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141
별이 박힌 것 같은 커다란 눈동자가 물끄러미 제 얼굴을 올려다본다. 기태정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이해림.”
“그게 뭐예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있는데, 세화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히히 웃었다.
“왜?”
“진짜 군인 같아서요.”
“그야 진짜 군인이니까…?”
“아뇨, 해림이 부르는 소장님 목소리 톤이, 막…. 이해림 차렷, 열중쉬어, 그런 느낌이라서요.”
“…그랬나?”
“네, 그러셨어요.”
한 박자 텀을 두고서 세화가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렸다. 조금 전 기태정의 부름을 되새김질이라도 하듯이.
“이제 해림이 안 우니까 내려놓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래?”
기태정은 분부대로 조그만 아기를, 해림이를 안은 채 어정쩡하게 몸을 숙였다. 자세가 바뀌자 손을 열심히 휘젓는 통에 아이와 닿은 부분이 간지러웠다.
“잠깐만. 내려놨는데 또 울면?”
“네?”
푹신한 침대 위로 해림이를 막 내려놓으려다 말고, 기태정이 퍼뜩 세화를 향해 돌아섰다.
“갑자기 왜 울었는지 아직 이유도 찾지 못했는데…. 또 눕혔다가 이번엔 정말로 심하게 울어 버리면? 그땐 방법이 없잖아.”
모름지기 사고는 미연에 방지해야 하는 법이다. 쪼끄만 게 자주 눈물을 쏟으면 힘들기도 할 테니까 이렇게 계속 안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돌연 치민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세화가 어이없다는 듯 볼을 부풀리며 기태정 곁으로 다가왔다.
“그럼 그때 또 안아 주면 되죠.”
울면 달래 주고 예쁘다고 안아 주고, 그러면 되는 거예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세화가 기태정의 손을 이끌었다.
“그러다 보면 금방 또 괜찮아져요.”
힘이라곤 조금도 깃들지 않은 손짓이었는데도, 세화가 당기고 누르는 대로 멋대로 몸이 움직였다.
토끼와 사슴과 오리 모양의 솜뭉치가 종종 늘어선 상아색 침대 위로 인형만큼이나 솜뭉치 같은 아기의 몸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해림이는 눕고서도 계속 기분이 좋아 보였다. 착륙은 언제나 조심스러워야 하는군. 민들레 홀씨 같은 해림이의 머리카락 끝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기태정은 차마 세화에게 들려주기 부끄러운 감상을 삼켰다.
“이대로 두면 돼?”
“네, 모빌 켜 주면 잘 놀아요.”
“이 버튼 누르면 되나?”
“네. 저… 소장님. 저 해림이 옷 갈아입히려고 하는데.”
한번 보실래요, 하면서 세화가 더듬더듬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아이를 안아 보고 이름도 불러 보라기에, 그의 덤덤함과 단단함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리고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세화의 그 모습에서 기태정은 틀림없는 사랑을 느꼈다.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용감한 세화에게,한참이나 작은 그에게 기대어 안기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했다.
“아직 소, 손이랑 발이 작아서… 되게… 귀여워요.”
야무지게 말아 쥔 주먹이 자기 엄지발가락보다도 작을 거라며, 세화가 주섬주섬 아기 옷장을 뒤적였다. 따뜻한 나무 색의 가구 안에는 우주복과 모자 같은 것들이 소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애써 주는 세화를 위해서 기태정 또한 덤덤하게 굴려 노력했다. 더 깊은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도록, 세화가 가벼운 태도로 저를 대할 수 있도록.
“…애 옷이 이게 뭐야.”
그런데, 노력할 것도 없이 옷장 속 아기 옷들을 보자 타박하는 말이 절로나왔다.
“왜요?”
“너무, 좀….”
귀엽다 싶으면 일단 담고 봤는지 색이며 디자인이 중구난방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도 옷과 모자가 영 따로 놀고 있다. 물론 해림이 자체는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예뻤지만….
“하긴. 너 처음 봤을 때도 이상한 차림으로 있었지.”
“아, 그거야…!”
토끼 귀가 달린 분홍색 모자를 꺼내려던 세화가 발끈하며 기태정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저를 어려워하긴 해도 더는 공포 같은 게 어리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기태정은 당시 입었던 옷에 대해 주렁주렁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 세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또 웃었다.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와서 큰일이었다.
