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아, 아… 어떡…, 해, 준장님….”
기태정은 눈을 깊이 감았다가 떴다.
준장님.
저를 부르는 세화의 목소리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세화를 보내 준 이후로 기태정은 자신이 지은 환상 속에서만 살았다. 그 안에서 저는 여전히 준장이었고, 세화는 달았던 여느 날처럼 환하게 웃으며 저를 불러 주었다.
자주 가던 백화점에서 사과와 체리를 같이 고르고, 미색의 독서등을 켠 채 침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까무룩 함께 잠이 들었다. 관사 안에 갖춰 둔 작은 바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고, 드라이브도 했다. 실제 있었던 일과 뒤늦게야 세화에게 해 주고 싶었던 것들이 한데 엉켜, 나중엔 무엇이 진짜였는지 점점 경계가 희미해질 지경이었다.
꿈의 종착지는 언제나 5성의 바닷가였다. 맨발에 닿는 모래가 간지럽다며 자꾸만 웃는 세화의 그 말간 얼굴을, 기태정은 진짜가 아닌 줄 알면서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따금 세화는 제 상의 밑단을 잡아끌며 아이를 보러 가자고, 안아 봐도 괜찮다고 다정히 권해 주기도 했다. 대신 해림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 나름대로 엄한 꾸중을 덧붙이긴 했지만…. 그래도 순하기 짝이 없는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기태정은 몇 번이고 아이에게 속삭였다.
그때는 내가 눈이 돌았다는 핑계로 너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했어, 많이 미안했어, 지금도 너무 미안해, 해림아.
그리고 세화, 너에게도.
“피가… 준장님, 피가 너무 많이 나는데….”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던 환상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눈이 부시던 백사장은 알알이 흩어지고, 빛이 사라진 자리엔 엉망이 된 보호실의 정경이 훅 들이찼다.
“이거… 어, 어떻게…, 어떡하면….”
기태정은 문설주를 짚으며 느리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쪽 손으로 피가 솟구치는 부위를 더듬어 보는데, 생각보다 자리가 안 좋았다. 그제야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바, 어차피 망한 거…! 차라리 죽이면 돈이라도 후하게 받겠지!”
“아, 안 돼…!”
악당의 촌스러운 발악과 세화의 울음 섞인 비명이 귓가를 스치고, 그와 동시에 또 한 차례 날아든 메스가 목빗근 부근의 애매한 곳을 긁고 갔다. 특수 분장의 얇은 거죽이 크게 들썩이고, 안에 부착했던 음성 변조기 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저에게 메스를 휘두른 잔챙이는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니 찌르는 손에 힘이 쏠린 모양이군. 놈의 입장에선 운이 좋았다는 말 외엔 지금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쩌다 목표로 하는 각도에 딱 들어맞았는데 얼결에 그 자신의 무게를 고스란히 실을 수 있기까지 했으니….
“준장님!”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음이 났다. 이젠 준장 아닌데. 별 하나 더 달아서 소장인데. 세화에게 준장이라고 불리니 이렇게나 좋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걸로도 골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잡스러운 새끼가 휘두르는 메스에 처맞고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여기요! 사람 좀 빨리 불러 주세요, 여기…!”
뒤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콩콩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화의 품에 안긴 아이의 울음도 덩달아 커졌다 작아지길 반복했다.
기태정은 투레질하듯 머리를 흔들며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았다.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릎으로 기어 달아나려는 놈의 뒤통수를 잡아, 바닥에 안면을 세게 짓찧었다. 고작 그만큼 힘을 준 걸로도 칼이 꽂혔던 부위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버러지처럼 뭉개진 놈을 내던지고, 기태정은 천천히 아일랜드 식탁까지 걸어갔다. 그러곤 아까 챙겨 둔 찢어진 가운을 상판 위에 잘 올려 두었다. 칩이 보이도록 엎어 두었으니, 오선란 대장이 발견하면 수상쩍게 여기고 바로 확인 들어갈 거다.
“잠시만요, 사람 부를 테니까….”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들어가.”
다 갈라진 낮은 목소리에 세화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저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진짜 목소리를 들으니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다.
“문 따는 소리 들리지? 믿을 만한 사람들 금방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침실 안에서 기다려.”
“그치만….”
“나 멀쩡해.”
똑바로 서 있고, 쓰러지지도 않았잖아. 심지어 딱히 아프지도 않다는 말에 세화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찌나 하순을 꽉 깨물고 있는지 턱에 쪼글쪼글 호두 같은 주름이 질 정도다. 그 표정 되게 오랜만이라고, 반갑다고 웃으면 세화가 어이없어하려나?
“별일 아니야.”
“피가 그렇게 나는데 어떻게 별일이,”
“나 때문에 네가 아팠던 거에 비하면… 이건 정말 별것도 아니지.”
“…….”
“괜찮아, 신경 쓸 거 없어. 이 정도는 약 먹으면….”
차라리 잘됐다. 장교 시해 혐의까지 덮어씌울 수 있게 됐으니, 이 일로 김씨 가문은 완전히 끝낼 수 있다. 넋을 놓는 바람에 어이없이 당하긴 했어도 그 덕에 절 부르는 이세화의 목소리도 들어 봤으니까, 그걸로 충분히….
“호출받고 왔습니다! 이상 없으십니까?”
현관문이 드디어 뜯겨 나가고, 밖을 지키고 있던 아군들이 밀려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으로 발을 딛는 놈들의 동태를 관찰하던 기태정은 무전을 타고 들리는 오선란 대장의 노성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날카로웠던 눈매에 서서히 나른함이 고였다.
“준장님…?”
순간 시야가 크게 이지러지더니 무릎에 힘이 탁 풀렸다. 몸이 무너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기태정은 멋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구질구질한 참회와 뒤늦은 후회, 못난 연정을 몇 번이나 펼쳐 보고 덮어 보았다.
