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28)화 (128/144)
  • #125

    “바다… 요?”

    “그래, 바다.”

    아니다. 산뜻하다, 기보다는… 후련하고 또 허탈해 보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기태정은 모든 게 끝나 속이 시원한 사람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전부 내려놓아 더는 어떠한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 이 시간에… 바다를, 왜….”

    “5성 사람들만 갈 수 있는 바닷가가 있어. 거긴 밝고 환해서 괜찮아.”

    나라님이 돈 덕지덕지 발라서 꾸며 놓은 곳이라 안전하기도 하다며 기태정이 거듭 강조했다.

    왜 저렇게 최선을 다해 가려는 곳의 화려함과 무해함을 어필하는 것일까, 어울리지도 않게. 의아함에 고개를 모로 기울이던 세화는 뒤늦게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밤 중의 바다…. 한 박자 늦게 2환의 항구에서 벌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세화는 그런 자신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물론 기태정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몸짓이긴 했다.

    생애 다시 없을 끔찍한 기억인 건 틀림없는데, 과연 저에게 지난 시간을 아파할 자격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당장 오늘도 아기는, 해림이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끌려가니 마니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무리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가물가물해진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거다.

    핑곗거리야 많았다. 그 이후로도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던 터라, 잔뜩 좁아진 시야론 밀려오는 당장의 일을 소화하기도 급급했다.

    충격으로 쓰러져 큰 수술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잠시 기억을 잃었고, 다행히 정신을 차렸더니 이번엔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다친 곳은 다 나았다는데 아직도 똑바로 걸을 수 없다. 어찌어찌 간신히 말은 할 수 있게 됐으나 구사하는 문장은 여전히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이 와중에 오선란 대장은 저를 양자로 입적시켰다. 1성 주민증을 갖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천것이었는데, 이젠 무려 5성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태정은 다시 잘해 보자며 자꾸만 저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세화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는 변명을 속으로 꿍얼꿍얼 늘어놓았다. 벅차고 어려운 일이 마를 새도 없이 새로이 덧입혀져서, 이전에 겪었던 불행까지 계속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벌써 괜찮아져선 안 될 것 같아서, 세화는 저 멀리 미뤄 두었던 상흔 같은 우울을 힘껏 긁어내렸다. 기껏 낳은 아이도 지켜 줄 수 없는 주제에 뭘 벌써 괜찮아지고 싶어 해. 그렇게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은 제 마음을, 살고 싶다고 발버둥 치는 뻔뻔한 자신의 무의식을 엄히 꾸짖었다.

    “가자. 너 바다 좋아하잖아, 아이 이름을 해림이라고 지을 정도로.”

    “…….”

    “예전에 백화점에서 봤던 디스플레이 기억하지? 그 바닷가 갈 거야.”

    세화는 말없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백화점에서 봤던 바닷가?그거야말로 너무나 까마득한 일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재판 다 끝나면 같이 보러 가기로 했었잖아.”

    따뜻했던 순간을 낯설어하는 세화의 얼굴을 보며 기태정은 한 뜸 숨을 죽였다. 그러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날 에스컬레이터에 설치된 실감 나는 디스플레이를 보며 우리가 무슨 한담을 나누었는지, 관사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휴가 계획을 세웠었는지, 그때 네가 무엇을 궁금해했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또 얼마나 환하게 웃었는지….

    “가면서 재판 어떻게 됐는지 말해 줄게. …같이 가자.”

    차근차근 세화를 설득하려던 기태정은 결국 방향을 우회해야 했다. 달콤했던 한때 같은 건 더는 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다 꺾이고 부러져 퀭해진 눈동자, 그 밑바닥에 남은 아주 약간의 감정은 오직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몇 차례 눈을 깜빡이던 세화는 그제야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기태정은 소파에 걸쳐 두었던 두툼한 카디건을 세화의 마른 어깨에 둘러 주고, 헐렁한 환자복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하얀 손끝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

    그렇게 몇 발자국 걷고 나서야 기태정은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렸다.

    “우리 손잡고 걸었던 적 있었나?”

    “…….”

    “없었지, 아마.”

    걸음이 느린 세화와 발을 맞춰 나란히 걷는 법까진 겨우 익혔지만, 이런 식으로 손을 잡고 느긋하게 걸어 본 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세화를 어디 좋은 곳에 데리고 가 주지도 않았다.

    안에 가둬 두다가 과일 쪼가리 같은 걸 사러 갈 때나 슬쩍 풀어 줬다. 4환 하우스 코앞에 있던 주차장이나 관사의 마당에서 짧게 산책하는 일. 그게 세화에게 허락되었던 바깥나들이의 전부였다.

