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32)화 (132/144)

#129

“그… 패치를 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말 그대로입니다. 이대로라면 이세화 씨도 해열제를 먹으면 열이 내릴 거고, 술을 마시면 취하기도 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처럼.”

만개하는 꽃처럼 세화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패치 없이도 약이 든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생을 이런 몸으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는 게 가능한 건가?

“보자, 요즘 먹고 있는 약이… 정신과에서 처방해 준 거랑 내과 약, 영양제가 전부죠? 정밀 검사는 2주에 한 번씩 받고 있고요.”

“아, 네….”

“사실 저번 달부터 검사할 때마다 약물 받아들이는 속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서, 전담의들끼리 매일 상의하던 중이었어요.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A7 부작용에 대해 뒤져 봤는데….”

군의관이 복잡하게 생긴 차트를 허공에 띄웠다. 하도 자주 본 탓에 어디쯤 위치한 문자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 어림짐작할 수 있는 지경이 됐다.

“실용 사례가 워낙 적긴 하지만, 눈여겨볼 만한 부작용 증상이 있더군요.”

차트 옆으로 조그만 홀로그램이 두둥실 떠올랐다. 혈관 안에서 갖가지 색의 세포들이 제각기 힘차게 꿈틀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하얀 것의 몸집이 거대해지더니 근처에 있던 다른 세포들을 와그작와그작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세포가 나타나선 크게 몸집을 부풀리고… 하여튼 자기들끼리 몸 안을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너무 강력한 치료제가 들어가니까 내 몸이 스스로 뭔가를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이 홀로그램처럼요. 면역 기능을 포함한 모든 체계가 다 무너지는 거죠.”

하지만 이세화 씨의 경우는, 하며 군의관이 처음 띄웠던 단면도를 불러 왔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처음부터 체질이 좀… 뭐랄까, 꼬여 있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A7을 들이부었으니 결과적으론 이미 뒤집혀있던 걸 다시 뒤집어서, 앞면을 보게 만든 셈인 거죠.”

운이 좋았다고 말하며 군의관이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A7을 들이붓게 된 경위를 생각하면 운 같은 소린 하면 안 되는 거긴 하지만, 어쨌든 이세화 씨에겐 A7 복용이 전화위복이 된 것 같습니다. 이 결과만 놓고 봤을 때는요.”

세화는 당황스러워서 군의관이 띄워준 여러 가지 결과물만 두리번거렸다. 그래, 기쁘다기보다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러면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러다 패치도 안 듣고 약도 안 듣는 어정쩡한 상태가 되면 큰일 아닌가?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요. 예측 결과 나쁘지 않으니까, 우선 패치 의존도부터 서서히 낮춰 볼 겁니다. 힘들겠지만 복잡한 검사도 수시로 있을 거고, 피도 왕창 뽑게 될 거예요. 하루에 서너 번씩도 하자고 할 수 있으니까 미리 각오는 하고 있어요.”

“그거야 상관없는데….”

“왜 상관이 없어요. 검사받는 게 얼마나 진 빠지는 일인데.”

그래도 백 퍼센트 장담할 순 없으니 너무 들뜨지는 말라고 군의관이 뒤늦게 덧붙였다.

“체질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이세화 씨의 몸이 형편없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정양에 힘써야 합니다. 패치 사용을 줄이면 지금보다 약해질 수도 있어요. 며칠 후면 아기도 나올 건데 앞으론 더 건강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화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사흘 후에 해림이를 꺼내기로 했다. 통상적으로 인큐베이터 밖으로 나오는 시기와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기에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아니, 완벽했다.

안면을 튼 간호사들은 누굴 닮았는지 아이가 아주 튼튼하다며 저를 볼 때마다 칭찬 아닌 칭찬을 건넸다. 기기와 프로그래밍이 아무리 좋아도 타고난 걸 따라갈 수가 없는 건데, 해림이는 발육 상황이며 건강 상태가 훌륭해서 다 커서도 웬만해선 잔병치레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간호사들이야 몸이 약한 저를 위로해주려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이겠지만, 그럴 때면 세화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떠올리고 말았다.

