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세화는 저도 모르게 기태정의 눈치부터 살폈다. 국방부 건물 안에서, 그것도 재판을 앞두고 사고를 칠 것 같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하우스 잡역들을 다 쏴 죽인 전적이 있지 않은가.
멀찍이 선 군인들 또한 이쪽의 동향을 유심히 살피는 게 느껴지는데, 매조는 자기알 바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뭐라 나불거리고 있었다.
몸 팔아서 손님 끌고 오던 걸레 새끼, 지조라곤 하나도 없는 사쿠라 같은 자식, 팔자 고쳐 보겠다고 눈 뒤집힌 더러운 창놈…. 그렇게 몇 마디 뱉어 놓곤 벌써 변주할 거리가 다 떨어졌는지, 이후로는 따분한 욕설만 반복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기태정은 아직까진 날뛰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흥미로운 기색으로 김 소위와 매조를 번갈아 가며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그게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닌지라, 세화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은 채 다가오는 세 사람을 주시했다.
가까이서 보니 매조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상한 낯을 감추려 화장품을 치덕치덕 바른 탓에 얼굴과 목의 색이 따로 놀았다.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았는지 소매와 옷깃엔 시커멓게 때가 앉아 있었고, 오래 묵은 곰팡이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도 확 풍겼다.
난데없이 사쿠라라고 불려서 놀랐던 거고 기태정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됐던 거지, 매조의 존재 자체가 그리 위협적인 건 아니었다. 무감한 눈으로 놈을 바라보던 세화는 뒤늦게야 이상한 점을 깨닫고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매조의 한쪽 손이 사라졌다. 어깨부터 팔뚝까지는 제대로 붙어 있었지만, 왼쪽 소맷단 아래는 톱으로 뚝 썰어 버린 듯 아무것도 없었다. 다리도 썩 멀쩡해 보이지 않는다. 도망치다 잡혀 온 선수들의 발뒤꿈치 힘줄을 끊어 버리면 꼭 저렇게 걷곤 했으니… 그에 준하는 일을 당한 게 분명했다.
그나마 아직 성한 오른쪽 손등엔 피딱지가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목덜미에도 콕콕 점 같은 상처가 가득하고….위치나 형태를 보아하니 비교적 최근까지 주사를 놓은 게 아닐까 싶었다. 약을 빨고 여운처럼 밀려오는 소양감에 벅벅 몸을 긁다 보면 손이며 다리에 저런 식으로 흉이 지기 마련이다.
“미안하네, 기 준장.”
매조가 약에 손을 댄 건 자의일까? 아니면 김 중령이 손을 쓴 것일까. 생각에 잠긴 세화를 내버려 둔 채 김 중령이 점잖게 사과를 건넸다. 물론 저 같은 하층민이 아닌 기태정을 향해서였다.
“우리 쪽 증인인데, 젊은 친구라 그런지 욱하는 면이 있어.”
졸지에 모자란 놈 취급을 당하자 매조가 코 평수를 넓히며 씩씩거렸다. 무장한 군인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고, 바로 곁엔 장교들이 자리하고 있는데도 저런 태도를 고수하는 걸 보면…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게 확실했다.
그래서 더 의아해졌다. 약에 절어 있는 놈을 증인으로 삼을 수 있는 건가? 사장도 아니고 매조를 여기에 데리고 온 이유가 뭐지?
“아까 뭐라고 했지?”
기태정은 김 중령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매조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대한 산 같은 남자의 그림자가 자신의 위로 쏟아지자, 매조도 조금 당황해선 우물쭈물 뒤로 물러섰다.
“걸레 새끼의 상판대기?”
얼굴 하나만큼은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외모 운운하니까, 별다른 말 안 했는데도 대단한 모욕을 퍼붓는 것 같아 관전하는 쪽이 다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기태정은 그저 매조가 했던 말을 복기하는 것뿐인데도 말이다.
“원래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주제를 욕설로 삼기 마련이지. 자기 머리가 나쁘면 멍청하다고 비난하고, 돈이 없는 게 콤플렉스면 거지새끼들이란 말부터 고르고.”
곧고 기다란 남자의 손가락이 매조의 양 뺨을 쥐곤 좌우로 휙휙 돌려 댔다. 더러운 것이라도 닿은 듯 살갗 끝만 간신히 집어 든, 성의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손길이었다.
“걸레처럼 살고 싶은 본인의 취향에 미치지 못하는 쌍판이라 억울한 건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애꿎은 사람한테 화풀이를 하면 못쓰지. 그래, 안 그래?”
“으아악!”
기태정이 툭 떠미는 통에 매조는 뒤로 나자빠져 몇 바퀴나 굴러야 했다. 그가 밀친 매조의 이마는 곧 퍼렇게 멍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당장의 상황만 봤을 땐 기태정이 그리 힘을 주지 않은 것 같아서 뭐라 트집을 잡기도 애매했다.
