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드신 술이 아직 안 깨셨어요?”
“안 되는 거 알면 됐고. 나가 봐.”
팀장님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팀장실을 나와 목에 걸려 있던 가이드 신분증을 벗고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들에게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어디 가?”
“지원팀 차출 요청서가 내려와서요, 팀장님이 저보고 현장 나가래요. 그럼 고생들 하세요.”
“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클럽.”
“예에?!”
놀라는 후배 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가볍게 목을 돌리며 서류에 적힌대로 지원팀을 요청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출 요청서를 받은 지원 3팀 서요한입니다. 어디서 뵐까요?”
한태화 없이 돌아온 일상은 여느 때와 같았다.
***
오성파의 남은 잔당들의 처리를 위해 신설된 청산 특별팀에서 나온 이는 자신을 차수혁이라고 밝힌 에스퍼였다. 내부 업무 쪽에 적합한 능력자라서 현장 경험이 적다고 말하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남자는 그 말과는 달리 커다란 덩치에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현장팀 같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한태화보다도 조금 더 크려나? 그의 키와 어깨를 눈대중으로 대충 가늠해 보며 올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서요한입니다, 라고 인사를 하며 장갑 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그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차수혁입니다. 피지컬이 좋으셔서 에스펀 줄 알았어요.”
“제가 아까 지원 3팀에서 나왔다고 인사드렸잖아요. 몸은… 생각보다 가이드가 에스퍼들을 상대로 힘쓸 일이 많아서 신경 써서 관리해서 그럽니다.”
“지원팀도 어렵네요.”
“어느 부서나 그렇죠.”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는 차수혁이란 남자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어딘지 말을 잘 듣는 커다란 개 같은 인상이면서도 넉넉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여유롭고 깔끔한 성격 같아 보였다. 그 서글서글한 말투며 부드러운 인상에 괜찮은 사람이네, 라고 생각하며 인사를 마치자 차수혁이 매고 있던 가방을 내보인 후 난처하게 웃었다.
“현장으로 가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살펴보셔야 할 것 같은데, 어디서 볼까요?”
넓은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서류가 든 가방에서 덜그럭덜그럭하는 묵직한 소리가 났다. 제법 양이 많은가 본데…. 잠시 고민하다 차수혁에게 물었다.
“차 있으십니까?”
“예, 밖에 주차장에요.”
“그럼 거기서 봐도 될까요?”
“그럼요. 가시죠, 제가 안내할게요.”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사람처럼 차수혁은 선량하게 웃으며 주차장이 있는 방향을 예의 바르게 가리켰다. 그 손짓을 따라 먼저 발걸음을 떼면서도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호의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는 자신을 살아있게 만들어주는 존재였기 때문에 폭주 증상으로 정신이 나간 게 아닌 이상 성별에 관계없이 호감을 갖고 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에 반해 한태화가 좀 유별난 것이고.
“전속 가이드 분은 계세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화제는 그쪽으로 흘러갔다. 주차장을 향해 나란히 걸으며 묻자 차수혁이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아직이요.”
“아직 없으세요? 에스퍼 발현을 언제 하셨는데요?”
적어도 이십 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차수혁의 모습에 내가 혹시 잘못 봤나 싶어 다시 한번 자세히 살폈지만 역시나 중반 아래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심각한 노안이거나.
“좀 늦어서 18살에 하긴 했는데, 제 능력이 현장에서 쓰일 능력은 아니라서 급할 게 없었어요. 그래서 좀 신중하고 싶어서 고민하다 보니 이렇게 늦었네요.”
“능력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아, 그게 음… 정신계열인데요….”
정신계열? 이번에도 생긴 거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에 조금 놀라워하며 주차장으로 나가는 유리문을 어깨로 밀었다. 그러나 어깨에 힘을 주려는 순간, 나보다 한발 앞서간 차수혁이 먼저 문을 열어 잡아주었다. 평소 같으면 나도 손 있다고 면박을 주었을 텐데, 처음 만나는 사람이 보이는 호의에 그럴 수가 없어 난처하게 웃으면서도 얌전히 문을 나섰다. 그러자 그런 내 옆으로 차수혁이 냉큼 따라붙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사람을 잘 따르는 개의 모습이라 웃음이 났다.
