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34)화 (134/144)

#131

“…죄송합니다.”

“…….”

“놀라신 것 같아서 도와드렸습니다.”

썩둑 잘린 단면을 늘어놓은 듯 눈앞의 풍경이 툭툭 끊어졌다. 세화는 얼어붙은 몸을 간신히 움직였다.

올려다보는 눈높이는 익숙한데, 서서히 시야에 들어차는 낯은…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다. 짧게 사과하고 곧장 멀어지는 목소리도 낯선 이의 것이었다. 그런데….

세화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입술만 달싹였다. 뭐지? 뒤에서 저를 감싸 안던 그 순간이, 그 느낌이 너무나 익숙했다. 등에 닿던 단단한 몸의 감촉, 뻗은 팔의 높이와 길이, 귓가를 스치던 체온… 사소한 그런 것들이, 꼭….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저, 저기…!”

그리 크게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남자는 용케도 알아듣고는 바로 자리에 멈추어 섰다. 분부대로 따를 준비가 되었다는 듯 유순히 구는 그 태도가 어쩐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밖에 선 군인들과 똑같은 옷차림에, 엇비슷하게 커다란 키인데… 왜일까. 왜 이 사람만 유독 다르게 보이는 걸까.

“그게, 그러니까, 저기….”

저도 모르게 불러 세우긴 했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당연하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으니까.

저 사람이 기태정…인 것 같다니.

원래 병원 소속인 건지 남자에게선 소독약 냄새가 풀풀 풍겼다. 흘끗 보니 손가락 끝이 다 터져서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알코올 솜을 자주 만지면 피부가 저렇게 상해 버리곤 한다. 하우스 지하에서 장기 따던 놈들의 손이 꼭 저랬다.

기태정의 손은 저렇지 않다. 굳은살이 가득하긴 했어도 저런 식으로 손끝이 허옇게 트진 않았다. 아니, 비단 손만 다른 게 아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 피부색까지 다른데, 왜….

“…아니에요, 고맙… 습니다.”

어물어물하다가 싱겁게 인사하자, 남자 또한 슬쩍 묵례했다. 그게 끝이었다. 밖으로 향하는 남자의 걸음엔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절도 있어도 여유가 묻어나던 기태정과 달리, 군기가 바짝 잡힌 모습이었다.

발걸음 소리는 금세 뚝 멎었는데 도어 록 해제 음은 들리지 않았다. 당분간 보호실 안에도 지키는 사람이 있을 거라더니, 저이가 담당인 모양이었다.

세화는 갉작이는 속을 어쩌질 못해 괜히 가슴께나 문질러 댔다.

기태정은 뒤에서 저를 옭아매는 것을 좋아했다. 한창 야한 짓에 여념이 없을 때도 그랬고, 그냥 잠만 잘 때도 그랬고, 일이 다 어그러진 이후에도 그랬다. 품 안에 저를 욱여넣고 있으면 전부 다 없었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그의 무게감과 양감에 어쩔 수 없이 익숙해져 버린 몸은 저 사람은 기태정이 틀림없다고 말하는데, 정작 남자의 생김새며 체향은 전혀 다르니 혼란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침실 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세화는 이내 어깨를 잘게 떨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기태정이 아닌 게 당연하잖아. 여기에 왜 있겠어, 그 사람은….

“더 높으신 분 되어서 잘살고 있다잖아….”

기태정은… 재판이 끝나자마자 저를 보내 주었다. 몇 번이나 약속을 지켜 달라고 했을 땐 들은 척도 않는 것 같더니, 갑자기 이렇다 할 얘기도 없이 끝을 내 버렸다.

그는 언젠가 들고 왔던 아기 신발과 똑 닮은 물건을 멋대로 신겨 주면서, 나만 없어지면 너와 해림이 모두에게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오선란 대장에게 가면 아이를 실험실로 데리고 가려는 일은 시도조차 불가능할 거라고, 앞으로 그런 모욕은 절대 없을 거라며 달래 주었다.

그리곤 미안하다고 했다. 한참이나 때늦은, 그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토해 낸 사과였다.

몸을 추스르느라 저 멀리 치워 두었던 기억이 단박에 되살아났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기태정과 엉킨 좋았던, 아팠던, 슬펐던 모든 마음의 조각이 세화를 꼼꼼히 포위했다.

