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29)화 (129/144)
  • #126

    큼지막한 부피의 쇼핑백을 보며 세화가 유순히 눈을 슴벅였다.

    기태정은 발치에 물건을 내려놓은 채 잠시 망설였다. 최근 본 것 중 가장 평온한 세화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나쁜 마음을 먹게 된다. 불과 조금 전에도 세화가 홀로 침잠하는 순간을 몇 번이나 봐 놓곤,이 정도는 계속 달래 주면 나아지지 않을까… 뻔뻔하게도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 보내 주자.

    그래, 보내 주긴 할 거야. 근데…마지막이잖아.

    그러면 오늘까지는 같이 있어도 되지 않을까.

    조금만 더 걸어가면 별을 보며 잠들 수 있다는 숙박 시설이 있다고 들었다. 그 핑계를 대면서 오늘 밤만, 딱 한 번만 너를 끌어안고 잠들게 해 달라 부탁하면… 마음 약하고 착한 이세화는 허락해 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말해 볼까? 지금까지는 분위기 썩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혀끝까지 차오르는 욕심에 정말로 그 말을 내뱉을 뻔했던 기태정은, 바람결에 팔랑거리는 세화의 환자복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신파를 찍고 청승을 떠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자격이 있어야 가능한 거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제 욕심이 먼저인 저 같은 개새끼에게 그런 것이 허락될 리가.

    기태정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쉬다,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겼다.이런 식으론 끝이 나지 않을 거다. 포기하기 좋은 날 같은 게 어딨단 말인가. 하루는 이틀이, 이틀은 사흘이, 일주일이, 한 달이 될 거고, 그러다 결국은 놓지 못하겠지. 그걸 뻔히 알아서 오선란 대장에게 오늘 곧장 세화를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한 거였다.

    이러다 제 시각에 오선란 대장이 도착하면 제대로 된 설명이나 인사도 없이 세화를 보내야 한다. 해 주지 못한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안 그래도 속이 터질 것 같은 와중인데, 마지막 인사마저 망칠 순 없었다.

    멋있고 다감한 모습 같은 건 이미 글러 먹었으니, 평범하게 느껴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네가 더 아프지 않길 바라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쉴 수 있길 바란다고… 보통의 사람들이 헤어질 때 하는, 보통의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받아.”

    “이게… 뭐, 예요?”

    놀란 세화는 저도 모르게 끝이 뒤집힌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빽 울린 어린 소리에 기태정이 피식 웃었지만, 그런 걸 민망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당황스러웠다.

    기태정이 쇼핑백 안에서 꺼낸 것은 세화가 2환의 식당에서 버렸던 그 가방이었다. 배를 타러 갈 땐 자신의 행색을 감춰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쓰레기통에 넣었던 건데… 그 물건이왜 저 사람의 손에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준장님, 이거 주워서… 몰래 계속….”

    “그런 거 아니야.”

    “…그렇, 지만….”

    “왜 그런 의심을 하는 건진 알겠는데, 자세히 봐 봐.”

    일단 받아서 살펴보고 이야기하라며 기태정이 가방을 떠넘겨 주었다. 세화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가 건네는 물건을 받아 들었다.

    그가 장담했던 것처럼 자세히 들여다볼 것도 없었다. 가방의 겉과 모서리를 쓸어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제가 들고 다녔던 것과는 소재나 마감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급스러웠고 또 정교했다. 이런 좋은 재료로 이렇게나 촌스러운 디자인의 가방을 만들었다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눈에 익은 겉모양만 본뜬 거라 세밀한 부분은 차이가 날 수도 있어.”

    “…….”

    “다 낡은 걸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길래 예전부터 멀쩡한 거 새로 사 주고 싶었는데….”

    ‘비싼 걸로 한 아름 방에 들여 줬더니 그런 건 또 싫다고 삐죽댔고.’ 하며 기태정이 작게 혀를 찼다. 새삼 저를 타박하려는 건 아니고 그 나름대로 무게를 빼려 가볍게 구는 것 같았다.

