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31)화 (131/144)
  • #128

    팔목을 두어 번 털어 보았다. 손가락을 끝을 접어 보기도 하고, 팔을 크게 돌려 가동 범위를 확인했다. 제일 약한 걸 썼는데도 약효가 돌았는지 그새 다 나았다.

    기태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예전보다 몇 가지 추가된 화려한 장식들이 움직임을 따라 차랑거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금빛으로 번쩍이는 명찰 위에 달린 소장의 상징이었다.

    정복 어깨엔 무려 별 두 개와 국화가, 옷깃이며 포켓의 위아래엔 군부와 공군을 상징하는 배지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따위 비실용적인 옷을 입고서 전투 작전을 지휘하라니. 실제 전투는 치러 본 적도 없을 새끼들한테 결정권을 주니까 이딴 걸 제복이랍시고 주문하고 앉아 있는 거다. 물론 전투복이나 활동복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계급이 계급이다 보니 요즘은 정복을 입고 나서야 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아져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오셨습니까, 소장님.”

    기태정은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준장이 아니라 소장이다. 이 계급장을 달고서 여기저기 불려 다닌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저를 부르는 호칭은 여전히 낯설었다. 다른 때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잘만 적응했는데 이번엔 뭐가 문제인 걸까. 나이가 들어서 그러나?

    실없는 생각이나 하던 기태정은 픽 웃으며 텅 빈 복도에 시선을 내던졌다. 답이 빤한 우문이었다. 끝이 살짝 늘어지는 특유의 어투로 준장님, 그렇게 불러 주던 음성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소장이라는 새로운 호칭에 익숙해져 버리면 그 언젠가도 없었던 일이 될 것만 같아서, 기태정은 그토록 바라던 별 하나를 더 달고서도 여전히 뻣뻣하게 굴었다.

    “김석철은?”

    “손 사장과 함께 가둬 두었습니다.”

    “치료제는 투여했고?”

    “예. 멀쩡해졌습니다. 가벼운 발작 증세를 보이긴 하지만, 일상적인 정도입니다.”

    애초에 발작이 온 것도 치료제로 인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해진 몸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서일 거다.

    손목이 잘리고 복부가 찢어지던 감각은 아직도 생생한데, 그 고통이 전부 거짓이라는 듯 살갗은 매끄러워지고 출혈도 뚝 멈춰 있다. 미치지 않는 쪽이 이상한 거지. 치료제 복용에 익숙한 편인 김석철도 규칙적으로 자신의 몸이 터져 나가자 반쯤 정신이 나가 울부짖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어.”

    필요한 만큼만 자고, 최소한으로 먹는다. 그래야 안 죽고 살아 움직일 수 있으니까.

    하우스의 허술한 창이 몰아치는 겨울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덜컹덜컹 흔들렸다. 조금 쌀쌀한가 싶더니 순식간에 겨울이 오고, 또 해가 바뀌었다. 까마득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헤아려 보면 이세화가 떠난 지 고작 다섯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낡은 복도는 밟는 곳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감시자만 있고 관리인은 사라진 4환의 하우스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원래도 허름했던 건물 이곳저곳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풀 같은 게 자라나기 시작했고, 천장이며 벽마다 물처럼 번진 곰팡이로 눅눅한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거기에 쇳내와 락스 냄새, 그리고 오래된 종이 특유의 꿉꿉한 냄새까지 더해져 처음 발을 들인 사람은 헛구역질부터 할 정도였다.

    그래도 장부나 모포의 퀴퀴한 냄새는 창을 열어 두면 조금 가시곤 했는데, 건물 구석마다 숨겨진 지폐 다발의 구릿한 냄새는 무슨 수를 써도 빠지질 않았다. 원래 오래 묵은 돈 냄새가 제법 지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것마저도 여길 드나들던 사람들의 새카만 욕망 탓으로 느껴졌다.

    “소장님!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김 중령의 파산 신청이 기각되었다고 합니다.”

