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지켜보는 원로들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피어올랐다. 세화는 그 자리에 굳게 버티고 서서, 유희 거리라도 찾은 듯한 음험한 눈길을 전부 받아 냈다. 아이 대신 나를 쓰라고, 나를 데려가라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면서.
“잠시 휴정을 요청하겠습니다.”
허리에 스프링이라도 단 것처럼 기태정이 몸을 단박에 튕기며 일어났다. 오금 뒤로 손이 불쑥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몸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허튼 생각이 스밀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제 몸을 조여 안는 남자의 손길은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고리타분한 생김의 재판장 문이 열리고, 그와 대비되는 최첨단 센서가 하나가 된 두 사람의 몸을 스캔했다.
“갓 태어난 자식새끼를 데려가겠다는데 그 소릴 듣고 제정신일 사람이 어디 있나!”
안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직전, 오선란 대장이 숨죽여 으름장을 놓는 것이 들렸다. 제 귀에 들어가 봤자 좋지 않을 내용이라 판단했는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차 소장, 입 뚫렸으면 아까 했던 소리 다시 해 봐. 뭐? 애의 피를 뽑아? 그것도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는 애를?”
“대장님, 그건 말씀드렸듯 기태정 준장의 주장대로라면 마땅히 필요한 절차,”
“김 소위의 잘잘못을 가리는 자리에서 왜 자꾸 애먼 사람을 물고 늘어지는 건가? 심지어 김 소위 친인척 되는 인사가 그딴 소리를 하는 게 곱게 들릴 것 같아?”
“오 대장님, 조금만 진정하시죠.”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게다가 그 약, 김 소위가 멋대로 ‘추수’ 밀어붙이면서 제조했던 것 아니었어? 아직 허가도 안 난 프로젝트의 부산물을 검사해서 어디에다가 쓰게. 위에는 뭐라고 보고하려고.”
“…….”
“이봐, 차 소장. 왜 말이 없어? 아까는 아주 사람 죽일 듯이 몰아갔으면서?”
느리게 문이 닫히고, 귓가에 콕콕 박히던 말소리도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기태정의 가슴에 달린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식들이 모빌처럼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별과 꽃과 새. 군인들에게만 허용되는 국화國花와 공군의 상징, 그리고 장성이라는 표식. 아마도 기태정의 전부이자 삶의 목표일 것들….
세화는 눈을 감았다. 실핏줄이 다 터진 탓인지 감은 눈꺼풀 뒤에도 얼룩 같은 반점이 여럿이었다.
***
별관의 의무실은 이전에 신세를 졌던 곳보다 훨씬 더 넓었고 또 신식이었다. 약식 검사를 마치자마자 나 중위를 비롯한 휘하의 사람들은 기태정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비웠다. 과장 좀 보태 작은 운동장만 한 공간에 수액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세화는 마른 입술만 연신 벙싯거렸고, 기태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폴대에 걸린 수액과 관을 타고 흐르는 액체의 속도를 점검했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잠자코 있으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는데도 멋대로 나섰으니….
그래도… 그걸 몰라서 아이 대신 저를 데려가라 폭탄선언을 한 게 아니다. 기태정이 분노할 걸 알면서도, 그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알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기태정에게 계급장만큼 소중한 것이 없듯, 저에게는 해림이의 안위가 간절했다. 그뿐이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내가.”
“…….”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넌 그냥 가만히만 있으라고, 저 새끼들이 무슨 개소리를 하든 넘어가지 말라고.”
“…….”
“그 다짐 받고서 여기에 너 세운 거였는데, 대체 왜…!”
세화의 돌발 행동을 꾸짖으려던 기태정은 자신의 목소리가 상당히 격앙되었다는 걸 깨닫고 슬몃 입술을 깨물었다.
“…충격으로 실신해서 더는 자리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해 둘 테니 그렇게 알아.”
“준장님.”
“수액 다 맞는 대로 돌아가. 박 소위 붙여 줄 테니까.”
“주, 준장님…! 잠시만… 요!”
다급히 부르자 남자가 다시 돌아섰다. 놀랍게도 그의 낯을 가득 메운 것은 형형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건… 그 표정을 굳이 해석해 보자면 저를 걱정, 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 소장님… 하여튼 그 사람이, 제 아이 데려가서 화, 확인할 필요 있다고 한 거, 그거….”
“…….”
“그거, 혹시, 어떻게 되는 건지… 가능성이 정말 이, 있는 건지….”
기태정은 양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잠시 바닥만 바라보았다. 화를 참는 건 아닌 것 같고, 저에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고심하는 듯했다.