제 몸 이야기나 듣다가 기태정이 떠오를 줄은 몰랐다. 오늘도 예고도 없이 밀려온 그의 생각에 달군 쇠가 심장을 푹 찌르고 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제가 아닌 그 사람을 닮은 덕에 해림이가 아프진 않을 거라고 하니까… 그거 하난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머무르는 보호실에서 동실하기로 했죠?”

“네. 그리고 생각해봤는데…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슬슬 퇴원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군의관의 눈썹이 대번에 위로 치솟는 것을 보고 세화는 준비했던 변명을 주섬주섬 꺼냈다.

“보호실 안에서만 생활하는 게 더 안 좋은 것 같아서요. 자꾸 무기력해지고…. 상담 선생님도 병원 밖에서 지내는 거 추천한다고 하셨어요.”

상담실에서야 예전부터 그런 조언을 자주 했지만, 진짜로 움직여야겠다 결심하게 된 건 해림이 덕분이었다. 고생 끝에 세상으로 나온 아이에게 병원의 풍경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신생아 시절은 기억도 못 한다는 걸 알지만 아빠 마음이라는 게 그랬다.

그래서 이제 퇴원하겠노라 강수를 두었다. 오선란 대장도 그렇고 담당의들이 심히 과보호 중인 건 사실이었고, 이대로라면 한참 후에나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반대하던 오선란 대장도 일상을 살아가는 연습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자, 결국 허락해주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도중에 이상 증세 나타나면 당연히 안 됩니다. 퇴원 이후로 검사받으러 왔을 때도 결과 안 좋으면 바로 입원해야 하고요.”

“그렇게 할게요.”

세화는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퇴원하면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어요? 왜 그렇게 빨리하겠다고 그래요. 오선란 대장님 돈 펑펑 쓰면서 편하게 쉬지.”

홀로그램과 차트를 정리하며 군의관이 물었다.

“……, 아이스크림….”

“엥? 아이스크림?”

“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

이유는 모르겠다. 조금 더 건설적인 일을 해도 좋을 텐데 말이다. 앞으로 먹고살 방법을 고민해본다거나,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한다거나… 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있는데도 이상하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먹었던 3천 원짜리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졌다. 그것도 이 겨울에. 길거리에 서서 전부 먹고선, 손목에 텅 빈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끼고, 나 왔다는 인사를 건네며 무덤처럼 따뜻한 어딘가로 쑥 빨려 들어가고 싶었다.

***

요 며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김 중령의 파산 신청은 원로 대부분에게 큰 공분을 샀다. 뒤로 빼돌릴 거 다 빼돌려놓고는 수중에 돈이 없어 배상이 어려울 것 같다니. 그의 친인척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새끼들은 정신 차리려면 아직도 멀었다.

뭐 주워 먹을 거 없나 두리번거리는 하이에나 같은 놈들도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손해 배상 청구의 주축은 김석철의 개짓거리로 크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었다. 각자의 체면 생각해서 좋게 진행해 보자던 이들도 이번엔 역정을 내며 덤벼들었다.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거짓말에 눈이 안 돌아가는 게 이상했다.

덕분에 기태정도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김 중령을 확실하게 보내 버려야 한다. 그와 동시에 방치된 2환의 하늘길을 뚫을 방법도 고민해야 했다. 화재의 흔적을 전부 지우진 않으면서 영공 방어도 할 수 있고, 물자 수송도 가능한 수준만큼만 회복시켜야 한다니. 씨발. 오늘은 김석철 그 새끼한테 회복 약 좀 나중에 주라고 해야겠다.

“말씀 주신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소장님.”

일은 빡세도 자기 무시하던 놈들 좆되는 꼴 보고 있으니 기분 좋다며 어울리지도 않게 내내 생글거리던 최 준위가 돌연 어색하게 굴었다.

