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37)화 (137/144)

#134

“가끔 소장님 사연을 들으면 지금 세화 씨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요, 딱 그런 표정 지으면서.”

막냇동생을 어르는 듯한 다정한 말투였다. 그런 표정? 내 얼굴이 어떻길래. 뺨을 더듬거리자, 나 대위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소장님은, 음… 세화 씨 앞에서 이런 말은 좀 그렇긴 한데… 약 빤 사람처럼 날뛰셨죠.”

그마저도 고르고 고른 점잖은 표현인 듯 언젠가를 회상하는 나 대위의 얼굴에 일순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왜, 약한 모습이나 콤플렉스를 감추려고 일부러 삐딱하게 구는 사람들 있잖아요? 안타깝게도 소장님은 그런 유형도 아니에요. 소장님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그냥 자기한테 그따위로 구는 게 좆같아서 싫으시대요.”

“…….”

“그만큼 본인을 동정하는 걸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분이세요. 내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감정에 취해서 멋대로 날 가엾게 보는 게 싫으시다고…. 뭐, 실제로 소장님을 마냥 딱하게만 보기엔 아주 많은 걸 가진 분인 건 틀림없으니까요. 또….”

이런 얘긴 이세화 씨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이 돼서 망설였던 건데, 하며 나 대위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소장님한테 그렇게 대하고서도 여태 사지 멀쩡히 붙어 있는 사람은 세화 씨뿐이에요. 나도 나중에 듣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지, 정확히는 소장님과 특별한 사이가 된 사람이 이세화 씨뿐이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

“하여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놀랄 것 없다는 거예요. 소장님 멀쩡하시니까. 본인이 싫다는데 안쓰럽게 생각할 것도 없고요.”

세화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양 손목을 흘끔거렸다.

벙커에서 기태정의 소년병 시절 이야기를 듣고 슬쩍 연민을 내비쳤을 때, 그는 제 손목을 꺾어 버렸다. 고작 몇 마디로 쉽게 녹아 버린 자신의 마음을 조롱했으며, 내내 소중히 품어 왔던 모든 것을 잔인하게 비웃었다. 처음 그에게 걷어차였을 때도 그 순간보다 아프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기태정의 그런 말과 행동이,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이런 취급을 받아 온 것에서 기인했던 거라면….

목이 꿰뚫리고 근육과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점이 찢겼는데도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 다쳤든 말든 이상 없이 작동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하는, 쉬이 낫는다는 게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건 아닐 텐데도 돌봐주는 이 하나 없는… 그런 나날을 살며 체득한 방어적 기질 같은 거였다면, 그렇다면 당시 기태정이 그렇게 날 선 대응을 했던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물론 숨겨진 사연까지 헤아려 가며 그를 품어 주고 싶은 건 아니다. 뭐가 어쨌든 당시엔 기태정이 저에게 심하게 굴었던 게 맞다. 살육 기계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해서 남에게 상처를 줬던 걸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럼 지금 들어가 봐도 되는 거죠? 수술 중인 것도 아닌 거면….”

나 대위는 진심이냐며 펄쩍 뛰었다. 안에 기태정 소장님이 있는데, 정말로 들어갈 거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다.

“어휴, 문제 될 거야 전혀 없죠.”

곧 깨어나실 시간이긴 하다며 나 대위가 세화의 등을 떠밀었다.

“상처야 벌써 아물었을 테니 흉한 꼴 볼 일은 없을 거예요.”

나 대위의 밝은 덧붙임에 조금 속이 쓰렸다. 저를 위해서 일부러 가벼이 해 주는 말이라는 걸 아는데, 도리어 그로 인해 심장에 돌덩이 같은 것이 하나둘 얹히는 기분이었다.

세화는 병실 문에 손을 올린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힘을 실었다.