지저분하게 얽히고설킨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로, 이제 세화는 남자가 눈을 감았다 뜨기만 해도 그 속내를 대충 읽을 수 있게 됐다. 이전엔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하나도 짐작할 수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리되었다.
“그건 이 자리에서 논할 문제도 아닐뿐더러… 하, 애초에 그렇게 되도록 두지도 않을 거니까 신경 쓸 거 없어.”
“그럼 언젠가, 쿨럭, 다른 곳에서 논할 주제긴, 하단… 뜻이죠.”
“그럴 일 없을 거라고 했지.”
그걸 어떻게 믿으라고. 세화는 고개를 내저으며 무작정 기태정의 소매를 붙들었다.
“그러면, 차라리… 처음부터 저 데리고 가면, 아이한테는 눈 못 돌릴 테니까….”
“이세화!”
“맞잖아요, 제 몸은 실제로도 이상하니까, 데려간 사람들이 저한테 흥미가 생기면, 새싹, 아니, 해림이한테는 더는 관심 갖지 않을 거고,”
“그래, 바로 그게 문제야.”
솟구치는 화를 꾹 누르는 듯 기태정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네 체질이 신기하다는 거, 널 낳은 사람도 비슷한 이유로 피실험자였다는 거… 그게 제일 큰 문제라고.”
어떤 약도 통하지 않는, 정확히는 인체에 해로운 성분만 걸러내는 체질. 나 중위도 예전에 말한 적 있지 않았던가, 군부에서 침을 흘릴 법한 소재 아니겠냐고. 물론 제가 버티고 있으니 세화든 아이든 멋대로 실험실로 끌고 가진 못하겠지만, 몸도 마음도 허약해진 이세화에겐 이렇게 불안에 시달리는 것조차 독일 거다.
“그런 거 하나도… 상관없는데….”
“나는 상관있어.”
“준장님.”
“안 돼.”
“…….”
“이건 안 돼. 더는 나설 생각하지 마.”
텅 빈 눈에 차오르는 것은 불신이다. 원망이나 미움 같은 게 끼어들 틈도 없었다. 세화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최근 입버릇이었던 계약서를 써 달라느니 하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서, 그저 고개만 푹 숙였다.
무의식중에 가슴께를 문지르고 있는 걸 보니 답답한 모양이다. 혹은 속앓이 중이거나. 그 둘 다일 수도 있고….
기태정은 목을 죄던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갑갑함에 목이 메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너 무려 실장급 선수였잖아.”
“…….”
“그런데 왜 저런 얕은수에 흔들려. 일부러 하는 도발인 거 뻔히 알면서.”
자기 발치만 멍하니 바라보던 세화가 작게 웃었다. 고작 콧바람에도 맥없이 꺼질 것 같은 촛불 같은 웃음이었다.
“그땐… 지키고 싶은 게 없었으니까요.”
가지고 싶은 거야 수도 없이 많았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밥, 1성 주민의 신분증, 좁아도 좋으니 내 명의로 된 깔끔한 집, 지겨운 빚을 다 털 수 있을 만큼의 돈….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목숨처럼 소중히 하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게, 그 어느 것에도 다치지 않게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예전에는요….”
기태정의 거짓말을 알게 되었던 그날, 제 몸 위로 덮였던 것과 똑같은 새하얀 침구를 보고 있자니 혀가 멋대로 움직였다.
“…준장님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었어요.”
“…….”
“그때는, 정말로….”
목소리가 자꾸만 잠겨서 말끝이 뭉개져 버렸다. 그래도 세화는 울지 않았다. 그저 뜨겁고 따뜻했던 언젠가를 고요히 반추할 뿐이었다. 기태정을 좋아한다고 인정한 것과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 나름대로 큰 결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한 번 마음을 먹은 이후로는 다시 없을 것처럼 열렬히 좋아했다.
다시 없을 것처럼 …. 그런 식으로 마음을 내준 게 문제였던 걸까. 그래서 이렇게 아픈가.
“왜… 이러는 걸까요, 저는.”
왜 이렇게 됐을까, 당신과 나는.
“이해도 안 되고… 지겨우시죠, 저 계속… 이러고 있는 거.”
“…….”
“하긴…. 준장님의 아이로 알려져 있으니, 준장님의 체면을 생각… 해서라도, 남들에게 쉽게 내어주진… 않으시겠네요.”
생각이 짧았다, 죄송하다… 그런 덧붙임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이제 세화는 당위성을 갖추지 않고선 그 어떤 약속도 믿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아이를 돌보는 일이 아니고선 자신의 가치를 찾지 못한다.
