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49)
  • 저 새끼가 아무래도… 벌써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좆됐다, 씨발.

    ***

    여긴 또 어디야. 4호실로 쳐들어온 한태화에 의해 수면 가스가 터져 그대로 정신을 놓았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근데 눈을 뜨자마자 보인 낯선 공간은 4호실의 풍경이 아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를 살피려 눈을 굴리다 고개를 드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태화와 시선이 딱하고 마주쳤다. 놀라서 다시 베개로 머리를 붙이며 눈을 감고 자는 척 하자 옆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티 나잖아요, 요한. 귀엽네요.”

    “…….”

    내가 저놈이랑 나이 차이가 얼마가 나더라? 어른한테는 귀엽다고 하는 게 아니라고 한소릴 해야 하나? 고집스레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며 얼굴 위로 그늘이 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어째 좀… 불안하다?

    “으음, 아, 잘 잤-.”

    불안한 마음에 눈을 떴다가 말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코앞으로 다가와 있던 해사한 얼굴 위로 길게 눈웃음이 지어졌다.

    “아깝네요.”

    “…….”

    살짝만 턱을 들어 올려도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놀라 굳은 얼굴로 바짝 얼어있자 웃고 있던 놈이 기울였던 상체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던 얼굴이 치워지자 그제야 간신히 숨이 터졌다.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숨까지 참고 있었다.

    “…한태화씨가 왜 여기 있습니까?”

    “요한을 간호하고 있었거든요. 착하죠?”

    너만 아니었다면 간호 해줄 일 자체가 없었겠지.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삼키며 어딘지를 살피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딘데요?”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돌리니 내가 누워있던 침대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괸 놈이 생글생글 웃으며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난감함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자 침대 주변이 하얀 커튼에 가려져 있었다. 설마 의무실인가?

    “의무실이요. 요한이 그대로 잠들어서 내가 데리고 왔어요.”

    “아….”

    역시 의무실이었구나.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는데 의무실이란 단어에 응급 가이딩을 필요로 했던 에스퍼가 떠올랐다. 그 꼬장꼬장했던 가이드도. 걔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 김한서 에스퍼는 어떻게-.”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주친 시선에는 등 뒤가 서늘해지며 소름이 돋았고. 아니, 씨발, 어쩌라고!

    “크흠, 음. 한태화씨, 미리 양해를 좀 구하자면 그건 제 일이라서-.”

    “그러니까요. 그게 요한 일이면, 그 일을 막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죠. 나도 요한한테 미리 양해를 좀 구할게요.”

    “…….”

    사람이 왜… 사람 말로 개소릴 하지? 그게 왜 네 일이야? 어이가 없어서 허탈한 표정을 짓자 한태화가 싸늘한 얼굴로 미소를 띠었다. 근데 그게 정말 즐거워서 웃는 것 같지는 않아서 따라 웃을 수도 없었다. 이 분위기 뭐야? 내가 왜 자꾸 이놈 눈칠 보고 있지?

    “…한태화씨. 어쨌든 뒷일은 잘 마무리된 게 맞겠죠?”

    “글쎄요. 알아서 했겠죠.”

    “…….”

    응, 참 믿음직스러운 대답이었다, 이 새끼야. 입안이 씁쓸해져 담배 생각이 났다. 그래서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려고 시트를 걷고 무릎을 내리는데 보조 의자에서 일어난 한태화가 부축을 해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빤히 바라보다 스스로 일어나자 그저 한번 웃어 보이고 만 한태화는 딱히 무안해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이놈에게서 평범한 반응을 바라면 안 된다.

    “어디 가요?”

    “…흡연실요.”

    놈의 물음에 대충 대꾸하며 커튼을 걷고 나오니 의무원이 괜찮냐는 듯 눈짓을 보내왔다.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의무실을 나서자 그 뒤로 따라붙은 한태화가 졸졸 쫓아오기 시작해 신경이 쓰였다.

    “…같이 가시게요?”

    “예. 싫어요?”

    네, 싫어요. 좋겠어요, 그럼?

    “아뇨, 그게 아니라… 담배 안 피우시잖아요.”

    하고 싶을 말을 우회적으로 돌려 묻자 놈이 예쁘게 웃었다.

    “그럼 이제라도 배울까요?”

    “…아뇨, 이게 뭐 좋은 거라고….”

