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25)화 (125/144)

#122

“안 그래도 여기 이 친구가 제법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 주더군요. 기태정 준장 앞에서 이런 이야길 꺼내는 게 참 민망하긴 한데….”

김 중령이 눈짓하자 구석에서 대기 중이던 군인이 태블릿을 펼쳐 들었다.

“이세화 씨와 이 친구가 예전에 4환에서 나눈 대화의 녹음본입니다.”

자신이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는 들어보면 다들 아실 거라며 김 중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세화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음성 파일이 있다고? 평소에 매조와 통화 같은 걸 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친밀하게 어울려 다녔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흔적이 남아 있는 거지?

- 속없는 거야 진작 알았어도… 너도 그런 거나 밝히는 놈인 줄은 몰랐다. 씨발, 어차피 돈이나 보고 사람 고를 거면 평범하게 살고 싶다 그딴 소리나 하지를 말든가.

- 당연한 거 아냐? 나한테 카드 준 이 사람은 젊고, 잘생기고, 돈까지 많은데.

놀랍게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저와 매조가 맞았다. 듣고 있자니 저게 언제였는지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아마 기태정에게서 받은 카드로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가던 길이었을 거다.

어쨌든 재생된 파일 속에서 세화는 물욕에 눈이 멀어 기태정에게 줄을 갈아탄 사람으로, 반대로 매조는 오래 품은 순정을 배반당한 사람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물론 저런 얘기가 나온 배경이나 맥락 같은 건 싹둑 잘려 있었지만, 저 녹음본만 들었을 땐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이 얘기만 들어 봐도 이세화 씨의 본심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선천적으로 남자를 받을 수 있는 몸도 아니라면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남성 장교들만 골라 유혹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본인도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 아니겠어요? 평소 행실이 단정하지 않은 사람을 마냥 무고한 피해자라고 보는 것도 우습기도 하고요.”

호기심과 빈정거림을 머금은 시선이 우르르 쏟아졌다. 하긴 생긴 게 좀, 하층민은 어쩔 수 없지… 그런 저급한 품평이 재판장 안을 음습하게 떠돌았다.

기태정이나 오선란 대장은 일순 딱딱하게 낯을 굳혔지만, 정작 세화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재판장에 매조가 나타난 것, 본인을 거절한 것에 앙심을 품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게 당황스럽긴 했어도 그뿐이었다. 매도하는 말 좀 들었다고 화가 나거나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박 소위가 겁을 줬던 것보다 훨씬 더 점잖은 수준 아닌가?

다만… 아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결함을 입증하려 이 자리에 선 게 아니다. 모든 걸 확실히 끝내고 해림이와 조용히 지내고 싶었을 뿐이다.

한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저 사람들에게 아이를 빼앗길 수도 있다고? 제 불안을 조장하려 일부러 하는 소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 미미한 가능성에도 별수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개소리.”

세화를 달래 주려는 듯 기태정이 차분하게 그러나 조금도 단정하지 않은 내용으로 응수했다.

이후의 설전은 예측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기태정은 밑도 끝도 없는 인신공격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사실을 설파한다고 한들 딱히 귀 기울이지 않을 테니 청중들이 직접적으로 관심이 있을 법한 문제, 이를테면 2환 창고 전소로 인한 자산의 피해 상황 같은 문제를 부각하는 데 집중했다.오선란 대장 또한 본심을 알 수 없는 가면을 쓰고서 능청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대장님, 양자인 이세화 씨를 감싸고 싶으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어허, 큰일 날 소리. 내 양자라고 해서 무조건 편을 들 생각은 없네. 김 중령도 본인 자식이 잘못을 해서 재판에 세운 것 아닌가.”

“예? 허허…. 외람되지만 방금 대장님의 말씀엔 크나큰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라니? 간단한 명제야. 계급이 뭐든, 가진 재산이 얼마나 되든, 가문의 역사가 어떻든 우린 군법 아래 모두 평등한 존재야. 그게 전부지.”

“그거야…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대장의 양자든 중령의 친아들이든 군법을 어겼으면 심판을 받아야 해. 다만, 김석철 소위는 너무나 뚜렷한 범법자라는 거고, 내 양자는 진위를 알 수 없는 구설에 올랐다는 게 차이점 아니겠나?”

“아직 판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범법자라 단정 지으시다뇨!”

김 중령의 항의에, 오선란 대장은 호쾌하게 사과하며 ‘그래. 2환 전체를 화마로 밀어 넣고, 기밀문서를 빼내 불법 약물을 제조한 혐의가 있을 뿐이지.’라고 말했다.