매섭게 몰아붙였던 거, 그토록 지키고 싶다던 아이를 들먹이며 상처를 줬던 게 미안해서, 한 번 잃을 뻔하고 나서야 자신의 방법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아서… 그래서 평범하게 잘해주려고 애쓰는 요즘이었다. 그랬더니 이제 세화는 저를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끙끙 앓기만 한다.
기태정은 참담한 심정으로 시트 위에 널브러진 세화의 손만 바라보았다. 잎맥처럼 뻗은 핏줄은 한없이 가느다랗고 여리다. 피부는 하얀 침구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허옇다. 이렇게까지 마른 몸이 아니었는데. 네가 이 정도로 창백하진 않았는데….
“…무슨, 생각해.”
자꾸만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삼키며, 가지런히 놓인 세화의 손가락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보았다.
놓아주진 않을 거다. 놓아줄 수 없었다.
나한테도 그런 맹목적인 마음을 품은 적 있다며. 지금 아이에게 그랬듯, 나도 지켜주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며. 그러니까 조금만 더 견뎌. 내 곁에 있어. 나쁜 건 다 희석되고, 다시 내가 좋아질 때까지 버텨 봐. 그러면, 혹시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예전과 같은 감정이 싹틀지도 모르잖아.
“화 안 낼게, 말해.”
“…언젠가 준장님이 절 질려 하는 날이 틀림없이 올 텐… 데, 지금처럼 몸 상태도 이러면… 더더욱 쓸모없을 테니까….”
“…….”
“그럼 그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앞으로 해림이가 그런 무서운 말, 안 들으려면… 어떡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느라….”
아….
“그래도… 이젠 제가 오선란 대장님의 양자니까, 괜찮겠죠?”
아, 아아. 기태정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의무실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있는 세화의 눈동자엔 그 무엇도 비치지 않았다. 새카만 장막이 드리워진 것만 같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쉴 새 없이 뭐라 중얼거리는 세화를 보면서… 기태정은 인정하기로 했다. 이미 다 끝났다는 걸.
바로 이 건물이었다. 제가 가볍게 내뱉었던 거짓말을 세화가 전부 알게 된 곳도, 크게 충격을 받은 세화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곳도….
엉엉 울다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저에게 마지막으로 진실을 듣고 싶어 했던 그날, 솔직히 말해 달라던 애원을 외면하고, 늘 그랬듯 모르는 척 얼버무렸던 그때…. 이 예쁘고 애틋하고 소중한 사람의 모든 것이 다 깨져 버렸다. 내가 다 부숴 버렸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그 마음을, 그 어여쁜 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지만… 아무리 허우적거려 봐도 손안을 빠져나가는 고운 모래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래봤자 유실되는 속도만 빨라질 따름이었다.
손도 쓸 수 없게 다 망가뜨려 놓곤 꾸역꾸역 세화를 붙들고 있었다. 나도 네 곁에 있게 해 달라고, 너와 함께 바다를 보게 해 달라고, 네 입에서 ‘우리 세 식구’라고 하는 말을 듣고 싶다고, 예전처럼 날 보고 다시 웃어 달라고…. 그런 뻔뻔하고 부질없는 상상이나 했다. 늘 다정했던 너에게 이번에도 날 좀 봐줄 순 없겠느냐고 구걸했다. 또 멋대로, 잔인하게.
“세화야!”
목구멍이 따끔거려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있는데, 오선란 대장이 노크도 없이 문을 쾅 열어젖혔다. 직전까지 언성을 높이다 왔는지 목덜미까지 시뻘겠다.
“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잠시 시간 좀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너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외면하려던 오선란 대장은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태정의 안색에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침대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세화를 보다, 기태정을 따라 복도로 나왔다.
“왜. 세화에게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그렇다기보다는….”
기태정은 의무실의 회색 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뭔가를 참기라도 하듯 돌연 이를 악물었다. 아래턱의 근육이 툭 도드라지고 목에는 핏대가 울컥 일어섰다.
“기태정 준장?”
순간 기태정의 눈가에 습윤한 이채가 확 서린 것을 본 오선란은 설마, 하며 뒤로 턱을 당겼다. 설마 우는 건가?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끔뻑이자, 착각이었노라 비웃기라도 하듯 평소와 똑같이 오만한 낯을 한 기태정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세화를 놓아주면, 아이의 친권도 다 포기하면.”
“…….”
“그러면 추후 두 사람의 보호자는 오선란 대장님이 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