    “그죠? 그걸 알면서도 피우네요, 요한은.”

    “…….”

    할 말이 없어진 불리한 상황에 모르는 척 몸을 돌려 복도를 나서자 환하게 넓은 로비가 나타났다. 목에 걸려 있던 가이드 증을 보안대에 찍고 나와 주차장 옆에 마련된 흡연 장소로 걸어갔다. 그러자 담배를 피우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한태화를 보고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한태화가 집요하게 따라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대접이라 그저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딱히 손이 잡히는 게 없었다. 이놈의 라이터는 사도, 사도 없어져. 라이터만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나.

    불이 없어 담배를 못 피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하얀 손이 뻗어 나와 기다란 손가락을 하나 펼쳐 보였다. 그 순간 손가락 위로 나타난 작은 불덩이에 놀라 고개를 들고 놈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시원한 눈매가 요사스럽게 휘어지며 눈웃음을 쳤다. 그 부담스러운 얼굴을 피해 담배에 불을 붙인 후 고개를 돌리자 입에서 길게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러면 자괴감 안 듭니까?”

    “무슨 자괴감이요?”

    “이러려고 내가 에스퍼가 됐나, 뭐 그런?”

    다시 한번 담배 필터를 빨아들이며 한태화를 바라보자, 휘어져 있던 눈 그대로 미소를 지어 보인 놈이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뇨, 그보단 편하다고 생각하죠. 일상생활에서 여러모로 편리하게 쓰이거든요. 근데 자꾸 몸의 어느 부분인가가 어긋나는 느낌이라 자주 쓰지 못해 아쉽고요.”

    “…그러시구나. 근데 그런 힘이 없어도 불편할 건 또 없으니까요.”

    “편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건 아니고요?”

    “…….”

    거, 뉘집 새낀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주 송곳이네. 그러나 한편으론 맞는 말이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대신 흰 연기만 뿜어냈다. 그러자 그런 나를 보며 놀리듯 웃고 있던 한태화가 갑자기 한 걸음 다가오더니 불을 붙여줬던 손으로 어깨를 짚어왔다. 방금 전 그 손에서 불길이 일던 것이 생각나 어깨를 작게 움찔거렸지만 한태화는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대신 내가 편하게 살게 해줄 테니까, 가이딩 좀 해줄래요?”

    “…….”

    하마터면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 말에 놀라 턱을 빼며 어이없게 쳐다보는데도 한태화 놈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어쩐지, 대화가 좀 이어진다 싶더니 도로 제자리였다.

    “…대체 38%짜리 가이드한테 왜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 소문 못 들었어요?”

    “들었어요. 가이딩률이 38%라서 광땡이라던데, 별명도 너무 귀엽더라구요.”

    귀엽… 아무리 들어도 적응되지 않는 단어다. 저건.

    “근데 그 38%가 섹스를 하면 두 배 가까이 오르잖아요. 그럼 제법 구미가 당기죠.”

    “…이봐요, 한태화씨, 나는-.”

    “요한은 많이 해봤을 테니까, 나 좀 알려줘요. 저는 그런 게 처음이라서요.”

    “…….”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런 거? 그런 걸 나라고 해봤겠냐. 가이딩이라고 해봐야 응급으로 하는 보조 가이딩으로 기껏해야 손이나 잡던가, 피부 위를 만지는 것뿐이었다.

    물론 한태화는 나를 방독면남(男)으로 의심하고 있고, 그 방독면남이 다짜고짜 아랫도리부터 잡고 흔들었으니 조금쯤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그 방독면남이 나라고 해도, 나 역시 그날이 처음이었다. 같은 남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해 본 것은 말이다. 그날은 워낙 빡이 쳐 있기도 해서 그랬지만, S등급의 폭주를 D등급이 막으려다 보니 시작부터 세게 가이딩을 해야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방독면남이 누군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이때에, 그런 것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댈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다른 더 좋은 가이드를 만나세요. 저한테 이러지 마시고.”

    “다른 가이드들은 취향이 아니라서요.”

    “…취향 그거, 별거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진지한 내 말에도 한태화는 묘한 얼굴로 웃기만 할 뿐, 알아들은 표정이 아니었다. 결국 다시 담배를 물고 뻑뻑 연기만 피워대는데, 말이 없던 한태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받았던 가이딩이 너무 좋아서 그래요. 다시 한번 확인해 볼 것도 있고요.”

