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49)
  • ‘…걔는 어떻게 지내는데?’

    ‘어떻게 지내긴 뭘 어떻게 지내. 지금은 빵에 들어가 있지. 근데 조만간 나올 거야. 몇 달 후에.’

    #12

    ‘……그거 아직도 그러고 사냐.’

    ‘그러고 살다니? 육성파가 실질적으로 걔 거고, 심지어 이 클럽도 걔 건데? 이만하면 남자로서 성공한 삶이지!’

    술에 취한 듯 목소리를 높이다 쿵 하고 테이블에 대가리를 박고 뻗어버린 한석만을 난감하게 바라보다 술잔을 기울이는데 시선이 날아드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쪽을 바라보니 미묘한 표정의 차수혁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이 심히 복잡해서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연장우.

    나의 오랜 친구이자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친구였다.

    그 친구가 감옥에 들어가 있다는 소식은 안 듣느니만 못한 소식이었다. 아직도 이런 곳에 몸을 담고 있다는 소식이라면 더더욱.

    놈과 내가 중, 고등학교 때 양아치 짓을 좀 하고 다니긴 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끽해야 오토바이를 훔쳐 폭주족 놀이나 하다 다시 돌려놓고 하던 것이 다였는데, 학교 애들이 소문만 듣고 지레 겁을 먹어 알아서 피해 다녔을 뿐이었다. 그러나 딱히 누굴 괴롭힌 적도 없었고, 소위 말하는 삥을 뜯은 적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우리끼리 뭉쳐 다니는 게 재밌고 즐거웠다. 다만,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이유 없이 배척을 받자 반항심이 커졌고, 그러다 보니 점차 눈에 띄기 시작했다. 괜한 시비를 걸어오는 무리들도 많아져 주먹질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고, 수에서 밀리자 패거리를 만들어 어울려 다녔다. 그런 것이 소문이 나 졸업할 때쯤 소위 말하는 스카웃 제의도 받았다.

    그러나 선을 넘는 것을 거부한 나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나를 따라 당연히 그 제안을 거절하리라 믿었던 장우는 그날로 그 길에 들어섰고. 거기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해서 길거리에서 우연히 자릿세를 뜯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오만 정이 떨어져 그대로 연을 끊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때쯤 운 좋게 기관에 들어오게 되어 다른 놈들도 전부 다 끊어낼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정신을 차려 제대로 살려고 노력해 온 것이다.

    ‘넌 씨발, 장우가 얼마나 대단한 줄 알어? 그 새끼가… 에스퍼라고. 응? 에스퍼라고 알지? 씨발, 그 새끼는 주먹으로 벽도 뚫어. 알아, 새끼야?’

    테이블에 대가리를 처박고 있던 한석만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도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유치하기는.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었다. 그 새끼가 육체 강화계 능력자란 사실을. 심지어 그 사실을 가장 처음 안 게 나였고, 그놈에게 처음 가이딩을 해준 것도 나였다. 그랬더니 그 힘을 결국 이런 데서 썩히고 있는 것이다. 그 배은망덕한 놈이.

    물론, 그놈 능력이야 나처럼 좋게 봐줘야 D등급이라 폭주할 가능성이 적었고, 가이딩도 많이 필요하지도 않아서 나와 틀어졌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었을 것이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불법 가이딩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에스퍼보다 가이드 수가 많은 한국에서는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어제 한석만이 굳이 나를 알은척한 이유는 그렇게 밝혀졌다. 한석만은 이제 곧 감옥에서 출소할 연장우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나를 보자마자 그놈에게 비빌 건덕지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나는 그 점이 무척 껄끄러웠지만, 작전 수행상 필요할 것 같아 아무 내색 하지 않고 침묵했다. 어차피 나야 작전이 끝나고 나면 여느 때처럼 지원팀으로 복귀를 할 테니 연장우가 나오기 전에 부딪히지 않고 일을 끝낼 수 있다는 계산속이 있기도 했다.

    다만, 의외였던 것은 바로 차수혁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놓고도 녀석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궁금할 게 많았을 텐데도. 그 배려심이 고마운 한편, 그 속내가 좀 궁금했다.

