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40)화 (140/144)

#137

“아, 병원 근처에서 살게 될 것 같아요.”

“병원 근처? 여기?”

“네, 그… 오선란 대장님이 도와주셔서… 아,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세화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끝에 가서는 파르르 떨렸다. 젓가락질도 영 시원찮고 말도 다시 더듬거리기 시작한다. 불안을 자극한 주제인가 보다.

“음.”

기태정은 짧게 목을 울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기도 했다. 한참 세화와 어긋날 때 이 주제로 지긋지긋하게 굴었던 탓이다.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그만하자고 하는 걸 몇 번이나 모르는 척했으니… 세화 입장에선 어디서 살 거냐는 물음이 껄끄러울 법도 하다.

관사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이와 함께 평화롭게 노닥거리는 모습? 저를 보고 오셨냐며 환하게 웃어주는 거? 그딴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세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저를 보는 게 어렵고 싫으면… 그럼 아주 가끔만 드나들어도 상관없는데. 어차피 밖에서 할 일 많으니까.

이제야 얼굴 내놓고 드나드는 걸 허락받았으면서, 동거라니…. 지나친 욕심이라는 건 기태정도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세화가 동의한대도 오선란 대장이 반대할 수도 있다. 아니, 반대할 게 뻔하다.

같이 살자고 조르지 않는 것. 하고 싶은 말 다 하지 않고 있으니 예전보다야 많이 나아지지 않았냐는 자화자찬으로 세화를 당황하게 하지 않는 것…. 그나마 이 정도가 당장 기태정이 떠올릴 수 있는 세화에 대한 배려였다.

용서를 받은 것도 아니고, 용서를 구하는 중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지. 머리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초조함이 불쑥 솟곤 한다.

특히 제가 세화를 아프게 했던 대목들, 이를테면 지금처럼 주거 문제 같은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 당장이라도 수복하고 싶어 마음이 들썩였다.

빨리 좋은 기억으로 덮어 주고 싶다. 더는 저와의 언젠가를 떠올리고 저런 쓸쓸한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새살이 돋아도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느긋하게 기다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막상 세화의 먹먹한 얼굴을 마주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그럴싸한 것들을 해진 그의 마음에 덕지덕지 발라 주고만 싶었다.

“그래서 퇴원하면 뭐 할 거야.”

“…….”

“하고 싶은 거 많았잖아.”

아무래도 세화가 어색해하는 것 같아서 주제를 돌려 보았다. 그렇지만 이도 썩 좋은 이야깃거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글쎄요, 하며 애매하게 답하는 세화의 낯은 아까보다 한층 더 흐려져 있었다.

“학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공부하려던 거 아니었어?”

“그거야….”

해가 바뀌었어도 고작 스물두 살인 주제에, 세화는 세상 다 산 것 같은 쓸쓸한 눈을 하곤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저 없으면 안 될 거고.”

그게 무슨 뜻이지? 두루뭉술한 말에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던 기태정은, 조금 후에야 생략된 주어가 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로도 바빠서 아무 생각도 안 들 것 같은데….”

“…….”

“학교… 도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야 한 번도 가 본 적 없으니까 꿈꾸던 거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막상 가서 제가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왜 해 보지도 않고서 그런 말을 해.”

불퉁하게 대꾸하자 세화가 하하, 작게 웃었다. 텅 빈 소리를 내며 웃던 세화는 폭신폭신한 계란찜을 퍼 먹었다. 따뜻한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속이 든든해졌는지, 그제야 굳은 어깨에서 긴장을 푼다.

“뭘 하면 좋을까요…. 모르겠어요.”

“…….”

“준장… 아니, 소장님도 그렇지… 않으세요?”

“…뭐가?”

“전 다 끝나면 뭐든…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저한텐 그게 성 안의 주민이 되는 일이었고, 소장님은 재판을 성공적으로 마치시는 거였겠죠. 중얼거리면서 세화가 고개를 슬쩍 비꼈다.

길게 뻗은 세화의 속눈썹에 드리운 감정을, 서글픔을, 이기적인 기태정은 끝내 모르는 척했다. 그 마음을 깊이 파고들면 결국은 내가 떠나는 게 좋겠다는 선택지 외엔 남는 게 없을 것 같아서. 대신 몸에 좋은 반찬 같은 거나 세화의 수저 위로 얹어 주며, 더 먹으라는 염려만 무뚝뚝하게 흘릴 뿐이다.

“그런데 진짜로 다 끝나고 나니까 그냥… 겨우, 숨만 겨우 쉬고 있는 것 같아요. 전혀 다르게… 일이 풀려서, 그런 걸까요.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 많은 게… 달라졌으니까….”

