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39)화 (139/144)
  • #136

    “이 새끼들이 미쳤나!”

    눈을 뜬 지 30분은 지났으려나. 김 중령은 지치지도 않는지 깨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중이었다. 난데없이 끌려온 것보다 자신을 구속한 것이 한낱 조무래기들이라는 걸 더 불쾌해하는 것 같았다.

    “야, 기태정!”

    김 중령은 벌게진 얼굴로 무려 소장의 이름을 막 불러 젖혔다. 그래도 평소엔 꼬박꼬박 존댓말 쓰며 체면을 차리더니,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출근길에 갑자기 처맞고 기절하면 누구라도 당황스럽긴 할 거다. 정신 차려 보니 퀴퀴한 창고 안이고, 원수 같은 놈의 반반한 낯짝이 코앞에 있으면… 그래, 빡칠 만도 하지. 기태정은 사과를 아삭 베어 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 진짜 돌았냐? 지금 감히 누구를 납치해서,”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김 중령의 고개가 뒤로 휙 젖혀졌다. 뻐억, 뼈가 부서졌을 법한 폭음이 몇 차례 이어지고, 결국 놈은 혓바닥을 길게 뺀 채로 의자 위에 힘없이 늘어졌다.

    쯧. 기태정은 작게 혀를 찼다. 살살 다룬 건데도 주먹질을 다섯 번도 견디지 못해 저 꼴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저는 사과를 들고 있느라 한 손으로만 팼는데도 말이다.

    “나는 좋게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김 중령이 주제 파악하고 입만 처닫고 있었어도, 손까진 안 올렸어.”

    기태정은 반쯤 먹은 사과를 바닥으로 내던지며 손목을 탈탈 털었다.

    “우선 오해부터 바로잡읍시다. 김 중령을 죽은 사람으로 만든 건 내가 아닙니다.”

    죽은 사람이라는 말에 김 중령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죽…, 은 사람이라니….”

    “김석철이 불 지르는 바람에 엿 먹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파산 신청 같은 꼼수나 쓰려고 하니까 이 사달이 났지. 설마 내가 개인적으로 원한 좀 있다고 백주에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겠습니까. 나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기로 다짐도 한 참이고.”

    “으, 어으, 으….”

    “네 아들 새끼가 저지른 멍청한 짓거리에 돌아 버린 피해자들이, 이럴 거면 차라리 김 중령 당신을 죽여서 보험금이라도 받아 가기로 마음먹었거든. 당신네 집안에서도 당신 사후의 상속분은 일체 포기하겠다고 합의서 써 줬고. 어때, 이젠 상황 파악이 좀 되나?”

    ‘당신네 집안’이라는 말에 다 죽어 가는 생선 눈깔을 하던 김 중령이 한 차례 크게 퍼덕였다. 설마하니 집안 내부에서 총질하는 놈이 나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던 것 같다.

    “김석철 그 새끼가 독보적으로 모자라게 굴길래 좀 의아했는데, 이제 보니까 콩 심은 데 콩 난 거였네.”

    “그, 그암, 히…!”

    “감히? 감사할 줄 알아야지, 김 중령.”

    정신 좀 차리라는 뜻에서 김 중령의 뺨을 톡톡 두드려 줬다.

    “어쨌든 경한 제약 명맥은 유지하게 해 줬고, 바라던 대로 김석철 그 새끼는 아직 군인이고, 김 중령 당신도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으로 처리될 예정이라 계급장 반납하는 불명예는 없을 예정인데.”

    2환 화재 사건으로 피해를 본 이들은 김씨 가문보다 영향력이 크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그들을 죄 모아 놓고 보니 이야기가 또 달라졌다.

    기태정을 아니꼽게 보던 이들도 이건 명백히 경한 제약의 잘못 아니냐며 슬쩍 피해자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계산기 두드려 보니, 이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훗날 비슷한 일이 터졌을 때 자기들의 재산권도 보장받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무엇보다 존나게 잘나신 원수님이 몹시 싫어하는 유형의 사건이기도 했다. 돈만 쥐여 주면 다 해결될 거, 불만 가진 놈들이 뭉칠 계기를 줄 까닭이 뭐란 말인가.

    “내가 뒤에서 선동질을 좀 하기는 했어도, 파산 신청이라는 헛발질이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을 텐데. 유감입니다.”

    “으, 크윽, 내, 내 도온…, 돈을, 쿨럭…!”