    이 얘길 들어놓고도 차수혁은 나와 매칭 센터에 가고 싶을까? 아직… 내게 호감이 있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지나온 과거고, 후회나 반성도 할 만큼 했다. 지금은 체념에 가까운 상태였고, 가끔 이렇게 잘못했던 과거가 발목을 잡아올 때면 포기하는 습관도 길러졌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 고아라고 놀리며 반목하던 놈과 기관 동료로 다시 마주쳤을 땐 좀 심각했다. 그 새끼가 지가 하던 짓은 생각하지 못 하고 양아치 짓이나 하던 고아 새끼라고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는데, 그때는 나도 이제 막 기관에 들어와 양아치 물이 덜 빠졌던 때라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서로 주먹다짐까지 했다. 그러다 오토바이나 훔치고 다니던 좀도둑 새끼라는 말에 빡이 쳐 덩달아 소리를 쳤다.

    ‘그래도 나는 너처럼 약한 애들을 괴롭히고 다니진 않았어, 이 살인자 새끼야! 네가 괴롭혀서 죽은 애 얼굴은 기억하냐? 쓰레기 같은 새끼야.’

    그 순간 사위가 조용해지며 나와 주먹다짐을 하던 놈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몸을 굳히다 결국 졸도를 하며 쓰러졌다. 당황해서 놈을 둘러업어 의무실로 옮겼는데, 그 뒤에 나타난 놈의 파트너라는 에스퍼가 그놈이 그 일로 죄책감을 느껴 지금까지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미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있어서 고작 그런 말 몇 마디 들었다고 미안한 마음이 들진 않았다.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하는 꼴도 영 보기가 싫었고. 다만 똑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뒤돌아 나왔을 뿐이다.

    그래도 난 내가 나쁜 놈일 걸 인정이나 하고 살지, 그놈은 어느새 자기가 피해자인 척 스스로를 연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이 내가 저보다 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악의적인 소문이나 퍼트리고 다니던 놈이 죄책감은 무슨. 살면서 그렇게 웃긴 소린 처음이었다.

    어쨌든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후, 놈은 사표를 쓰고 기관을 나갔고, 나는 뻔뻔하게 남아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의 일이 불거져도 예전만큼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일까. 잘못에 대한 인정과 체념을 그때 배웠다.

    ‘남의 눈에서 눈물 빼면 네 눈에선 피눈물 나는 거야. 언제고 다 다시 돌아온다고. 그러니 착하게 좀 살아, 인석아!’

    매번 그렇게 말하던 보육원 원장님의 말씀은 예언처럼 맞아떨어졌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봐도 과거의 잘못은 언제고 반드시 부메랑처럼 되돌아왔고, 나는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차수혁이 더 이상 나와는 엮이지 않고 싶어 한다 해도 이해할 수 있….

    똑똑똑-

    “요한 형, 일어났어요?”

    차수혁? 갑자기 밖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문을 열어주니 벌써 준비를 마친 멀끔한 차림새의 놈이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오후 2시가 넘었는데?”

    “음… 그럼, 좋은 점심이요. 아침도 건너뛰었는데 배는 안 고프세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차수혁이 무난한 답변을 하며 한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막 일어나 씻지도 못한 채 손님을 맞이하게 된 나는 어어, 하는 당황한 얼굴로 차수혁을 안으로 들이다 불퉁하게 표정을 굳혔다. 나 지금 되게 꾀죄죄할 것 같은데.

    “…고프지. 씻고, 준비해서 나갈게. 그러니까 네 방에서 기다리는 건 어때?”

    어제 만취 상태가 되어 근처 모텔에 방 두 개를 잡고 각자의 방에서 뻗었다. 이걸 작전비로 청구했다간 대번에 의심의 눈초리가 날아올 게 뻔해 각자 방은 각자가 결제하기까지 했다. 가이드와 에스퍼가 작전 수행을 나가서 모텔 방을 잡았다고 하면 십중팔구 모두 야릇한 시선을 보내올 게 뻔했으니까. 그러니 제 방을 놔두고 굳이 내 방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차수혁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면 안 돼요?”