“정신조작이에요, 제 능력은.”
“…아, 예…”
“역시 기분 나쁘죠? 이런 능력은….”
#10
제 능력에 대해 얘기하던 차수혁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원래 정신계열의 에스퍼들은 그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꺼리는 경우가 많았고, 인기도 없었다. 이미 여러 말들을 들었던 듯 그 넓은 어깨가 추욱 처져있는 것을 보며 나 역시 오랜만에 당황했다. 그 모습 위로 언뜻 축 처진 강아지의 귀와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아 부정의 의미로 얼른 손을 흔들었다.
“아뇨, 그런 거 아닌데요. 능력은 그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 차수혁씨가 기준만 잘 잡고 계시면 문제될 건 없죠. 이미 잘 잡고 계신 것 같아 보이시구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내 대답에 차수혁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피어났다. 그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듯 싱글벙글 웃으며 한 번씩 내 쪽을 힐끔거렸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차수혁의 차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흰 SUV 차량에서 빛이 한번 깜박였다.
“저 찹니까?”
“예.”
아직도 목소리에 웃음기가 남아있는 차수혁을 못마땅하게 올려다보다 말없이 걸음을 옮겨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러자 운전석에 올라탄 차수혁이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쉬지 않고 생글거렸다. 한마디 해야 하나. 어쩐지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든 모습에 무음으로 해서 주머니에 넣어놨던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진짜 메시지를 확인해야 했고.
“…얜 또 뭐야.”
그 짧은 사이에 새로 온 메시지가 256개였다. 또다시 ‘.’이 하나 찍혀 온 메시지 창을 보며 두려운 마음으로 화면을 열자 점으로 테러된 화면이 나타났다. 이건 또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전화며 메시지며 받지를 않자 이런 미친 짓을 벌인 것이다.
[제발 일에 집중 좀 하십시오. 그렇게 딴 짓하다 다칩니다. 오전 9:37]
[한태화: …네ㅠㅠ 오전 9:37]
의외로 쉽게 수긍하며 대답 한번 후 잠잠해진 메시지 창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머뭇거리는 기색의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한태화씨랑은 잘 아는 사이신가 봐요?”
“예?”
“아니, 방금 한태화씨 이름을 부르시길래요… 그래서 생각났어요. 요즘 좀 유명한 그분 맞으시죠? 그, …서데렐라.”
“…….”
이대로 창문에 머리를 박고 확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쪽팔렸다. 서데렐라가 뭐냐고, 씨발. 굳은 얼굴로 차수혁을 보며 입매를 단단히 굳히자 제가 말을 해놓고도 눈치를 보고 있던 차수혁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찡그림에 가까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괜한 얘길 꺼냈나 봐요. 한태화씨가… 이번엔 진짜 가이드 계약을 맺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돌아서 사실인지 궁금했거든요. 그 상대가 누군지도 궁금했고요. 근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소문이 났습니까? 내가 한태화씨랑 가이드 계약을 맺을지도 모른다고?”
“예.”
“와… 이 사람들이, 남의 일이라고 막말하네. 그죠? 차수혁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내 물음에 당황해 하던 차수혁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시동도 켜지지 않은 차의 핸들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힐끔힐끔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이 딱 사고를 쳐놓고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개의 모습이라서 설핏 웃음이 났다.
“그럼… 한태화씨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신 건가요? 가이드 계약을 할 생각도 없으시고요?”
“당연하죠. 서로 등급 차이가 심하잖습니까. 무엇보다 누가 그런 놈이랑.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다. 누구 인생을 조지려고 그런답니까, 들.”
퉁명스런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난처하게 웃던 차수혁이 동의를 표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시 동안 어색하게 말이 끊겼다. 조용해진 분위기에 운전석 핸들에 몸을 기대고 있던 차수혁이 망설이는 듯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얘가 은근히 머뭇거리면서도 할 말을 다한다.
“그럼 전속 가이드 계약은 안 맺으시는 건가요?”
왜 자꾸 가이드 계약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걸까. 차수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장갑을 벗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제가 누구랑 매칭해도 가이딩률 퍼센티지가 잘 안 나와서요. 그래서 안 맺는 게 아니라 못 맺고 있는 겁니다. 주세요.”