김 중령은 어금니를 세게 짓씹었다. 이세화가 여기저기 흠결이 많다고 들쑤신 이후엔 그를 양자로 들인 오선란의 수상쩍은 행보를 공격할 생각이었는데, 얍삽하게도 오선란이 먼저 선수를 치는 바람에 이 패는 더는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밖으로 나돈 시간이 길어 만만하게 봤는데, 그래도 대장은 대장이었다.

“그렇습니다. 부가적인 이야기가 지금 뭐가 중요합니까. 김석철 소위가 멋대로 군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2환을 완전히 망가뜨린 게 문제지요.”

두 사람의 짧은 실랑이를 지켜보던 기태정도 슬쩍 말을 보탰다. 4환의 하층민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를 하던 늙은이들은 자산 문제가 거론되자 금세 모든 걸 잊었다. 실제로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사실 2환에 투자를 한 게 있었다는 둥 하며 은근슬쩍 숟가락을 얹으려 들었다.

“이제 나 중위가 골라 온 자료들 발표만 하면 얼추 끝나.”

남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든 아이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복잡한 심사를 위로라도 해 주듯기태정이 손등을 부드럽게감싸 쥐었다. 큼지막한 손이 손가락을 덮듯이 쓸어내리다 물 흐르듯 방향을 틀었다. 손바닥끼리 맞닿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정말 다 끝이야.”

속삭이는 목소리엔 희미하게 기쁨이 어려 있었다.

이 남자와 손을… 잡았던 적이 있었나. 몸을 섞을 때를 제외하곤 이런 친밀한 행위를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살갗을 타고 쿵쿵 울리는 맥동이 자신의 것인지, 기태정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주제와 다소 어긋나긴 하지만 불쾌한 말이 나도는 것도 원치 않고, 이런 식으로 여론을 조성해 이 사람을 억울한 피해자로 만들고 싶지도 않으니, 김 소위 측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해 보겠습니다. 나 중위 앞으로.”

“억울한 피해자라니!”

퀭하다 못해 박힌 안구가 떨어질 것 같은 낯을 하고서 매조가 꽥꽥 소리를 질러 댔다. 진정 약에 취하지 않고서는 벌일 수 없는 무엄한 짓거리였다.

“저 사쿠라 같은 새끼 좀 잡아가세요! 자기 몸뚱어리 특이한 거 이용해서 평생을 약 팔고 몸 팔아 온 새낀데 지가 무슨, 억지로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갑작스러운 매조의 발작에 사람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작 그를 데리고 온 김 중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 중령, 저거 증인으로 계속 둘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딱 봐도 약에 전 놈을 여기가 어디라고 데리고 와.”

신경질적인 청중들의 항의에 김 중령이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출한 증거물 확인했으니 증인 또한 그만 물리겠습니다.”

“헉, 자, 잠깐만요!”

사색이 된 매조가 김 중령에게 매달렸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일을 그르친 건 직감한 것 같았다.

“왜 저 새끼가 안 끌려가고 제가 잡혀가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다 말했잖아요! 왜 나만 끌고 가는 건데!”

“이 새끼가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어이, 이거 치워.”

매조가 하나만 남은 손을 허우적거리며 김 중령을 붙들었다.

“빵살이 안 시킨다며! 약도 준다고 했잖아! 원래 저 녹음 파일도 기 이사인지 기 준장인지 하는 사람한테 팔아치우려던 건데…! 평생 약 준대서! 살려 준대서! 그래서 너한테 넘긴 거라고!”

“야, 김 중령. 저 새끼 그냥 죽이면 안 돼? 시끄러워서 뭘 할 수가 없네.”

앞자리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던 누군가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김 중령은 여부가 있겠냐는 듯 매조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졌고, 그와동시에 경호처럼 지키고 서 있던 군인들이 무섭게 곤봉을 휘둘렀다. 억센 손길 몇 번에 매조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매조가, 준장님께 접근한 적 있어요?”

“아니.”

기태정 준장의 안사람 타이틀을 차지한 하층민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죽거리며 돌아보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런 개죽음은 세화에게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다만 최후까지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는 매조에게 자신의 미래가 겹쳐 보여, 아주 조금이지만 안쓰러웠고… 또 기태정에게 음성 파일을 넘긴다 어쩐다 했던 매조의 말이 신경 쓰였을 뿐이다.

“하우스 잡역들은 그때 다 죽였고…. 선수들한텐 사람 붙였어. 전부 다는 아니고 일부에게만.”

“…….”

“의심하다가 서로 잡아먹고, 다 빼앗고, 그렇게 서서히 공멸하는 게 남들이 보기에도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왜… 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매조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군인들처럼,기태정 역시 충분히 그리 처리할 수 있었다. 락스를 퍼부어도 피 냄새가 가시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을 죽여 놓고선 왜 선수들은 내버려 뒀지? 그 덕에 김 중령이 이렇게 매조를 훌러덩 주워 온 것 아닌가. 기태정답지 않은 일 처리였다. 심지어 그가 저에게 제법 물렁물렁해지기 전이라는 걸 고려하면 더더욱 납득이 가질 않았다.

