제발.”

    #15

    그 말에 무척 무해하게 웃어 보인 한태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요한은요? 같이 안 가요?”

    아오, 저 붕어 대가리.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작전 중이라니까요. 작전이 끝나야 가죠. 그러니까-.”

    “도와줄까요?”

    “예?”

    “요한 작전 말이에요, 내가 도와줄까요? 그럼 쉽게 끝날텐데.”

    네가? 날 돕는다고? 쉬이 믿음이 생기지 않는 말에 떨떠름한 얼굴로 한태화를 바라보는데, 놈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진짠가?

    “…어떻게 도와줄 건데요?”

    “그냥 다 때려 부수면 돼요. 그럼 숨어있던 놈이 튀어나오거나 도망을 칠 테니 그때 잡으면 되거든요. 쉽죠?”

    “…….”

    아, 저 조카크레파스씹팔색 같은 놈. 그래, 믿은 내가 병신이다!

    내가 저 새끼랑 싸워서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될까? 1%? 0.5%?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태화의 체격을 찬찬히 훑어보았지만 역시나 이길 수 있는 상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짜증으로 사납게 일던 기세를 누그러트리며 욕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됐습니다. 안 도와줘도 되니까 그냥 제발 딴 데 가서 노세요. 가뜩이나 눈에 띄는데 이러다 한태화씨 때문에 걸리기라도 할까 봐 심장 떨려 죽겠습니다. 이왕이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시면 더 좋겠고요. 위험하잖습니까.”

    그 말에 한태화가 갑자기 감동한 얼굴을 해보였다.

    “위험이요? 지금 저 위험할까 봐 걱정해 주는 거예요?”

    …너겠냐?

    “아뇨, 여기에 있는 다른 일반 시민들이 위험하단 의미였습니다. 위험이란 단어 뜻 몰라요?”

    “…….”

    저한테 위험이란 말이 가당키나 한가? 어딜 감히 양심도 없이 스스로한테 위험이란 단어를 함부로 갖다 붙이나 싶어 비난 어린 눈빛을 보내자 실망한 듯 입술을 삐죽하게 내민 놈이 구두 앞코로 불만스럽게 바닥을 걷어찼다. 그러든지 말든지 무시하며 바로 등을 돌렸다. 말도 안 통하는 놈을 상대하고 있어 봐야 시간만 아까웠다. 작전 수행이나 마저 하기 위해 클럽으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다시 한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한.”

    “아, 또 왜요.”

    “진짜 요한이 아니에요?”

    “…….”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었지만 금방 그 의미를 이해했다. 잠시 시선을 내려 놈과 나의 벌어진 간격을 살폈다. 갑자기 저런 걸 왜 또 물어. 지난번 아니라고 소리쳤던 것이 무색하게 진지하게 물어오는 한태화의 물음에 이번 대답은 답이 좀 더뎠다.

    “저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저 아닙니다.”

    “…….”

    왜 자꾸 찾으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지간하면 얽히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만 봐도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도 구설수에나 오를 뿐 서로에게 좋을 일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D등급의 보조 가이드와 재벌가의 S등급 에스퍼의 조합이라니. 우린 지금 서로 떨어져 있는 이 간격만큼이나 서로가 서로에게 먼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삽질 그만하시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저 좀 그만 쫓아다니시고요.”

    확실하게 밀어내는 말에 상대는 침묵했다. 나 역시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그때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거짓말.”

    “…….”

    “이제 보니 요한은 거짓말도 참 잘하네요.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았어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삐딱하게 서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을 찌푸린 눈으로 노려보다 곧장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뒤로 한태화는 계속해서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의심 많은 사람 싫어한다고 했으니까, 나는 요한에게 계속 싫은 사람이겠어요.”

    “…….”

    “진짜 이제부터라도 좋아해 봐요, 요한. 알았죠?”

    미친놈. 저렇게 나올 거면서 물어보긴 왜 물어봐? 어차피 저 좋을 대로만 해석할 거면서!