장갑을 낀 채 서류를 살피면 불편할 것 같아 벗어서 주머니에 넣은 후, 차수혁을 향해 손을 내미니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보이던 차수혁이 제 손을 조심히 손을 내밀었다. 뭐야? 기겁을 하며 손을 물린 후 황당함에 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다른 새끼 가이딩은 하지 말라던 한태화의 경고가 떠올라 목 부근의 솜털들이 삐죽하게 서 있었다.
“손 말고, 서류요!”
“아….”
그제야 얼굴을 붉힌 차수혁이 어깨에서 가방을 끌어내려 안에 있던 서류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니, 지가 진짜 개야? 달라고 한다고 손을 주게? 황당하다는 얼굴로 허둥지둥하고 있는 차수혁을 꼴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문득 한숨을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초짜를 데리고 현장엘 나가야 한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벌써부터 담배 생각이 절실해졌다.
“여, 여기요.”
“예.”
떨떠름한 얼굴로 서류를 넘겨받아 대강 목록을 살피는데 생각보다 양이 좀 많았다.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도와줘야 할 차수혁은 붉어진 얼굴로 창밖만을 바라보며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 새끼가 진짜. 노냐? 나는 일하라고 혼자 두고? 화가 나려는 것을 참으며 억지 미소를 지은 채 차수혁을 불렀다.
“차수혁씨.”
“…예?”
“이 많은 걸 나 혼자 다 봐야 할까요, 아니면 옆에서 내용 추려서 빨리 볼 수 있게 도와줘야 할까요?”
자꾸 내려가려고 하는 입매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자 아, 하고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허둥지둥 서류를 챙겨 들었다.
“…아, 아아! 예! 죄송합니다, 자꾸 딴생각이 나서…,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요, 빨리하고 끝냅시다, 차수혁씨.”
“…예.”
또다시 처진 귀와 꼬리가 보이는 듯해 작게 혀를 차며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니까 진짜 저 초짜를 데리고 작전엘 나가야 한다는 거지? …암담하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에 담배가 든 주머니 부근을 손으로 더듬었다. 담배가 간절했다.
***
우리는 한참 동안 서류를 보다 해가 지고 나서야 클럽이 있다는 동네로 움직였다. 그곳에서 지원비로 나온 카드를 이용해 옷을 새로 사 입은 후, 클럽 앞에 차를 대고 조심히 동태를 살폈다. 아직 피크 타임이 아님에도 입구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것이 정말로 인기가 많은 클럽인 것 같았다. 시간을 살피니 시간도 아직 이른 편이라 담뱃갑이 든 주머니 위를 더듬으며 차수혁을 돌아보았다.
“차수혁씨.”
“네?”
“흡연자세요?”
“…담배 피우시게요?”
“예, 괜찮으면 들어가기 전에 한 대 태우고 들어가려고요. 괜찮을까요?”
“아… 예, 그럼 같이 가시죠.”
안전벨트를 풀며 묻자 멍하니 있던 차수혁이 저도 따라나서려는 듯 급하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살피다 미심쩍게 눈을 좁혔다. 아무리 봐도 몸 생각해서 담배 같은 건 안 피울 타입 같은데?
“흡연자세요?”
내 의심스럽다는 물음에 차수혁이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웃어 보이며 태연히 대답했다.
“가끔요. 긴장했을 때 같은 때만 피워요. 근데 오늘은 현장 나온다고 안 들고 와서… 한 대만 빌려도 될까요?”
“아, 그럼요.”
거짓말이라 생각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대답에 의심은 바로 풀렸다. 현장 일을 나왔다고 긴장하는 모습이 나름 귀엽기도 했고. 그래서 별 말없이 차에서 내리자 차수혁도 따라 내리며 내 뒤로 쫄래쫄래 따라붙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개를 키우나 봐. 친근하게 주변을 얼쩡거리는 모습이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여워 자꾸 웃음이 났다.