    “되긴 하는데, 혹시… 어제 일로 내가 신경 쓸까 봐 배려해 주는 거면 그럴 필요 없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들어와.”

    벅벅, 감지 않은 머리를 긁으며 안으로 들어오자 따라 들어온 차수혁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방 안을 살폈다.

    “오, 여긴 감금이 테마인가 봐요. 제 방은 마사지 방 테마던데.”

    “…거기서 잠이 오디?”

    “예. 뭐,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겠어요? 깨고 나서는 좀 당황했지만.”

    웃으며 꺼내는 가벼운 화제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수건을 챙겨 욕실로 향하는데, 방 구경을 하고 있던 차수혁이 대뜸 나를 불러 세웠다.

    “요한형.”

    “응?”

    “형이 워낙 눈치가 빠르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어제 일 때문에 신경 쓰이실까 봐 온 거 아니에요.”

    “…그건 방금 얘기했잖아.”

    “예. 근데 형 과거가 어떻든 제 태도에는 변함이 없을 거란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 오긴 했어요. 함께 매칭 센터에 가자고 했던 부탁도 여전히 유효하고요.”

    “…….”

    음…. 뭐라 할 말이 없어 머쓱한 얼굴로 서 있는데 놈이 그런 나를 보며 귀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 게 건방지게.

    “작전하라고 내보내 놨더니 작업질하다 왔냐고 혼날 분위긴데 이거. 알았으니까 일단 일에나 집중하자, 응?”

    “네.”

    순하게 고개를 끄덕인 차수혁이 이내 창살로 된 우리 안에 놓인 침대를 구경하러 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머리를 털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다 당황한 얼굴로 멈춰 서서 인테리어를 살폈다. 주인장께서 테마에 얼마나 신경을 쓰셨는지 화장실 벽에조차 수갑이 달려 있었다. 기가 막힌 심정으로 천장에서부터 줄줄이 늘어진 쇠사슬이 달린 수갑들을 바라보았다.

    “별… 헐.”

    수건을 어깨에 두른 채 벽에 달린 수갑을 만져보자 제법 묵직한 무게감까지 느껴졌다. 이거 꼭 진짜 같네?

    #13

    “에이, 장난감이겠지.”

    보통 이런 건 어느 부분을 누르면 저절로 열리게 되어 있는 가짜 장치일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범죄에 악용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한쪽 팔에 수갑을 채운 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흑역사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며, 오토바이로 묘기를 펼치다 가로등을 들이박아 현행범으로 잡혀 수갑을 찼던 때의 감촉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은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하하- 뭐야 이거, 꼭 진짜 같네?”

    기분 나쁘니까 얼른 풀어버려야지. 이리저리 손목을 뒤틀며 멀쩡한 손으로 수갑의 이곳저곳을 눌러보는데 매끈한 수갑의 그 어느 부분에도 열릴 만한 장치가 없었다.

    “뭐… 냐, 이거.”

    순간 불길한 느낌을 들어 식은땀이 다 났다. 에이, 열쇠는 있겠지. 열쇠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자 창살 모양의 장식장 안쪽으로 은색의 작은 물체가 보였다.

    “아, 다행이…. 응? 이게 왜 이렇게 짧… 아? 어?”

    한쪽 손이 묶인 상태라 다른 쪽 손만을 뻗었는데 조금 짧은지 열쇠를 집을 수가 없었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며 몸을 틀어 봐도 마찬가지였고. 키! 키만 좀 더 컸어도!

    “와… 씨발, 망했다.”

    풀릴 생각이 없는 묵직한 수갑에, 이곳은 욕실 안, 열쇠엔 손이 안 닿네? 허허허 하고 마른 웃음이 터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풀고 싶으면 밖에 있는 차수혁을 불러야… 악! 이 미친놈아, 괜히 이걸 손대 가지고! 미치겠네, 진짜!

    주먹으로 머리를 내리치며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차수혁을 부르는 거 외엔 다른 방법이 생각나는 게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작게 차수혁을 불렀지만 방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지 대답이 없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수혁아!”

    “…어… 형, 혹시 저 부르셨어요?”

