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최 준위.”
“예.”
“이딴 허접한 것들 두르고 간다고 이세화가 날 못 알아볼 것 같아?”
의장대 제복까지 입고 있는데 퍽이나 눈에 안 띄겠다며 싸늘하게 일갈하자, 최 준위가 민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됐으니까 박 중위, 저거 다 치워.”
“하지만….”
“이젠 상관 말이 말 같지도 않나?”
서슬 퍼런 기태정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칼같이 자세를 바로 했다. 놈들 하는 짓이 볼수록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터졌다.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제가 많이 변하긴 한 모양이었다. 이 새끼들이 뒈질 준비가 아니라 고작 맞을 준비나 하는 걸 보면.
“최 준위.”
“예.”
“귀관은 이세화 핑계를 대면 다 괜찮을 것 같았나? 무려 대장이 정식으로 요청을 넣었다는데 상관한테 보고도 없이 멋대로 일을 저질러?”
지은 죄가 있는 최 준위는 뒷짐을 지고서 바닥만 바라보았다. 박 중위 또한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욕을 퍼붓는 게 낫지, 저런 식으로 나올 때의 기태정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떤 징계든 달게 받겠다며 거듭 사죄하면서도, 최 준위는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계급장 도로 내놓으라고 하셔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이동부터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려면 4시간도 그리 여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
“소장님. 다른 날도 아니고…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오늘이 아기의 진짜 생일이잖습니까.”
하…. 기태정은 눈을 굴려 죄 없는 천장을 노려보았다.
비상시엔 사후 보고도 허용된다. 박 중위와 최 준위는 이 일이 적들에게 진지가 넘어가는 수준의 시급한 일이라 판단했던 모양이고, 기태정에게 이세화는 그만큼 무거운 주제이긴 했다. 5성 한복판이 전복된대도 세화의 일보다 다급하게 느껴지지 않을 거다.
그렇지만 저의 애틋함만을 앞세워 이런 식으로 일을 저질러버리면, 그러면 세화를 보내 준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처음만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일도 아니다. 지금 이렇게 세화를 보고 오면 다음엔 오선란 대장 몰래 다녀올 방법을 고심하게 될 게 뻔하다.
게다가 생일? 해, 아니, 아기의 생일 같은 걸 특별히 여길 자격이 저에게 있기는 한가? 세화가 들으면 웃기지 말고 아이에게 사과부터 하라며 화를 낼 거다. 당연하다. 세화를 붙들어 놓겠다고 애한테 못 할 짓 많이 했으니까….
“…최 준위.”
“예.”
“오선란 대장 쪽으로 회선 연결해.”
기태정은 마른 얼굴을 느리게 쓸었다.
일단 오선란 대장에게 따져 물을 거다. 당신이야말로 누구보다 나를 경계해야 하는 사람 아니냐고, 그 자리에 나는 대체 왜 부르는 거냐고, 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부하 놈들 헛소리를 왜 들어주고 있느냐고 거칠게 항의할 거다.
“박 중위 너는….”
뒤이어 지시를 내리려던 기태정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멈칫 멈추어 섰다.
항의, 할 건데….
숨을 참느라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관자놀이며 목덜미에 핏대가 벌컥 일어설 정도로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부관들에게 해야 할 말을 고르는 사이 실낱같은 기대감이 염치도 없이 피어올랐다. 실금처럼 야트막했던 균열은 이내 전신을 죄 부술 기세로 격렬하게 번져나간다. 누가 귀에 대고 북이라도 치는 것처럼 맥박 소리가 쿵쿵 울려 댔다.
“아, 씨발….”
기태정은 결국 눈을 감았다. 떨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세게 주먹을 움켜쥐어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결국은 애 핑계를 대는 내가 진짜 비겁하고 쓰레기 같은 거 아는데, 세화야, 이세화, 멀리서 네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어….
“…사람 불러서 특수 분장 준비해.”
한참 망설이던 기태정은 결국 패배를 선언했다. 구차하게 구는 스스로가 어이없었지만, 도저히 유혹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만나도 된다고, 보러 가도 괜찮지 않냐고, 세화도 아닌 타인에게 그런 말 좀 들은 것만으로도 애써 참아 왔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오는 길에 소독약도 가져와. 의료용 알코올 솜도 좋고. 사람 하나 완전히 절일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 많이.”
“아…, 예!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낯으로 굳어 있던 최 준위가 헐레벌떡 태블릿을 꺼내고 손목시계의 다이얼을 눌렀다. 박 중위는 지시 사항에 더해 평범한 활동복까지 준비하겠다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특수 분장 같은 게 먹히기나 할까? 사람 살가죽 같은 건 쉽게 바꿔 끼울 수 있다는 걸 이세화도 알고 있는데.