    세화의 손을 붙들었던 순간은 대부분 제 성질을 이기지 못했을 때였다. 어딘가로 끌고 가거나 혹은 붙들고 씹질이나 할 때. 그도 아니면 제 입맞춤을 받아들이면서, 진심으로 저에게 순종하는지 확인하고 싶을 때…. 그럴 때가 아니고선 손을 내밀어 주지도 않았다.

    이게 뭐라고. 손 좀 잡아 주는 게 대체 뭐라고…. 고작 이만큼 체온이 닿는 것만으로도 마음까지 따뜻해질 수 있었는데 왜 그땐 미처 알지 못했을까.

    기태정은 자신의 손등을 간질이는 세화의 소맷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쓰게 웃었다. 잘못한 것도 많고, 몰라서 못 해 줬던 것도 많고…. 이 와중에도 저는 세화와 달리 이기적인 사람이라,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잘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

    “큰일이네.”

    “…네?”

    “아니야, 가자.”

    기태정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세화를 이끌었다. 오선란 대장과 약속한 시각이 곧이었다. 이후로 다시는 세화와 아이 앞에 나타나지 않겠노라 다짐했으니, 그때까지 한 번이라도 더 이 얼굴을 눈에 담고 싶었다.

    더는 내보여선 안 될 아쉬움과 미련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

    5성의 포트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숨겨진 루트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이 바닷가였다. 물론 설정값을 알고 있다고 한들 군부에서 지급한 물건으로 스캔하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5성 시민 중에서도 허락받은 일부만 올 수 있다는 해변은, 예쁘긴 참 예뻤다. 최근 무엇에도 감흥을 보이지 않았던 세화조차 놀라서 차창 너머로 목을 빼고 있었을 정도였다.

    기태정은 인근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 둔 채 백사장으로 세화를 이끌었다.

    세화는 걸음마를 막 뗀 아이처럼 어설프게 걸음을 옮겼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이 신기한지 한 걸음 걷다 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또 한 걸음 내딛다 슬쩍 발을 들어 신발 밑창을 살펴보기도 하고…. 세상 밖을 처음 구경하는 갓 난 동물인 양 열심히도 뽈뽈거리며 모래밭을 거닐었다.

    아,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밝은 세화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깃털 같은 게 심장을 자꾸만 간질이는 기분이라 기태정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기분이 상했는지 세화는 우뚝 멈추어 서선 뚱한 낯으로 발가락 끝만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그 감촉마저 마음에 들었는지 이내 순하게 풀어진 얼굴을 하고선 다시 뒤뚱뒤뚱 이곳저곳에 발자국을 찍고 다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세화와 느릿느릿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다 져 버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공군 훈련 기지라거나 세화가 몸담고 있던 하우스에선 이 시간쯤 되면 벌겋고 검은 낙조가 드리워졌다. 갈퀴처럼 뻗은 황혼에 건물과 골목이 죄 잡아먹히고,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워지곤 한다.

    그런데 이곳의 해거름은 그저 어여쁘기만 했다. 둥실둥실 흘러가는 구름은 머들러로 휘저은 휘핑크림 같았고, 해가 막 진 하늘은 분홍빛과 보랏빛이 섞인 오묘한 색이다. 언젠가 세화에게 건네주었던 디저트 가게의 포장 상자 같은 풍경이었다.

    일몰 이후에도 차질없이 휴양을 즐길 수 있도록 섬세하게 배치한 갖가지 조명들이 순차적으로 켜지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어두워진대도 눈앞의 경치를 감상하는 데는 조금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저녁노을을 고스란히 부어 버린 것 같은 바다의 색은 아름다웠고… 한편으론 우스웠다. 고개만 들면 누구나 볼 수 있는 해와 구름마저 사실은 공평하지 않다. 부와 권력을 쥔 사람들을 위한 하늘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기태정은 그 정점에 서 보겠다고 평생을 발버둥 쳐 왔다. 처음엔 죽기 싫어서 그랬고, 그 이후론…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져 보겠다며 무엇에건 손속을 두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군부의 탓만 할 수도 없게 됐다. 평생 다시 없을 소중한 사람을 가둬 두고, 울리고, 손조차 잡아 주지 않았던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잘못이었다.

    “2환 화재의 책임을 김씨 집안에서 전적으로 지기로 하고, 대신 김석철은 계급장 떼고 내 밑으로 들어오기로 했어.”

    “…그게 무슨….”

    “2환 복구와 손해 배상 처리에 가진 돈 다 퍼붓게 되더라도 자식새끼의 불명예 제대나 수감소 수용 같은 멍에는 지지 않겠다는 뜻이지, 김씨 집안에서.”

