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9)

“놀라셨겠네요. 그래도 병원에 연락을 한번 해볼까요? 얼마나 치료가 됐는지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이쪽으로 와달라고 부탁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 줄 수 있어? 나는 세화 외엔… 안 돼.”

미친놈들은 꼭 지들이 순애보인 줄 알아요. 바로 그 미친놈의 전형인 남자를 못마땅하게 훑으며 세화라는 가이드가 이번 기회에 꼭 저 남자에게서 벗어나길 기도했다. 그리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휴대폰 있습니까? 제가 연락해 보죠. 제가 일할 땐 휴대폰을 안 들고 다녀서요.”

“…….”

남자는 어느새 가까워져 있는 내 모습에 움찔하며 경계의 눈빛을 보내다 다시 온순한 표정을 짓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내게 제 휴대폰을 전해주려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무거운 소리와 함께 바닥이 진동하더니 4호실 쪽으로 연결된 벽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아무리 조악한 기관 시설이라지만, 그래도 가이딩을 위한 룸이었다. 가끔씩 난동을 부리는 에스퍼들도 있고, 힘이 폭주하여 능력을 써대는 에스퍼들도 있어서 공룸의 벽은 단단한 강철판이 덧대어진 채 지어졌다.

근데 그런 벽이… 무너진다고!?

놀란 얼굴로 벽을 바라보다 얼른 문가로 몸을 붙이며 경악했다. 그 순간 벽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가는 모양새로 와르르 허물어졌다.

“미쳤어!”

“아악!”

멍청한 얼굴로 제 자리에 서서 무너지는 벽을 구경하다 튕겨 나온 잔해에 이마를 얻어맞은 에스퍼가 아픈 곳을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친 상처에서 피가 나는지 그의 손 아래가 붉게 젖어 들었지만 그걸 신경 써 줄 여력은 없었다. 제 상처 아픈 놈이 병원 갔다는 자신의 가이드를 그렇게 애타게 찾을 리 없었다. 어디 한군데 부러지고 찢어져도 안 아픈 놈인가 보다고 치고 요란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한 공룸을 불안한 눈빛으로 살폈다.

이게 그러니까… 응급 가이딩을 하다 힘을 쓰는 에스퍼들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벽에 강한 힘이 가해지면 저절로 수면 가스가 방출되는 그런 경호 시스템이 존재했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3호실과 4호실 천장에서 하얀색의 수면 가스가 다량으로 살포되기 시작했다.

#3

“읍!”

숨을 참으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그런 뒤 경호 시스템에 의해 모든 잠금장치가 해제된 문을 열고 나가 복도 벽에 설치된 유리장에서 다급하게 방독면을 꺼내 들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한 수업 프로그램에서 배웠던 대로 방독면을 착용하자 그제야 편하게 숨이 터졌다.

그러길 잠시, 고개를 들어 살핀 눈앞의 상황에 움직임을 멈춘 채 떡하고 입을 벌렸다. 열려 있는 3호실 문과 부서져 있는 4호실 문 사이로 나온 수면 가스에 의해 복도가 하얀 연기로 가득 차 사방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눈 깜박할 사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폭주 증상을 보이던 남자를 떠올리고 다시 3호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연기가 자욱이 깔려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방 안에서 남자가 서 있었던 곳으로 예상되는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역시나 쓰러져있는 남자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미치겠네.”

이 알 길 없는 상황에 급한 대로 장갑을 벗고 쓰러진 남자의 뒷덜미를 부여잡았다. 찌릿한 감각과 함께 기운이 섞여드는 것이 느껴지며 서서히 쓰러진 남자의 정신으로 링크가 이루어졌다. 링크란 오롯이 가이드의 능력이기 때문에 에스퍼가 힘으로 막아두는 것만 아니라면 쉽게 가능했다. 물론 힘으로 막아둔다고 해도 얼마든지 강제로 해제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링크된 세상에서 서 있는 곳을 살피니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방 안으로 덜렁 놓인 낡은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이 링크된 세상이 바로 힘의 근원이 되는 공간으로 그 크기에 따라 에스퍼의 힘이 결정됐다. 다행히 남자는 높은 등급의 에스퍼는 아닌지 세계가 좁았다. 다만 작은 방의 4면체의 회색 벽들이 모두 금이 간 채 곧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가이딩이 필요해 보이긴 했다. 이 세상이 붕괴되면 저 에스퍼가 폭주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얼른 그의 근원의 열점으로 보이는 눈앞의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가, 열기를 품은 뜨거운 책상 표면에 다시 손을 떼어냈다. 생각보다 뜨거운데. 잠시 고민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의자에 앉아 책상 위로 양손을 올렸다. 화끈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천천히 가이드로서의 힘을 개방하자 덜그덕거리는 진동이 느껴지며 바닥과 함께 벽이 움직이더니 방 안이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금이 간 벽들이 책상 아래를 스치는 순간, 균열이 조금씩 사라지며 책상 표면에서 느껴지던 열감이 잦아들었다.