요람 난간에 얹은 세화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동통을 이겨 내기 어려웠다. 그래도 꼴사납게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눈앞에 보이는 해림이 덕분이다. 아기는 코끝을 씰룩이면서도 여전히 착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 기태정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써도 까딱 부주의했다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기를 봐야 한다.

시터가 오면 해야 할 일도 많다. 그간 열심히 연습했던 분유 타는 법이 틀리진 않았는지 검사도 받아야 하고, 속싸개 싸는 법과 가오리 같이 생긴 귀여운 아기 옷을 입히는 법도 익혀야 하고, 기저귀도 갈아 봐야 하고, 또….

세화는 눈을 깊이 감았다 뜨며 버겁게 숨을 뒤챘다. 매운 걸 잘못 먹은 것처럼 목구멍이 따가워져서 침을 삼키기만 해도 아팠다.

순조롭게 잊어 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나 보다.

***

기태정은 밭은 숨을 감추려 괜히 헛기침했다. 아침에 공군 장교 전체 회의가 있어서 지금에야 병원에 들를 수 있었다. 다소 급하게 한 특수 분장이 어색하진 않을까 목 언저리를 꾹꾹 누르며, 신발장 옆에 조심스레 섰다. 경호 인력으로 분한 기태정의 지정석이었다.

짬이 나는 대로 세화와 아이를 보러 온 것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이럴 줄 알았다. 망설였던 것도 처음뿐이다. 들키면 세화가 어떤 낯으로 저를 볼까 두려우면서도 도저히 이곳으로 향하는 걸음을 끊을 수가 없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분유 냄새, 햇빛을 가득 머금은 침구와 옷감의 향이 보호실 안을 꽉 채웠다. 여기저기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귀여운 노래가 울려 퍼지고, 이따금 세화는 소리 내어 웃는다. 세화가 제 침대 위에서 새싹아, 하고 배 속 아기에게 속삭일 때 막연히 그려 보던 풍경과 똑같았다.

침실에만 콕 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세화는 수시로 들르는 전문가들에게 이런저런 육아 상식을 배우느라 바빴다. 상주하는 시터가 있어도 기본적인 건 아빠가 할 줄 알아야 한다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바람에 기태정 또한 어깨너머로 아기 돌보는 방법을 익히게 됐다. 분유를 먹일 때의 각도, 아기 등을 두드려 얼러 주는 타이밍, 속싸개 싸는 방법…. 실제론 품에 안아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데도, 온종일 서서 세화와 아이를 지켜보다 보니 절로 눈에 익어 버렸다.

“저기, 죄송한데….”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하고는 이곳저곳 살펴보고 있는데, 안에 있던 세화가 별안간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저를 불렀다.

“바쁘지 않으시죠?”

나를… 부른 건가, 지금? 얼떨떨하게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세화는 겸연쩍은 얼굴로 잠시 아이를 봐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물건 하나를 거실로 옮기려고 하는데요, 큰 소리가 나면 혹시 아기가 놀랄 수도 있으니까….”

“제가 옮기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걸 부탁드리려던 건 아닌데….”

“저보다는 보호자 분께서 지켜보시다가 바로 달래 주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아기가 울 수도 있으니까요.”

아아, 하며 세화가 슬쩍 몸을 틀었다. 좀 더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그럼… 죄송하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바운서라는 건데, 이걸 옮기려고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른 침대도 아니고 아기가 쓰는 바운서 같은 거,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었다. 햇빛이 적당히 드는 쪽으로 옮겨 두자, 세화가 아기를 안고 곧장 따라 나왔다.

“위치는 이쯤이 좋으신가요?”

“아, 네. 감사합니다. 한 곳에만 있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기분이라도 내면 어떨까 싶어서….”

내내 데면데면하게 굴다가 갑자기 도움을 요청한 게 민망했는지, 세화는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조심스럽고 딱딱한 어투긴 했어도, 조잘대던 예전 말버릇을 연상케 해서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그러고 보니 곧잘 걷고 말도 자연스럽게 한다. 조금 속도가 느리긴 해도 이젠 크게 불편해 보이진 않는다.

며칠 살펴보니, 세화는 밥도 잘 먹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했다. 그 덕인지 얼굴도 많이 좋아졌다. 뺨에 뽀얗게 살이 차오르고 있고, 아주 옅게나마 꽃물을 입힌 듯 혈색도 돌았다.