    “결국 이런 거나 안겨 준다는 게 자존심이 좀 상하긴 한다만… 네가 잘 들고 다니던 거 버리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내 탓이니까.”

    “…….”

    “원래는 퇴원하고 관사로 들어오면 그때 보여 주려고 했는데….”

    기태정이 손을 뻗어 축 늘어진 가방끈을 툭 건드렸다.

    “이젠 그럴 수 없게 됐으니, 지금 줄게.”

    그럴 수 없게 됐다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선물만큼이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뭐, 여태 기태정이 건네줬던 고가의 선물 중 가장 마음에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고맙다고 하기엔 상황이 좀 묘했다. 기태정의 말마따나 가방을 버리게 된 계기에 그가 아주 연관이 없진 않았던 탓이다.

    물론 선택은 자신이 했으니 이런 것까지 꾸역꾸역 그를 원망하려는 건 아니었다. 한데 미움도 습관인지 선뜻 좋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별개의 상황이라는 걸 인지는 하고 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더는 챙겨 줄 필요가 없다는 사양도… 그야말로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았다.

    저 사람은 계속 날 아프게 했잖아. 그러니까 괜찮지 않나? 어리고 못된 생각이 삐죽삐죽 가시처럼 돋아났다.

    세화는 소금기 섞인 바람에 건조해진 눈가를 연신 문질렀다. 사실 그렇게까지 간지럽진 않았는데 자꾸만 유치하게 구는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저를 빤히 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 괜히 하는 행동이었다.

    푹푹 끓는 한숨만 삼키던 세화는, 번뜩 떠오르는 일이 있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퇴원 이후… 그 얘기를 지금껏 미뤄 두고 있었다.

    기태정과 내내 도돌이표를 그리느라 일단은 치워 두고 있던 주제가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퇴원 이후 자신의 거처였다.

    기태정은 제가 당연히 관사로 들어오리라 여기고서 아이 방까지 꾸미고 있었지만, 세화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사실 몇 차례나 의사를 명확히 하긴 했는데, 그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모르는 척하는 통에 좀처럼 진전이 되질 않고 있었다.

    저 또한 알고는 있다. 거취 문제를 제대로 매듭지으려면, 그 이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아이의 친권 문제, 그리고 기태정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일….

    알고는 있었으나 재판이 코앞이라는 핑계로 강경한 태도를 취하진 않고 있었다. 부표처럼 흔들리느라 내가 지금 왜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요즘인데, 기태정과 또 싸우고 상처받으면서, 뭔가를 쟁취할 기운도, 용기도 없었다. 그저 약속을 지켜 달라 쥐어짜듯 부탁했던 것이 그 당시 세화의 최선이었다.

    그렇지만 문제의 그 재판이 이제 대충 정리가 된 거라면… 더는 모르는 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참에 그에게 약속을 지켜 달라고 운을 떼 볼까?

    하염없이 가방끈만 만지작거리던 세화는,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준장님.”

    “알아.”

    “…저는,”

    “네가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알아.”

    “…….”

    “재판 끝났으니 정말로 그만하자고, 당신이랑 같이 살 생각 없다고… 그 말 하려는 거잖아.”

    허에 찔려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있자, ‘매번 느끼는 건데 대체 실장 자리까진 어떻게 올라갔어?’ 하며 기태정이 픽 웃었다.

    “안에 든 거 꺼내 봐.”

    뭐가 들어 있나? 슬쩍 가방을 흔들자 뭔가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느껴졌다.세화는 머뭇거리며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에 자리한 것은 손바닥만 한 최신형 태블릿이었다.

    “전 이런 건 필요 없는데….”

    “안 가져도 되니까 보고 서명만 해.”

    “서명… 이요?”

    잠금 설정이 되어 있지 않은지, 손가락이 조금 닿은 것만으로도 곧장 화면이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거기엔….

    “준… 장님.”

    세화는 큼지막하게 떠오른 글씨를 한 번에 인지할 수 없어 입속말로 몇 번이고 되짚어야 했다.

    친권 포기 각서.

    제 눈이 멀지 않은 것이라면, 분명 그리 적혀 있었다.