그리고 이상한 건 분명 매조를 향해 던진 조롱이었는데, 김 소위 또한 덩달아 낯빛이 흐려졌다. 아니, 흐려진 정도가 아니다.그는 회색빛으로 축 늘어진 턱을 부들부들 떨며 기태정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있는 대로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은데도 살이 덕지덕지 붙은 탓인지, 이마며 목줄기엔 희미한 핏대조차 일어서지 않았다.
“그러게. 나도 인물 훤한 기태정 준장이 내 아들이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던 김 중령이 뒤늦게 끼어들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반반한 낯짝 말곤 뒷배조차 없는 신세이지 않으냐 비웃는 거였다. 만나자마자 냅다 총부리부터 들이대는 것보단 나은 건가? 잘 모르겠다….김 중령 같은 화법 또한 사람 진을 쏙 빼놓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럼 안에서 다시 보세. 오늘은 부디 결론이 났으면 좋겠군.”
김 중령은 잔뜩 독이 올라 씨근덕거리는 김 소위의 등짝을 가볍게 내리치고는, 재판장을 향해 발을 뗐다.
“아, 참.”
세화의 곁을 막 지나치던 김 중령이 뒤늦게 뭔가 떠올랐다는 듯 슬쩍 몸을 틀었다.
“아들을 낳았다지?”
뱀 같은 시선이 세화에게 꽂혔다. 비록 찰나이긴 했으나 착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눈길이었다. 기태정 또한 그를 모르지 않는지, 대번에 자신의 앞을 막아선 탓에 시야는 금세 차단되었다.
세화는 괜히 카디건의 소매 끝을 주먹 안으로 꾹꾹 말았다. 기분 더러워지라고 일부러 한 소리라는 걸 아는데, 갑자기 아이 얘길 꺼내니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의도치 않게 기태정의 등 뒤에 숨은 꼴이 되어 버린 것도 민망하고….
“늦었지만 축하하네. 조산이라고 들었는데 부디 건강했으면 좋겠군.”
아까 밖의 군인들에게 눈치를 줬을 때처럼, 이번에도 세화는 저를 등지고 선 기태정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넌지시 뒤로 뻗은 그의 손이 더듬더듬 자신의 팔목을 꾹 쥐었다가 놓았는데, 어쩐지 달구어진 그 체온이 안심하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아직 안 늦었어.”
“…….”
“병원에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
멀어지는 세 사람을 끝까지 주시하며 기태정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차피 지금 환자복 입고 있으니까 몸 상태 나빠졌다는 핑계도 부자연스럽진 않지.”
저를 향해 돌아서는 기태정의 얼굴엔 애써 꾸민 평온이 담겨 있었다. 성질대로 날뛰고 싶은데 제 앞이랍시고 나름대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별로… 놀라진 않았어요.”
물론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맞닥뜨린 건 당황스러웠을 뿐 매조의 말은 마음에 담아 두지도 않았다. 김 중령이 의뭉스럽게 흘린 얘기는 거슬리긴 했지만… 언제고 벌어졌을 일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각오가 단단히 섰다. 오늘 재판에서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저런 찜찜한 사람을 언제 마주치게 될까 내내 걱정하며 살아야 할 거다. 그쪽이 더 싫다.
세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블릿의 버튼을 꾹 눌렀다. 사실혼 관계를 빠르게 선택하고, 적당한 위치에서 대기 중이던 군인에게 기기를 되돌려 주었다. 그는 무엇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군말 없이 태블릿을 받아들곤 기태정에게 경례를 올리며 멀찍이 거리를 띄웠다.
갑자기 나타난 김 중령 무리 덕에 잡생각이 툭 끊긴 건 다행이었다. 사실혼이든 별거 중이든 지금 상황에서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인데 혼자 괜히 의식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아직 재판장 문턱도 안 밟았으니까 할 수 있는 소리야. 안에는 저것보다 상식 없는 늙은이들 천지라고.”
“그보다 더한 소리도, 쿨럭, 많이 들었는데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세화는 시선을 추스르다 흠칫 놀랐다. 눈을 돌리자, 기태정이 처음 보는 낯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협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애는 쓰고 있는데, 절로 굳어 버린 입매는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매우 어색하고 어설픈, 그런 표정이었다.
아, 혹시 ‘그보다 더한 소리’의 주어가 하우스 손님들이 아니라 기태정 본인이라고 생각한 건가…?
“…그건 그래.”
멋대로 결론을 내린 그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뜻은 아니었노라 정정할 틈도 없었다.
“내가 너한테 했던 말에 비하면… 저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
“…….”
“뭐야, 네가 왜 더 속상한 얼굴을 하고 있어.”
기태정이 검지로 세화의 코끝을 톡 두드렸다. 일부러 장난스럽게 구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다른 의미를 품은 손끝이 자꾸만 꿈틀거렸다.그대로 내려 자신의 어깨를 짚거나 허리를 안거나, 또는… 손을 잡고 싶다는 듯이.
“일단 가자.”
그러나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서 물러섰다. 당황스러워하는 자신의 모양새가 웃긴지 정수리 위로 느른한 웃음소리가 번졌고, 그게 전부였다.