    문밖에서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안심을 하면서도 벌겋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목욕탕에서 불이 나면 왜 얼굴만 가리고 도망친다는 것인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잠깐 좀 들어와 볼래?”

    “…예?”

    그래, 당황스럽지? 이해한다.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마치 이제 막 썸 타던 관계에서 상대가 저돌적으로 유혹하는 것처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 오해하지 말라고. 그래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긴 하다만.

    “오해하지 말고 들으라고. …들어와서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무슨 일… 형, 저 잠깐 좀 들어갈게요.”

    당혹스러워하는 차수혁의 목소리가 들리고 난 후, 잠금장치도 없던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커다란 몸의 상체가 반쯤 들어왔다.

    “형, 무슨 일로… 음?”

    “…도와줘. 장난삼아 해봤는데 안 풀려….”

    “…….”

    “무슨 말이라도 해라.”

    “…웃어도 돼요?”

    “그것만 빼고.”

    낮게 웃음 짓던 차수혁이 천천히 욕실 안으로 들어와 한쪽 손목에 수갑을 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내 모습을 진지한 얼굴로 살폈다.

    “형, 혹시 취향이….”

    “됐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저기 장식장 안에 열쇠 있으니까 그것만 주고 나가.”

    “장식장이요?”

    웃음을 참고 있는 게 훤히 보이는 놈이 창살로 된 장식장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원래 사람은 이럴 때일수록 뻔뻔해야 한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녀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건 나 주고, 넌 나가 봐.”

    “형, 목까지 빨개요.”

    “야! 그거 못 본 척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놈의 단 한 마디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감을 느끼며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쪽팔려.

    “죄송해요. 너무 귀여워서. 잠시만 계셔보세요. 제가 풀어드릴 테니까.”

    귀여운 사람이 다 얼어 뒤졌나.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한 놈을 노려보다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에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성큼성큼 다가온 차수혁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수갑의 열쇠 구멍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순간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얼굴이 민망해서 잠시 숨을 참았다. 나 아직 안 씻었는데… 씨발. 부담스러운 자세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자 또다시 작게 웃음소리가 난 후 손목을 감싸고 있던 무거운 쇠가 떨어져 나갔다. 그새 벌겋게 변한 손목을 문지르며 다친 곳이 없는지를 살피는데, 덩달아 심각해진 차수혁이 손목을 붙잡아 잡아당겼다.

    “―어?”

    “왜 이렇게 붉어졌-.”

    “…….”

    그 순간 링크가 이루어지며 끌려 들어가듯 녀석의 정신세계로 들어갔다. 그곳은 두터운 구름이 낀 회색빛 하늘 아래로 바위만 무성히 있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자갈과 바위로만 이루어진 삭막한 광경을 둘러보다 다시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리저리 금이 간 회색 하늘이 여러 갈래로 조각난 채 어긋나 있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좋지 않은 상태에 곧바로 링크를 풀어낸 후, 손목을 빼내며 조심스럽게 차수혁을 살폈다. 가이딩이 필요한 것 같은데….

    “야, 너… 가이딩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죄송해요. 갑자기 잡아서 놀라셨죠. 상처가 있는지만 본다는 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자꾸 딴소리를 하는 놈을 보며 한마디 하려는데 별안간 표정을 굳힌 차수혁이 내 말을 끊었다.

    “왜요? 필요하다고 하면 형이 해주시게요?”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가만히 응시해오는 차수혁을 보며 표정을 굳히다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래. 사람 적응 안 되게.

    “…임시 가이드 계약 맺은 사람은 있을 거 아니야.”

    “…있죠.”

    보통 전속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들은 임시 가이드 계약을 맺고 주기적으로 갱신해 가며 가이딩을 받았다. 당연히 차수혁에게도 임시 가이드가 있을 거고.

    “그럼… 낮 동안 잠깐 갔다 와. 나는 알아서 시간 때우고 있을게.”

    “형.”

    “-어?”

    “저 아직 매칭 센터 가보자는 제안 안 물렸어요. 그거 아직도 유효하다고요. 형도 저랑 그렇게 약속하신 거잖아요.”

