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뒤로 물러나 있어!”
몸을 날리듯 의사와 세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시야를 차단하고, 세화를 뒤로 슬쩍 밀어내며 독촉하자 다행히도 인기척이 조금씩 멀어졌다. 당황한 와중에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것 같다.
일이 틀어질 것 같다고 판단했는지 간호사, 아니 간호사 분장을 한 놈이 재빨리 현관문에 달라붙었다. 밖에서 진입하는 것을 방해할 요량인 듯했다.
기태정은 놈들이 가져온 3층짜리 왜건을 발로 차 옆으로 쓰러트린 다음, 현관 쪽으로 세게 밀었다.
“으어억!”
문의 잠금장치에 작은 금속기를 가져다 대려던 놈은 날아온 왜건에 다리를 다쳤는지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과격한 기태정의 대응에 다른 놈들도 머뭇거리며 상황을 살피기만 했다.
“흐에엥…!”
“괜찮아, 괜찮아….”
요란한 소리에 놀란 아이를 안고 어르는 세화의 목소리에서 초조함과 두려움이 묻어났다.
기태정은 빠르게 바닥을 훑어보았다. 놈들이 챙겨온 건 주사기, 메스, 시약병, 심박 측정기 같은 평범한 의료용품들이었다. 왜건에 새겨진 코드가 응급실인 걸 보니, 그 핑계로 내부 검문은 어찌 통과했나 보다.
총기나 폭탄류는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그렇지, 지금 메스 하나만 믿고서 이런 짓을 벌인 건가? 물론 저야 맨손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지만, 저 새끼들은 민간인으로 보이는데.
허접한 놈들이 허접한 도구를 들고 여기까지 쳐들어온 저의가 뭘까? 오선란 대장이 평소의 배로 경호 인력을 붙여 놨다는 건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김 중령이 심어 둔 끄나풀이 맞다면 이런 짓을 왜 벌이는 건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 중령은 2환 화재 손해 배상 건으로 이렇게 눈에 띄는 짓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파산 신청을 시도한 이후론 비교적 젠틀하게 사건에 임하던 세력들까지 강도 높게 김 중령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요즘이었다.
“우, 움직이지 마!”
발치에서 메스를 주워들며 의사 가운을 입은 놈이 꽥 소리를 질렀다.
“이,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나에게도 아이가 있어요.”
아이라는 말에 뒤에서 세화의 몸이 크게 튀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 이 새끼들이 이걸 노렸구나.
“기태정 소장에게 연락해요.”
지금 세화가 가장 약해질 수밖에 없는 단어를 꺼내 들며, 의사가 손에 쥔 메스를 흔들어 댔다.
“당신과 아이한텐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을 거고, 합의 이루어지면 기태정 소장의 반대 세력들까지 책임지고 설득할 테니까…. 일단 기태정 소장한테 연락만 해요. 자리 만들어 주면 이쪽에서 다 알아서 할 거야….”
합의는 씨발, 얼어 죽을 합의.
어떻게 처리할까. 세화를 침실 안으로 피신시키기엔 동선이 애매했다. 엄호하며 움직인다고 해도 측면이 살짝 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안고 있는 아기를 찌르기 딱 좋은 각도가 나올 거다.
기태정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몰살은 쉽다. 그렇지만 흉 하나 안 지게 하면서 누군가를 지키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런 건 해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다.
경우의 수를 어디까지 헤아려야 하지?
세화의 앞에서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았다.
2환의 항구에서 송 씨를 비롯한 사람들의 목숨줄을 쥐고 세화를 협박했을 때, 배 한 척을 그의 눈앞에서 날려 버렸을 때…. 저를 보던 세화의 눈길이 어떠했던가.
그래서 기태정은 원래 하던 대로 편히 움직일 수 없었다.
세화와 아이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아야 한다. 피가 튀는 험한 광경도 보지 못하게 할 거다. 이제야 겨우 웃기 시작했는데…. 혹시라도 예전 일이 떠올라 세화가 괴로워하면, 그것도 저와 얽힌 일로 또 그렇게 되어 버리면 이번엔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
“바운서 뒤에서 최대한 몸 웅크리고 있어요. 창가에 바투 붙는 것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 적당히 거리 두는 게 좋습니다.”
시선은 여전히 전방에 두고서 세화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어차피 저 새끼들 다 살릴 겁니다. 그래야 배후 캐물을 수 있으니까.”
“…….”
“조금 시끄럽긴 하겠지만 아무도 안 죽어요. 약속할게요.”
걱정은 되지 않는다. 해 본 적 없는 방식이 낯설 뿐, 어렵지 않게 마무리될 거다.