    최 원사, 아니 최 준위가 싱글벙글한 낯으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일이 전부 마무리될 무렵, 휘하의 부관들에게도 선택지가 주어졌다. 진급보다는 완전한 개명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다들 당연하다는 듯 계급장부터 골라서 의외였다. 수용소 출신은 툭하면 체계가 개판이라고 욕먹는데, 무려 소장을 모시는 부관들의 짬밥이 형편없어서야 그런 평에 힘을 실어 주는 것 아니겠냐는 이유였다.

    평소였다면 지랄 말고 너희 살길부터 찾으라고 핀잔을 줬겠지만, 이번엔 기태정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무훈이야 곧 쌓일 테니, 그때 새 이름도 주고 더 높은 자리도 주겠노라고 무뚝뚝하게 그간의 충성을 치하해 주는 것으로 그쳤다.

    이제는 기태정도 겉으로 보이는 일에 어느 정도는 신경을 쓰는 중이었다. 그래야 세화가 다치지 않을 테니까.

    ‘처음 하우스 점거할 때 데려갔던 사람들 말이야. 선발 기준 같은 게 있었나?’

    바닷가에서 세화를 보내 준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국방부 건물에서 오선란 대장을 마주쳤는데, 무시하고 지나칠 줄 알았던 그가 난데없는 걸 물어 왔다. 곁에 사람을 두는 규준이 무엇인지, 벌은 어떻게 주는지 잘 알겠다만 포상 방식은 어떤지, 재판 끝나고서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이들이 있는지…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말이다.

    ‘당장 죽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사람들 위주로 골랐습니다.’

    ‘스파이 솎아 내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는 왜? 그렇게 판단한 이유가 있나? 다 죽이느니 입 무거운 놈들 데리고 일하는 게 훨씬 편하잖아.’

    ‘믿을 수 있는 사람 하나하나 고르고 살펴보는 것보다 바로 쓰고 치우는 쪽이 편합니다.’

    죽여도 되는 놈들이라는 게 첩자만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개중엔 엄격한 처우가 불만인지 쓸데없이 주둥이를 놀려 부대 내 사기를 떨어트리는 놈들도 있었고, 수용소 출신이라 은근히 멸시하는 놈들도 있었다.

    별 이유 없이 눈에 띄어 데려온 놈들도 있긴 했고, 이들은 큰 문제 없이 부대로 복귀했다. 멀쩡히 살아 나가는 놈들도 있어야, 제 말을 듣지 않았을 때 얼마나 괴로운 일이 생기는지 소문을 퍼트릴 것 아닌가.

    그런데 오선란 대장은 그 얘기를 듣고는 설레설레 도리질을 쳤다.

    ‘김 중령이 재판 준비하면서 자네 기준으론 하찮기 짝이 없는 사람들 데려다 휘두르는 거 봤지? 그 의사라거나, 아이 학군에 목을 맨 부모라거나…. 그리 대단치 않은 인선이라지만 본인이 필요한 순간에 언제고 그런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무시할 수 없는 무기라네.’

    ‘…….’

    ‘자네도 이제 소장이지 않은가. 어차피 제대를 미룬 거라면, 슬슬 아랫사람 다루는 방식도 바꿔 보는 걸 추천하고 싶네. 세화에게 상처 줬던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

    ‘사람이든 무기든 쓸 만큼 쓰고 바로 버리는 게 편리하긴 하지. 세화를 몰아붙였던 것도 그런 판단에서 기인한 걸 테고. 자네도 일부러 찍어 두고 그 아일 괴롭히고 싶었던 게 아니라, 김석철의 공범이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

    ‘그렇지만 그런 방식만이 정답은 아니었다는 걸 이번 기회로 깨달았을 거라 생각하네만.’

    저에게 예쁜 구석이 있어서 붙들고 충고해 주는 게 아니었다. 오선란 대장은 세화를 위해서라도 변해 보라고 했다.