    이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나 싶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내가 언제 간다고 약속했어?

    “…내가 언제 약속을 했어? 봐서라고 하지 않았냐?”

    그 떨떠름한 물음에 평소 표정으로 돌아온 차수혁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에이, 그게 그 말이죠.”

    “이게 이제 막 기어오르네? 아, 몰라. 다녀오든 말든 너 알아서 해. 나가. 나 씻을 거야.”

    “예. 그럼 씻고 나오세요. 저는 잠깐 나가서 약 사올게요.”

    갑자기 약은 또 왜?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의아하게 쳐다보자 차수혁이 열쇠를 꺼내려고 몸부림을 치느라 붉어진 손목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뭐라도 발라야 할 것 같아서요.”

    “이 정도로 뭘, 됐―.”

    “다녀올게요. 천천히 씻고 계세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린 놈이 욕실 문을 닫고 나갔다. 제 할 말만 내뱉곤 내빼버린 행동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서서히 얼굴을 찌푸렸다.

    “저 새끼 저거, 기어오르는 거 맞는데?”

    헐 참. 이젠 별게 다. 차수혁이 나간 욕실 문을 노려보다 신경질적으로 티를 벗었다. 기분이 묘했다. 짜증은 좀 나는데 그게 아주 나쁜 기분은 또 아니다. 나도 내 마음을 정확히 모르겠다.

    ***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약국명이 적힌 비닐봉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기다리던 차수혁이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에 뚱한 얼굴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자 녀석이 붉어진 손목을 잡고 직접 약을 발라주었다. 내가 하겠다는데도 어찌나 고집이 센지 손을 맡긴 채 턱 아래로 다가온 정수리를 멀뚱히 내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이 다 발렸을 때쯤 잡힌 손을 털어내며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자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벗어났다. 자꾸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가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핑곗거리로 삼은 늦은 점심을 먹고 난 후, 오성파 잔당 무리가 어떻게 분열되어 있는지가 적혀 있는 보고서를 자세히 살피며 함께 놈들의 계보를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와 있었다. 어지럽게 늘어져 있던 서류를 챙겨 뒷정리를 마친 다음 수혁이와 함께 클럽으로 향하자 여전히 입구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어제 한석만과 헤어지기 전, 오늘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기에 차에서 내려 사람들 사이로 섞여 줄을 섰다.

    한석만은 어제도 내내 장우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애가 닳아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계속해서 나를 붙잡아두려 했다. 그런 한석만의 태도에 나 역시 일부러 이쪽 일을 다시 해보고 싶은 것처럼 굴었고, 놈은 눈앞에서 흔들리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어릴 때도 매사 즉흥적으로 생각 없이 일을 치더니 커서도 여전했다.

    그렇게 클럽 안으로 들어가자 늦은 시간임에도 이곳만이 별세계인 것처럼 커다란 음악 소리와 현란한 조명이 눈과 귀를 괴롭혔다. 한 번씩 짙은 스모그까지 쏴대는 클럽 안은 심하게 활기가 넘쳤다. 모두가 신이 난 그 속에서 나는 대충 박자만 탔고, 옆에 서 있던 수혁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막은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뭐라고 해봐야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것을 알기에 웃지 말란 의미로 옆구리를 툭 치자 그제야 웃음이 멎었다. 그래놓고는 기껏 한다는 짓이 클럽 안을 두리번거리며 티가 나도록 어색하게 구는 거였다.

    “그만 좀 두리번거려.”

    “예?”

    고개 좀 가만히 두라고 소리를 쳐도 음악 소리에 묻혀 듣지 못하길래 손으로 귀를 잡고 내리자 얼띤 얼굴을 해 보인 놈이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였다. 신장의 차이로 인해 구부정해진 모습에 굴욕감을 느끼며 귀가로 입술을 가까이 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고개 좀 가만히 두라고! 사람 찾으러 온 거 다 티 나잖아!”