클럽 옆으로 난 어둑한 골목길 사이로 걸음을 옮기자 이미 다녀간 사람들이 많은 듯 바닥에 여러 개의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었다. 그렇게 건물 사이로 난 골목길 입구에 서서 먼저 담배를 하나 빼물고 불을 붙인 뒤 담뱃갑을 넘기자 내밀어 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차수혁이 내 손에 닿지 않게끔 조심하며 담뱃갑을 받아갔다. 그 조심스러워하는 모습도 귀여워서 웃음과 함께 연기를 내뱉자 마찬가지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던 차수혁이 왜 웃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개 같아서 귀엽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화내겠지? 어떻게 말해도 욕같이 들릴 것 같아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그때 불이 붙은 듯 연기를 한번 뿜어낸 차수혁이 담뱃갑을 돌려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맨손으로 잡자 손끝이 맞닿으며 작게 기운이 일렁였다. 역시나 곧바로 차수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지금까지 보인 행동으로 보아 가이드의 별것 아닌 접촉에도 예민한 타입 같아 보이긴 했다.
“장갑… 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안에서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왜요, 기관에서 나온 가이드인 거 다 티 내고 다니라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걱정돼서요.”
“위험하게 안 만들 테니 걱정 마시죠.”
내 말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차수혁이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아니,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차수혁씨.”
“…예.”
“우리 수혁이가 올해 몇 살이지?”
“……예?”
갑작스러운 반말에 놀란 듯 하마터면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릴 뻔했던 차수혁이 손가락 사이로 담배를 걸쳐 놓으며 어? 하고 입을 벌렸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정없이 떨리는 눈을 구경하던 나는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이거야 원, 정신조작이 능력이라는 사람치곤 속마음 읽기가 너무 쉬워서 미안할 정도였다.
“저 안에 들어가서도 존댓말이나 하고 다니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으니까, 서로 호칭을 편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차수혁씨는 몇 살입니까? 나는 올해 스물아홉인데.”
“…스, 스물여섯요.”
#11
예상대로 딱 스무 살 중반대의 나이였다. 여전히 당황한 듯 보이는 차수혁을 귀엽게 봐주며 마지막으로 깊게 빤 담배의 불씨 끝을 손으로 털어낸 후 꽁초를 버릴 곳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마땅히 버릴 만한 곳이 없어 작게 혀를 찼다. 어쩐지 바닥에 꽁초가 많더라니. 이따 안에 들어가서 버려야겠네.
“며칠 같이 다녀야 할 텐데 편히 하자. 너도 날 그냥 형이라고 부르고. 나도 편하게 대할게.”
“…어, 아, 예.”
“그래. 그럼 들어갈까?”
“…예, 형.”
붉어진 목덜미와 귓가를 바라보며 웃다 몸을 돌리는데 이 낯선 곳에서 놀랍게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서요한? 너 서요한 맞지? 재떨이 친구!”
“…….”
순간 꽁초를 쥐고 있던 손이 움찔거렸다. 저 재떨이가 이 담배꽁초를 버릴 재떨이를 말하는 건 아닐 거고…. 찬 공기에 나와 있던 손을 가볍게 주먹 쥐어 상의 주머니에 넣은 채 삐딱하게 고개를 돌리자 제법 단단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더라….
“나야, 나. 한석만. 기억나지?”
“…영동고 한석만?”
“그래, 형님이다. 이 자식, 반반한 얼굴은 여전하네. 덕분에 한 번에 알아봤어.”
“…너는 이제야 제 나이로 보이는데? 잘 지냈어?”
“오랜만에 봐 놓고 주둥이 그따위로 놀리는 것도 여전하네. 나야 잘 지냈지. 너는? 놀러온 거야?”
“어. 요새 여기가 제일 잘나간대서. 근데 너희 영업장이었나 보네?”
“그래, 인마. 형님이 관리하는 곳이다. 너는 아주 칼같이 끊어내고 잠적했다더니 그래도 아직 놀러는 다니나 보네.”
간신히 기억 끝에서 어린 날 흑역사 속에 있던 인물의 얼굴을 끄집어냈다. 그때보다 훨씬 단단해진 험악한 인상의 남자는 어울리지도 않게 넉넉하게 웃으며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게 제법 아파서 눈가를 작게 찡그리자 얌전히 서서 상황을 파악 중이던 차수혁이 슬쩍 내 팔을 잡아끌어 한석만의 손에서 내 어깨를 구해냈다.