    화가 나니 자연히 발걸음이 거칠어져 맞닿는 땅에서 쿵쿵하고 요란한 진동이 느껴졌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놈을 만나러 나왔음에도 수확이 하나도 없었다. 돌려보내지도 못했고, 괜히 속만 더 시끄러워졌을 뿐이다. 아무리 세상사 쉬운 일이 없다지만 좀 너무하다 싶은 마음에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도처에 널려있는 기분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

    그렇게 별 소득 없이 클럽 안으로 돌아오니 여전히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에 열기가 느껴졌다. 천천히 주변을 살피다 사람들을 피해 가장자리 쪽으로 다가가는데, 그런 내 팔을 누군가가 홱-하고 잡아채며 벽 쪽으로 미는 게 아닌가. 순간 마주친 눈이 아니었으면 팔꿈치를 들어 상대를 찍을 뻔 했다.

    “형, 왔어요.”

    날 벽으로 밀친 이는 바로 수혁이었다. 굳은 얼굴의 녀석은 나를 계속해서 벽 쪽으로 밀어붙이더니 제 몸으로 감싸듯 위쪽 벽을 짚었다. 갑자기 그 품에 감싸인 자세가 된 나는 당황한 얼굴로 수혁이를 올려다보았다.

    “어…, 누가 왔는데? 그리고, 그 이야길 꼭 이런 자세로 해야겠냐?”

    “…제가 아는 타깃이에요. 놈도 제 얼굴을 알고요.”

    “뭐?! 넌 사무 업무만 보던 내근직이라며?”

    놀라서 얼른 클럽 안을 살폈다. 그러자 2층 난간에 기댄 한석만이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두운데다, 거리가 멀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석만의 허리가 내내 굽신거리는 걸로 보아 확실히 예사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때 무언가 길게 얘기하던 한석만이 갑자기 사람을 찾듯 고개를 두리번거려서 수혁이의 품으로 몸을 웅크렸다.

    “저놈이 누군데?”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고개를 올려 묻자, 잠시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수혁이가 곤란한 듯 손으로 입매를 감쌌다.

    “김동원이요. 콜 네임은 샐러맨더, A급 능력자로 오성파에서도 급진적인 부류에 속해요. 밤나비의 탈환을 노리는 자기도 하고요. 불을 다루는 능력자라 여기서 문제가 생기면 피해도 클 텐데….”

    하필 여기를 거점 삼고 있던 게 그런 자라니. 김동원은 급진적인 부류일 뿐 아니라 기관 쪽에 시비 걸기를 좋아하는 호전적인 성격이었다. 지난번 백화점 폭탄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고.

    “어떡하죠, 형?”

    “뭘 어째. 일단 지원팀부터 불-.”

    그때 주머니에 넣어놨던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던 말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에 뜬 한석만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그 순간 함께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수혁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둘 다 동시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수혁이는 받지 말라는 눈짓을 했지만, 끊기지 않는 전화에 통화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어, 왜.”

    -너 어디야? 소개시켜 드릴 분 있으니까 2층으로 와라.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2층으로 오라고! 아니다, 어디야? 애들 보낼게. 어딘지만 말해.

    “…됐어. 어디야? 내가 갈게.”

    괜히 헤집고 다니다 얼굴이 알려진 수혁이까지 걸려서 같이 끌려가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을 알기에 먼저 선수를 치자 앞에서 작게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어쩌냐. 그런 마음에 불퉁히 쳐다보며 전화를 끊자, 수혁이가 고민을 하듯 또다시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 때마다 짓는 표정인가 보다.

    “일단 내가 가서 상황을 보고 올 테니까 넌 어디 구석에 가서 숨어있어.”

    “…그냥 저랑 나가요, 형.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나가서 지원팀을 부르고 대기해 있는 게 낫겠어요.”

    “그러다 그 전에 저놈이 가버리면? 언제 또 잡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

    “지원팀 올 때까지 누군가는 저놈을 잡아놓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건 그런데… 느낌이 별로 안 좋아서 그래요. 김동원이면 높은 등급의 위험인물이기도 하고요. 우리 그냥-.”

    “수혁아.”