“왜냐니, 네 과거와 관련된 사람들이 갑자기 다 사라지면….”

덤덤히 대꾸하던 기태정도 그제야 자신의 모순을 깨달은 듯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사라지면, 너에게 이목이 더 쏠릴 수도 있으니까.”

“…….”

“생각해 보니까 그때도 무의식중에 그런 꼴은 보기 싫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내 속도, 네 속도 모르고서.”

“…….”

“물론 저런 선수들 정도야 큰 변수가 되지 않으리라 계산 마친 이유도 있고.”

세화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딱 붙어 속닥이는 기태정의 목소리가 몸 이곳저곳을 간지럽게 했다. 심장 언저리라거나, 뼛속이라거나… 손을 뻗어 만질 수도 없는,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은밀한 곳들을.

“자자, 그럼 곁가지는 달지 않고 사실만 정리해 봅시다.”

앞줄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휘저었다. 김 중령의 숙부 되는 사람이라며 기태정이 작게 속삭여 주었다. 귓속말을 할 때마다 제가 뻣뻣하게 굳는 걸 보고 일부러 이러는 것도 같았다.

“증인들의 평소 행동거지와 김 소위가 저지른 일이 대단한 연관이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 이쯤 하도록 하고, 다만….”

김 중령의 숙부가 갑자기 세화를 향해 돌아섰다. 안경을 고쳐 끼느라 슬쩍 드러난 맨눈엔 불길한 흥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와 별개로 저 하층민의 체질에 의문이 들긴 합니다.”

“차 소장!”

“아시잖습니까, 대장님. 이 늙은이가 이런 쪽으로 워낙 관심이 많다는걸. 뭐 저 하층, 아니, 대장님의 양자를 데려다 실험이라도 벌이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세화 씨가 얼마 전 낳았다던 그 아이는 확실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차 소장이라는 사람이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기태정 준장의 주장에 따르자면김 소위가 군부의 문서를 빼돌려다 불법으로 위험한 약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생긴 아이가 확실하다면서요? 당연히 그 결과물도 단속해야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흠… 그건 그래. 어쨌든 군부에서 만든 제조법 덕에 태어난 애긴 하잖아. 살펴보긴 해야지.”

“태어난 지 몇 개월이라고 했지? 피 뽑는 정도로 충분하려나?”

세화는 양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다시 또 이 주제로 돌아왔다. 심지어 이번에는 처음 김 중령이 입을 뗐을 때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었고, 설득력도 있었다.차 소장의 주장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해림이는 기밀문서에 적힌 약물 제조법으로 태어난 아이가 맞으니까.

세화는 침음을 삼켰다. 아마 기태정이 초기에 세웠던 여러 가지 계획엔 저를 이용하다 버리는 것은 있었어도, 제 과거를 지워 주고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것까진 없었을 것이다.

요즘 하는 짓만 봤을 땐 그래도 저 남자가 자신은살려 줄 것이란 확신은 들었다. 그러나 해림이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 아이를 내어주지 않으면 여태 기태정이 내세운 주장들마저 흔들릴 것 같은데… 과연 그가 거기까지 희생해 줄까? 본인이 승소하고 제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다른 하나쯤은,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이의 안위 정도야 기꺼이 포기할 것 같았다.

“대장님 말씀처럼 군법 아래 모두가 평등합니다. 정확히는 원수님 아래 모두가 하찮은 미물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요. 김 소위에게 어떠한 특혜도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기태정 준장의 아이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그게 공평한 처사 아니겠습니까?”

차 소장의 주장은 김 중령의 수법과는 달랐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흥미 위주로 소비하고 싶어지는 김 중령의 여론몰이와 달리, 차 소장의 화술은 그를 고려하는 자신의 모습이 제법 논리적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어차피 김 소위의 범법 행위에서 벗어난 주제라는 건 매한가지인데 말이다.

“……, 아닙니다.”

마른 입술만 잘근거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불쑥 말 덩어리를 토해 냈다. 쥐어짜듯 길어 올린 목소리였으나 앞뒤로 앉은 사람들이 기척을 느낄 정도는 됐다. 주변에 앉은 이들이 하나둘 세화를 돌아보기 시작하자, 이내 재판장 안의 모든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됐다.

“제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합니다. 그건 이 나라에서 가장 좋은 병원이… 보증한 검사 결과, 예요. 그러니까, 뭔가 약물 반응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신 거라면….”

옆에서 기태정이 다급히 잡아당기는 통에 한쪽 어깨가 축 내려앉을 정도였다. 그래도 세화는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저를, 데리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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