    ‘세화가 어떤 더러운 말도 듣지 않았으면 한다며? 그럼 자네도 달라져야지. 내 마음 돌려 보려 애쓰는 시늉이라도 하는 쪽이 보기에 자연스럽지 않겠나? 그래야 사람들이 자네가 목적만 달성하고 세화 팽한 게 아니라고 여길 테니까.’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화와 다시 만나진 못할 테니 잘못 같은 걸 되풀이할 수조차 없겠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 늘 그랬듯 혈혈단신으로 뻗댈 수 없게 됐다.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건 그런 거였다.

    솔직히… 진심으로 오선란 대장의 충고를 이행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세화에게 잘못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그 외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까닭은 아직도 모르겠다.

    제가 너그럽게 군다고 해서 다른 놈들이 진정 탄복하는 것도 아니다. 씨발, 조금 풀어 줬다고 사람 만만하게 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5성 사람들 사이에서 세화의 취급이 형편없어지는 건 견딜 수 없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열이 올랐다. 감히 누굴 상대로 뒷말을 해.

    그래서 기태정도 조금씩 노력하는 중이었다. 밑의 사람들이 맡은 일을 잘 해내면 수고했다고 말해 주기도 하고, 까마득한 군병들에게도 적절한 포상을 지급하기도 했다. 아직은 그게 전부였으나, 그것만으로도 나 중위, 아니 나 대위는 많이 변하셨다며 감격의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약간이나마 물러진 티를 내자마자 저에게 쉰 소리나 해 대는 원로들도 참아 주고 있었다. 특히 김 중령과 척지고 있는 군부 내 인사들 혹은 기업인들과는 가끔 회동하기도 했다. 반주조차 곁들이지 않은 간단한 점심 식사 정도였지만, 예전의 기태정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상전벽해가 따로 없을 변화였다.

    “소장님, 이번에도 출정하실 겁니까?”

    “해야지.”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태정이 가장 공을 들이는 건 자신의 위명이 닳지 않도록 하는 일, 그러니까 전쟁터에서 나뒹구는 것이었다.

    일부러 험준한 고지만 골라 출정하고 있었다. 부관들조차 식겁할 무모한 작전을 짜기도 했고, 홀로 나서서는 굳이 점령할 필요가 없는 곳까지 가서 기어이 승기를 꽂아 넣고 돌아오기도 했다.

    당연히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거대한 전투기에 짓눌려 팔 한쪽이 날아갈 뻔했던 건 무용담 축에 들지도 못했다. 요즘처럼 치료제가 갖추어지지 않은 시대였다면 진작 현충원에 안장되었을 거다.

    “이 짓거리도 슬슬 한계일 것 같긴 하다만.”

    아무리 위험하다고 한들 생각 없이 총칼을 휘두를 수 있는 전쟁터가 차라리 편했다. 매뉴얼대로 전투기를 조종하고, 목표 지점에 무기를 투하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러한 저의 행보를 두고 우려의 말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젠 소장인데, 장교가 홀로 모든 걸 떠맡는 것이 보기 좋진 않다며 여기저기서 입방아를 찧어 댔다.

    기태정이 보기엔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집안 연줄로 겨우 사관 학교에 들어가 모의 전투나 몇 번 깨작여 봤을 놈들이, 작정하고 덤벼드는 저를 당해 내지 못할 거라는 건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그런 와중에 지금은 소장, 곧 중장까지 달게 되면 휘하의 병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군부 놈들은 죽여도 안 죽는 저 괴물 같은 놈이 쿠데타라도 일으키면 어쩌나 사서 걱정하기 시작한 거다.

    기태정은 고개를 꺾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외줄을 탄 것처럼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다. 누가 신호라도 내려 주면 좋겠다. 이제 네가 어떻게 날뛰어도 세화는 안전하다고, 너 같은 오물은 전부 벗고서 깨끗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그러면 아무런 미련도 없이 전부 내던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문 열겠습니다.”