나야 손이 닿아야만 가이딩을 할 수 있는 D등급의 가이드였지만, 등급이 높을수록 손을 대지 않고도 가이딩이 가능했다. 닿는 부분의 치료도 훨씬 넓게, 잘 이루어졌고. 가이딩을 하는 방법이나 효율이 가이드마다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손에 닿는 책상 표면이 서늘하게 느껴질 때쯤에야 책상에서 손을 떼어냈다. 아직 벽 전체를 뒤덮은 균열들이 남아있었지만, 보조 가이드가 할 일은 열감을 잡는 일이었다. 나머지 가이딩은 남자의 가이드가 맡아서 하게 될 것이다. 미련 없이 손을 떼고 일어나 링크를 해제하자 정상 체온을 찾은 남자가 여전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한숨 돌린 셈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드는데 갑자기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량의 수면 가스가 퍼져있는 공간에서… 인기척이라니?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져서 숨을 죽인 채 앞을 보자 누군가의 움직임을 따라 흰 연기가 스멀스멀 움직였다. 조심히 앞으로 다가가 가늘게 눈매를 좁히니 부서진 벽의 가장자리를 짚은 채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좁은 방독면의 시야 사이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피던 나는 작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저놈이 왜… 여기 있어?”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경계심을 세우며 이번엔 반대편으로 뒷걸음질 쳤다. 기관 내 전설로 통하는 S등급의 에스퍼, 한태화. 그 남자가 부서진 벽을 짚은 채 힘겹게 서 있었다. 원래는 말이 안 돼야 하는 일이었는데 눈앞에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이 수면 가스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에스퍼의 난동을 막기 위한 가이드를 위한 장치. 폭주 전 아슬아슬한 상태로 가이딩 룸을 찾는 에스퍼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안된 장치인데, 어지간한 에스퍼라도 렘수면 상태로 빠뜨린다는 수면 가스를 맡고도 저 괴물 같은 S등급의 에스퍼는 버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태가 좋진 않은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양새긴 했다.

그럼에도 놈에게서 경계를 풀지 않으며 슬금슬금 몸을 물리는데, 그때 마침 한태화가 풀썩하고 고꾸라지며 바닥을 짚었다. 그러다 이내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며 몸에서 힘을 빼며 긴장을 풀었다. 그럼, 그렇지. 놈이 아무리 괴물이라도 이걸 버틸 수 있을리 없지.

안도를 하며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한 걸음을 떼어 보기도 전에 다시 몸을 돌려 쓰러진 한태화를 살폈다. 미치겠네, 진짜. 이성은 계속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눈에 밟히는 남자의 모습에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조심스럽게 그가 쓰러져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어쩐지 한태화를 향해 조금씩 다가갈수록 익숙한 열기가 느껴졌다. 뭐지?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근처로 다가서자 더 강한 열기가 느껴져 순간 손을 움찔거렸다. 설마… S등급이… 폭주 증상을 보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경악한 얼굴로 쓰러진 한태화를 내려다보다 발끝으로 어깨를 밀었다. 찝찝해서 직접적으로 손을 대기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바닥에 모로 쓰러져있던 몸이 정면으로 눕혀지더니 화려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극성 팬클럽이 있을 정도로 잘생겼다더니 소문대로 예사 미모가 아니었다. 희미하게 시야를 가리는 연기 속에서도 그 화려한 이목구비가 모두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한태화는 기관 내에서 유명했다. S등급의 에스퍼란 사실도 유명했고, 보는 사람마다 모두가 놀란다는 그 외모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그가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극심한 가이딩 거부 때문이었다. 그는 S등급의 에스퍼면서도 전속 가이드를 두지 않은 채 가이딩을 거부해 오고 있었다.