    #14

    잠시 멈칫하며 어깨를 굳혔던 수혁이는 민망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제가 얼마나 어색하게 굴고 있었는지를 눈치챘는지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며 목덜미를 쓸어내리기도 한다. 그랬음에도 여전히 분위기를 맞추지 못하고 난색을 표하더니 사나워진 내 시선을 받고 나서야 조금씩 몸을 들썩였다. 이게 어디냐.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놈의 어설픈 몸짓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데, 아까부터 힐끔힐끔 우리 쪽을 보고 있던 여자들이 자연스레 다가와 몸을 붙이며 시선을 맞춰왔다. 웃으며 분위기를 맞추는데 그 사이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차며 수혁이와의 거리가 점차 벌어졌다. 당황한 얼굴로 나를 부르듯 입을 뻥긋거리던 놈이 완전히 사람들 사이에 묻히는 것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차다 느긋하게 클럽 안을 살폈다.

    오늘도 텄나. 어제와 다를 게 없는 풍경에 고개를 내젓는데 갑자기 안쪽에서 요란한 비명소리가 나더니 사람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앞에 있던 여자마저 그쪽으로 갔는지 갑자기 한산해진 주변을 둘러보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을 지나쳐 그 방향을 향하던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한태화가 왔대!”

    뭐? 누구?

    “한태화다! 어떡해! 진짜 한태화야!”

    “나 실물은 처음 봐. 가서 말 걸어 볼까?”

    …누구요? 설마 내가 아는 그 한태화…? 에이, 그냥 동명이인의 유명 연예인이라든가, 클럽 유명인이겠지.

    설마 하는 마음으로 표정을 찡그린 채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헤쳐 앞으로 나아가니, 정말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요 며칠 내도록 본 화려한 이목구비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클럽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헐.

    “…쟤가 왜 저기 있어?”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몰려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뒤로 빠지며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우연이겠지? 그냥 어쩌다 놀러온 클럽에 내가 있는 것일 확률이… 그래, 내 가이딩률만큼이나 낮구나, 젠장.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한태화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화면을 열었다. 그러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메시지 창을 보고 멈칫하며 손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가 내 번호를 어떻게 알고 연락을 했지?

    “요한형, 사람들이 한태화라고 소리치는 걸 들었는데… 아니겠죠?”

    “…….”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몰리자 한산해진 플로어를 가르고 다가온 수혁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 의미를 눈치챘는지 수혁이의 표정도 굳었다. 그 얼굴에도 ‘그 미친놈이 여긴 갑자기 왜?’ 하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휴대폰 화면 위로 빠르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한태화씨 사람들 시선 피해서 클럽 밖으로 나와요. 나 좀 봅시다. 오후 9:48]

    메시지를 작성해서 전송 버튼을 누른 후, 까치발을 해서 한태화가 있는 쪽으로 목을 빼자 스툴 의자에 느슨하게 앉아 클럽 안을 살피던 한태화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놈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낯선 곳에서 엄마를 잃은 아이 같아 보이는 모습에 혀를 차면서도 얼른 어깨를 움츠린 채 사람들 뒤로 자세를 낮추자 옆에 있던 수혁이도 덩달아 몸을 낮춰왔다.

    “형? 지금 뭐 해요?”

    “아니, 그게… 수혁아, 내가 나가서 한태화씨를 돌려보내 볼 테니까, 너는 여기 좀 지키고 있어. 알았지?”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그사이에 한석만이나 오성파 놈들이 오면 어쩌려고? 넌 여기 있어.”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 있던 수혁이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짙은 눈썹이 물결치는 모양이 웃겨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수혁이의 입술 사이로 길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수혁이는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마음에 안 든다는 눈을 한 채 바라보다 결국 허리를 펴며 몸을 세웠다.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주세요. 제 번호 저장했죠?”

    “걱정 말라니까.”

    “걱정이 되니까 하는 소리죠.”

    헛소리. 녀석의 마지막 말을 무시한 채 사람들로 세워진 장벽을 이용해 몸을 숨긴 후 뒷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곧장 문을 열고 나가자 그곳을 지키던 가드들이 험악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다가왔지만 이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곤 어색하게 얼굴을 풀며 눈인사를 해왔다. 나 역시 어제 한석만을 통해 인사했던 사람들임을 알아보고 머쓱한 얼굴로 눈인사를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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