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오선란 대장은 쓴 것을 삼킨 사람처럼 잠시 콧잔등을 찡그렸다. 빛이 바랜 기억을 더듬는 그는 괴로우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무슨 수를 써서든 네 아이 찾아 주겠다고,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해 줄 거라고…. 그런 약속을 했었어.”
신기한 일이었다. 우는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은 오선란 대장이 어쩐지 세화와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이 남남이라는 건 확실한데, 이렇게 보니 진짜 부자지간 같기도 했다.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얼굴도 닮아 가는 건가. 아니면 세화와 닮았다던 그 사람을 보고 익혔던 표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
“그래서 난 여전히 자네를 용서할 수 없네. 세화를 그 지경으로 망가뜨려 놓고선 이제 와 잘해 주고 싶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양심이라곤 내다 버린 것 같은 네놈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그렇지만….”
오선란 대장은 툭 떨구고 있는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다,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정작 세화는 하루하루 시들어 가고 있는데… 내 사감 같은 게 뭐가 중요하겠나.”
“…….”
“차라리 마냥 떼쓰고 우겨 대는 철부지였다면 앞으로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된다고 강짜라도 놨을 텐데…. 또 그런 성정이 못 되니까, 세화는….”
최근의 세화를 떠올리며 온 얼굴로 안타까워하던 오선란 대장은 이내 눈에 시퍼런 불을 켜고선 ‘그렇다고 세화가 그간 자네만 그리워하며 괴로워했다는 소리는 아니야.’ 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착각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세화는 정말이지 혼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노라고. 습격 사건이 아니었다면, 또 네 놈과 얽힐 일이 없었다면 순조롭게 잊어 갔을 거라고.
“해림이 생각해서라도 건강해지겠다고 애썼고, 실제로도 많이 좋아졌지…. 그래, 워낙 곧고 강한 아이니까.”
하지만 한 번은, 하며 오선란 대장이 길게 숨을 흩트렸다. 본인의 입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더 골이 깊어지기 전에… 한 번은 서로 터놓고 얘기할 시간이 있어야 나중에 세화에게 한으로 남지 않을 것 같았네.”
그 외엔 어떠한 이유도 없고, 다시 말하지만 난 네놈이 정말로 싫다며 오선란 대장이 진저리를 쳤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기태정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입에 발린 말 같은 게 통할 사람도 아니었고, 오선란 대장 역시 그런 걸 바라지 않을 거다. 그래도 그는 세화가 많이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원래 성품이 어떻든 간에 오선란 대장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세화의 상처가 이만큼이나 아물진 못했을 거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저 또한 갖가지 도움을 받았으니, 언제고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무뚝뚝한 기태정의 인사에 오선란 대장은 코끝을 매만지다 푸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가끔은 말이지, 나도 참 신기해. 이렇게까지 순수하게 세화의 행복만 바랄 수 있다는 게, 애들이 정말 내 자식과 손자처럼 느껴진다는 게….”
직전까지 역정 내다가 불쑥 꺼내 보인 오선란 대장의 속내가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자가 이세화가 아닌 기태정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싶다. 친자식처럼 여기고 있다는 세화에게 이런 의문을 토해 낼 순 없을 테니까.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내가, 글쎄…. 순정 같은 것보다는… 추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 그래, 추하다는 말이 꼭 맞아. 이건 순정이 아니라 집착이지. 그것도 매우 처절하고 못난.”
“…….”
“그런데 더 뼈아픈 사실은, 나는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다는 거야.”
내가 지금도 널 그리워하는 게 죄가 되는 것은 아닐까. 많이 부담스러우려나. 그렇지만 사랑하는데.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데.
“사랑한다는 말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이젠 아프지 않았냐고 묻고 싶고, 그때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고, 난 그런 일이 있을 줄 정말로 몰랐다고… 그 말만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나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아니, 죽지도 못하고 홀로 긴 시간 살아야 한대도 어떻게든 견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예고도 없이 터져 나온 그리움에 잡아먹힌 것 같았던 오선란 대장은 이내 짧게 도리질을 치며 정신을 차렸다. 바싹 말라 새카맣게 흐려지던 노장의 눈에 또렷하게 초점이 되살아난다.