    “…그걸, 받아들이겠다고 했어요? 김 중령이라는 사람이?”

    “받아들이기만 해? 좋아했어. 내가 김석철 그 새끼를 어떻게 굴리다 죽여도 군인으로서 죽었다는 명예는 남을 테니까.”

    “그렇지만… 김 소위는 자기 아들이잖아요.”

    “친아들을 잃는 것보다상류 사회에서 우스운 꼴이 되는 게 견디기 어려웠을 거야. 길게 봤을 때, 돈이야 또 벌면 되지만 한번 붙은 불명예의 꼬리표는 떼어 낼 수 없을 거란 계산도 있었을 테고.”

    “…….”

    “그 정도 집안에서 계급장을 반납한 불미스러운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더더욱 자존심이 상했겠지. 머릿속 꽃밭인 김석철 소위야 어떻게든 복직이 될 거라고 믿고 사고를 친 거겠지만.”

    세화는 충격을 받은 듯 멀거니 기태정을 바라보았다. 하긴, 아직 개월 수도 채우지 못한 인큐베이터 속의 아이를 지켜 주겠답시고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려 했던 그는 5성 사람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배는 안 고프고?”

    끼니 같은 건 관심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해 둔 것이 있어 세화를 데리고 조금 더 걸어갔다. 옹기종기 심긴 야자수를 지나자, 하얀 캐노피가 드리워진 거대한 카바나가 나타났다.

    “나도 딱히 허기가 지진 않는데, 바닷가 오면 이런 거 다 한다고 그래서.”

    “…….”

    “억지로 먹으라고 안 할 테니까 그냥 분위기만 내는 거다, 그렇게 생각해.”

    카바나 내부에는 푹신한 러그가 깔려 있었고, 온도 조절 장치까지 갖추어져 있어 생각 이상으로 쾌적했다. 미니바와 안락한 가구들, 온갖 신기한 첨단 시설이 즐비했으나 정작 세화의 눈길을 끈 것은 디귿 모양으로 오목하게 파인 카바나 입구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이었다.

    기태정은 간이 의자를 끌어와 세화를 불 앞에 앉히고, 그릴 위에 이런저런 음식들을 올렸다. 시간이 촉박해 큰 기대는 없었는데 얼추 구색은 갖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양념을 바른 고기며 새우 꼬치, 깨끗하게 다듬은 채소나 과일 같은 것이 쉴 새 없이 불판 위로 올라왔다. 파인애플에 설탕과 시나몬 가루를 뿌려 굽기 시작했을 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불신의 눈초리를 하던 세화는, 풍미가 더해진 독특한 단맛이 신기했는지 맛을 보고는눈을 커다랗게 떴다. 폭신하게 녹은 마시멜로를 손에 쥐여 주자,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그건 반 이상이나 먹었다.

    기태정은 입가에 설탕 가루를 묻힌 세화를 한참이나 눈길로 더듬었다. 신기한 일이다. 분명 일자로 굳은 입매를 하고 있는데도 웃고 있는 게 느껴진다는 게, 그리고 고작 이런 걸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하긴, 원래 너는 아주 작은 일에도 행복해하던 사람이었지.

    하지만그러다가도 세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보여 주고 먹여 주는 것에 조금은 관심을 보이다가도, 이런 것에 들뜨는 스스로가 한심한지 자꾸만 목을 툭 떨구며 금세 우울한 낯을 했다.

    기태정은 그 서글프고 예쁜 눈썹에 입 맞춰 주고 싶었다.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마른 얼굴을 내도록 쓸어 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체리 한 알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던 이세화는, 이제 그 어떤 기쁨도 느낄 자격이 없다는 듯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굴려고 한다.

    그간 겪었던 저와의 일로무릎이 꺾인 것도 있지만, 자신의 출신 때문에 사람들에게 아이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게, 실제로 어찌 되든 그런 논의가 오갈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세화를 도무지 웃을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았다.

    기태정은 볼을 우물거리며 불 앞에서 손을 쪼이는 세화의 옆모습을 흘끔 훔쳐보았다. 부담스러워할 게 뻔해서 계속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새 조금 자란 앞머리가 바람에 살랑이고, 동그란 이마와 뺨 위로 반사된 물빛이 반짝였다.벌써 가을의 초입인지라 저녁에는 제법 쌀쌀했다.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처음 세화를 만났던 계절이 성큼 다가올 것만 같았다.

    “이세화.”

    어쩐지 속 깊은 곳부터 조여드는 기분이 들어, 기태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줄 게… 있어.”

    카바나 입구에 슬쩍 놓인 쇼핑백을 집어 들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입을 떼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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