***
짐은 단출했다. 해림이 침대며 소독기며 부피가 커다란 짐들은 미리 부쳐서 들고 갈 것도 딱히 없었다. 제 몸과 해림이만 챙기면 끝이었다.
이틀 전까진 한 가지 자세만 고수하며 해림이를 품에 안고 있던 기태정은 그새 아이를 잘 다룰 줄 알게 되었다. 바구니처럼 생긴 동그랗고 조그만 카시트에 해림이를 척 앉히고, 손싸개를 채워 주는 솜씨는 어째 저보다도 나은 것 같았다.
차라리 품에 안고 말지, 덜렁 들고 가다가 떨어트리면 어떡하냐고 망설이던 저 대신 카시트의 손잡이를 척 쥐고선 차와 맨션까지 옮겨다 준 것도 기태정이었다.
“집이 너무 좁은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충분하죠.”
쪽쪽이를 물고 있는 해림이의 등을 토닥이며 기태정이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채광이 별로인 것 같고, 이건 색이 별로고 저건 뭐가 마음에 안 들고…. 그가 트집을 잡지 않은 건 안방에 놓인 널따란 자신의 침대와 그 옆에 놓인 해림이의 침대뿐이었다.
“오늘은 안 바쁘신 거예요?”
“어.”
거짓말이다. 기태정과 다시 만난 이후로,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땐 웬만해선 독촉 같은 건 안 하는 박 중위가 요 며칠 몇 번이고 찾아왔다. 손목시계의 알림이 위협적으로 웅웅 울릴 때도 있었다. 그래도 기태정은 괜찮다고, 상관없다고만 했다. 애가 닳은 부관들이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매달릴 때까지 하릴없이 저와 해림이 곁에서 얼쩡거렸다.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세화는 저도 모르게 핏 웃고 말았다. 얼쩡거린다는 표현을 기태정에게 쓰는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저녁에 오선란 대장 온다고 했었나?”
“네. 집에서 조촐하게 밥 먹기로 했어요.”
그러냐며 해림이를 어르는 기태정의 손길이 조금 빨라졌다. 먹고 가라는 권유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이대로 눙치고 있을 수 있을까, 타이밍을 엿보는 것 같았다.
쫓아낼 생각은 당연히 없었지만 자신의 눈치를 보는 기태정의 모습이 싫지 않아서, 세화는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경치는 참 좋지 않냐거나, 컨트롤러에 최신식 기능이 많아서 헷갈린다는 등의 영양가 없는 투정이었다.
기태정은 눈에 불을 켜고흠부터 찾았지만, 오선란 대장이 마련해 준 이 집은 세화에게 과분하기만 했다. 저택 같은 기태정의 관사보다야 규모는 작아도 없는 게 없었다. 병원과 가까워서 혹 해림이가 아프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고, 보안 시설이 엄청난 점도 마음에 들었다.
좁아터진 일인용 숙소를 배정받았을 때도 기뻐서 폴짝 뛰었는데, 이렇게 예쁘고 근사한 공간이 싫을 리가. 무려 집을 사 주고도 생색조차 내지 않는 오선란 대장에게 감사하고 죄송할 뿐이었다.
“참. 저 계속 고민해 봤는데요….”
과장을 좀 보태긴 했다. 계속까지는 아니고 어젯밤, 보호실의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든 기태정의 기척에 온 신경을 기울이다가 문득 떠올린 엉뚱한 생각이었다.
“뭔데?”
“그… 좀, 민망하긴 하지만요….”
“괜찮아, 말해.”
“놀리지 않는다고 약속,”
“안 놀려. 무슨 일인데.”
“아… 음, 저 디저트 만드는 법을… 배워 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디저트? 제빵 같은 거 말하는 건가?”
“아, 네…. 퇴원하고 뭐든 하고 싶긴 한데, 그렇다고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고… 그래도 가루 계량은 잘하지 않을까 싶어서….”
아무 말도 않고 빤히 저를 바라보던 기태정이 슬금슬금 미소를 지었다. 꿈실거리던 입매가 초승달처럼 휘더니, 이젠 하하 소리까지 내며 크게 벌어진다.
세화는 조금 시무룩해졌다.놀리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제가 생각하기에도 황당한 이유긴 했으나, 그래도 저렇게까지 웃을 건 없지 않나….
“그래, 그렇긴 하네. 적어도 그 분야로 널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지만, 빈정거림보다는 귀여워하는 느낌이 가득해서… 세화는 부끄러움에 이마만 문질렀다. 요 며칠 기태정은 자꾸만 저런 식으로 웃는다.