“흐흠, 하여튼… 아까도 말했듯 앞으로도 난 자네와 살갑게 지내고 싶은 마음 없네. 혹시라도 또 세화와 해림이에게 상처를 준다면 이번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영 떨어트려 놓을 테니 그리 알아.”
좀 아프겠지만 길게 봤을 땐 세화에겐 그게 훨씬 더 나은 일이 될 테니까, 하면서 오선란 대장이 혀를 쯧쯧 찼다.
“적어도 용서를 구할 상대가 살아 있다는 걸, 세화가 꺾이지 않고 이렇게 잘 견디고 있는 걸 모쪼록 감사히 여기도록 하게. 내가 아니라 세화에게.”
이후론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불러 세워 사적인 것을 묻지 말라고 무뚝뚝하게 일갈하며, 오선란 대장이 뚜벅뚜벅 보호실로 걸어갔다.
기태정은 그가 보호실의 문고리를 쥐기 전 밝게 웃으려 몇 번이나 안면 근육을 당기는 것을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세화가 살아 있는 것에, 사과할 기회가 아직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오선란 대장의 충고가 속을 묵직하게 휘젓고 갔다.
***
“오셨습니까, 소장님.”
상주 시터 중 한 사람이 보호실 현관까지 튀어나와 꾸벅 경례를 올렸다. 기태정은 텅 빈 거실을 느릿느릿 둘러보다 부드럽게 풀고 있던 낯을 꽝꽝 얼렸다. 세화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웃고 있었던 거지, 다른 놈 기분 좋아지라고 사람 좋은 척 꾸미고 있었던 게 아니니까.
“세화는.”
찾아오면 오셨냐며 쭈뼛쭈뼛 얼굴을 내밀던 이세화가 보이질 않는다. 자나? 그렇다기엔 안쪽에서도 인기척조차 느껴지질 않았다.
운동하러 갈 시간도 아니고, 상담실 갈 시간도 아닌데…. 무슨 일이지? 기태정의 눈매가 단박에 싸늘해졌다. 지난 일 이후로 경계가 대폭 강화되긴 했어도, 혹시 모를 일이다.
“방금 검사받으러 가셨습니다.”
덕분에 원치도 않은 마중을 나온 시터가 쩔쩔매며 공손히 보고했다.
“검사?”
이 새끼들이 처돌았나….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이세화가 자릴 비웠는데 나한테 말도 없어? 밖에 선 놈들을 조지려고 돌아서려는데, 시터가 고개를 저으며 기태정을 붙들었다.
“체질 관련한 일로 박 선생님께서 급히 호출하셨습니다. 나 대위님이 직접 모시고 간 데다, 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는 게….”
“이 새끼가 지금,”
“그, 까다로운 건 아니지만 예정에 없었던 검사고… 이세화 님이 놀라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수치 파악이 어려워질 수도 있으니, 혹 소장님 오시면 꼭 좀 붙들어 놓으라고… 나 대위님이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대에게 그가 듣기 싫을 게 뻔한 말을 하느라 시터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소장님.”
기태정은 삐딱하게 서서 혀끝으로 볼 안을 굴리다가, 별수 없이 보호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쩌겠는가. 원활한 검사가 목적이니 무턱대고 쫓아오지 말라는데.
아니, 근데 그러면 씨발, 알람이라도 하나 넣어 주든가. 까다롭지도 않고 안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짧게 보고 올리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기태정은 손부터 씻으며 습관적으로 자신의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다행히 꼴은 멀끔했다. 전투기와 무기 점검 기간이라 요 며칠 정신이 없었다. 보호실에 걸음 한 것도 거의 일주일 만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세화에게 몇 번 메시지를 보내긴 했는데 답은 오지 않았다. 읽었다는 표시는 뜬 걸 보면, 멋대로 세화 손에 쥐여 주고 갔던 핸드폰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욕실에서 나와 거실의 소파로 향하려는데, 아까 그 시터 놈이 아직도 현관쯤에서 수상쩍게 서성이고 있었다. 무전을 쉴 새 없이 만지작거리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누가 봐도 저에게 숨기는 게 있어 보였다.