    “나는 서명과 제출 마쳤으니까 네가 동의만 하면 돼.”

    “…….”

    “빈칸에 서명하고 제출 버튼 누르면 다 끝나.”

    신청인의 이름 기태정, 직업은 군인, 특이 사항은 장교…. 이 서류는 지금 눈앞의 남자가 적은 것이 틀림없었다. 세화는 얼떨떨한 낯으로 태블릿 화면 위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다고 진위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패를 더듬던 습관대로 저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3점 내기했던 거, 그런 약속… 지키고 싶지 않았어. 내 성격 알잖아.”

    “…….”

    “네 상태도 처음보다는 나아지는 것 같았고, 심리 상담도 곧 시작한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달라지겠지, 결국은 나 받아 주겠지, 그렇게 끝까지 모르는 척 버텨 보려고 했어. 그런데….”

    기태정은 세화의 얼굴을 비낀 채 아무 곳에나 시선을 주었다. 안온하게 내려앉은 어둠 속, 조명과 어우러진 주홍빛 불티가 타닥타닥 작게 튀었다. 언제 봐도 아름답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남자의 얼굴 위로 갖가지 감정이 불꽃처럼 훅 피어올랐다.

    “그런데 내가 나의 권리와 존재를 전부 지우면, 너와 아이를 깨끗하게 포기하면… 너희 두 사람은 오선란 대장의 유일한 혈육이 돼.”

    “…….”

    “아이가 실험체처럼 논의될 일도, 네가 하층민이라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일도 없게 되는 거지. 나야 내 가슴팍에 단 계급장 빼곤 아무것도 없다지만 오선란 대장을, 유서 깊은 명문가를 적으로 돌리는 건 꺼림칙한 일일 테니까.”

    “…….”

    “지금이야 다들 정신 못 차리고서 개소리하는 중이긴 한데… 곧 깨닫게 될 거야, 오선란 대장 말마따나.”

    고집스레 모닥불만 응시하던 기태정이 드디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태블릿을 쥔 세화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지금, 기태정이 정말로… 친권을 포기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아이가 혹시라도 실험 대상이 될까 봐, 혹은 그 비슷한 소리가 나오는 걸 막아 주기 위해서? 저 남자가 정말 그 이유로 물러서는 거라고?

    “친권을… 다 포기하시면, 그렇게 되면, 준장님.”

    “…….”

    “제가 준장님께, 매달릴 이유가… 하나도 없게 돼요.”

    “…….”

    “지금처럼, 준장님 곁에서… 이렇게, 버티고 있을 이유가… 사라져요.”

    “…….”

    “그거 다 알고, 하신 거… 맞으세요?”

    아이의 성씨 하나 마음대로 고칠 수 없어서 꾸역꾸역 기태정의 곁에 머물렀던 거였다. 혹여나 그가 심술을 부려 아이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마음 졸이면서도, 저와 이 사람은 무슨 사이인가, 이런 관계를 대체 뭐라고 부르는 건가…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해림이의 친권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었고, 오선란의 양자라는 좋은 방패까지 생겼으니 기태정은 이제 그 무엇으로도 저를 강제할 수 없게 됐다.

    좀처럼 믿기질 않는 게 당연했다. 내기를 들먹이며 약속을 지켜 달라 종용하긴 했어도 마음 깊은 곳으론 큰 기대가 없었다. 제 의지가 이 정도라고 표명하는 정도로 그치고, 재판 이후에 다시 방법을 찾아보자고…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었는데.

    이대로 이 사람과 이렇게 끝… 이라고?

    “내가 답이 없는 꼴통이라, 오선란 대장이 금쪽같은 내 새끼 절대 못 넘겨준다고 반대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물러나는 걸로 이야기 맞춰 놨어.”

    “…….”

    “당분간 나랑 어떻게 된 거냐고 귀찮게 하는 사람들 생겨도 그러려니 해. 뭐, 설마 너한테 함부로 말 붙이는 정신 나간 새끼들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세화는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 친권 포기 각서만 붙들고 있었다. 별안간 눈앞에 펼쳐진 광고 같은 해변도 그렇고, 자신을 놔주겠다는 걸 별일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말을 하는 기태정도 그렇고… 모든 게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곧 오선란 대장이 도착할 거야.”