놈은 처음 기관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 사근사근 웃는 태도로 아무한테나 가이딩을 해주었을 가이드는 더럽다고 말해 모든 가이드들의 반감을 샀다. 그러나 S등급의 에스퍼가 폭주를 일으켰다간 자연재앙 급의 사태가 일어날 것이 뻔하기에 기관에서는 신입으로 들어온 가이드들을 소개했다. 그랬더니 저놈은 얼굴이 빻았다, 저놈은 다리가 짧다, 어떤 사람에겐 그냥 분위기가 좆같다, 라는 막말을 퍼붓곤 지금까지 혼자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저놈은 전속 가이드를 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놓곤 굳이 그 예쁜 얼굴로 웃으며 독설을 날렸다는 소식에 나는 진작 저 남자를 또라이로 규정해 놓은 참이었다. 더불어 피해야 할 제1순위의 남자로도 정해놨었고.

“그러니까… 이놈이 벽을 부순 거네. 가이딩을 거부하느라.”

4호실 너머로 쓰러져 있는 검은 인영을 확인 한 후,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놈은 폭주 증상을 보여 이곳 공룸으로 오게 되었고, 그를 가이딩하러 온 저 가이드를 거부하다 결국 힘이 폭주해 벽을 터트린 것이다.

내참, 누가 S등급 아니랄까봐 사고 한번 거하게 치네. 어이가 없는 마음에 주변을 돌아보다 쓰러져 있는 한태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걸 그냥 두고 가면… 폭주하겠지.

급격히 몰려오는 피곤함에 손을 들어 얼굴을 쓸려다 방독면을 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탈하게 내렸다. 오늘은 아주 재수가 옴 붙은 날이구나. 낮게 욕설을 내뱉다 하는 수없이 한태화의 옆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쨌든 가이드로서 폭주의 전조 증상을 보이고 있는 에스퍼를 그냥 방치하고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법률상의 문제도 문젠데, 그 폭주가 자연재앙 분류되고 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가는 것이라서 양심에도 반하는 일이었다.

내키진 않지만 다시 한번 가이딩을 할 생각으로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신적 기운을 소비하는 가이딩은 하루에 여러 번 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과도하게 힘을 쓴 가이드가 코마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이미 한차례 했던 가이딩의 여파로 처지기 시작한 몸을 느끼며 대충 간단히 응급 처치만 하고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남자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

“…―!”

잡힌 팔목에 경악하며 한태화를 내려다보니 희미한 시야 사이로 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놈이 소름 끼치게 고요한 얼굴로 방독면을 쓴 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수면 가스로 진작 정신을 잃고 잠에 빠져들었어야 할 놈이 아직도 버티고 있던 것이다.

“하지 마.”

“…….”

“더러운 손 치우고, 당장 꺼져.”

그 상황에 말까지 하는 놈을 보고 놀라서 숨까지 참고 있던 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경악했던 감정을 지우고 슬쩍 눈썹을 들어 올렸다. 더러워? 하, 별?, 오늘 일진이 진짜 왜 이러지? 부적이라도 써야 하나?

짜증으로 뻣뻣해진 목덜미를 느끼며 가볍게 목을 돌렸다. 그리곤 아직도 방 안을 가득 채운 수면 가스에 눈빛이 조금씩 더 흐릿해져 가는 한태화를 바라보다 바닥에 떨어진 그의 팔을 붙잡아 무릎으로 눌렀다.

“윽-, 뭐 하는-!”

“가만히 있어요. 팔 부러집니다.”

한태화에게 가볍게 경고하며 남은 팔을 잡고 온몸으로 누른 채 바지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디 그 더러운 가이드 손에 가이딩 한번 당해 보라지.

근육이 풀리면서 힘이 빠졌는지 꼼짝도 못 하는 놈을 비웃으며 버클을 풀고 상의가 접혀 들어간 사이로 손을 미끄러트리자 몸이 크게 요동을 쳤다. 그러나 수면 가스로 기운이 없긴 한지 이내 다시 잠잠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무 밴딩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헐.”