아니, 그보다는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향수 냄새가 제일 큰 문제다. 얼굴이나 목소리야 바꿀 수 있다지만 체향은 감출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저에게 안겨있을 때만 숨을 쉴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만큼 이세화는 자신의 향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게다가 요즘의 기태정은 세화가 좋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전의 몇 배로 향수를 뿌려 대던 참이었다.
어쨌든 당장 떠오른 건 소독약이나 알코올 같은 거에 몸을 담그는 거였다. 약 한 알만 먹으면 바로 회복될 테니, 피부가 다 터지더라도 그런 걸 퍼붓는 쪽이 조금이나마 안전할 것 같았다.
“소장님, 연결됐습니다.”
기태정은 미친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 이따위 허술한 걸 다급히 들고 온 저 새끼들도 그렇고, 그에 못지않게 조악한 임시방편이나 떠올린 저도 그렇고….
그렇게까지 상태가 안 좋았나. 하긴, 얼마 전엔 병원 가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니까 꼴이 말이 아니긴 한가 보지. 기태정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태블릿 화면을 확인했다. 어쩐지 멍해져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모르겠다. 오선란 대장이 무슨 수든 내주지 않을까. 어차피 이세화의 앞에선 그 어떤 전략도 무용했다.
***
“저, 대장님….”
“음?”
“저기… 아, 아니에요.”
세화는 주변을 둘러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당분간은 신경 좀 쓰는 게 좋겠다며 오선란 대장이 사람을 잔뜩 붙여 주었다. 눈어림으로도 기존 인원의 세 배는 되는 것 같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는데 이 정도 불편함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자세히 얘기해 주진 않았어도 김 중령과 그 일당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오선란 대장이 고생 중이라는 건 잘 알았다. 저와 해림이가 5성에 무사히 자리 잡길 바라며 고군분투 중인 양부에게 자신의 편의만 따질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다.
없진, 않은데…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일부러 덩치가 큰 사람들만 불러 모은 걸까? 원래도 군인들은 민간인보다 몸이 좋기 마련인데, 거대한 블록 같은 장정들이 복도마다 촘촘히 늘어서 있으니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난 갓난아기가 이렇게 작을 줄은 몰랐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네…. 너무 작은 것 같아요.”
침실 밖을 흘끔 곁눈질하던 세화는 오선란 대장의 감탄에 도로 해림이에게 집중했다.
정말로, 속싸개에 꼼꼼하게 싸인 해림이는 심하게 조그맸다. 몸무게는 평균이고 다리 길이는 평균보다도 길쭉한 편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제 눈엔 한없이 작아 보였다. 콩깍지가 씌었다는 게 이런 건가 싶다.
저를 닮은 아이를 두고 이런 평을 내리는 게 좀 쑥스럽긴 한데, 해림이는 너무너무 예쁘고 순했다. 보호실로 이동한 지 20분쯤 지났는데도 아주 얌전했다. 옮긴 곳이 낯설 법도 한데 울지도 않고 와앙, 크게 하품이나 한 번 하고는 여태 쿨쿨 자는 중이었다.
“한번 안아 볼래?”
“아, 아뇨….”
만면에 미소를 그리고 있던 세화는 오선란 대장의 갑작스러운 권유에 기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에요, 지금은 말고요….”
제 손이 닿아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걸 안다.
해림이는 신생아 보호실에 따로 머무르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인큐베이터 안에서 완벽한 생장 시간을 거쳤고, 이 요람도 면역 증강 및 무슨 개선을 위한… 하여튼, 이름도 어려운 장치가 오토로 돌아가는 최고급 제품이라고 했다.
그래도… 아직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저렇게 작고 연약한데. 안았다가 목이라도 부러지면 어떡해….
“그나저나 정말….”
오선란 대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 번 더 해림이를 들여다보았다. 세화는 반 발자국 뒤에서 서서 쭈뼛거리기만 했다. 있는 대로 목을 빼고서 까치발을 들고 있자니, 오선란 대장이 어이없어하며 해림이의 코앞까지 저를 끌고 왔다.
“네 새낀데 왜 그렇게 내외를 해. 어때,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지?”
“네….”
“어쩌면 이렇게 판박일까.”
시선 끝에 듬뿍 배어나는 아련한 애정이 더는 낯설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선란 대장은 지금 자신을 낳았다던…, 그… 이진우라는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입버릇부터 얼른 고쳐야 할 텐데. 낳아주신 분, 이진우라는 분, 저를 낳아 주셨다던 그 사람… 이런 식으로 부를 때마다 오선란 대장의 눈에 안타까움이 서리는 걸 안다. 그런데도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나도 이거 고쳐야 하는데 말이다. 너와 해림이 앞에 두고서 자꾸 진우 생각하는 거.”