그렇긴 했다. 계획대로 풀리지 않은 건 저나 세화나 마찬가지였다. 계획은 무슨, 뜻대로 된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선 세화는 몇 번이나 크게 침을 삼켰다. 겨우 털어 넘긴 건 사실 타액 같은 게 아니라 자꾸만 속에서 울컥 치솟는 무언가였을 것이다.

“…준장님.”

“어.”

“이상… 하지 않아요? 우리 이러고 있는 거요.”

“…….”

“그렇게 싫다고, 놔 달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 놓고서… 이렇게 어물쩍, 쉽게….”

어느새 코끝이 빨갛게 된 세화가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쉽게, 준장님 받아 주고….”

“…….”

“같이 마주 앉아서 밥 먹고… 앞으로 뭐 할지 그런 얘기나 하고, 이러고 있는 게, 가끔은… 아주 가끔은….”

“…….”

“이런 저한테 정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준장님을,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어디가 잘못된 게 아니고서야, 대체 어떻게.

저 들으라고 하는 힐난이 아니었다. 여전히 어리고 여린 음성으로 세화는 또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대단한 비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매끄러운 설명을 곁들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기태정은 그 어설픈 탄식에서 지금 세화가 품은 서러움을 완벽히 읽을 수 있었다.

애틋하게 여기고 있다. 평범하고 예쁜 형태는 아니긴 하지만 틀림없이 사랑하고 있다. 그런 상대의 기쁨과 행복보다, 절망과 우울이 익숙하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를 저 지경으로 만든 것이 나라는 걸 아는데도 놓을 수가 없는 이딴 마음을, 사랑… 같은 걸로 포장해도 되는 것일까.

기태정은 금방이라도 닳아 없어질 것 같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종종 제 앞에서 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던 세화는 어느 순간부터는 우는 법도 잊고서 저렇게 물기에 푹 절어있기만 했다.

“그럼 이렇게 할까.”

“…….”

“3점 걸고서 내기 하나 하자, 나랑.”

뜬금없는 제안에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기태정을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나랑 마주 앉아서 밥 같이 먹어 주는 이유 세 개를 찾아보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새끼를 내가 왜 두고 보고 있을까, 그 이유를.”

“…….”

“겸사겸사 날 용서해 주고 싶은 이유까지 생각해 주면 더 좋고.”

뻔뻔스럽게 덧붙이자 세화가 허, 하고 어이없어했다.

“한 개에 1점으로 쳐서, 3점 다 채우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 그게 뭐든.”

“…저더러 그걸 믿으라고요.”

“진짜야. 지난번에도 들어줬잖아.”

기태정은 부드러운 갈비찜을 결대로 찢어 세화의 밥 위에 얹어 주었다.

“만약 시간이 한참 지나도 답이 안 나올 것 같으면, 그땐 됐으니까 진짜로 그만하자고 해.”

“…….”

“이제야 내 마음 정리된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판 다 튼 것 같다, 그러고서 나 버려.”

버리라는 말에서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렸는지, 세화가 미간에 슬쩍 힘을 줬다. 어쩐지 조금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준, 아니 소장님은요.”

“나? 나는 계속 기다려야지. 네가 용서해 줄 때까지.”

“그게 무슨 내기예요….”

“뭐, 언제는 나랑 말이 되는 내기를 했나.”

장난스럽게 받아치자 세화의 입매가 갸름해졌다. 능청스럽게 구는 기태정의 태도가 황당한지 잠시 입가를 씰룩이더니, 이내 말을 말자는 듯 다시 식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속 편하게 굴어.”

“…….”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울고 싶으면 울고, 따지고 싶으면 따지고.”

기태정은 흘러내린 소매 밖으로 드러난 세화의 마른 손목을 멀거니 응시했다. 이젠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다,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툭 말을 던졌다.

“종장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누구도 알려 준 적 없어.”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데굴 굴리며 밥알만 씹던 세화는, 한 박자 늦게야 기태정이 조금 전 자신의 물음에 답해 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전에 너랑도 이런 비슷한 얘길 한 번 했던 것 같은데, 끝을 바라긴 했지만 사실 그 이후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었던 것 같아. 당장 해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무거워서.”

“…….”

“근데 지금 드는 생각은, 글쎄…. 끝까지 다 왔으면 그 책은 그대로 덮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 굳이 꾸역꾸역, 자리도 없는데 다 끝난 이야기에 뭘 주절주절 덧붙일 게 아니라….”