    “…….”

    뭐지, 이 새끼? 낚시인가?

    #8

    심정을 대변하듯 짧아진 담배가 손가락 사이에서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금세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태연히 담배를 껐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저는 한태화씨의 가이딩을 해준 적이 없는데, 다시 받고 싶다뇨. 뭔가 착각을 하셨나 봅니다.”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니까요.”

    끝이 까매진 담배꽁초를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자리를 피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금세 팔이 잡혀서 몸이 돌아갔다.

    “그러니까 요한, 내가 부탁했잖아요.”

    “…뭘요.”

    “젖꼭지 한 번만 만져보겠다고요.”

    이런 미친! 아무렇지 않은 척해보려던 얼굴이 일그러지며 지금껏 참아왔던 화가 터졌다.

    “어떤 미친놈이 그딴 부탁에 그럼 만져보시라고 가슴을 내줍니까? 그리고 나 아니라고요! 절대 아니라고! 그러니까 제발 좀 꺼져요!”

    아아,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내 꿈, 내 출세, 내 팀장직이.

    한태화에게 기어이 화를 내며 팔꿈치 부근을 잡고 있던 손을 쳐내고 쿵쿵 발소리를 크게 내며 유리문을 밀었다.

    아오 씨발! 그날 뭐 하러 보고를 하겠다고 사무실로 기어 들어와서 이런 사달이 났을까! 짜증과 함께 화가 치솟았다. 그래도 이만하면 이제 더 이상 따라다니진 않겠다 싶어 그거 하나만이 위안이 됐다. 내 장밋빛 미래가 다소 어둡고 음울해지긴 했지만.

    쿵쿵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유리문 너머로 아직도 그대로 서 있는 한태화가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당당히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길게 세워진 가운뎃손가락과 함께 욕설을 내뱉은 후 혹여 맞기라도 할까 봐 사무실로 줄행랑을 쳤다. 사실 후환이 좀 두렵긴 했다.

    ***

    뒤에 홀로 남아 그런 요한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한태화는 ‘하하’ 하는 웃음소리를 내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화내는 것도 귀엽네.”

    한태화는 요한의 말을 전혀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길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

    안 따라다니기는 개뿔. 놈은 벽창호가 분명했다. 내가 그렇게 아니라고 했는데도 한태화는 여전히 나를 따라다녔다. 벽에 대고 말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그 덕분에 나는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끼며 날로 더 수척해져 갔다. 한태화를 뒤에 달고 다닐 때마다 무섭게 따라붙던 동료들의 시선도 점차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바뀌어 갔고. 그렇게 불쌍하면 이놈 좀 떼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다들 그저 불쌍해하기만 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 식으로 동정할 거면 제발 뭐라도 좀 해주든가, 이건 뭐 다들 강 건너 불구경이다. 젠장.

    “좋은 아침입니다.”

    버릇처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사를 하자 먼저 와있던 강선배가 오랜만에 보는 밝은 미소로 나를 맞았다. 뭐야, 아침부터 왜 저래?

    “좋은 아침이야, 광땡아. 그리고 축하한다.”

    “뭐가요?”

    으레 항상 나보다 먼저 와서 인사를 받아주던 한태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둘러보며 놈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강선배가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아주 기쁘게 외쳤다.

    “한태화 없어! 작전 하나 생겨서 거기 투입됐대!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놈한테서 벗어나는 거야!”

    “…어… 정말요?”

    “뭐야, 그 뜨뜻미지근한 반응은? 설마 그새 정이라도 들어서 아쉬워하는?.”

    “만세!”

    선배의 뒷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놈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기쁨을 표출했다. 주머니에 넣어 뒀던 휴대폰이 울리지만 않았어도 만세 삼창을 했을 거다. 그렇게 히히거리며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확인하던 나는 도로 표정을 구겼다.

    [한태화: 요한ㅠㅠ 저 오늘 일이 생겨서 못 가요ㅠㅠ 근데 설마 만세 부르면서 기뻐하고 있는 건 아니죠? 오전 9:02]

    “…….”

    뭐야, 이놈. 혹시 우리 사무실에 카메라 같은 거라도 달아둔 거 아니야? 상당히 그럴듯한 의심이라 휙휙 고개를 저어 사무실 안을 살피는데 옆에 앉아 있던 강선배가 곁으로 다가와 휴대폰 화면을 흘깃거리더니 흠칫하고 놀라서 몸을 물렸다.