    시계를 확인한 기태정이 다시 쇼핑백 안을 뒤적여 신발 한 켤레를 꺼냈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건… 예전에 제가 울면서 집어 던졌던 아기 신발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 회복실에 머물러야겠지만, 어차피 난 오래 자리 비울 예정이니까 마주칠 걱정 같은 거 하지 말고 편히 쉬어.”

    “오래… 자리를 비운다는 게….”

    “실컷 쉬었으니 이제 원래 하던 일 하러 가야지.”

    그래도 공군 장교인데. 국방부 건물도, 그의 관사도 5성 안에 있는데… 무슨 수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 자신하는 거지?

    뭔가… 이상했다. 그의 말에 어긋나는 구석은 딱히 없었지만, 뭔가가속을 갉작이는 것 같은 찜찜함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세화는 괜히 부산스레 눈을 굴리다 조심스레 기태정을 불렀다.

    “준장님, 혹시… 그 일이라는 거,”

    “별 하나 더 달게 됐어.”

    기태정은 듣지 못한 듯 말을 툭 자르며,몸을 숙여 세화가 신고 있던 병원용 실내화를 벗겨 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한쪽 무릎을 꿇었다.

    “준장님…?”

    의아함과 놀라움이 섞인 세화의 부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태정은 모래가 묻은 세화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로 덥석 올려 두었다.

    “나 이제 준장 아니고 소장이야.”

    “…….”

    “1년 후에는 중장 달 예정이고. 그래서 앞으로 할 일이 많아.”

    기태정은 발에 엉겨 붙은 반짝이는 모래알을 전부 치워 주고선, 준비했던 신발을 신겨 주었다. 고작 이런 일에 장전이라도 하듯 열과 성을 다해 집중하고 있어서 감히 말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왜. 내 얼굴 계속 보고 싶어?”

    신발은 맞춤 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제 발에 꼭 들어맞았다. 단순히 치수만 맞는 게 아니라, 이렇게 편하게 착 붙는 신발은 어디서도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보기 싫어도 보게 될 거야, 뉴스에 자주 나오게 될 테니까.”

    “…….”

    “네가 내 얼굴 까먹지도 못하게, 앞으론 귀찮고 좆같아도 여기저기 열심히 얼굴 내비치려고.”

    이상하다. 지금 좀, 확실히, 뭔가 이상… 해.

    세화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가슴께를 꾹 움켜쥐었다. 어찌 보면 그토록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모난 돌이라도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아서, 저도 모르게 어깨를 크게 들썩이게 됐다. 그를 아직도 좋아하는 건 절대로 아닌데 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쓰렸다.

    “그래, 어이없지?”

    “…….”

    “이 와중에도 이딴 생각밖에 못 하는 나 같은 새끼, 네가 최선을 다해서 좋아해 준 거… 그것도 잘 알아.”

    한참이나 자신의 발만 응시하던 기태정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보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기태정은….

    “다시는 못된 말, 못된 짓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봐 달라고 하고 싶은데….”

    “…….”

    “그건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 같고….”

    신발 앞 코를 몇 번 가볍게 주무르던 기태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꿇고 있던 쪽의 무릎에서 모래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어찌나 입자가 고운지, 옷감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와르르 쓸려 내려가 버렸다.

    기태정은 진득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망막에 박제해 영영 잊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짙은 시선을 받아 내던 세화는, 다 타 버려 재가 되어 버린 줄 알았던 언젠가를 불현듯 떠올렸다.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에서, 같은 칸에 발을 맞추고 서서, 언젠가 함께 저 바다를 보러 가자고 속삭이던 기태정의 눈동자가 꼭 이렇게 일렁였는데….

    “준, 장님….”

    “그동안 미안했어, 세화야.”

    “…….”

    “아주 많이.”

    한때 세화의 세상이었던 커다란 손이 속절없이 나부끼는 머리칼을 부드러이 쓸어 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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