    아직도 본인을 박 소위라고 칭하는 박 중위가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손 사장과 김석철이 갇힌 방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풍기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시금털털한 구린내가 코를 찔렀다.

    “일어나. 밥 먹을 시간이다.”

    바에 축 늘어져 있던 두 인영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기태정은 대부분의 전투에 김석철을 대동했다. 죽기 직전까지 몰아가다가, 정말로 위급해지면 입에 치료제를 쑤셔 넣어 주었다. 한쪽 다리는 일부러 망가진 그대로 두었지만, 손은 매번 멀쩡히 붙여 주었다.

    그러다 일을 다 마치고 귀환하면 4환의 하우스에 처박아 두고 손 사장과 끼니마다 다투게 했다. 정확히는, 싸우라는 지시를 내리진 않았다. 식판을 하나만 주고 둘이 알아서 나눠 먹으라고 했을 뿐이다. 사이좋게 나눠 먹을 수도 있는 건데, 매번 죽일 듯이 서로에게 덤벼드는 건 어디까지나 놈들의 선택이었다.

    “이거 손 사장이 세화한테 10만 원씩 빚 달아 가며 줬던 귀한 메뉴인 거 알지?”

    “으, 으으, 으….”

    “그래도 나는 공짜로 주잖아. 돈 달라는 소리 안 하고.”

    감사히 먹으라며 발로 식판 끝을 툭툭 치자, 이젠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 두 덩어리가 버둥거리며 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죽지 않게 잘 지켜보고.”

    “예. 관사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2환으로 가지.”

    “그렇지만…, 아닙니다. 모시겠습니다.”

    대번에 쓸쓸해지는 박 중위와 최 준위의 눈길을 무시하며, 기태정은 뚜벅뚜벅 발을 옮겼다.

    세화가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관사에 들르질 못했다. 중장 달 예정이니 그때 새 관사를 받겠다는 핑계나 대고서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세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관사 안을 거닐던 세화의 궤적을, 거기서 울고 웃었던 그 안쓰럽고 어여쁜 얼굴을, 기태정은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1층 응접실은 꼴이 가관이었다. 원래는 아픈 세화를 위해 이런저런 응급 기기를 들여놨던 곳인데, 그건 침실로 다 올려 두고 전체를 아기 방으로 꾸며 두었다. 발도 못 들이는 주제에 사람을 시켜 매번 깨끗하게 쓸고 닦는 제가 등신 같다는 걸 알면서도, 어차피 쓸 일이 없는 공간이라는 걸 아는데도…. 그래도 그곳을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결국 피해 버리고 만다.

    저를 보려 들지 않았던 세화가 점점 웃는 얼굴로 저를 돌아보기 시작하고, 방 안 가득 고소한 분유 냄새가 퍼지고, 기기 다루는 법을 몰라 허둥지둥하는 세화를 대신해 이것저것 손을 봐주고, 그러다 문득 예전 일이 생각나 저를 엄하게 책망하는 세화에게 잘못했다고 투정 부리듯 사과를 하는… 막연히 그런 날을 꿈꾸었던 적도 있었다. 세화의 속이 그 지경으로 망가졌다는 것도 모르고서.

    “2환 상황은?”

    “전투기 운용은 어렵지 않은 수준까지 회복되었습니다만, 화물을 실은 거대 비행정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늙은이들 곡소리 여전하겠군. 그 사람은 찾았나?”

    “아, 식당의 송 씨요? 예. 여전히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빚이 얼마라고 했더라, 그 사람.”

    박 대위에게서 액수를 들은 기태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지시를 내렸다. 송 씨에게 익명으로 복권 한 장을 선물하라는 거였다. 괜히 종잇조각이나 건네주고 끝내라는 게 아니라, 거기 적힌 번호를 무조건 1등으로 당첨시키라는 암묵적 명령이었다.

