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무슨 의도로 그런 걸 묻는 건가?”
오선란의 표정이 한 박자 늦게 굳어졌다. 기태정의 목소리가 하도 덤덤해서 처음엔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
“제가 없더라도 앞으로 세화가 그 어떤 더러운 말도 듣지 않았으면, 그리고 안전했으면 합니다.”
“안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더러운 말이라니?”
“조금 전 재판장에서 원로들이 입에 담았던… 예를 들면 세화의 출신을 들먹인다거나, 아이를 실험 대상으로 삼자는 그런 이야기들이 이후론 세화의 귀에 들어갈 일이 없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만 확실하다면 놓아주겠다고? 세화와 아이를?”
“예.”
협상에 임할 때의 기태정이 대체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목소리를 내고 또 어떤 제스처를 자주 취하는지 이미 겪어 본 바 있다. 회의나 재판에선 지켜보는 사람이 다 무안해질 정도로 잘난 낯을 빛내며 유들거렸으나, 일전에 친권 포기 각서를 내밀었던 순간처럼 목격자가 없을 땐 입에 칼을 물고서 덤벼들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난 당장이라도 당신을 썰고 찢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기태정은, 뭐랄까.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여태 본 것 중 가장 날것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어찌 보면 이제야 제 나이에 걸맞은 청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재판 때문에 다들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차차 깨닫게 될 걸세. 내 대에서 끊길 줄 알았던 오씨 가문의 명맥을 이을 사람이 나타났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세화의 5성 편입은 마쳤으니, 아이의 등록지 문제만 해결하면 적어도 앞에선 더는 허튼소린 못 하겠지.”
기태정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이제 세화는 오선란 대장의 유일한 혈육이다. 표면적인 것만 따져 봐도 저보다는 오선란 대장 곁에 머무르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제가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마르지 않는 재화 정도일 텐데, 그건 오선란 대장 또한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었다. 일신의 안전 같은 건 준장인 제가 걱정할 계제가 아닐 거고… 오히려 오선란 대장은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라는, 기태정으로선 손에 넣기 요원한 명예라는 왕관까지 세화의 머리에 씌워 줄 수 있다.
무작정 세화를 제 옆에 주저앉히려고 했던 건 생각할수록 못난 짓이었고 또 못 할 짓이었다.
“그럼 이대로 재판 마무리 짓겠습니다.”
“뭐라고? 어떻게?”
“약물 제조보다는 2환 전소로 인한 손해 배상 청구 쪽으로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따로 자리를 마련하라고 하되, 저는 이후로 뒤에서 피해자들, 정확히는 잿밥에 관심이 있는 승냥이 떼들을 지원해 줄 생각입니다. 되도록 오래오래 김 중령이 골머리를 앓도록, 그 과정에서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그 돈을 전부 잃을 수 있게 유도하려 합니다.”
물론 최후엔 비참하고 지저분한 몰골로 눈을 감게 만들 작정이지만, 그런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떠벌릴 필욘 없어 보였다. 오선란 대장은 생각에 잠긴 채 가볍게 턱을 쓸었다.
“김 소위는? 약물 제조 관련한 일은 처분 없이 넘어갈 건가?”
“그럴 순 없죠. 제가 하나 정도를 양보하면 배심원들도 그 새끼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양보하겠다니? 무엇을?”
“제대를 미루려고 합니다.”
흐트러진 정복을 여미며 기태정이 담담하게 응수했다.
오선란은 잠시 말문이 막혀 으음, 하고 길게 목을 울렸다. 결국 이 모든 일은 기태정이 군복을 벗고 싶어서 짠 판이었다. 그가 살육 병기 취급을 얼마나 지긋지긋해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기태정은 군부 인사들에게 엿을 먹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고 들었고, 내내 국외를 돌았던 오선란 또한 그 무용담을 들어 본 적 있을 정도다. 그런데….
“제대를… 포기하겠다고? 세화 때문에?”