    고민이 깊은 듯 구불구불 물결치는 눈썹이 일자로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가까이 몸을 붙인 채 새롭게 안 버릇을 하나 기억하며 작게 이름을 부르자 수혁이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왔다.

    “만약에 너, 이걸로 승진하면 다 내 덕이다? 응?”

    “…이 상황에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잊지 말라고.”

    꼭 잊지 말라는 의미로 턱밑을 쓸어주자 눈살을 찌푸린 녀석이 턱을 홱 틀며 손길을 피한다. 보통 개들은 여기를 만져주면 좋아하던데. 아쉬운 마음에 흐릿하게 웃으며 벽에서 등을 떼어내 앞을 막아선 몸의 어깨를 살짝 밀쳤다. 그러자 그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길에도 커다란 몸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형, 말 진짜 안 듣네요.”

    어릴 때부터 하도 많이 들어온 얘기라 별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래서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리자 아직도 고민하는 얼굴을 해 보이고 있던 수혁이가 먼저 백기를 흔들었다.

    “대신 무슨 일 있으면 여기로 바로 오세요. 계속 대기하고 있을 거니까. 알았죠?”

    “숨어있으라니까. 그리고 너야말로 상황 봐서 아니다 싶으면 바로 튀어. 의리 지킨다고 기다릴 생각하지 말고. 알았지?”

    “형-.”

    “제발 현장 경험 있는 사람 말 좀 들읍시다, 후배님.”

    “…저는 여기 있겠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기억하세요, 형.”

    나도 난데, 이놈도 진짜 어지간히 말을 안 듣는다. 못마땅한 마음으로 눈을 흘겼지만 수혁이 역시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서서 나를 고요한 시선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행동에 작게 혀를 차다 하는 수 없이 혼자 2층으로 난 계단을 향했다.

    밤의 열기에 취한 사람들은 그 계단 난간에 매달려서도 몸을 흔들며 한 번씩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계단을 올라가는 사이 몇몇의 팔들이 뻗어 나와 몸을 감싸왔다. 그 손길들을 정중히 떼어내며 꿋꿋이 2층으로 향하자 저 멀리 한석만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 이제 어쩐다.

    한석만의 뒤로 흥미로운 표정의 김동원이 난간에 기대 눈인사를 해 보였다. 뚱한 얼굴로 대강 고개를 까딱여 보이며 상의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가자 한석만이 곧장 친근한 척을 해오며 한 손으로 어깨를 끌어안았다.

    #16

    “어서 와라. 근데 민혁이는?”

    “몰라. 누구랑 눈 맞아서 나갔는지 알 게 뭐야.”

    불퉁한 얼굴로 대충 되는대로 지껄이며 어깨를 추어올리자 어깨에서 손이 떨어진 한석만이 킬킬거리며 은근하게 몸을 붙여왔다.

    “그러고 보니 걔도 한창때네. 너도 내가 아는 애로 소개시켜 줘?”

    “됐으니까 왜 불렀는지나 말해.”

    계속해서 귀찮게 붙어오는 몸을 팔꿈치를 이용해 밀어내자 쉽게 떨어져 나간 녀석이 그제야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앞에 선 남자를 가리켰다.

    “여기 우리 이사님 좀 소개시켜 주려고 불렀지. 네 얘기 했다니 흥미를 보이셔서. 이사님, 얘가 제가 말한 그 친굽니다. 장우랑도 잘 아는 사이고요. 그, 아시죠? 그놈이 술만 먹으면 찾아대는 놈이요.”

    “아, 이 친구가 그 친구인가? 만나서 반가워요.”

    “…….”

    삼십 대 중반, 혹은 그보다 위.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채 정장을 차려입은 김동원은 젊어 보이는 인상으로 선량하게 웃어 보였지만 이상하게 피 냄새가 났다.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과 미소 짓고 있는 얇은 입술, 거기에 마른 뺨과 짙은 눈썹이 마치 하이에나와 같은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니까… 며칠 좀 굶어 피 냄새를 그리워하는 하이에나 말이다.

    기분 나쁜 첫인상에 악수를 청해오는 것을 보면서도 상의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서 있기만 하자 앞에 선 김동원으로부터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들어도 비웃음에 가까운, 마치 가지가지 한다는 느낌의 웃음이었다.