“네, 그래서… 오선란 대장님도 그렇고 소장님도 그렇고… 믿을 수 있는 시터 붙여 준다고 하셨으니까, 해림이 잠깐 맡기고 저녁에라도 공부해 볼까 싶어요. 물론 아직은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전문학교 입학하게?”
“글쎄요, 그것까진 자신 없고요… 일단은 그냥 취미로….”
“그래, 좋네. 해 봐. 네 말대로 뭐든.”
22년. 짧다면 짧은 평생에 인이 박인 것들을 당장 덜어 낼 순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발목을 적시고 말았던 구정물처럼, 2환과 4환에서 삼월이로 살아왔던 삶의 흔적은 쉽사리 지워지질 않았다.
그래서 세화는 애써 잊으려 하지 않기로 했다. 자학하듯 과거의 편린을 꺼내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속에 무엇도 없는 듯 외면하지도 않고… 예전에 있었던 일도 제 몸의 조각이겠거니, 하면서 받아들이려는 중이었다.
어떤 좋은 치료제를 먹어도 환상통은 남는다.
더는 모르는 사람처럼 기태정을 잊고 살아 보려고 했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저를 지켜 주겠답시고 기꺼이 피를 흩뿌린 남자를 울면서 받아 주기까지 했다.
해림이만 해도 그렇다. 지금이야 해림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처음 아이가 찾아왔을 때의 두려움과 우울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여진처럼 밀려오는 통각은 여전하다. 좋고 나쁨이 명확히 분리되지 않았다.그래도 분명한 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거다. 기태정과 지난 일을 툭툭 꺼내 털어 보기도 하고, 해림이를 보고 있으면 사랑이라는 말밖에 남지 않는 정도까진 되었다.
푹 팬 자리를 이렇게 부지런히 메우다 보면, 어느 날은 정말로 건강하고 단단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세화는 가루 계량에 능숙하니 베이킹을 배워 보겠다는 유치한 발상도, 그 일이 능숙하게 된 까닭도 굳이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저거 장민가?”
창문 너머 거실만 한 면적의 테라스를 살펴보던 기태정이 눈살을 콱 찌푸렸다.
“애 다치면 어떡하려고 저런 걸 가득 심어 놨어, 가시 잔뜩 달린 꽃을.”
“으음, 장미 가시 때문에 해림이가 다칠 날은 아직 멀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네가 해림이 안고서 산책이라도 하다가 찔릴 수도 있는 거라고, 기태정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파상풍이 얼마나 치명적인데. 빨리 손쓰지 않으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어.”
트집을 잡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묘목을 전부 뽑아내는 걸 고려하는 중인가 보다. 세화는 으음, 하며 목만 울렸다. 뭐라 대꾸하면 좋을까.
“안 되겠어. 날 풀리면 관사로 들어와.”
고민하던 보람도 없을 만큼 맥이 탁 풀리는 소리였다.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던 걸까?
“관사엔 저런 위험한 꽃 같은 거 하나도 없으니까.”
“제가 작정하고 장미 위로 쓰러지지 않는 이상 해림이가 파상풍으로 죽진 않을 거예요….”
세화가 조그맣게 항변해도, 기태정은 그냥 관사로 들어오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 주제를 꺼내기 적당한 때만 벼르고 벼르던 사람 같았다.
“민간 건물이 안전해 봤자 장교용 관사만 하겠어?”
“그건 그렇지만요….”
“그렇다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어차피 나 바빠서 잘 들어가지도 않으니까.”
바쁘다기엔… 매일같이 보호실에서 뭉개고 있지 않았나. 일단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기태정은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나 정말 바빠서 너랑 해림이 둘이서만 사는 기분도 낼 수 있을 거라고.정말, 사람 안 변한다더니.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들어와, 어?”
“날 풀리면요.”
“진심이야?”
해림이의 배냇짓만큼이나 의미 없이 하는 대꾸였다. 그걸 모르지 않을 거면서, 기태정은 집요하게 세화의 말꼬리를 붙들었다.
“날 풀리면 들어오겠다는 거, 진심이냐고.”
“글쎄요. 아직 멀었잖아요.”
“아직 멀기는. 따뜻해지는 거 금방이야.”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엔 잘 다듬어진 거대한 장미 덩굴이 있었다. 사실 장미인 줄도 몰랐다. 아까 기태정이 그렇다고 했으니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가시 돋았으니까 이제 잎도 돋을 거고, 그러면 꽃 피는 건 순식간이니까.”