    “얘 뭐, 천리안 같은 능력도 있냐? 아니면 우리 사무실에 카메라라도 달아 뒀어?”

    “…….”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강선배도 나를 따라 사무실 안의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며 새로운 메시지를 띄웠다.

    [한태화: 다른 새끼 가이딩 해주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요. 이리저리 헤프게 다니다 걸리면 혼나요. 오전 9:02]

    “뭐라는 거야, 또라이가….”

    어쩐지 이 메시지를 보낼 동안은 웃지 않고 타자를 쳤을 놈의 모습이 생각나 부르르 몸이 떨렸다. 그리고 동시에 휴대폰도 몸을 떨었다.

    [한태화: 벌써 보고 싶어요 요한ㅠㅠㅠㅠ 어쩌죠? 오전 9:03]

    어쩌긴 뭘 어째.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오늘 하루를 기쁘게 보내면 되지. 어쨌든 오늘 하루는 자유를 찾았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흥얼흥얼 흘러나왔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강선배가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흘기며 몸을 물리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

    [한태화: 근데 요한, 메시지 확인하고 있으면서 왜 답이 없어요? 오전 9:03]

    “…헐.”

    [한태화: 임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그쪽으로 갈까요? 오전 9:04]

    [조심해서잘다녀오십시오. 오전 9:04]

    오겠다는 개소리는 하지 마시고요. ㅇ과 ㅗ까지 썼던 글자를 지우며 급하게 답장을 하자 곧장 글자 옆에 떠 있던 1이란 숫자가 사라지며 다른 글자들이 떠올랐다.

    [한태화: 보고 싶어요 요한ㅠㅠㅠㅠ 오전 9:05]

    [한태화: 요한은 나 안 보고 싶어요? 오전 9:05]

    미쳤냐, 내가?

    [몸조심하시고요. 오전 9:06]

    그래도 혹시나 다시 답을 안 했다가 당장 돌아오겠다고 할까 싶어 답장을 하자 한 텀 늦게 답장이 왔다.

    [한태화: 나 안 보고 싶냐고 물었는데… 오전 9:08]

    [한태화: 그건 왜 대답 안 해줘요ㅠㅠ 오전 9:08]

    “아, 귀찮아 죽겠네, 진짜.”

    [ㅂ호거시ㅂㅍㅓ요. 오전 9:08]

    [아, 회의 들어간다고 불러서 오타 났네요. 지금 좀 바빠서요, 일 잘 보고 오세요. 오전 9:09]

    느긋한 마음으로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답장을 하자 금세 다시 답이 왔다. 임무 나갔다는 놈이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나 보다.

    [한태화: 뒤에 문장이 더 긴데 오타 없는데요? 오전 9:09]

    [한태화: 좀 의심스럽네요 오전 9:09]

    의심하면 지가 어쩔 건데.

    [의심 많은 사람 싫어합니다. 오전 9:10]

    그렇게 답을 하자 읽었다는 표시가 나타난 것에 비해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일하고 있는 중인가 싶어 이제 그만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

    [한태화: 이제부턴 좋아하도록 노력해봐요^^ 오전 9:13]

    “…미친놈 아냐, 이거.”

    “누가?”

    “한태화요. 이 미친놈이 자꾸 작업 멘트를… 팀장님?”

    “연애 하냐? 그것도 하필이면 한태화랑?”

    언제 들어오셨는지 어깨 뒤에서 목을 뺀 채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던 팀장님이 몸을 바로 세우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 얼른 휴대폰 화면을 뒤집어 책상 위로 올려놓으며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린 채 불퉁히 입을 열었다.

    “아, 남의 휴대폰을 왜 봐요.”

    “부하 놈이 상관이 왔는데도 인사도 없이 휴대폰만 붙잡고 있길래 궁금해서 봤다, 왜?”

    “…오셨어요.”

    “오냐, 아?까 왔는데 이제야 인사를 받네?”

    빈정거리는 팀장님의 목소리가 묘하게 날이 서 있는 것 같아서 어깨가 움츠러들며 슬슬 눈치가 보였다. 이 양반이 오늘따라 왜 이러시나.

    “뭐 화나는 일 있으셨어요?”

    “너… 진짜 한태화랑 사겨?”

    “미쳤어요?!”