“뭔데.”

“그게….”

곰 같은 놈이 도와 달라는 듯 박 중위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박 중위는 에휴, 하고 한숨을 삼키며 나는 모르겠다는 듯 도리질만 쳤다. 어쭈. 기태정은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이 새끼들도 진급 좀 했다고 바로 빠져가지고….

“오선란 대장 측에서 경호 인력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요즘 내가 많이 봐줬지, 싶어 서늘하게 낯을 얼리려는데… 최 준위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누구? 오선란 대장?”

“예.”

거기서 저에게 경호를 요청할 대상이라고 해 봐야… 당연히 이세화, 단 한 사람뿐이다.

왜? 기태정은 차마 그 이름은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하고 속입술만 잘근 씹었다. 세화는 장성들도 아프면 달려갈 정도로 이 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병원 안에 머무르고 있다. 게다가 오선란 대장이 직접 나서서 신변을 보호하고 있는데… 인력 충원 요청이라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뭔가 놓친 게 있나? 김 중령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 수 쓰려고 드나?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세화 동향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똑바로 보고해. 다른 일도 아니고 오선란 대장이 경호를 왜 요청해.”

“아, 걱정하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게… 오늘 오후에 그…, 인큐베이터에서… 예, 꺼낸다고 합니다.”

최 준위도 세화와 아이를 언급할 땐 혀가 매끄럽게 굴러가진 않았는지 몇 번이나 삐걱거렸다.

“크흠, 그래서… 우리 쪽에서도 신경 쓰고 있다는 티를 내야, 이세화 씨 퇴원 이후에도 김 중령이 함부로 접근 못 하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김 중령 잔뜩 독 올라 있는 상태니까요.”

조금은 허술한 핑계였다. 물론 세화와 아이의 일론 유난스럽게 구는 것이 낫긴 하다만, 굳이 저까지 끌어들이며 세를 과시할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오씨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부리는 사람들을 데려오는 게 김 중령에겐 더 큰 압박으로 느껴질 거고, 이미 그렇게 하는 중인 것으로 안다. 정말로, 왜, 굳이?

“소장님께서 직접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박 준위가 바닥에 내려두었던 브리프 케이스를 뒤적였다. 안에 든 것은 의장대에서 주로 착용하는 검은색 제복이었다.

“혹시라도 이세화 씨가 저희 쪽 사람을 알아보면 불편해할 수 있으니, 군복도 다른 종류로 착용하고, 얼굴도 가리겠다고 답해 두었습니다. 모자랑 방독면 쓰시고, 혹시 모르니 음성 변조 장치도 착용하십시오. 그 정도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기태정은 코끝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삐딱하게 다리를 짚고 섰다. 어이가 없어서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최 준위.”

“우리 쪽에서 보내는 딱 한 사람만 이렇게 차림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뒤에서 최 준위 하는 짓을 지켜보던 박 중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슬쩍 말을 보탰다.

“오선란 대장도 동의한 일입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얼굴을 가리는 걸로도 모자라 목소리 변조까지 허락된 경호원이라니. 김 중령 쪽에서도 위장 접근하기 너무나 좋은 조건 아닌가. 재판 준비하던 때보다 지금이 더 위험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오선란 대장이 저딴 조건을 수락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소장님이야말로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이세화 씨 완벽하게 지켜 주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오선란 대장도 그 부분에선 이의가 없었습니다.”

박 중위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예정 시각은 4시간 후입니다.”

허락도 없이 저지른 짓이 무섭긴 한지, 최 준위가 손을 달달 떨며 기태정에게 의장대 제복을 내밀었다.

“소장님,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이후로는 오선란 대장도 무슨 일이 생기든 소장님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

“아무도, 아니 이세화 씨는 절대로 모를 테니, 이세화 씨와 아기 얼굴만 보고 오세요.”

기태정은 눈만 내리깐 채로 제 앞에 놓인 낯선 옷과 방독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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