    “물론 김 중령 유산으로도 완벽한 배상은 어려울 것 같아서, 차액은 경한 제약의 지분을 일부 나눠 갖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돈과 권력은 대체 뭘까.

    김 중령의 친인척들은 이때다 싶어 본인이 가업을 잇겠다며 덤벼들었다. 이름도 못 들어 본 놈들까지 발 벗고 나서 저에게 가문의 비밀이, 자산이, 하여튼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며 밀어줄 사람을 찾느라 야단법석이었다. 방계가 직계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귀다툼은 역겹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김 중령을 지지해 주는 게 이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지분을 빼앗기고 손발이 묶여 버리면, 앞으로는 원래 자신이 가져가던 것보다도 훨씬 적은 몫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놈들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김 중령의 시혜를 기다리며 손가락이나 빠는 것보다 허깨비 같은 감투라도 쓰는 쪽이 낫단다. 그게 대체 뭐라고.

    어쩌면 꺾일 줄 모르던 집안의 위명을 믿고 나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하던 가락이 있는데 우리 가문이 그렇게 금방 망할까, 그리 과신하는 것 같기도 하다.한 발자국 떨어져서 봤을 땐 등신이 따로 없는데, 잔뜩 취한 본인들만 모르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 김 중령 저 새끼도 무려 5성의 병원에 사람을 풀어 인질극이나 벌일 생각을 한 거겠지. 이세화를 해치지만 않으면 붙잡아 협박하는 정도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누가 나에게 딴지를 걸 수 있겠냐고 자신했던 게 분명하다.

    “이르, 이러, 케 사람을, 데려다, 데, 윽…!”

    “그렇지. 함부로 하면 안 될 일이지. 근데 이제 난 특진 같은 건 좆도 관심 없어져서.”

    제대나 원로, 그런 것에 목숨을 걸었을 땐 까일 빌미를 주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꼼수를 부려 훼방 놓는 놈들이 없도록, 재판 기록에 자신의 승리가 떳떳하게 적힐 수 있도록 명분을 갖추는 일에 집착해 왔다.

    그렇지만 이제 그따위 것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제 몸과 이세화 정도는 지킬 수 있는 위치인 걸로 충분하다. 더는 욕심 같은 거 안 부린다기엔 손에 넣은 게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 이만하면 됐다.

    “어쨌든 여러 가지 이유로 김 중령은 오늘부로 사고로 뒈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나는 네놈을 그렇게 순순히 죽게 둘 생각 없고.”

    물 머금은 장미처럼 화사하게 핀 낯을 하고서 기태정이 생글생글 웃었다.

    “이대로 2환 약쟁이 소굴에 던져 넣어.”

    “예.”

    “자, 잔깐…!”

    어눌하게 뭉개진 발음이 듣기 싫어 한 번 더 김 중령의 면상을 후려쳐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화를 하층민, 천민, 버러지… 그리 불렀던 김 중령은 앞으로 본인이 그런 처지가 될 예정이다. 죽은 사람이 되어 이름과 신분조차 갖지 못한 채, 그리 멸시하던 약쟁이들에게도 구걸하지 않곤 쌀 한 톨도 얻어먹지 못할 거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 혼자 벌인 일 아닙니다.”

    “으, 으으….”

    “김 중령네 그 잘난 집안이 아니었으면 나도 이렇게 무모한 짓은 안 했지.”

    지금 본인이 이 꼴이 된 것이 자신 앞에선 빌빌 기던 경한 제약의 친인척들 탓이라는 걸 알고 난 이후로, 김 중령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분노로 뻣뻣하게 몸이 굳어 당장이라도 뇌가 펑 터질 것만 같았다.

    기초 군사 훈련도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내뺐다던 저 새끼가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박 중위는 석 달도 어렵지 않겠냐고 했지만, 글쎄…. 기태정의 생각은 달랐다. 저런 새끼들은 의외로 제법 질기다. 당장 김석철만 해도 손목이 날아가고서도 견디고 있지 않은가. 욕심이 많은 놈들은 쉽게 안 죽는 법이다. 그리고 그러길 바랐다. 여태까지 저지른 짓이 있는데 곧장 죽어 버리면 시시하잖아.

    “지금 경한 제약 대표로 나선 놈들이 총 다섯이랬나?”

    “예.”

    “김 중령 부자가 숨겨 둔 치부 가장 많이 털어놓는 놈 밀어주겠다고 전해. 그래야 사후에라도 계급장 회수하지.”

    “전달하겠습니다.”