크다. 저 예쁘장한 얼굴 아래에 이런 게 달려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미친?, 왜 콜라병을 달고 다녀?”

성인 남자의 손으로 귀두 부근을 감싸고도 길게 남는 길이에 질려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조금씩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더럽다고 했던 놈치곤 빠르게 앞이 젖으며 정신 간 경계가 흐려졌다. 그러나 링크가 열리지 않아 가이딩을 할 수가 없었다. 놈이 힘으로 링크를 막아두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억지로 열고 들어가자면 못 들어갈 건 아니었다. 어차피 링크를 여는 것은 가이드의 고유 능력이고, 상대가 열어주길 기다리기보단 그냥 열고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가이딩이었으니까.

그러나 제 근원이 되는 공간으로 타인이 들어와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것이 좋은 기분일 리 없었다. 코마 상태에 빠진 가이드도 다른 가이드로부터 가이딩을 받아야 해서 그것에 대해 배운 적이 있는데, 그때 들어본 바에 따르면 그건 정말 더러운 기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평소처럼 상대가 링크를 열어주길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링크 열어요. 죽고 싶은 거 아니면.”

“…….”

“한태화, 열어.”

#4

링크를 열라는 말에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고집을 부리던 놈이 이름을 부르자 순식간에 링크를 열었다. 저도 그걸 왜 열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놀라길래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열었겠어. 살고 싶은 생존 본능이지. 제 몸은 살고 싶어 발악하고 있는데 주인이라는 놈이 그걸 모른다. 아직도 자신이 왜 링크를 열었는지 모르겠는 듯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태화를 비웃으며 링크된 세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삭막한 듯 휑한 기분이 드는 동시에 버석하게 마른 바람이 거칠게 뺨을 스쳤다. 마치 한태화의 세계가 침입자인 나를 밀어내듯 사납고 이질적인 기운이 온몸을 감싸왔다.

에스퍼의 정신세계는 그 주인의 기분에 많이 좌우되는 편이고, 가이드에게 가지는 호감도에 따라 그 사람의 정신세계가 가이드를 받아들이는 느낌 역시 달라졌다. 날카로운 기세의 뜨거운 바람이 몸을 휘청이게 할 만큼 강하게 불어오는 것을 보니 내가 어지간히도 싫은가 보다.

하긴 다짜고짜 아래를 잡아 오며 억지로 가이딩을 해주는 가이드라면 나라도 싫지. 근데, 그러게 누가 그딴 말로 사람 신경을 건드리랬나? 아니, 애초에 폭주 상태에 접어들 때까지 상태를 방치한 한태화도 문제였다. 자신의 폭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클지를 잘 알면서. 저기 누워있는 가이드의 가이딩만 얌전히 받았어도 될 일을 키운 건 한태화 자신이었다. 그럼 나도 집으로 가서 편히 쉴 수 있었을 텐데. 투덜투덜 끊임없이 불만 사항을 중얼거리며 눈을 뜨기 힘들 만큼 불어오는 바람을 팔로 막은 채 앞을 살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시든 갈색의 삭막한 대지 위로 회색빛 하늘이 마치 깨진 자동차의 앞 유리처럼 온통 금이 간 상태로 날 맞이했다. 잘못 손을 댔다가는 유리처럼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세상.

예상보다 심각한 상태에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며 열점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S등급 답게 심하게 넓은 이 공간에서 어떤 형태일지도 모르는 것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수 없이 한태화의 귀두 부근을 엄지와 검지로 문질렀다. 금세 쿨쩍이는 소리가 나며 앞이 젖어 들었다. 작게 신음이 들려와 시선을 돌리니 무서운 시선으로 이를 악문 채 노려보고 있는 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 사나운 시선과는 달리 쾌감이 높아지자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금이 잔뜩 간 투병한 벽 쪽으로 내 몸을 떠밀었다.

괜히 가이딩을 할 때 성적인 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정신 방어기제가 강한 에스퍼들의 경계심을 흐리게 만들기 위함도 있었고, 이렇게 그 사람의 근원으로 가까이 가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일반적인 가이딩은 아니었다. 보통 폭주가 의심되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에스퍼의 저항을 무시한 채 직접 걸음을 옮겨 근원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거부하는 에스퍼의 세상이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해올테지만, 그것만 이겨낸다면 이 세상을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이 가이드만의 특권이라면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가이딩의 효율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가이드의 가이딩은 에스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였고.

