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기태정은 입 모양으로만 ‘행복….’하고 중얼거렸다. 남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 말을 입에 올려본 사람처럼 몹시 어색해했다.
“…이세화,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쓰게 웃음 짓던 기태정은, 그러고서도 잠시 입술만 달싹였다. 그가 세화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것은 환기 장치 하나가 가동을 멈춘 후였다.
“여기까지 직접 와서 네가 그런 걸 물어봐 주면.”
“…….”
“나는 염치도 없는 새끼라서, 조금은 기대를 하게 돼.”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인데 이상하게도 능청스러움보다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제 정말 볼 일 없을 테니 이 기회에 다 쏟아내고서 끝내겠다는 각오가 엿보이기도 했고, 저 같은 놈에게 더는 여지를 주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너는 어땠는데.”
“…….”
“잘, 지냈어?”
때마침 천장에 달린 거대한 실링 팬이 부드러이 작동했다. 견장이며 훈장 같은 장식은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정복 셔츠, 침대에 둘린 하얀 커튼, 기태정의 머리카락과 짙게 일렁이는 눈동자…. 세화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은연히 흔들리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풍경을 바라보던 세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네, 잘 지냈어요.”
“…….”
“밥도 잘 먹었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고….”
“…….”
“아직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조금 불편할 때도 있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네.”
거창하게 운을 뗐던 것치고는 단출한 반응이었다.
원래 기태정은 말을 잘 꾸며내는 사람이었다. 보호자는 무조건 나로 하라거나, 네가 나의 유일한 약점이고 예외라는 둥… 듣는 사람을 취하게 하면서도 자신의 속내는 전부 드러내지 않는 표현법에 매우 능숙했다. 적어도 당시의 세화가 느끼기엔 그랬다.
웃기게도 그러면서 미안하다는 말은 할 줄 몰랐다. 너에게 마음이 있다는 별것도 아닌 고백도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정작 사람 가지고 놀 때는 세화야 좋아해, 그런 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잘만 했으면서. 진심이 담긴 언어가 필요한 순간엔 궁금하지도 않은 변명만 줄줄 늘어놓았다.
위해주겠다, 잘하겠다 그렇게 고백하기는커녕, 끝내 저에게 백금 목줄을 채우지 않은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드러낸 못된 남자였다.
그러던 그가 겨우 진심을 다 꺼내 보인 건, 모든 게 박살이 나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 이후였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기태정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미 다 부서져 잿가루가 폴폴 날리던 자신과 달리, 남자는 바닷가에서도 굳건하기만 했다. 친권 포기 각서를 건넬 때도, 오선란의 대장의 차에 저를 태울 때도 그는 시종일관 덤덤한 낯을 하고 있었다. 꼴사납게 눈물을 뚝뚝 떨구었던 건 언제나 저였다.
오선란 대장의 권유처럼 살아보겠다고 바삐 움직이다가도, 어쩔 수 없이 문득 기태정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저를 아프게 하던 얼굴이 떠올라 뒷골이 서늘해지기도 했고, 무서워 덜덜 떨기도 하고, 좋았던 때도 있었노라 곱씹기도 했다.
그가 저보다 더 속상했으면, 많이 힘들어했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상상도 물론 한 적 있었다. 그렇지만 기태정에게 진짜로 흠집 같은 게 날 거라곤 기대하진 않았다. 평생 누구에게 져본 적이 없는 남자니까, 금세 괜찮아졌으리라 그리 짐작했다. 기태정 그거 회복제 한 알이면 멀끔해질 텐데, 뭐하러 사서 걱정을 하느냐 의아해하던 바깥의 군부 인사들처럼.
“그리고 저는, 이제….”
“…….”
“흐흠, 저는 이제 패치를 쓰지 않아요. 그래도 되더라고요.”
“…뭐?”
굳게 다물렸던 기태정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이 얘기엔 도저히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없는지, 그가 잘 쓰고 있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패치를 안 써도 된다고?”
“정확한 원인은 아직 모르겠지만 A7인가, 그 약의 부작용인 것 같다던데… 어쨌든 변했대요, 체질이.”
“그럼, 혹시 아프면….”
“약 먹으면 돼요. 보통 사람들처럼.”
“…….”
“영양제도 먹을 수 있고, 혹시라도 수술할 일 생기면 마취제 투여하고 평범하게….”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갑작스레 몸을 터트릴 듯 세게 끌어안는 악력에, 세화는 평범하게 수술받으면 된다는 마지막 문장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삼키고 말았다.
“…준장님.”
당황해서 익숙한 호칭이 튀어나왔는데, 그 부름이 도화선이 된 건지 저를 무작정 끌어안은 남자의 손이 얕게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
“이번 한 번이면 되니까, 잠깐만 이렇게 있어….”
기태정이 얼굴을 처박고 있는 곳이 웅웅 울렸다. 세화는 그를 밀어내지도, 마주 안아주지도 않았다. 매번 격랑처럼 덮쳐오던 그를 견뎌내던 것처럼 이번에도 가만히 서서, 이 시간이 끝나기를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등이며 허리에 감겼던 손에 조금씩 힘이 풀려갈 무렵, 세화는 침을 크게 한 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새 주민증만 손에 넣으면 행복해질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거든요.”