“…그래… 요?”
“어. 기후가 낯선 나라에선 꽃이나 풀 같은 걸 보면서 대충 시기를 가늠했어. 계절이 바뀐다는 신호구나, 하고.”
가시덤불이 엉겨 붙으면 그건 곧 꽃이 필 거라는 이야기라고.
봄이 온다는 뜻이라고….
“…그렇구나.”
세화는 어쩐지 눈 안쪽이 훅 뜨거워져서 애꿎은 상의만 죽죽 잡아당겼다. 아….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아릿한 감각이 온몸을 녹진하게 만들었다.
내가 가진 건 가시뿐인 것 같다는 얘길 들려준 적도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서 이런 얘길 꺼낸 건지 모르겠다. 저 사람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길 어쩜 저렇게 잘도 흘리는 걸까….
“아기 춥겠다.”
기태정이 작게 혀를 차며 컨트롤러를 눌러 댔다. 층고가 높아 보통 건물의 2층 높이는 될 것 같은 거대한 통창에 불투명한 드레이프가 둘리고, 그 위로 해림이의 침구 색과 비슷한 크림톤의 커튼이 쳐졌다. 기태정이 절묘하게 버튼을 조절한 덕에 기분 좋게 빛을 느낄 정도의 틈만 딱 남겨 둔 상태였다.
“그러게요, 아직은 추울 거예요.”
창은 튼튼하고 난방도 빵빵하게 돌아가는데도, 세화는 고개를 끄덕여 주며 거실에 쳐진 커튼을 눈에 담았다.
3월을 뜻하는 패엔 꽃과 장막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다. 도형적 특성을 강조한 뾰족한 벚꽃은 벌겋고, 또 검어서 예쁘지도 않았다. 수상쩍게 펼쳐진 캄캄한 천개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꽃놀이 나온 놈들이 실컷 뒹굴고 있지 않겠느냐고, 다른 선수와 손님들이 저를 깎아내리려는 농담을 자주 하긴 했었지만….
세화도 사람이나 동물이 그려진 다른 패가 되고 싶었다. 쓸쓸하지 않을 거라면 멋있기라도 한 달이 자신의 것이었으면 했다. 요원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처럼 근사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일평생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삼월이가 아니라 이세화라고 불릴 수 있었으면, 약이나 팔고 화투패나 돌리다 죽을 선수 같은 게 아니라 주민등록부에 이름 석 자 올릴 수 있는 한 명의 사람일 수 있었으면.
주제도 모르고 분에 넘치는 꿈을 가슴에 담았던 탓에 세화는 내내 아팠다. 결과적으로 뜻대로 풀린 일은 하나도 없었고, 얼결에 얻은 것들은 어딘가 깨지고 부서져 아직도 모서리가 성하질 않았다.
그런데 이토록 버겁고 아픈데도, 지금은하나도 놓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잘해서 이룬 건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여기에 행복까지 바라선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주제도 모르는 욕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오늘보다 내일 더, 한 뼘이라도 더 마음이 여물었으면 좋겠다.
하늘을 바다처럼 유영할 수 있는 남자가 뜻 없이 뱉은 조금 전 그 한마디 때문에 계속, 계속 행복해지고 싶어졌다. 뾰족한 가시 끝에 찔려 때론 피가 나고 아파도, 기태정의 말대로 기다리다 보면 제 손에서도 꽃이 피어날 날이 올 것 같았다.
“…소장님.”
“어.”
“저녁, 드시고 가실래요?”
“그럼 밥도 안 주고 쫓아내려고 했어?”
세화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마주한 기태정의 눈동자 속에, 둥글게 눈을 휘며 웃고 있는 제 모습이 보였다.
“해림이 그만 눕혀 주러 가요.”
“벌써?”
“계속 안고 있으면 버릇 안 좋아져요.”
“아직 앤데 버릇 좀 안 좋아져도,”
“안 돼요.”
“…알았어.”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며 기태정이 턱짓했다.
집 안을 맴도는 훈풍에 단단히 여민 커튼의 끝자락이 살짝 흔들렸다.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하얗고 아름다운 장막 속, 금이 붙어 가며 이전보다 더더욱 견고해진 작은 세상.
어린 날의 세화가 그토록 바라던 것들이 모두 이 안에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