    “차라리 빚을 상환해 주시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당첨금처럼 눈먼 돈은 주변에서 욕심을 낼 수도 있고, 또 본인도 의도치 않게 다른 곳에 쓸 수도 있을 거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허튼 곳에 돈 들이붓는 것까지 어떻게 말려.”

    다소 방향은 이상했으나, 이 정도가 기태정이 베풀 수 있는 최대치의 친절이자 사죄였다.

    세화 네가 봤으면 뭐라고 했으려나…. 사람이 대체 왜 그러냐고, 이왕 도와주는 거 심술부리지 말라고 어이없어했을까? 돈으로 얼버무리지 말고 예전엔 미안했다고 제대로 사과나 하라며 참견했을 수도 있겠다.

    근데 뭐가 됐든, 세화야, 난 씨발, 안 되는 새끼인 건 분명한 것 같다. 이런 와중에도 너한테서 조금은 잘했다는 칭찬이나 듣고 싶어 하잖아.

    기태정은 받아 든 시가에 불을 붙이며 발을 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끈끈한 것이 군홧발에 미련처럼 달라붙어 쩍쩍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어떻게든 죽지도 않고, 다치면 회복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씩 밑의 사람들을 챙기고, 군부 인사들과 마음에도 없는 겉치레 인사를 나누고, 그리고 끊임없이 세화와의 기억을 덧그리면서… 기태정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멀쩡하진 못했어도, 어쨌든 숨 쉬며 살아는 있었다.

    ***

    “으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군의관? 의사?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아직도 알 수 없는 오선란 대장의 측근이 난감한 듯 턱을 쓸었다.

    “어쨌든 저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세화 씨.”

    “네.”

    “얼마 전에 있었던 혈액 검사에서 제법 유의미한 반응이 나왔어요.”

    세화는 계절에 따라 두툼해진 환자복 상의를 만지작거리며, 군의관이 띄워 준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젠 익숙해진 제 몸의 단면도였는데, 심장이며 혈관의 움직임은 척 보기에도 굼뜨기 그지없었다.

    그것뿐일까. 상담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정신과 약도 꼬박꼬박 먹고 있고, 정해진 시간마다 성실히 상담 치료에도 임하고 있는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나아지고 싶고, 달라지고도 싶다. 그것만은 분명한데 형편없이 약해진 정신머리가 의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상담 선생님은 아무 말이나 편하게 해 보라고 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뭐라도 쏟아 내고 싶은 날이 있긴 했다. 그런데 얹힌 말을 꺼내려면 그 이전에 담당의에게 설명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 우울과 걱정을 대체 어디서부터 끄집어내면 되는 걸까. 그렇게 멍청히 자리를 지키다, 시간이 끝나 일어설 때면 예전보다 더 큰 자괴감이 불쑥 자신을 덮쳐 오곤 했다. 어물거리다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새파랗게 질려서 바보처럼 엉엉 울다가 상담실을 나오는 날도 많았다.

    오늘 아침에도 회복실까지 오는 복도를 걸으면서, 세화는 제가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으면 어땠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나 했다.

    이런저런 일 다 겪어 봤더라면. 연애 같은 거 이미 몇 번 해 본 이후였다면. 조금 더 어른이 된 이후에 기태정을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들떠서 마냥 휘둘리지도 않았을 거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분이 바뀌어 어쩔 줄을 몰라 하지도 않았을 거고, 요령이 생겼으니 지금보단 덜 아프게 그와의 시간을 정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기태정과는 모든 것이 너무나 빨랐던 것 같다.

    “이세화 씨의 체질이 정상적으로 뒤바뀌려는 것 같습니다. A7의 부작용 때문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고요.”

    “…네? 그게 무슨….”

    또 깊은 바닥까지 추락하려는 세화를 붙든 것은,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였다. 정상적인… 체질이라고?

    “내 짐작이 맞다면 이제 약을 먹을 때 굳이 패치를 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지금 보이는 체내 반응은 평범한 사람들과 아주 비슷한 수준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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