    꿈에서도 듣고 싶지 않은 말에 펄쩍 몸을 띄우자 그제야 팀장님이 한숨을 내쉬며 치켜떴던 눈매를 누그러트렸다.

    “아님 말지 뭘 그렇게 펄쩍 뛰어. 더 의심스럽게.”

    “팀장님은 한태화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미쳤냐, 너?”

    “그 마음이 바로 방금 전 제 마음입니다.”

    “…….”

    어이가 없는지 가만히 응시해오는 팀장님의 시선에 당당히 고개를 들고 ‘뭐요, 왜?’라는 눈빛을 보내자 팀장님이 기가 찬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너, 나 좀 따라 들어와.”

    “왜요?”

    “왜겠냐, 내가 네 팀장인데! 자꾸 말끝마다 토 달지?”

    “좋은 아침 입… 이 아닌가 보네요.”

    그때 마침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후배 상원이가 눈치를 살피며 살금살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슬쩍 시선을 돌려 시계를 바라보자 9시 15분이 지나있었다. 그럼 늦은 주제에 좋은 아침이길 바랐냐?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눈을 흘기니 놈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컴퓨터 뒤로 몸을 숨긴다.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팀장님을 따라 팀장실로 들어가자 여느 때처럼 엉망인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 앉아.”

    양복 상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자리에 앉은 팀장님이 맞은편 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에 보조 의자를 끌고 와 앉으며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서류가 너무 많이 쌓여 있어서 여기 앉으면 팀장님 얼굴도 안 보이겠는데요.”

    “그러니까 거기 앉으라고. 네 얼굴 보기 싫으니까.”

    아, 그렇게 깊은 뜻이. 눈앞에 쌓인 서류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쳐다보자 팀장님이 혀를 차며 모니터를 움직여 다시 내 얼굴을 가렸다. 쳇, 아침 인사 좀 늦었다고 사람이 아주 옹졸해졌다. 서러운 마음에 ‘팀장 정승원’이라고 쓰인 명패를 손으로 툭툭 밀었다.

    “치지 마라.”

    “…뭐가요.”

    “내 이름, 치지 말라고.”

    “…….”

    아주 귀신이 따로 없다니까. 불만스럽게 눈을 흘기면서도 얌전히 손을 물리자 서류산 너머에서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원팀 차출 요청서가 내려왔는데, 아무리 봐도 이 일에 너만 한 인재가 없을 것 같아서 부른 거야.”

    “…무슨 일인데요? 그리고 얼굴 좀 보고 말하면 안 돼요?”

    “응 안 돼. 요즘은 네 얼굴만 봐도 화병이 날 것 같아.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라고.”

    “아, 진짜.”

    #9

    입을 삐죽이며 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늘어지는 사이 새로운 서류 하나가 서류 산의 가장 위로 올라왔다. 그 서류를 끌고 와 껄렁껄렁한 태도로 살펴보는데 이번에도 서류 산 너머에서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당 고해성사실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다.

    “요새 오성파의 남은 잔당 무리 쪽 움직임이 영 수상한가 봐. 그래서 뒤를 좀 캐다 그중 한 본거지를 알아낸 모양인데 아직 어느 잔당 무리 쪽인지가 안 나온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요원을 투입해서 알아보려는가 본데, 그쪽도 뭘 눈치챘는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라고 하고. 그래서 현장팀 요원들 말고 얼굴이 안 알려진 인물을 찾고 있다길래 냉큼 물어왔지.”

    “오성파요?”

    오성파란 말에 재차 확인하듯 되물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성파는 정부에 저항하는 반정부 단체의 이름이었다. 본래 한국은 타 국가에 비해 에스퍼와 가이드의 활동이 자유로운 국가였다. 강한 에스퍼들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 50년 전부터 강한 에스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주축으로 우후죽순 이상한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체들은 서로 간의 싸움이 빈번해서 민간에 극심한 피해를 줬다. 결국 참다못한 정부가 나서서 다른 에스퍼와 가이드들을 끌어모아 그들의 싸움을 제재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세가(CEGA)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제재에 정점을 가한 것이 바로 에스퍼 & 가이드 특별법, 흔히 E&G 특별법으로 불리는 법이 제정된 일이었다. E&G 특별법은 에스퍼와 가이드의 등록을 의무화하여 등록된 에스퍼와 가이드에 한해 법률적으로 보호해 주겠다는 특별법으로, 그 법에 속하지 않은 능력자들이 법을 어겼을 경우엔 가중된 처벌을 하겠다는 법이었다.