    “야, 요한아-.”

    “누구라고?”

    당황한 한석만이 만류하려는 듯 입을 열자마자 그의 말을 끊으며 묻자, 눈치를 보듯 떨리는 시선이 나와 김동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 여기 이분은 이번에 우리 클럽에 투자한 회사의 이사님이신데-.”

    투자회사 이사?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노골적인 시선으로 김동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그 깔보는 시선에도 김동원은 선량한 사람인 척 양손을 들어 보이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그게 참… 가증스러웠다. 백화점 테러범 주제에.

    “나랑은 상관없는 분 같은데 인사는 무슨. 나는 밑에서 놀고 있을 테니까 술 먹을 때나 불러.”

    일단 한 발 후퇴.

    막상 샐러맨더를 대면하자 기분이 영 찜찜한 것이 예감이 좋지 않았다. 수혁이 말대로 이대로 나가 지원팀을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팔꿈치로 한석만을 한번 툭 친 뒤, 바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팔꿈치 부분을 세게 잡아당기며 억지로 몸을 돌려세웠다. 균형을 잃고, 기우뚱 기울어지는 몸을 추스르며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는데, 내 팔을 잡은 채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던 김동원이 이를 드러내며 짐승처럼 웃었다.

    “사내새끼가 뭘 그렇게 비싸게 굴어? 응?”

    “-뭐?”

    신경을 긁는 말에 화가 나 팔을 쳐내려는 순간, 팔꿈치가 잡혀있던 손의 손가락 사이로 타인의 손가락이 파고들며 가닥가닥 얽혀왔다. 그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들은 강한 힘으로 손을 잡아채더니 거칠게 뿌리치는 손길에도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그렇게 놀라서 고개를 드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링크가 이루어졌다.

    모든 감각이 상대에 의해 열리며 억지로 끌고 가듯 정신을 잡아끄는 느낌에 핑글 하고 시야가 돌고, 다리에선 힘이 풀렸다. 눈 앞에 펼쳐진 붉은 사막을 바라보다 풀썩하고 무릎을 꺾고 그대로 고꾸라지려는데 그런 내 몸을 김동원이 가볍게 받아내며 잡고 있던 손을 더 세게 잡아왔다.

    “그럼 그렇지.”

    “…….”

    “가이드셨나? 세가 쪽 쥐새끼?”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내 손 놔, 이 변태 새끼야.”

    무릎에 힘을 주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내가 힘을 써서 몸을 세우려 들자 쓰러지는 몸의 허리를 받쳐주고 있던 놈의 손이 등을 타고 올라와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 서늘하고 차가운 손은 마치 뱀이 사냥감을 휘감듯 사람의 몸을 옭아맸다. 불을 쓴다는 놈치곤 이상할 정도로 손이 차가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라고? 그럼 가이딩 좀 해봐. 그럼 믿어주지.”

    “이, 미친-!”

    억지로 링크가 이루어진 것도 환장할 일인데, 가이딩률을 올리려는 속셈인지 뒷덜미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김동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 미친 변태 새끼! 맞닿을 듯 가까워지는 입술에 경악하며 팔을 들어 올려 놈의 턱을 팔꿈치로 가격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쾅하며 클럽 내 모든 스피커가 터져나가더니 곳곳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꺄아아아악!”

    “뭐야! 무슨 폭발이야?”

    “또 테러야?”

    순식간에 시끄러웠던 음악 소리가 끊어지며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클럽 안이 난장판이 됐다. 좁은 문 쪽으로 사람들이 몰리며 계속해서 비명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한산해진 무대 쪽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나뒹굴고 있던 술병이나 스툴 의자 등이 갑자기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느껴진 묘한 힘의 파동에 놀라 김동원에게 몸이 잡힌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지? 당황한 고개가 번잡스럽게 돌아갈 때,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가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한, 거기서 뭐 해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얇은 난간 위로 조명을 등진 한태화가 서 있었다. 놈은 얇은 난간 위에서도 안정감 있게 서 있다가 가볍게 뛰어내려 2층 복도 위로 삐딱하게 올라섰다.