이진우의 일로, 정확히는 이진우에 대한 호칭을 고민 중인 걸 어떻게 알았는지 오선란 대장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진우 때문에 너희를 예뻐하는 건 절대 아니야. 너흴 진우의 대체품 같은 걸로 생각하지도 않고, 책임감으로 꾸역꾸역 떠맡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진우와의 오래전 약속을 지키고자 널 양자로 올린 건 맞지만, 널 진짜 내 아들로 가슴에 품게 된 건 나의 의지라고. 그러니 혹 자신의 말버릇으로 불안했다면 그럴 것 없다며 오선란 대장이 다정하게 위로했다.
세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그런 말을 들어도 황송해 어쩔 줄 모른다거나, 냅다 부정부터 하지 않는다. 좋은 얘길 들었을 땐 그냥 웃으면 되는 거라고 오선란 대장이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아, 드디어 왔군.”
시계의 알람을 확인하던 오선란 대장이 돌연 눈살을 콱 찌푸렸다. 대단히 못마땅한 것을 보았다는 듯이.
“세화야, 난 잠시 일 좀 보고 와야 할 것 같다.”
엇, 그러면…. 해림이와 혼자 있어야 하는데…. 조금 불안해진 세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초조하게 엄지손톱만 긁어 댔다.
“걱정할 것 없다. 안에도 사람 들여놓으마.”
오선란 대장은 잘 할 수 있다며 가볍게 어깨를 짚어주곤, 곧장 자리를 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담 시터 바로 부를 걸 그랬다. 나름대로 역사적인 순간이니 외부인 없이 해림이를 맞이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시간쯤 후로 시터를 예약해 두었는데….
얼떨결에 홀로, 아니 해림이와 둘이서만 남겨진 세화는 자꾸만 움츠러들려는 몸을 곧게 폈다. 그래, 무서울 게 뭐가 있어. 내가 아빤데. 언제까지 무서워할 거야.
요람 근처만 빙글빙글 맴돌던 세화는 용기를 내, 아이의 발치쯤에 딱 섰다.
“새싹아, 해림아.”
태명과 이름을 번갈아 가며 불러 주자 아기가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벌써 자기 이름을 알아듣는 걸까? 확실하진 않지만 아빠인 제가 잠깐이라도 그렇게 느꼈으니, 맞는 걸로 여기기로 했다. 금세 들뜬 세화는 발그레해진 뺨을 하곤 배시시 웃었다.
“예쁘다….”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는 게 아이의 정서 발달에 좋다고 했는데, 바보처럼 예쁘다는 감탄 밖에 나오질 않았다.
벌써 머리숱도 풍성하고, 이목구비도 또렷하고…. 저를 닮기는 했는데, 해림이가 훨씬 예뻤다,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뭐랄까. 제 유전자를 좋은 방향으로 극대화하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막 보호실로 온 아가를 보고 숨죽이며 그리 말했을 때, 오선란 대장은 네 아빠랑 똑같은 소릴 한다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해림이를 보고 있으면 기태정이 떠올랐다. 눈썹과 미간, 콧대와 턱은 확실히 저보다 그 사람의 느낌이 났다. 조막만 한 얼굴과 길쭉한 다리도 그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아. 잠깐 기태정을 떠올렸다고 단박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세화는 좌우로 짧게 고개를 털며 습관처럼 차오르려는 우울을 밀어 냈다. 아기 생각만 해야겠다. 해림이에게 집중하다 보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해림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아기를 불러 보려던 세화는 손 아래에서 뭔가 달칵 눌리는 기분에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물렸다.
“…어?”
다행히도 면역 장치는 별 이상이 없었으나, 매달아 둔 모빌이 저 혼자 열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요람과 연동되어 있는 건가?
토끼와 다람쥐가 부지런히 잘도 굴러갔다. 오르골 연주도 사랑스러웠다. 문제는 얌전히 잘 자던 해림이가 뭔가 거슬린다는 듯 눈썹을 찡긋거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아, 안 되는데….”
세화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요람 겉면을 더듬거렸다. 조금 전에 제 손이 닿았던 부근을 뒤적이다 보니, 툭 튀어나온 부분이 느껴졌다. 바로 찾아서 다행이다. 이게 버튼이었구나….
“휴….”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했던 어깨를 툭 떨구었는데…. 순간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뒤에서 훅 끼쳐왔다.
누구지? 낯선 인기척에 놀랐으나, 돌아볼 틈도 없었다. 구부정하게 굽히고 있던 등에 단단한 몸이 툭 닿았다. 귓가를 스쳐 앞으로 길게 쭉 뻗은 누군가의 팔이, 세화를 대신해 요람의 버튼을 꾹 눌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