높으신 분을 모시는 곳이긴 한지 병실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시폰 드레이프를 두른 통창으로햇살이 와르르 쏟아졌다. 창밖으로는 잘 가꾼 정원과 산책로가 보였고, 배치된 소품들은 척 보기에도 고가였다.

한가운데엔 새하얀 커튼으로 사방을 가린 침대가 놓여있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한 장치 같은 건가?어쨌든 그것만큼은 뉴스 같은 곳에서 보던 응급실의 느낌과 비슷했고, 그 덕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생겼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호기롭게 안으로 들이닥치긴 했어도, 막상 눈을 감고 있는 기태정의 얼굴을 보았더라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나 대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젖어 물끄러미 침대만 바라보고 있는데, 처음 들어보는 낮은 목소리가 세화의 상념을 뒤흔들었다.

“내 시계 가지고 와.”

제 인기척을 느끼고 깬 걸까? 아니면 이미 깨어 있었나? 뭐가 됐든 밖에선 커튼 내부가 들여다보이질 않으니 알 수 없었다. 땅을 뚫을 수도 있을 정도로 음색이 가라앉은 걸 보면 정신을 차린 건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걸 어떻게 하지, 나 대위를 불러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어이없게도 안에서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났다. 뽀얀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병실 내부에 설치된 각종 환기 장치가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흡연이 허용되는 병실인 건지 경보가 울린다거나 하는 추가 조치는 없었다. 다행인 건가?

기가 막혀서 긴장이 확 풀려 버렸다. 칼 맞았던 건 생각도 안 하고 담배부터 찾는 기태정이 어이없었고, 장소가 병원이라는 건 고려조차 하지 않는 남자의 몰상식함이 황당해서, 안에 들어서며 제법 비장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던 건 까맣게 잊고 말았다.

“나 대위, 시계.”

재차 재촉하는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커졌고, 담뱃대를 깊이 빨았다 연기를 내뱉는 통에 발음이 살짝 뭉개졌다. 세화는 귓가를 후려치고 가는 남자의 음성에 자꾸만 소름이 오싹 돋는 팔뚝을 문지르며, 불투명한 장막을 조심스럽게 걷어 냈다.

기태정은 저를 등지고 서 있었다. 회복제 한 알 먹은 게 전부라더니… 수액조차 맞지 않은 건지 폴대도 보이지 않았다.

“세화랑 아이는.”

아직은 불편한지 윗옷을 걸치는 움직임은 평소처럼 재빠르지 않았다. 느린 손짓을 따라 널따란 등판에 새겨진 산맥 같은 근육이 꿈틀거리며 약동했다. 옷을 꿰입는 속도가 살짝 느릴 뿐, 다행히 손을 못 쓰진 않았다. 찔리고 찢어졌던 부위는 멀쩡해진 것 같다.

“왜 대답을….”

불량하게 담배를 꼬나문 남자가 그제야 이쪽을 휙 돌아보았다. 멀거니 선 인영을 발견한 기태정의 짙은 눈썹이 불만스럽게 까딱였다. 미간에 서렸던 짜증이 놀라움으로, 그러다 먹먹함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세화는 문득 기태정을 처음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날이 추웠고, 눈과 꽃잎이 뒤엉킨 거리는 몹시 지저분했다.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자는 입김 같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흥미롭다는 듯 눈꼬리를 접고는, 네가 그 유명한 꽃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지금,

“…….”

기태정은 의도치 않게 그때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선 저를 마주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표정뿐인 것 같다. 아… 아닌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낯빛이 많이 상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림 같은 외양이야 여전했지만, 지금은 곁에 서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얼굴선이 날카로워졌다.

이채를 잃어 새카맣던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세화조차 읽을 수 없는 다채로운 감정이 그의 눈빛에, 얼굴에 머물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별일 없는 것 같네. 아이 두고 여기까지 왔을 정도면.”