“…누구?”
자연히 시선을 차수혁에게 돌렸던 한석만이 찔끔한 표정으로 확인을 구하듯 나를 쳐다봤다. 뭐라고 해야 안 이상하지? 그런 생각으로 잠시 머리를 굴려봤지만, 사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친한 동생.”
“친한 동생? 뭐, 힘은 좋게 생겼다만…, 너랑 어울릴 분위기는 아닌데? 왜 데리고 다니는 거야?”
얼굴 가득 경계심을 세운 한석만이 다시 내 팔을 잡아끌며 작게 속삭였다. 확실히 차수혁은 한눈에 봐도 곱게 자란 티가 난다. 나를 아직도 양아치 서요한으로 기억하고 있을 한석만에 눈엔 그게 이상해 보일 거고. 그동안 열심히 살았던 만큼 무척 억울한 일이었지만, 차수혁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눈짓을 해보이며 대충 분위기를 맞추기로 했다. 뭔가 딱 감이 왔으니까. 이놈을 이용하며 작전이 생각보다 쉽게 끝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
“애가 좀 멍청하긴 한데….”
그래도 이 말을 할 때만큼은 차수혁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다. 저래 봬도 저 어린 나이에 특별팀에 소속될 만큼 엘리트 공무원인 차수혁이 입가를 파르르 경련하듯 떨었다. 그로서도 이런 말은 처음 들어보겠지. 좀 미안하네.
“…말을 잘 들어. 착해.”
“그래? 하긴, 좀 멍청하면 어때. 데리고 다니기엔 힘 좋고, 말 잘 듣는 게 최고지.”
이해했다는 듯 어깨에 팔을 걸친 한석만이 귓가에서 질 낮게 킬킬거리며 낮잡아 보는 시선으로 차수혁을 훑었다. 딱 봐도 ‘호구 잡혔구나?’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더니 이제야 차수혁이 만만해 보였는지 호기롭게 나서서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이쯤 되니 차수혁도 어이가 없는지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서요한 친구, 한석만이라고 한다.”
“…차민혁입니다. 반갑습니다, 형님.”
의외로 분위기를 맞춰 악수를 받는 차수혁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데, 갑자기 멈칫하고 몸을 굳혔던 한석만이 크게 웃으며 차수혁의 어깨를 팡팡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쟤가 갑자기 왜 저래?
“으하하하! 이 친구, 아주 마음에 드네? 응? 체격도 건장하니, 아주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한석만의 손길을 받아내고 있는 차수혁을 가늘어진 눈으로 살폈다. 설마…. 문득 아까 낮에 정신조작이 능력이라던 차수혁의 말이 떠올랐다. 너… 아니지?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잔할까, 요한아?”
“…그러지, 뭐.”
“이 새끼, 새침한 건 여전하네.”
“닥쳐. 누구한테 새침하대?”
“으하하하, 그 지랄 맞은 성격도 여전하고. 가자, 내가 좋은 술 사줄게. 거기, 민혁이라고? 너도 같이 가자.”
“예. 감사합니다.”
넉살 좋게 웃으며 넙죽 제안을 받아들인 차수혁이 한석만의 뒤를 따르는 것을 가만히 보다 그 옆으로 붙어 팔꿈치로 툭 하고 쳤다.
“방금 뭐 했지?”
확신을 담아 묻자,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차수혁이 대답을 고민하듯 슬쩍 눈을 굴렸다.
“그냥 뭐… 간단한 거요.”
“너 그러다 들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들키고 말고 할 게 아니에요. 호감을 갖도록 감정을 주입했을 뿐이니까. 가벼운 거라서 이상한 점도 못 느낄 거고요. 이러다 제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금방 깨지는 암시 같은 거라고 보면 돼요.”
“…….”
그렇게 안 봤는데, 이 자식 이거… 현장 일에 소질 있네? 그 짧은 사이 가짜 이름까지 만들어 분위기를 맞춘 거로도 모자라, 능력까지 쓰는 센스를 발휘한 게 의외라 멀뚱히 쳐다보자, 차수혁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한석만 쪽을 힐끔 살피더니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뭘? 손?”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놀리듯 묻자 확 하고 얼굴을 붉힌 놈이 눈살을 찡그렸다. 괴롭히는 보람이 있다니까.