“너 뭐야.”
“예?”
“뭐 하고 있냐고, 거기서.”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놈의 멱살을 틀어쥐자, 시터가 허옇게 질려 덜덜 떨었다.
“소, 소장님, 그게….”
“내가 이세화 한정으론 등신같이 구는 건 사실인데, 넌 이세화가 아니잖아?”
“헉, 소장님…!”
“씹새끼들이 몇 번 좋게 넘어가 줬더니 나사가 빠져 가지고….”
“그, 그게 아니라… 무전이 고장 나서 그렇습니다.”
시터가 억울하다는 듯 귓바퀴에 부착한 손톱만 한 리시버를 떼어 냈다.
“아기가 쓸 기저귀와 소독한 젖병 받을 시간인데 연락이 닿질 않아서….”
사전 절차 없이는 보호실로의 접촉이 철저히 금지된 터라, 자신이 먼저 연락을 넣지 않으면 담당자가 물품도 가져다 놓지 않는다며 시터가 더듬더듬 변명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지러 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 못 미더우시면 그, 밖에 오선란 대장님 직속 부관 있으니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감시자도 서넛 더 붙여서 가겠다며 시터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빌었다. 기태정은 혀를 차며 놈의 멱을 틀어쥐고 있던 손을 풀어 주었다.
“그, 그러면 빨리 다녀오겠,”
“잠깐만. 그럼 아기는?”
“아, 자고 있습니다. 낮잠 잘 시간이라서요.”
야 이, 씨팔, 그걸 말이라고…! 성질대로 험한 말을 쏟아 내려던 기태정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 아기가 깨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애가 자다가 깰 수도 있는 거 아냐. 아무도 없는데 어떡하라고.”
“어, 음…. 워낙 순하고 수면 패턴도 일정해서… 지금 시간대면 딱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기저귀가 축축해져서 깰 수도 있긴 합니다만, 그 점을 고려해서 미리 물품을 충원해 두려는 거라….”
필요한 물건이 없어서 내내 발 동동 구르는 것보단, 아무도 없어서 혼자 조금 울더라도 곧장 새 기저귀 채워 주고 잘 달래는 게 낫지 않겠냐며 시터가 소심하게 의견을 냈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어쩔 도리가 없어, 기태정은 시큰둥한 턱짓으로 놈을 쫓아냈다. 박 중위와 오선란 대장의 부관에게 저 새끼의 신상을 재차 조사해 보라 명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현재 보호실에 상주 중인 시터는 총 세 명이며, 삼 교대로 움직이고 있다. 전문 업체에서 선별한 인재들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하는 짓이 영 어리바리한 것이… 저래서야 세화 힘들 때 도움이 되기는 할까 싶었다.
기태정은 여전히 아무런 알림도 없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다, 소파의 머리받이에 뒤통수를 깊이 묻었다.
세화는 사흘 후 퇴원 예정이다. 오선란 대장이 수배한 맨션은 병원과 주요 관공서에서 멀지 않았고, 뛰어난 보안 체계와 각종 편의 시설로 유명했다. 웃돈을 준대도 매물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주거지로 알고 있는데, 무려 대장이 나서니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올라가 볼까.”
중장 특진은 보장받았다. 원래 내년 예정이었으나, 하반기 안으로 한 번 더 계급을 갈아 치우게 될 것 같다. 세화와 다시 만나기 전까지 어찌나 이곳저곳 쑤시고 다녔던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저에게 성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군부의 위신이 서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빠른 제대는 글러 먹었고…. 좀 더 빡세게 굴러서 대장 자리나 진지하게 노려 봐야겠다.
지금도 돈이든 권력이든 아쉬울 건 없었지만, 대장이 되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거다. 나중에 원로가 되더라도 끗발 자체가 다를 거고… 무엇보다 저에겐 뒤를 받쳐 줄 집안이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면 앞으로도 세화를….
“…후, 우웅….”
검지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기태정의 움직임이 일순 뚝 멎었다.
침실 안쪽에서 도저히 모르는 척할 수 없는 기척이 느껴졌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진 모르겠다만,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내는 소리인 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