“…….”

“마지막 장이 왔으면 덮고, 그냥 새로운 책을 펼치면 되지 않나?”

“…….”

“애를 쓰고는 있지만 결국 나는 변함없이 나일 테니까, 앞으로도 넌 이런 나 마음껏 원망해. 어쩌면 사람이 변하질 않냐고 짜증도 내고…. 그러다가 문득 다른 세상이 궁금해지면, 다른 책을 펴보고 싶어지면 그때 열어봐. 거기엔 새로운 얘기가 적혀 있을 거고… 그럼 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무것도 없으면 또 채워나가면 되는 거고.”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던 세화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모르는 척 눈앞의 불한당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싶기도 하고,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이 지겹기도 하고, 이 지겨운 도돌이표는 대체 언제쯤 끝나나 서럽기도 한 얼굴이었다. 속은 쓰려도 기태정 또한 익숙해져야 하는 세화의 아픔이고 우울이었다.

“그리고 너 하나도 안 쉬워. 그 난리 통을 겪고서도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고 있는데,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왜 자꾸 쉽다고 말하지.”

기태정은 차려진 찬 중 귀하고 좋은 건 전부 세화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러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빡치는 일 생기면 그냥 나한테 욕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 괜히 미워하지 말고.”

“…….”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왜 자꾸 삽질을 해.”

세화에게선 잠시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보는 사람이 아플 정도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는 식탁의 모서리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세화가 먹을 반찬을 해체하느라 기태정이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는 소리만이 보호실의 부엌을 울렸다.

정적이 깨진 건 그로부터 한참 지나, 계란찜이 다 식어 푸딩처럼 차가워졌을 때쯤이었다.

“…준장님 때문이잖아요.”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 애쓰는 목소리에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호기로운 척하는 세화는 작은 새 같았다. 다 부러진 날개에 성치 않은 발목을 하고선 어떻게든 날아 보겠다고 뒤뚱거리는 가여운 어린 짐승. 도저히 함락되지 않을 수 없었던 선하고 사랑스러운 이세화 그 자체였다.

“그래, 나 때문이야.”

기태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니까 넌 나쁜 생각 하지 말고 웃어.”

울지 말고, 덧붙인 말에 세화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는 울고 싶으면 울라더니.”

푹 숙인 머리통이 알밤처럼 동글동글했다. 기태정은 쓰다듬어 주고 싶은 걸 꾹 참고, 무언으로 세화 나름의 용기를 응원했다. 말문이 막혔던 사람이 저렇게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를 상대로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지기까지 얼마나 속이 끓었을까.또 얼마나 애썼을까.

기태정은 자꾸만 아련한 방향으로 튀려는 자신의 머릿속을 꾹 짓눌렀다. 아직 세화에게 그 어떤 감정도 허락받지 못했는데, 동정이나 연민 같은 걸 멋대로 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세화가 아파할 때마다 말없이 투정을 들어주는 게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세화가 새롭게 펼칠 책엔 무슨 글귀가 적혀 있을까.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도 적힐 날이 올까?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세화가 이제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는 것 말고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외엔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세화에게 고백했듯, 그는 기태정의 예외였고, 어떤 수로도 이길 수 없는 유일한 약점이었으니까.

***

“이젠 눈치 보지도 않고 드나들고 있군.”

공군 청사로 돌아가려 보호실을 막 나섰는데, 때마침 세화를 보러 온 오선란 대장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작게 찼지만 그뿐이었다. 세화가 허락했다는데 자기가 뭐라고 가타부타 말을 얹겠냐며 꿍얼거린 적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딱 한 번뿐이었다.

“대장님.”

기태정이 올린 경례에 답도 해 주지 않은 채 쓱 지나치려던 오선란 대장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때?”

“인큐베이터에서 아이 꺼내고서… 경호 인력 충원할 때 말입니다.”

제 쪽으로 연락을 넣은 거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제 부관들이 얼토당토않은 변장 얘기를 꺼냈을 때도 별다른 제지가 없었다는 건 아직까지도 의문이었다.

김 중령이 이런 미친 짓을 벌일 거라는 건 본인도 예상 못 했던 일이라고, 오선란 대장은 일을 수습하면서 분명 그리 말했었다. 그렇다면 방패로 써먹으려 자신의 방문을 허락한 것도 아니라는 소린데…. 대체 무슨 이유로?그는 참다 못해 저에게 손찌검까지 했을 정도로 세화에게 끔찍한 사람이었다.

“…예전에, 세화를 낳아 준 사람에게 약속한 일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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