    이때 바로 오성파가 등장했다. 이 특별법에 대항하여 몇몇 단체들이 힘을 합쳤고, 그들은 스스로를 오성파라고 칭했다. 그렇게 정부의 에스퍼와 가이드들에 대한 탄압에 저항하려 만들어진 오성파는 점점 그 세를 키워 정부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커졌다. 그리고 정부는 그 오성파 놈들을 잡기 위해 세가를 키우기 시작했고.

    비등비등한 힘을 지닌 두 세력의 지리멸렬한 싸움은 30년 가까이 이어졌고, 마침내 2년 전 오성파의 수장인 밤나비를 잡아들이면서 정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제는 에스퍼와 가이드가 등록을 하는 것이 당연해졌고, 그들은 정부에 소속되어 시민들을 위해 힘을 사용 것이 당연한 사람들로 바뀌어 있었다.

    문제는 요사이 오성파의 계보를 잇겠다는 각종의 사이비 단체들이 늘어나 등록하지 않은 에스퍼들과 가이드들의 활동이 왕성해졌다는 점이다. 오성파의 수장인 밤나비만 잡아들이고 그들의 주요 핵심 멤버들은 잡지 못했다는 문제도 남아있었고. 그러니만큼 오성파와 관련된 일은 중요하고 큰 사건에 속했다. D등급의 보조 가이드가 나설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팀장님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고.

    “D등급으로 팀장직 다는 게 네 목표고, 꿈이라며? 그럼 실적을 쌓아야 팀장이든 뭐든 하지 않겠어?”

    “…그건 그런데요….”

    “그럼 아무 말 말고 거기 적힌 곳으로 가.”

    적힌 곳. 서류에 적힌 장소는 한군데였다.

    “클럽 와썹? 여기로 잠입하라고요?”

    “응. 거기가 주요 본거지 중 하나인 모양인데, 에스퍼나 가이드들뿐 아니라 조폭 놈들도 끌어들인 모양인지 그놈들하고 어울리려고 거기에 자주 출입한다더라. 이름이 뭐라더라… 육성파?”

    육갑하네. 헐. 육성파 보스는 그럼 육갑이인가? 이름만 들어도 조무래기들이란 느낌이 강하게 왔다. 그럼에도 지원팀의 보조 가이드가 참여하기엔 큰 작전이라는 점엔 변함이 없었고 말이다.

    “제가 낄 만한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

    “껴볼 만한 일이야. 당장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누가 들락날락하는지만 좀 보고 인물 명단을 만들려는 거니까. 가서 놀다 와. 덤으로 실적도 좀 쌓고.”

    “진짜 클럽엘 가라구요?”

    “응. 너 어릴 때 자주 다녀서 분위기도 잘 알잖아.”

    “…춤만 췄어요.”

    “누가 뭐래? 지레 찔리나 본데 그건 관심 없고, 익숙한 얼굴이 있는지만 며칠 보다 오라고.”

    한 마디로 클럽 죽돌이인 척하면서 누가 들락거리는지만 보고 오란 소리였다. 그 정도라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다.

    “그냥 상원이 시키죠?”

    “누구, 밖에 있는 저 핏덩이?”

    인턴 요원 생활을 마치고 지원팀에 들어온 지 이제 막 1년 되어가는 후배의 이름에 팀장님의 목소리가 바로 불퉁해졌다. 나 역시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는데, 상대가 이렇게 받아치니 좀 울컥했다. 그 핏덩이만 편애하나 싶어서.

    “쟤가 딱 이런 데 다니는 거 좋아할 나이잖아요.”

    “너는 아니냐? 이제 겨우 스물여덟인 놈이.”

    “스물아홉이에요. 사무실 직원들 나이 정도는 외워두시라니까요.”

    “여덟이나 아홉이나. 나한텐 다 핏덩이야.”

    여전히 불퉁한 목소리를 내는 팀장님의 말에 대충 대꾸를 하며 서류를 든 채 일어나자 나가보라는 듯 팀장님이 손을 휘저었다. 그 성의 없는 태도에 마음이 상해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데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요한아.”

    “아, 왜요, 얼굴도 보기 싫다는 분이.”

    “…한태화는 안 된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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