지금껏 가장 절실히 바라 왔을 목표를 여기서 이렇게 놓겠다고? 그것도 이루어지기 직전에? 믿기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아뇨, 미루는 겁니다. 말뚝 박을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기태정은 불편한 듯 목울대를 몇 번 쓸며 자꾸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가시라도 박힌 듯 침을 크게 삼키고는, 예의 그 무표정한 낯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제가 이 시점에서 곧바로 계급장을 던져 버리면, 남겨진 세화는 더더욱 처지가 곤란해질 겁니다.”
“…….”
“씹새끼들이 개소리하는 거 안 듣게 해 주려고 기껏 놔줬는데, 저한테 이용만 당하고 버려졌다는 말이 돌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
“저는 늘 그랬듯 전쟁터로 나가고, 대장님께서는 여기 남아 수용소 출신과 만나게 둘 순 없어서 반대했다고 하시는 쪽이 차라리 낫습니다.”
그래서, 하며 기태정이 주의를 환기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앞서보다 가벼운 태도였다.
“우선은 재판부터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날뛸 테니 대장님께서 중재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원로들도 반발이 적을 거고… 여러모로 그쪽이 가장 보기 좋은 그림이긴 할 겁니다.”
물 흐르듯 본인이 생각했던 바를 줄줄 늘어놓던 기태정은 끝에 이르러서야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깐이었지만 깊이, 질끈 감은 그림 같은 그의 눈매는 금방이라도 다 닳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제법 상식적으로 구는 기태정은 낯설었으나, 지금 그가 짓는 표정만큼은 익숙했다. 더는 이진우의 흔적을 더듬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때. 다시는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오선란 역시 저런 낯을 하고 살았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살아만 있을 때 자신의 몰골이 딱 저랬었다.
“그러니, 제가 아닌 세화를 위해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기태정이 어색하게 묵례했다. 하급자로서 마지못해 경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태정이라는 한 사람으로서 올리는 부탁이었다. 물론 이런 건 태어나서 처음 해 본다는 듯 뻣뻣한 태도긴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남에게 고개까지 숙여 가며 요청하는 건 이번이 정말로 처음일 거다.
오선란은 목석처럼 구는 기태정이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체감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듯 굴었어도 기태정 또한 한참이나 어렸다. 사랑을 받아 본 적도 배워 본 적도 없는, 그저 멀거니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꼴이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그 부분은 걱정할 것 없네.”
잠시 머뭇거리던 오선란은 어색한 손짓으로 기태정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물론 그가 세화에게 벌인 일은 여전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로 사랑을 잃고, 생이 통째로 찢겨 나가는 것 같은 그 상실감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태정을 아주 조금은 가엽게 여겨 주기로 했다.
***
“뭐? 따로 고발장을 쓰라고? 이 자리에서 한 번에 마무리 짓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입은 손해는 계속되고 있다고. 이자는 나가고 있는데 수익은 들어오는 게 없잖아, 2환 창고 다 타 버리는 바람에!”
재판장으로 돌아오자마자 기태정은 가장 민감한 주제부터 꺼내 들었다. 평생 쓰고도 남을 돈줄을 쥐고 있으면서도 늙은이들은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맹렬히 몸부림을 쳤다.
“엄밀히 따지자면 전 2환에서 일어난 화재로 재산상 손해를 입진 않았습니다. 각자 알아서 하셨어야 할 일을 제가 여태 도와드렸던 거지요.”
“야, 기태정!”
“야, 기태정? 지금 절 그렇게 불렀습니까? 하 대령?”
살벌한 대꾸에 기태정에게 삿대질을 하던 사내가 슬그머니 검지를 구부렸다. 평소엔 남들이 자길 뭐라고 부르든 신경도 안 썼으면서 갑자기 눈에 시퍼렇게 불을 켜고 지랄이었다.
“곧 중장, 못해도 소장은 달게 될 몸이니 그딴 식으로 막 부르는 건 좀 삼가시죠. 내가 너더러 그 나이 처먹고 똥배짱이나 부린다고 까면 기분 더러울 거잖아요.”