기태정은 침대 옆 협탁에 아무렇게나 담배를 비벼 끄곤, 손을 빠르게 휘저었다. 매캐한 연기가 전부 가셨을 무렵엔 남자는 예전처럼 여유로운 낯을 하고 있었다. 당황한 듯 연기를 흩트리던 손짓이나 저를 보고 흔들리던 눈빛이 아니었다면, 지금 그가 평정을 가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굳이 그런 분장을 하고서 널 보러 왔던 건….”

짧은 헛기침을 하곤, 기태정은 손바닥으로 목울대를 연신 쓸었다. 그러게 왜 눈 뜨자마자 담배부터 물어. 속으로 혀를 찼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까, 칼에 찔렸던 곳을 제가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오선란 대장의 요청이었어. 아까 봤던 것처럼 미친 짓 하는 놈들이 있을 것 같아서.”

“…….”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야. 경호 태세 강화할 거고, 앞으론 사전 등록된 의료진만 드나들 수 있게 조치를,”

“행복하세요?”

기태정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의도하지 않은 물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건방지게 말을 끊었는데도 이전처럼 차게 비웃지 않는 남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세화는 다시 느리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당신은 행복하냐고.

“이제 준장님이 아니라 소장님 되셨고, 재판도 좋은 결과 나왔고…. 바라던 건 다 갖게 되셨잖아요. 위해 준답시고 멋대로 사람 치워 버리고, 끝까지 자기 좋을 대로 굴었으면….”

“…….”

“그러면 행복하셔야죠. 왜….”

당신이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요.

세화는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그가 부재했던 지난 시간, 내도록 속이 헛헛했던 까닭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바닷가에서, 제 등을 떠밀었던 저 남자에게 다시 한번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거다.

언질조차 없이 갑자기 오선란 대장에게로 자신을 떠넘긴 그가, 저에게 어떠한 선택권도 주지 않은 기태정이 괘씸하고 미웠다. 구체적인 이유를 깨닫고 나니 그간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의 서러움이 밀려왔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명목이 뭐였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대도 이 사람만큼은 다시는 저를 반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이런 얼굴을 하고서, 이런 눈으로 절 바라볼 거면서, 새파란 칼날에 아무렇지도 않게 온몸을 내던질 거였으면… 날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지. 당신을 놓는 것도, 버리는 것도 전부 내 몫으로 하게 했어야지.

기태정에게서 도망치고 싶었고, 그가 꼴도 보기 싫었던 건 맞다. 그래도 그런 식의 마지막을 바랐던 건 아니었다. 이 못되고 이기적인 남자는 끝의 끝까지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화도 나고 서러운 동시에,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모순적인 감정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병기처럼 길러지고 다루어진 이 사람이 베풀 수 있는 가장 지극한 애정이 그때의 이별이었을 거다. 기태정 나름의 다급한 후회와 사죄였다는 걸 깨닫고 나니, 이젠 무작정 그를 미워만 할 수도 없었다.근사하게 별만 달았을 뿐 군부 내에서 이 사람이 어떤 취급을 받아 왔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는데, 예전처럼 무턱대고 원망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진짜, 진짜… 씨발이었다. 정말이지 기태정은 사람 속을 뭐처럼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남자였다.

“…아니.”

남의 속도 모르고서 기태정이 저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제대로 단추를 잠그지 않은 셔츠 자락이 크게 펄럭거렸다. 그가 성큼 내딛는 걸음마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와 담배 냄새가 훅 끼쳐왔다.

세화는 재빨리 기태정의 손이며 목을 확인했다. 메스가 찌르고 갔던 부위는 흉터 하나 남지 않고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회복제를 먹는다고 해서, 흉 없이 새살이 돋는다고 한들 고통스러운 감각마저 잊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기태정은 그 어떤 상처도 받은 적 없는 사람처럼 세화의 앞에 서서,한참을 머뭇거렸다. 아니, 아니, 아니. 고장 난 시계처럼 몇 번이고 그 말만 되풀이하면서.

“나도 내가 다 가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

“네가 없어서, 하나도 안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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