상담실도 나가고, 검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퇴원하면 어디에서 살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혼자서 고민도 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아이를 보면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세화는 열심히 살고 있었다. 저를 좋아할 때 그랬듯이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매일매일 어여쁘고 사랑스러웠다.

다행이라고 마음이 놓이면서도… 기태정은 세화가 아이에게 뭐라고 속삭이며 웃을 때마다 어쩐지 죽고 싶어졌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그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저를 흘끔 훔쳐보는 세화의 미간에 옅게 고랑이 팰 때가 있는데, 아리송한 시선이 제 얼굴이며 손을 배회하면 나 기태정 맞노라고 다 털어놓고 싶다. 하지만….

기태정은 다 터진 손끝의 거스러미를 뜯어내며 마음을 다잡았다. 뒷짐을 지는 척하며 뚝뚝 흐르는 핏방울을 옷에 쓱 닦아 냈다.

세화도, 아이도, 오선란 대장도 괜찮아 보인다. 이기적인 제 욕심을 꺾고 나니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았는가. 그럼 된 거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오롯이 제 잘못이었다. 다신 못 볼 줄 알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뭉개고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해야 한다.

“아, 이러면 너무 어두워지는데.”

세화는 불투명한 드레이프 커튼 위로 암막 커튼을 반쯤 치다 거두기를 반복했다. 컨트롤러로 쪼르르 달려갔다가, 다시 창 근처를 배회하다가… 모빌에 매달린 다람쥐처럼 부산스럽게 거실 이곳저곳을 오갔다. 내리쬐는 햇빛이 아이에게 좋지 않을까 봐 고심 중인 것 같았다.

그런 세화의 움직임을 따라 몇 가닥 삐친 머리가 새싹처럼 나풀거렸다. 동그란 뒤통수가 꼭 사과 같다. 기태정은 몰래 주먹을 꽉 쥐며 그 지나친 귀여움을 견뎌 냈다.

지금 표정 괜찮으려나? 말투부터 걸음걸이까지 세심히 신경을 쓰고는 있는데, 잘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다. 원래 위장술은 자신 있는 분야 중 하난데,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 앞이어서 그런지 전부 부족하게 느껴진다. 급한 마음에 실제로도 평소보다 준비가 허술했던 것도 있고….

이상하게도 세화는 뭘 눈치챈 사람처럼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저를 휙 돌아보곤 했다. 그리곤 한참이나 입을 벙싯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 관두었다. 어디가 그렇게 미심쩍을까 조마조마하다가도, 아직은 저를 완전히 지워 내진 않은 것 같아서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보호실 현관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기태정은 허리를 곧게 폈다. 미친 새끼. 이 와중에도 세화가 저를 깨끗이 떨치지 못한 게 기쁘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지.

“시터분은 식사 가셨죠?”

“아, 네…. 무슨 일이세요?”

“그사이 잠깐 봐 달라고 하셔서 들렀습니다. 보호자께서 걱정이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가운을 차려입은 의사 둘과 간호사 셋이 사람 좋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보호자라면 오선란 대장인가? 기태정은 흘끗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장교용이 아닌 일반용이라 성능은 후지긴 해도, 상부에서 쏜 메시지 같은 건 재깍 오기 마련인데… 아무런 알람도 뜨지 않았다.

기태정은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들어선 사람들의 낯을 살폈다. 우선 오선란 대장 쪽으로 긴급 호출을 보내 두었다. 세화의 건강 문제도 있어 수시로 의료진이 드나들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인원이 불시에 들이닥친 적은 없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몇 단계에 걸쳐 방문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밖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있다지만 스캐너가 모든 것을 걸러 주진 못한다. 싸구려 스프레이 한 통만 뿌려도 1성 검문대를 일시적으로나마 마비시킬 수 있지 않았던가.

“컨디션은 어떠세요?”

“아, 나쁘지 않아요. 잠도 잘 잤고요….”

“다행이네요.”

외부인들의 손과 발을 차분히 주시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기태정의 눈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크게 뜨였다.

“음… 수치 변화는 크지 않은 것 같고….”

세화 바로 곁에 선 의사가 쥐고 있는 펜이, 정확히는 클립에 달린 작은 문양이 매우 익숙했다. 그건 김 중령이 운영하는 회사, 경한 제약의 장학 재단의 심볼이었다.

“이세화!”

여태 공손하던 군인이 돌변해 자신의 이름을, 그것도 매우 다급하게 외치자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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