“준장님…!”
피비린내와 함께 익숙하지 않은 어둠이 밀려왔다.
그러면서도 이세화의 애달픈 부름과 맞는 암전이, 썩 나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세화는 초조하게 병원 복도를 서성였다.
나 중위, 아니 나 대위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으면서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걸까? 그나저나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길래 아무런 안내도 없는 거지? 원래 장교들이 들어간 수술방은 팻말조차 걸어 놓지 않는 건가? 보안… 뭐 그런 것 때문에? 그래도 그렇지, 수술하려면 의사든 간호사든 사람들이 바삐 드나드는 게 정상이잖아. 한데 사람은커녕 수술 도구나 의료 용품을 실어 나르는 로봇조차 보이질 않았다.
불길한 적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세화는 작게 몸을 떨었다. 혹시… 정말 혹시라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거라면…. 그 태산 같았던 남자가, 기태정이… 그대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됐다면….
“아냐, 설마….”
세화는 자꾸만 흉한 생각이나 하는 저를 나무랐다. 쓰러지기 직전까진 그 사람 말도 곧잘 했잖아. 나쁜 놈들도 마저 때려눕힐 정도로 힘도 넘쳤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했는데, 뭐.”
해묵은 감정과는 별개로, 기태정이 이런 식으로 죽, 아니 다치는 걸 보고 싶었던 건 아니다.
“별일 아니라고도 했으니까….”
해림이는 잠시 신생아 보호실로 이동시켰고, 박 소위, 아니 박 중위가 회복실 안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 검진받으러 왔을 때 저에게 막말했던 의사처럼 김 중령이 꾸리는 장학 재단의 수혜자들이 사주를 받아 벌인 짓이라고 했다. 저와 아이를 인질로 삼아 기태정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고 했던 것 같고, 자세한 내막은 오선란 대장이 직접 나서서 파악하는 중이라고 했다.
세화가 전해 들은 이야기는 이게 전부였다.
빨리 진짜 의사 좀 불러 달라고, 칼에 목을 찔려서 피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말에 문을 따고 들어온 군인들 또한 다급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쓰러진 사람이 기태정 준장, 아니… 기태정 소장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사람들의 태도가 묘해졌다.
물론 말씨나 태도는 매우 극진했다. 신속히 이송을 준비했고, 기태정의 부관들도 부랴부랴 소환됐다. 그게 끝이었다. 그 자리의 누구도 다급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찔린 목도 문제였지만 기태정은 괴한들을 상대하면서 손바닥도 크게 찢겼다. 대충 보기에도 촌각을 다툴 긴급한 상황이었는데도 어쩐지 모두가 슬렁슬렁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세화 씨.”
나 중위, 아니 나 대위와 최 준위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가왔다. 오랜만에 봤다고 저를 보는 눈빛에 반가움이 서려 있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네요.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어요?”
세화는 점점 돌아가는 모양새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환대해 주는 건 좋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태정이 저 지경인데, 부관들마저 이렇게 태평한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준, 아니, 소장님의 상태는….”
“아아, 괜찮습니다. 많이 놀라셨죠?”
“저야 아무렇지도 않아요. 근데 그… 하여튼 그분은 심하게 다치셨는데….”
소장이라는 부름은 영 입에 익지 않아서 세화는 슬쩍 호칭을 뭉개 버렸다.
“에이. 소장님이시잖아요.”
나 대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설명을 이어 갔다.
“음, 우선… 혈액에서 소량의 마취약이 확인되었는데, 차라리 이게 나아요.”
여태 마음 졸이며 이것저것 물어볼 사람을 기다렸다. 그런데 나 대위가 하는 말조차 세화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엉뚱한 약물이었으면 조금 골치 아팠을 수도 있는데, 병원에서 쓰는 진짜 마취제라서 이건 큰 문제 없을 것 같아요.”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밝았다. 세화는 어쩐지 얼이 빠져서 입술만 달싹이다 간신히 운을 뗐다.
“…아, 음… 칼에 찔렸던 곳은요? 지금 수술 중이긴 한 건지….”
“에이, 그거야 회복제 한 알이면 충분합니다.”
“…….”
“더 궁금한 건 없고요?”
그게 전부였다. 세화는 믿기지 않아서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나 대위를 붙들었다.
“회복제요? 수술을 왜 안 해요?”
“에이, 겨우 이런 일로 수술이라뇨.”
이런 일…? 목에서 터진 둑처럼 피가 솟았는데, 겨우 이런 일이라고?
“잠깐만요. 그, 회복제가 좋은 건 저도 알아요. 근데 여기 살도 다 찢어지고, 피도 엄청 흘렸는데….”
“맞아요,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즉각 응급실로 실려 갔을 거예요. 그래도 살아날 가망은 매우 낮을 거고.”
그렇지만 기태정 소장님이잖아요.
나 대위는 기태정이니까 괜찮다는 말을, 무슨 만능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휘둘러 댔다.
“몸에 박힌 탄환을 꺼내야 하거나 뭔가에 꿰뚫린 상태도 아니니까, 수술은 정말로 할 필요 없어요. 시간 지나면 금방 털고 일어나실 거예요.”
칼 맞고 피부 좀 찢어진 정도는 기태정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나 대위가 세화를 다독여 주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려는 뜻에서 일부러 가볍게 말해 준 것 같기도 한데… 조금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오히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기태정은, 보통 사람들은 생사를 가늠할 수 없을 수준으로 다쳐도, 누구 하나 자길 걱정해 주지 않는 걸 당연히 여기면서… 회복제 한 알만 삼키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군복을 입어 왔던 걸까? 매번, 평생을,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