    창고의 문을 열고 나오니 이전보다는 맑게 갠 2환의 하늘이 보였다. 기태정은 눈을 가늘게 좁혀 가시거리를 확인한 다음,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세화가 알면 기겁하려나? 그래도 이 정도면 퍽 온건한 일 처리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들었는데 아기가 태어나고 백일 동안은 피를 보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백일보다는…삼칠일? 하여튼 좀 더 까다롭게 챙기는 뭔가가 있었는데, 그런 게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애 코앞에서 칼을 맞아 버린 다음이었다.

    그래서 기태정은 삼칠일 같은 풍습은 없는 것으로 하고, 대신 아이의 백일까지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원래 이런 건 믿는 사람 마음이다.

    “헬기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포트로….”

    “헬기로 가지.”

    하늘길로 이동하기 썩 좋은 날씨는 아니었으나, 길바닥에 뿌리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오늘은 세화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직 세화의 동의를 구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 찾아가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한숨을 쉬며 자리를 내어 주긴 하니까. 그게 겸상이고 밥 약속이지 뭐겠는가.

    기태정은 혹여라도 얼굴이나 옷에 더러운 것이 묻진 않았는지 점검했다. 미신 같은 게 아니더라도 더는 잔인함에 골몰하고 싶지 않았다. 세화나 오선란 대장이 들으면 그 정도가 너그러워진 거냐고 어이없을 수도 있겠지만, 진심이었다.

    세화의 선함은 천성이었다. 나고 자란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조금이나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다부진 그 마음은 타고난 것이 맞았다. 저로서는 단 한 줌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늘이 내린 재능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이세화 같은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세화에게 약속했다. 이세화가 저를 온전히 용서해 주길 기다리는 동안,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무엇이든 해야 했다.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을, 사고관을 완전히 갈아 끼울 순 없어도, 세화가 보기에 이 정도면 많이 달라졌다고 느낄 법한 수준까진 끌어 올리고 싶었다.

    평생의 숙원을 전부 내려놓았는데 허무함이 조금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무엇을 위한 발버둥이었고, 무엇을 위한 획책이었을까. 불쑥 그런 생각이 떠올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 느껴질 것 같으면, 이세화를 생각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마음속의 폭풍이 가라앉았다.

    기태정은 조종석에 앉아 손발처럼 익숙한 장치들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신기한 일이다.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였던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도 결국은 무용해진 시간이 아깝지 않다. 여전히 군부의 개로 남게 된 것이 그리 억울하다거나 끔찍하지 않았다. 나의 세상이 박살 난 대신, 품에 세화를 안을 수 있게 되어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오히려 기대됐다.

    ***

    “퇴원한다고? 벌써?”

    “당장은 아니고 한 달 있다가요.”

    세화는 부지런히 수저와 젓가락을 놀렸다. 시선은 기태정이 아닌식탁 어딘가로 애매하게 고정한 채다.

    아프고 힘들어도 서로의 곁에 있어 보자고는 했다. 그렇지만 그리 요란하게 다짐을 나눈 것도 고작 며칠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색은 안 했어도 기태정 또한 세화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감이 오지 않을 때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있었다.하루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도 세화는 기태정을 준장님이라 불렀다. 다른 사람들하고는 잘 지내다가도, 기태정과 느릿느릿 대화를 이어 갈 때면 갑자기 말을 더듬기도 했다. 어제 불쑥 찾아왔을 땐 진료를 보러 간다기에 검사실까지 데려다주었는데, 그 짧은 길을 걷다 돌연 다리를 절었다. 세화에겐 과거의 어느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 현재 진행형이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그리 길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사소한 어긋남이 쌓이기 시작했던 건 5성의 바닷가에서 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였다. 그렇게 따지자면 차곡차곡 고인 기억의 무게가 그리 가볍지만도 않다.

    그래서 기태정은 무엇도 욕심내지 않았다.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길, 그리고 언젠가는 세화가 마음을 열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당장은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렇게 불쑥 찾아오고, 말을 섞는 것을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처지였다.

    “계속 병원에서 살 순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끼니마다 보호실로 올라오는 조리사가 따뜻하게 데운 계란찜을 차려 주자, 세화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입이 짧아진 세화가 그나마 자주 찾는 반찬이었다.

    “퇴원한다고….”

    기태정은 물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그럼… 어디에서 지낼 건데?”

    “네?”

    “퇴원하면 이제 어디에서 살 거냐고.”

    자신의 목소리에 기대감 같은 게 내비치지 않았길 바라며, 기태정은 최대한 무심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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