    “…한, 태화씨?”

    부름에 답하듯 미소를 지었던 한태화는 금세 무표정해진 얼굴로 날 붙들고 있는 김동원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저 새끼는 뭔데 요한한테 달라붙어 있어요?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면 쟤도 요한한테 가이딩해 달라고 매달리고 있는 건가?”

    예. 이 변태 새끼가 나잇값을 못하고 가이딩 좀 해달라고 더럽게 매달리네요. 그렇게 장난스럽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웃지 않는 한태화는 저절로 몸이 위축될 만큼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함부로 입을 열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을 다무는 대신 김동원에게 잡힌 몸을 빼내 보려 용을 썼다. 그러나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누구야, 유명인사께서 왜 여기 계시나? 너도 여기 다녀? 한태화가 들락거릴 정도면 내 귀에 들어왔어야 하는데. 귀한 손님이시니.”

    내 팔과 뒷덜미를 단단히 움켜쥔 채 김동원이 사납게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불안함이 깃들어 있어 누가 봐도 놈이 긴장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김동원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당황한 듯 보이는 한석만을 노려보다 내 뒷덜미를 더욱 세게 붙잡아 억지로 몸을 세우게 만들며 나직이 물어왔다.

    “너, 저 새끼랑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면 뭐? 다리 놔달라고 하게?

    쓸데없는 걸 왜 묻는지 모르겠다. 누가 봐도 아는 사이로 보이는데.

    “놔요.”

    “지금 이 상황이 너 때문에 일어난 게 맞냐고 묻고 있잖아, 이 쥐새끼야.”

    “놓으라고 경고했다.”

    “이 새끼가 근데-.”

    “야.”

    묻는 말에 대답을 않자 분노한 얼굴로 더욱 사납게 손에 힘을 가하는 김동원을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한태화가 불렀다. 야- 라고.

    “네가 뭔데 자꾸 우리 요한한테 이 새끼, 저 새끼래?”

    “…그럼 이 상황에 친한 척 이름이라도 부를까?”

    “미쳤어? 누구 이름을 그 더러운 입에 담아. 일찍 죽는 게 소원이야?”

    “…….”

    어쩌라는 거냐는 듯 인상을 찌푸린 김동원에게서 잡힌 손을 빼내려 손목을 돌리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한태화가 한 걸음 더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손은 언제 놓을 거야? 우리 요한이 싫어하잖아.”

    우리 요한이라고 좀 부르지 마! 친한 줄 알고 더 지랄이잖아!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는 사이 김동원이 세게 붙들고 있던 내 뒷덜미를 잡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벌써부터 싸움에 져서 꼬리를 만 개새끼 같은 모습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네 요한이라는 이놈이 산 채로 불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 아니면.”

    누가 저놈 요한인지… 아니 그보단 산 채로 뭐? 놀라서 김동원을 올려다보는데 앞에 버티고 선 한태화로부터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재밌네. 해 봐.”

    뭐 이 새끼야? 재미? 저게 미쳤나?

    “한태화씨!”

    내가 인질로 잡혀있음에도 김동원을 자극하는 한태화의 태도에 묘하게 서운함을 느끼며 그러지 말란 의미로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삐딱하게 서 있던 한태화는 내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성공하든 실패하든 넌 내가 가만 안 둬. 직접 내 손으로 찢어 죽여 줄게. 너뿐만이 아니라 네 친구, 네 가족, 네가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들을 싹 다 찢어 죽일 거라고. 어때, 너도 재밌겠지?”

    우스개 농담을 하듯 한태화가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노래하듯 말했다. 그러자 뒷덜미를 잡고 있던 김동원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한태화의 협박에 겁을 먹은 것이다.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야기라서. 사실 나도 겁을 먹었을 만큼 방금 전의 한태화는 좀… 무서웠다.

    “…씨발, 너 뭐야. 네가 대체 뭐길래 가이딩 해줄 놈이 없어서 힘도 못 쓰고 빌빌대던 새끼가 갑자기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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