“뭐, 뭐?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누구 맘대로 별을 더 달아!”
“제가 고발장 쓰면서 무슨 조건 내걸었는지 잊으신 건 아닐 테고…. 다시 읊어 드릴까요?”
김 중령을 비롯한 원로들은 기가 막혀 허허 웃기만 했다. 한낱 하층민 좀 건드렸다고 기태정은 잔뜩 독이 올라 날뛰고 있었다. 천하의 기태정이 말이다.
“기태정 준장,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할수록 그 사람이 내 약점이라고 사방팔방 광고하는 것밖에 안 돼.”
“제 유일한 약점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요?”
“왜냐니? 약점이 무슨 뜻인지 모르나?”
“예, 약점은 맞습니다만 그 요소가 저에게 불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말입니다.”
기태정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말도 지지리도 안 듣던 새끼한테 처음으로 약한 구석이 생겼다는데, 나 같으면 하층민 타령 같은 건 집어치우고 그 사람에게 잘해 줄 생각부터 하겠습니다. 수용소 출신인 저 같은 놈한테 귀한 자식새끼 내주는 것보다 훨씬 더 깔끔하게 라인 다질 기회 아닙니까? 심지어 ‘그 하층민’은 오선란 대장님의 유일한 양자이기까지 한데, 대체 뭘 믿고 그리 쉽게 입에 올리는 건지 제가 다 궁금해지는군요.”
직전까지 핏대를 세워 가며 이세화를 두둔하던 오선란 대장의 모습이 그제야 떠올랐는지, 원로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뒷배가 없는 기태정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오선란 대장은…. 그의 영향력 자체는 많이 약해졌다곤 하나, 오씨 가문은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는 명문가였다.
“빨리 끝내고 싶으니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김 중령님. 2환 화재로 인한 손해 배상 부분은 제 고발장에서 뺄 테니 피해 보신 분들과 개별 합의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코웃음이 절로 나오는 어린애의 생떼였다. 김 중령으로선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화재 사건은 명백히 김석철의 실책이었다. 그런 와중에 별개의 재판이 열리고 소송도 시작되고 한다면…. 진행되는 동안 방치된 자산들의 감가까지 보상해 줘야 할 것이다. 이 일과 엮여서, 하우스 범죄자들이 짠 함정이었다고 우겨 대는 것이 제일 나았다.
그러나 곧장 이어진 기태정의 제안은 이전처럼 마냥 뻗댈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대신 김 소위는 제 밑으로 받아 주겠습니다.”
“…받아 주겠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소위라는 계급장은 떼고 제 밑으로 보내십시오. 당분간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 몫은 해내는 군부의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게 잘 지도해 보겠습니다.”
전쟁터를, 다른 사람도 아닌 기태정이 끌고 다니겠다니. 사지에서 실컷 가지고 놀다가 죽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김석철은 육군이었다. 원래 딱히 하는 일이 없긴 했어도 분야가 전혀 다른 공군의 업무를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눈 감기 전엔 자신의 힘으로 소위 계급장 다시 달 수 있을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군공 쌓는 건 자신 있으니, 믿어 보시죠.”
“뭐가 어쩌고 어째?”
구석에 찌그러져 씨근덕거리던 김 소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찌질한 욕지거리나 주절주절 늘어놓는 한심한 자식놈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기며, 김 중령은 차분히 머릿속 저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기태정은, 돈과 명예 중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였다. 2환 화재 사건은 알아서 해결하는 대신 김석철의 처벌은 최소한으로 하겠다, 라…. 사형 구형을 요구했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한발 물러서 준 거긴 하고, 무엇보다 이 제안대로라면 명문가 최초의 불명예 제대나 수용소 수감이라는 오욕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아버지!”