그러나 자신의 근원인 비밀스럽고 소중한 공간 안을 타인이 제멋대로 누비고 다니는 감각이 기분 좋을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직접 필요한 곳으로 옮겨주길 기다리며 쾌감을 통해 한태화의 경계심을 눌렀다. 이렇게 성적인 쾌감이 올라가면 아무리 낮은 가이딩률이 나오더라도 쉽게 근원에 다가갈 수 있었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경계심 또한 약해져 가이딩률이 올라갔다. 섹스까지 간다면 꽤 높은 수준까지 가이딩률이 뛰기도 했다. 거의 2배 가까이로. 2배라면 50% 이하의 낮은 가이딩률을 가진 가이드라도 누구에게든 충분히 가이딩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였다. 세가가 중매 업체라고 놀림 받는 데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돌겠네.”

문제는 녀석의 근원으로 가까이 다가가긴 했지만 여전히 칼 같은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쳐 팔을 하나 들기조차 버겁다는 점이었다. 이 상태로는 가이딩을 할 수가 없었다. 놈이 나를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읏!”

굵고 긴 성기를 손바닥 전체로 감싸고 위아래로 흔들자 한태화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나자 바람이 줄어들며 확실히 숨 쉬기가 훨씬 편해졌다.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뜨니 눈앞에 지친 듯 날개를 늘어뜨린 투명한 나비가 깨진 벽에 붙어 파르르 얇은 날개를 떨고 있었다.

나비? 기관 내에서 괴물로 통하는 놈의 열점이… 저 연약해 보이는 나비라고?

놀란 마음에 잠시 아무 것도 못하고 서 있자 지쳐 보이던 나비가 파르르 날개를 떨어 날아가더니 손끝이 닿지 않을 높이 정도로 자리를 옮겼다. 놈은 성격 만큼이나 지랄맞고, 까다로운 가이딩 상대였다. 열점이 움직이는 에스퍼라니. 이건 너무 고난이도라고. 한숨을 내쉬며 까치발을 한 채 나비를 향해 손을 뻗던 때였다.

“-이게, 무슨!”

“…좋아?”

이 미친 새끼가. 손을 뻗으려다 몸을 움츠리며 한태화를 욕했다. 상체로 놈의 몸을 누르고 있던 자세를 이용해 한태화가 유두 부근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절로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한태화의 정신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모두 열어 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작은 감각에도 몸이 반응을 할 판이었는데, 연신 가슴을 문지르자 평소엔 있는지도 몰랐던 존재가 바짝 서며 묘한 감각이 아랫배로 뭉쳐 들었다. 그에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를 틀다 안 되겠다 싶어 성기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뿌리 부근을 잡고 빠르게 흔들었다. 손끝에 걸리는 고환 역시 몇 번 문질러주자 벽에 앉아 있던 나비가 주르륵 미끌어지며 눈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지지 않고 나비를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뜨거워. 손 안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인상을 썼다. 오늘따라 내 손바닥이 개고생을 하는구나. 한숨을 내쉬며 얼른 가이드의 힘을 개방했다.

“아!”

그 순간 광오한 세계가 정신을 덮쳐오며 잠깐 정신이 흐려질 만큼 머릿속이 번쩍거렸다. 씨발, 무슨 힘이…. 그의 근원은 우주처럼 광활하다는 외엔 표현할 말이 없었다. 괜히 S등급에게 손을 댔다고 후회를 하며 녀석의 세계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허리를 비틀며 이를 악물어 봐도 무섭게 힘이 빠져나갔고, 정신이 마모되는 기분마저 들어 더 힘이 들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가슴 부근에서 세게 문질러지는 감각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정신을 잃고 코마 상태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나를 거부하는 한태화의 세계는 버거웠고, 가이딩을 해야 할 세계는 광활했다.

“씨발!”

결국 욕설을 내뱉으며 손안에 있던 나비를 날려 보낸 후 얼른 몸을 떼어냈다. 거부가 어찌나 심한지 간신히 열점만 좀 잡아 진정시켰을 뿐, 제대로 된 가이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 내가 살 생각에 몸을 물리자 그의 고개가 나를 향하며 흐릿해진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

“…젖꼭지, 섰어.”