“…….”
“그런데 지금은 1성도 아니고 무려 5성의 주민인데… 행복하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어요.”
“…….”
“내가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더라, 성격은 어땠더라, 이렇게 속이 텅 비었을 땐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견디면서 살아갔더라, 그런 게… 하나도 떠오르질 않아요.”
기태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저를 제대로 끌어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저를 완전히 놔주지도 못하고서 그저 몸만 맞대고 있었다.
“노력은 하고 있는데… 진짜로 괜찮아지진 않는 것 같아요, 아마도… 준장님 때문에….”
“…….”
“준장님 때문에 제가… 너무 많이 망가져서요.”
“…….”
“그러니까, 그러… 니까….”
세화는 입을 벙끗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바닷가에서 병원으로 돌아오는 내내 바보처럼 울었지만, 그래도 그 이후로 지금까지 씩씩하게 잘 버티고 있었다. 혼자서도 괜찮아지고 싶어서 나름대로 애써왔다. 그런데 그의 가슴에 짓눌린 뺨을 타고 둥둥 울리는 심장 박동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계속, 저한테 미안해, 하세요.”
“…….”
“신분도 상승했고, 돈도 많아졌고, 좋은 양부까지 생겼으니 팔자 핀 거면서… 뭐가 그렇게 계속 힘든지, 아픈지, 평범하게 약을 먹을 수 있다는 게… 나한텐 어떤 의미인지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
“그런 사람이, 진짜 어이없게도 준장님… 뿐이라….”
닳아버린 내 속을 알아 줄 사람이 그토록 나를 울린 사람밖에 없다.
나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망가져 있던 저 남자를 가엾게 여길 수 있는 사람 또한 오직 나뿐이다.
이런 관계는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 계속 곁에서 준장님 원망… 할 거니까….”
기태정과 예전처럼 잘 지낼 자신은 없다. 그의 품에 안겨 같은 침대에 누워 자고, 부드러워지는 남자의 낯을 보고 싶어 조잘조잘 말을 붙여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같이 있는 것도 괴롭고 헤어져 있는 지금도 힘드니까…. 그렇다면 또 다른 답이 나올 때까지 기태정을 곁에 두는 건 어떨까 싶었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결정인 것 같긴 했다. 겨우 손에 넣은 다른 출구를 자신의 손으로 막아버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모순을 혼자만 앓는다는 게 억울하고 괴로워서, 물귀신처럼 그와 함께 아프고 싶다.
그러다 보면… 지금보다는 괜찮아지는 날도 올 것도 같았다.
어차피 새카맣게 죽어버린 이 자리는 영원히 기태정의 것일 테니, 언젠가는 그를 보면서도 아프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때도 오지 않을까….
“예전으로 돌아가겠다는 거 아니에요.”
“…….”
“준장님 미워하고, 욕하고, 실컷 분풀이하다가… 이제 다 됐으니까 그만 놔달라고 할 수도 있어요. 아니, 꼭 그럴 거예요. 왜냐면 저는,”
“그렇게 해.”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우묵한 곳에 기태정이 이마를 툭 기댔다.
“무슨 짓을 해도 되니까….”
“…….”
“내 곁에만 있어. 아니, 네 곁에만 있게 해줘.”
그는 한참을, 견디기 어렵다는 듯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마찰열에 살갗이 벌겋게 익을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세화.”
“…….”
“…세화야.”
뒤이어 기태정이 속삭인 말은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듣질 못했다. 그건 언어라기보다 숨결에 가까웠다. 그러나 바투 맞대고 있는 그의 입술이, 그 움직이는 모양이 어떤 문장이었는지 충분히 일러주어서…. 한참 전에는 감히 꿈조차 꾸지 못했던 그 말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던 세화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기태정을 마주 안았다.
아니지, 이걸 안았다고 할 수 있으려나. 겨우 그의 상의 끝을 움켜쥔 미미한 손짓에 불과했으나, 세화의 몫까지 대신하겠다는 듯 기태정이 세게 끌어 안아준 덕분에 그럭저럭 포개진 꼴이 되기는 했다.
이름처럼 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제가 가진 건 남루한 가시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기태정도 마찬가지였다.
뾰족하게 솟은 침에 콕콕 찔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이따금 보이는 성긴 틈으로 서로의 가시를 밀어 넣으며 환희에 떨곤 했다. 초라한 나에게도 온전히 가질 수 있는 내 것이 있다는 것이 아프면서도 황홀했다.
따뜻한 햇볕이나 아름다운 꽃으론 이 상처를 낫게 할 수 없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그에게서 물러서야 했던 지금에야 진정으로 깨달았다. 빈자리에 이 남자의 가시를 다시 꽂아 넣어야 피가 멎고 딱지가 앉을 것 같다.
고집스레 버티고 서 있던 세화는 이 문제의 답을 놓아버리기로 했다. 어쩌면 평생 모를 수도 있겠지. 당장 내일 그에게 보지 않고 지내는 게 좋겠다며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아파도 기태정과 맞물려 있을 때가, 그 축축하고 컴컴한 가시덤불의 군락만이, 이 지난한 진물을 멎게 할 수 있다. 그것만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