김 중령이 긍정적인 의사를 보이자, 김석철이 핏발이 잔뜩 선 눈으로 비명을 질러 댔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시끄럽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저 새끼 말을 믿으세요? 저 죽으면 다음은 누구일 것 같습니까? 우리 집안 다 날아가는 겁니다! 돈도 뺏기고 사람도 다 죽을 게 뻔한데…!”
골치 아프다는 듯 김 중령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면서 뒤에 선 교관들에게 슬쩍 고갯짓했다. 불과 조금 전 매조를 때려죽였던 그놈들이었다.
친아들에게도 거침없이 매타작을 지시하는 냉정한 모습을 보며, 기태정은 여기서 재판이, 아니 거래가 마무리되리라 짐작했다.
전 재산을 잃고 알거지가 되어도 재기를 노릴 방법이 없진 않다. 그러나 한 번 찍힌 불명예의 낙인은 억만금을 쏟아부어도 회복할 수 없다. 가문의 위세에 취해 있던 놈들이니 당연히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여겼다. 추후 세화를 이용해 저나 오선란 대장에게 다른 협상을 제안하면 된다는 계산도 물론 있었을 거고….
“아무리 그래도 소위까지 단 아들놈을 사람들 앞에서 그리 두들겨 패서 되겠어? 적당히 하도록 하고… 그래서 기태정 준장이 처음 요구한 내용이 뭐였나? 특진과 원로로서의 위치 보장이었던가?”
오선란 대장이 슬쩍 끼어들자 사람들이 다시 왁왁거리기 시작했다. 더는 기태정에게 돌아갈 포상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던 심정이었는데, 김씨 가문에 직접 맞서 자신들의 이익을 뜯어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기태정은 그 소란의 한가운데에 부표처럼 서 있었다.
임관을 마친 후 처음 군사 재판을 참관했던 날부터, 차곡차곡 계급을 높여 좌석의 중심까지 나아가던 그 모든 순간이 몇 배속으로 재생한 것처럼 빠르게 스쳐 갔다.
“…미친 새끼.”
기태정은 이 와중에도 한 번만 더 세화를 붙들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를 차게 비웃었다.
이제 정말로 끝이었다. 하우스를 점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이번 작전은, 아니 작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일은, 결과적으론 기태정의 처음 계획과 큰 차이 없이 진행되었다. 애매하긴 하나마 포상 또한 확실시되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것들을 손에 넣기 직전이다. 계급 특진, 더 좋은 관사, 더 많은 부관과 수하들, 제대 후 주어질 원로의 특권…. 수용소 출신의 인간 병기가 이 자리까지 오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다. 통쾌한 일이다. 그러니 마음껏 기뻐해야 한다.
군복은 아직 벗지 못했지만, 그래도 제대일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자기들을 수용소 동기라고 우겨 대는 나머지 놈들에게도 원로 자리나 만들어 줘야겠다. 김 중령네 부자는 사지 멀쩡히 달린 채로 죽지 못하게 서서히 몰아갈 거고, 그리고….
“…아.”
기태정은 텅 빈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질끈 눈을 감았다. 문득 목을 조이고 있는 정복의 타이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결국 해냈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랫동안 바라 왔던 걸 잔뜩 움켜쥐고 있는 이 손안에, 모든 이들이 바라 마지않을 영화를 전부 거머쥔 이 순간에… 세화는 없었다.
오직 세화만 없었다.
***
정신을 차려 보니 익숙한 침대 위였다. 세화는 옅게 물막이 드리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는 일어나려 하자마자 커다란 손이 뒤통수와 등을 감싸 준 덕에 수월하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누구인지 살펴볼 것도, 누구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의무실에서 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던데.”
곁에서 내내 자신이 눈을 뜨길 기다렸을, 기태정이었다.
“다녀와서 뇌 검사 다시 한번 더 받아. 말했지? 네 몸 지금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고.”
고리처럼 구부린 남자의 손가락이 이마와 콧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갔다.
“어딜… 다녀와요?”
아아, 하며 기태정이 스툴에서 일어섰다.
“바다, 보러 가자.”
돌아보는 그의 얼굴이 유독 산뜻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