비웃듯 키들거리며 웃고 있는 한태화를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이거 정말 미친 새끼 아냐? 이 와중에 그런 얘길 하고 싶나? 저는 아래를 바짝 세우고 있는 와중에? 폭주에 수면 가스까지 마셔 제정신도 아니면서?

검은 면바지 위로 불룩하게 불거진 놈의 아래를 쳐다보다 손을 들어 살피니 내 손도 한태화가 싼 프리컴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그 손을 찝찝한 눈길로 내려보다가 슬쩍 한태화가 입고 있는 비싸 보이는 상의에 문질러 닦아냈다.

“더러운 손에 세운 놈이 할 말은 아닌데.”

“…….”

“근데 나도 아무 가이드하고 구르다 온 몸은 영 취향이 아니라서요. 그게, 좀, 더럽잖아요? 나는 이만하고 갈 거니까 나머지는 다른 가이드를 알아보세요. 그리고 그땐 더러우니 어쩌니 하는 개소린 하지 마시고요. 재수 없으니까. 가이드나 에스퍼나 여기저기 몸 굴리고 다니는 건 똑같은데 왜 가이드한테만 지랄인지 모르겠네.”

일부러 놈이 한 말을 비꼬아가며 앙갚음하듯이 되돌려주자 한태화의 시선이 검게 가라앉았다. 흐려져서 곧 감길 것 같은 눈으로도 험악한 기세는 여전했다. 그제야 오싹하고 소름이 돋으며 정신이 들었다.

아, 원래 미친놈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닌데.

불안한 마음으로 한태화를 살피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의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자요. 빨리.”

무서워 죽겠으니까. 잠시 그러고 있자 손바닥 안에서 팔락대던 속눈썹의 움직임이 멎었다. 자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쉽게 마음이 놓이질 않아 얼마간 더 그러고 있다 슬그머니 손을 떼자 다행히 이번엔 진짜 잠에 빠진 한태화가 보였다.

와씨, 죽다 살았네.

긴 숨을 토하며 팔다리에서 힘을 빼고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방독면을 썼으니까… 내가 누군지는 모를 거야. …그렇겠지? 불안한 마음에 한태화를 힐끔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는데, 요란한 소리를 내던 경고음이 멎어있는 것을 눈치챘다.

어째 좀… 불안한데. 3호실을 통해 복도로 나가 계단이 있는 곳을 향하니 아래층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는 듯 발소리가 났다. 아마 경보 시스템이 작동하자 상황을 보러 오는 요원들의 발소리겠지. 생각보다 많은 수의 발소리에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엉망인 공룸 상태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쓰러진 에스퍼가 둘에, 벽은 부서지고, 문도 망가졌다. 그리고 아직도 연기가 가득한 복도로는 부서진 4호실 문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한마디로 개판이란 소리였다.

아 씨발… 이거 이러다 내가 다 뒤집어쓰는 거 아냐?

불안한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공룸의 반대편 복도 끝, 그 구석진 곳에 지원 1팀이라고 적힌 명패가 보였다.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몰려든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기분에 얼른 지원 1팀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나?”

방독면을 벗은 후 턱에 맺힌 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텅 빈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사건이 터져 사람이 부족하다던 팀장님의 말이 진짜였던 모양이다.

“아, 미치겠네. 이제 어쩌냐.”

문 너머로 요란하게 들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문가에 귀를 대고 서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 뒀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확인해보니 예상대로 팀장님이었다.

“여보세요? 팀장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공룸에서 긴급 경호 시스템이 왜 발동돼? 너 괜찮아? 어디 다친 거 아냐?

“아니, 저는 괜찮은데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근데 대체 누가 거기서 함부로 힘을 쓰고 지랄이야?

“…한태화요. 걔가 여기 있던데―.”

-…뭐? 누구?

못 알아들은 척하시기는. 다 들으셨으면서. 사람이 음흉한 데가 있다.

“자세한 상황은 저도 모르겠는데, 정황상 보자면 한태화가 가이딩을 거부하다 벽을 부순 것 같아요.”

-…그 미친놈이 또 한 건 했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있는데? 요원들은 출동했어? 걔들한테 사정 얘기 좀 잘 하고 있어 봐. 나도 바로 올라가서 도와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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