하지만 이런 요란한 일이 벌어졌는데도 제가 계속 세화의 곁을 지킬 수는 없겠지. 지금도 모르는 척 다시 존대하고 있긴 하지만, 아까 놀라서 세화를 편하게 부른 탓에 이미 제가 누구라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이 이딴 난장판인 게 씁쓸하긴 한데… 그래도 일주일이나 세화와 아이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정말 좋았다.
“뭐, 뭘 둘이서 속닥거리고 있어! 이세화 씨, 기태정 소장에게 연락하라니까!”
의사 놈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을 신호탄으로,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기태정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왜 자꾸 불러.”
“으아악!”
“불러서 왔잖아, 기태정 소장.”
아까 나에게도 아이가 있다는 둥 개소리나 하던 의사부터 잡아채며, 놈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누군가를 붙들고 있으니 그보다 크게 움직이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지 옆으로 불쑥 파고들려는 멍청한 새끼 하나를 마저 걷어차면서, 의사의 가운 깃을 더듬었다. 혹시나 했는데 아래쪽에 손톱만 한 전자 기기의 감촉이 느껴졌다.
“헉, 흐어억…!”
목을 조를 듯 놈의 멱살을 쥐고, 칩이 달린 쪽의 옷감을 찌익 잡아 뜯었다.
“내가 이세화랑 애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칩 가까이에 대고 살벌하게 속삭였다. 실시간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김 중령이, 애타게 찾던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워하길 바라며. 아. 지금은 음성 변조기를 착용하고 있으니 나인 줄 실감이 안 나려나?
“자, 잡아! 누구라도 저 애부터 잡아야…!”
세화나 아이를 인질로 삼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버러지 같은 놈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자기들이 넷이나 되니까 달려들어 저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그사이 단 한 놈이라도 세화에게 갈 수 있으면 될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기태정은 시큰둥한 얼굴로 몸을 움직였다. 몇 번이나 총을 맞고도 멀쩡히 살았는데, 조그만 메스 따위는 저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이 미, 미친놈이…!”
칼날 부분을 손으로 덥석 쥐고, 어디 좆대로 해보라는 듯 메스를 쥔 놈을 제 몸쪽으로 쑥 끌어당겼다.
“흐어억!”
압도적인 악력 차이에 경악하는 놈을 향해 씩 웃어 주고, 명치에 주먹을 세게 꽂아 넣었다. 솜뭉치가 펑 터져나가는 것 같은 묵직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구역질도 못 하고서 기절한 놈을 발로 걷어 내고, 제 어깨선쯤을 막 지나쳐 가려는 쥐새끼 같은 다른 놈의 안면을 움켜쥐었다.
이제 보니 이 테러 극의 핵심 인력은 간호사 복장을 한 놈들이었다. 적어도 이놈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느낌이 났다. 물론 기태정의 기준으론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저에게 붙들리는 바람에 발이 허공에 뜬 채 버둥거리는 놈의 배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그런데,
“뒤, 뒤에…!”
세화의 새된 비명이 울려 퍼지고, 그와 동시에 목덜미에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우리가 괜히 의사와 간호사로 꾸미고 들어온 줄 알아?”
용케도 아직 저에게 한 대도 맞지 않은 놈이 낄낄 웃으며 주사기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좋게 협상하자고 했을 때 말 들었으면 좋았잖아.”
혈관을 타고 약물이 찔끔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음, 검문은 통과했으니 응급실 상비품은 맞을 테고… 그럼 기껏해야 마취제 아닐까 싶은데. 주삿바늘이 깊게 찌르고 들어온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으니….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게도 큰 타격은 없을 것 같다.
“우리가 돈을 달라고 했어, 이세화를 뭐 당장 죽이겠다고 했어? 그냥, 억…!”
기태정은 주사기에 찔렸던 목 부근을 매만지며, 제 앞에서 까불어 대던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제가 움직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얻어맞은 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면서 바닥에 떨군 주사기와 저의 얼굴만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걸 보니, 투여에 실패했다고 짐작하는 것 같았다.
“아. 저 새끼한테만 슬쩍 말했구나, 내가.”
수면제든 독약이든 몸에 안 좋은 것들은 어지간해선 안 받는 걸로 유명한데, 나.
“그, 그게…!”
“티란정 삼십 밀리 정도는 들고 와. 그 정도면 잠깐 눈을 감기는 하는 것 같으니까.”
멱살을 잡으며 속삭이자,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듯 널브러진 놈이 대경하여 삿대질했다.
“뭐? 다, 당신이, 여기에 어, 어떻…!”
“입 다물어, 세화는 아직 모르니까.”
이쯤 되면 눈치챘을 것도 같지만…. 어쨌든 작게 혀를 차며 멍청한 놈에게 한 방 더 갈겨 주고, 겁에 질린 나머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확한 용량과 마취제의 종류는 모르겠지만 버틸 만했다. 이대로 이 새끼들 전부 정리하고, 오선란 대장 올 때까지 지켜보는 것도 전혀 무리가 없을 듯했다.