“아, 진짜. 놀리지 마시구요. 아까 전에 못 버린 담배꽁초 달라고요. 가다가 봐서 쓰레기통 나오면 제 거까지 해서 한꺼번에 버릴게요.”
“…그건 또 언제 봤어?”
불퉁한 대꾸에도 차수혁은 잔잔히 웃기만 했다. 실없이 녀석. 속으로 타박하며 내밀어진 손을 피해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차수혁이 내 팔을 잡고 주머니 안에 있던 손을 빼내더니 그 안에 있던 꽁초를 가져갔다. 그 짧은 접촉에도 또다시 기운이 일렁였고, 걱정스럽게 표정을 바꾼 차수혁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원래 이렇게… 링크가 잘되세요?”
“…어, 좀 그런 편이야.”
웃기게도 가이딩률 퍼센티지는 낮았지만 링크 실력은 좋았다. 아니, 좋은 것을 넘어서 상대가 링크를 열어두기만 해도 끌려들어 가는 수준이라 나 역시 그 점이 콤플렉스였다. 그래도 아직까진 사는 데 지장은 없었고, 문제가 된 적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괜찮다는 표시로 팔을 치니 그제야 녀석의 고개가 앞으로 돌아갔다.
“형.”
“왜.”
얘가 의외로 뻔뻔하네. 금세 형이라고 불러오는 넉살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자 앞만 보고 걷던 차수혁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 끝나고 나면 저랑 매칭 센터 가보실래요?”
“…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놀란 얼굴로 차수혁을 돌아보았지만 녀석은 꿋꿋하게 앞만 보고 걸었다. 마침 클럽 문이 열리며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밀려와 몸을 감쌌다. 스피커를 크게 울리는 음악 소리에 심장이 둥둥 울리며 기묘한 울림을 냈다. 아니… 음악 소리 때문인지 방금 차수혁의 말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봐서.”
음악 소리에 파묻히고도 남았을 작은 목소리를 용케 들었는지 차수혁이 씨익하고 웃으며 돌아보았다. 어쩐지 목에서부터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지만 태연한 척 얼굴을 굳혔다. 어느새 소름이 오른 목덜미를 슥슥 문지르며 크게 심호흡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만난 지 하루 만에 함께 매칭 센터에 가보자는 말을 꺼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좀 신중하고 싶어서 고민하다 보니 이렇게 늦었네요.’
낮에 그렇게 말했던 남자치곤 무척 놀라운 제안이었다. 물론 녀석이 내게 호감이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는데, 바로 이렇게 돌진해 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설레는 건가?
에스퍼와 가이드는 매칭 센터의 검사를 통해 서로 얼마나 잘 맞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면 매칭률이라는 것이 나왔는데, 가이딩률과는 좀 다르게 여러 가지 요소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지표였다. 그러다 보니 이것을 검사해 보자는 말은 사실상 고백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 짓을 해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차수혁을 바라보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요새 들어 갑자기 왜 이러지? 한태화와 차수혁을 번갈아 떠올리며 열이 오른 목덜미를 여러 번 문질렀다.
누구나 살다 보면 한 번쯤 잘 나가는 시기가 온다던데… 나는 그게 지금인가 보다.
***
어제 클럽에서 만난 한석만과 진탕 술을 마시며 친목을 다지다 오래전 끊어졌던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실질적인 육성파의 주인, 육성파의 실세가 바로 그 인연을 끊었던 친구라는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
‘너 걔가 자릿세 뜯는 깡패 짓이나 한다고 바로 연락 끊었다며? 그 후로 장우가 너 많이 그리워했어, 인마. 술만 마시면 네 얘기 꺼내고 그랬다고. 근데도 넌 연락 한번이 없냐, 이 독한새끼야.’
‘…왜 나만 독해? 그 새끼도 연락 없었어.’
‘네가 연락하지 말라고 하고서 바로 연락처를 바꿨다며? 장우는 그 뒤로도 널 많이 찾아다닌 모양이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