기태정은 짧게 고개를 털고, 날리듯 몸을 내던졌다. 뼈 부러지는 소리나 타격음이 너무 크면 세화가 겁먹을까 봐 살살 하려고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그냥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
메스며 주사기를 비장하게 집어 드는 놈을 걷어차고, 목덜미를 붙들어 왜건 쪽으로 집어 던졌다. 나름대로 힘을 조절했는데도 추락한 놈이 내지르는 비명이나 집기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고작 이 정도로 죽겠다고 소리 지를 거면서 무슨 배짱으로 이런 일을 벌여, 어?”
“끅, 흐읍, 윽… 저, 저희도… 기, 김 중령이 협박해서….”
더 들어줄 것도 없었다. 마지막 악당의 양 손목을 뚝 부러뜨려 주었다. 아까 사람들을 집어 던졌을 때를 교훈 삼아 이번엔 뼈 부서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히 했다.
이후론 더 처리할 것도 없었다. 김 중령이 심어 둔 칩은 확보했고…. 문 쪽에서 작은 진동음이 느껴지는 걸 보니, 바깥에서도 해체 작업에 돌입한 것 같았다. 여기든 저기든 죄다 느려 터진 새끼들뿐이지.
기태정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세화의 평화로운 공간을 깨부순 놈들을 내려다보았다. 놈들도 평범한 군인이 아닌 자신이 안을 지키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거다.
혹시 오선란 대장도 이런 순간을 대비해 저를 불러들인 거였을까? 그러면 자신의 소임을 다 하긴 한 거니까… 다행이다.
기태정은 쓰게 웃으며 세화를 향해 돌아섰다. 아기는 아직도 간헐적으로 울음을 뱉고 있었고, 세화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낯을 하고 있었다.
쓰러진 놈들이 끙끙 앓는 소리, 문을 해체하는 소리, 지친 아이의 얕은 울음…. 주변은 제법 소란스러운데도 어쩐지 고요하게 느껴졌다. 세화와 둘만 다른 세상에 갇힌 것처럼,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한 침묵이 유유히 흘렀다.
“…안에 들어가 있어요.”
정중히 말을 걸자 세화의 몸이 움찔 튀었다.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목소리도 여전히 제 것이 아니니 끝까지 발뺌해 볼 생각이었다.
“정리하기까지 시간 조금 걸릴 것 같으니까.”
기태정은 피가 흐르지 않는 손을 들어, 세화의 눈을 슬쩍 가려 주었다. 눈가를 꾹 누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떼어 내고 있는 것도 아닌… 굉장히 어정쩡한 동작이었다.
반대편 손에서 줄줄 흐르는 핏방울을 탈탈 털어 내고, 세화의 옷 끝만 겨우 쥐고서 슬쩍 앞으로 잡아끌었다. 착하게도 세화는 기태정이 이끄는 대로 부드러이 흔들려 주었다. 둘 사이에 끼다시피 한 아이가 우웅, 하며 몸을 뒤척였다.
“오선란 대장님 곧 올 겁니다. 담당의도요.”
“…….”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문 잠그고 있으세요.”
놀랐을 세화와 아이를 다독여 주는 건 제 몫이 아니었다. 수습은 오선란 대장에게 맡기고, 저는 이 어이없는 사건의 전말이나 밝혀야겠다.
“아, 그리고….”
문득 시선을 느껴 아래쪽으로 흘끔 눈짓한 기태정은 말이 턱 막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갑작스러운 소요에 놀라 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던 아이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커다란 사람을 보니 신기했던 걸까? 입을 헤벌리고선, 과장 좀 보태 주먹만 한 눈을 깜빡이는 아기는… 인형이 따로 없을 정도로 예뻤다.
“음, 그… 이후로는….”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던 기태정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팩 돌렸다. 부자연스러웠을 거 아는데, 별수 없었다.
세화와 세화를 똑 닮은 아이가 똑같은 표정을 하고서 저를 바라보고 있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도, 작게 입을 벌린 모양과 각도도 틀에 놓고 찍은 것처럼 똑같았다. 마취제가 아니라 이 풍경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얗게 표백되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문은 잘 잠그고 있고….”
오선란 대장이 올 때까진 침실 문 밖에서 지키고 서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세화를 다독이고서 돌아서려는데, 한데 엉킨 저와 세화의 그림자 위로 길쭉하고 낯선 인영이 슬그머니 드리워졌다.
이런, 씹…. 기태정은 빠르게 돌아서며 침실 안으로 세화를 떠밀었다. 갑작스러운 거친 손길에 겨우 울음이 멎어 가던 아이가 와앙 울음을 터트리고, 그리고….
“준장님…!”
상황 파악을 할 틈도 없이, 날카로운 메스가 기태정의 목줄기에 푹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