기태정은 사실혼을 선택한 것을 들먹이며 세화를 곤란하게 하지도 않았고, 이후로 세 사람을 어떻게 조져 놓을 것인지 떠들어 대지도 않았다. 그저 세화보다 한 발자국 앞서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었다. 더는 자신의 무서운 얼굴은 보여 주기 싫다는 듯이. 혹은 더러운 오물통 같은 광경은 보지 말고, 그저 내 뒤에 숨어 있기만 하라는 듯이….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저를 지옥에 처박은 건 누구도 아닌 본인이면서, 감히 내 곁을 떠나 혼자 자유로워지지 말라고 목에 칭칭 줄까지 감아 놨던 주제에…. 이젠 가시밭길 같은 건 걸으면 안 된다고 저를 안아 들지 못해 안달이었다.
유황불에 발이 다치면 어떡하냐며 묵묵히 까만 재를 털어 주고, 널 아프게 하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것 없다며 마구잡이로 총칼을 휘둘러 댄다. 다정한 악당을 자처하며 앞으론 달라진 지옥을 보여 주겠다고, 그걸 고백이랍시고 몇 번이나 속삭였다.
기태정은 정말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
재판장은 엄숙했다. 물론 건물 외관만 그랬고 안을 메운 사람들의 행태는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국가가 울려 퍼질 땐 어기적거리며 일어서는 시늉이라도 보였는데,이후로는 아무렇게나 털썩 앉아 자기들 하고 싶은 말이나 늘어놓고 있었다.
어쨌든 사람들이 쑥덕대는 말에 의하면김 소위의 유죄 판결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그가 가문 최초로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될 것인지, 김씨 가문에서 아들놈의 방화로 인한 자산 피해를 어느 정도로 보상해 줄 것인지, 그리고 기태정 준장이 과연 특진에 성공하고 원로로도 인정받게 될 것인지…. 그것이 재판의 주요 쟁점인 것 같았다.
일반적인 재판을 생각하면 안 된다고 기태정이 여러 차례 일러 주긴 했으나, 어차피 세화는 제대로 된 법적 절차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사고 친 선수나 다찌들 족칠 때 하우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어서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오늘은 증인이 제법 여럿 나올 예정이라고 하는데….”
상석에 앉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귀찮다는 듯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 옆에는 근사하게 정복을 빼입은 오선란 대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세화와 눈이 마주치자 인지하게 눈을 휘며 웃어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영 전달이 되지 않는 것 같자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 보이고는 흐뭇하게 웃다가 엄지를 번쩍 치켜들었다.
뭐지, 무슨 뜻인 거지…. 세화는 괜히 제 발이 저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높으신 분과 수상쩍은 신호나 주고받는다고 공정하지 않다 수군거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아무도 저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 아니지. 기태정을 제외한 모두가 오선란 대장의 손짓에 무관심했다.
“말했잖아. 여긴 상식 같은 거 하나도 안 통하는 곳이라고. 저런 걸로 트집 안 잡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기태정이 복화술이라도 하듯 입을 다문 채로 속삭였다.
“돌아가는 꼬락서니 봐. 하우스 도박판과 크게 다를 바 없잖아.”
“증인들 이야기를 들어 보기 전에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가 뭔가 더 일러 주려고 했는데, 반대편에 선 김 중령이 손을 번쩍 들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기름기가 낀 둥글납작한 얼굴이 불빛 아래 번들번들 빛났다.
“이 일이 커진 건 김석철 소위가 단순 마약이 아니라 ‘추수’ 프로젝트의 신약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는 의혹 탓이었지요. 한데 생각해 보니 정말로 저 하층민, 아, 기태정 준장. 미안합니다. 그래요, 이세화 씨가 그 신약으로 인해 아이가 들어선 건지, 원래 본인 체질이 그러했던 탓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기태정은 코웃음을 치며 세화에게 개소리를 성대하게도 한다고 비웃었다. 저 또한 동의했다. 어쨌든 김석철이 기밀문서 속 제조법 그대로 약을 만든 건 사실이지 않은가. 그저 기태정과 이렇게 딱 붙어서 속닥거리고 있어도 되는 건지 그게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러니 문제의 아이를 검사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어진 김 중령의 말에, 세화는 슬금슬금 기태정을 밀어 내려다 말고 차게 얼어붙어 버렸다.
지금, 뭐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 이상으로 정확한 증명이 없지 않습니까.”
아이? 내 아이? 해림이? 어째서…?약을 먹은 것도 나고, 체질이 이상한 것도 난데 왜 아이를 데려와서 검사하자고 하는 거야?
“김 소위가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그 약으로 인해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혹 아이 체내에 성분 같은 게 남아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면 여러 사람 피곤할 것 없이 바로 끝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무엇보다 결과도 정확할 거고요.”
아….이제야 알 것 같았다. 김 중령이 병원 의사나 꼬마애 같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풀어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았던 건, 저를 심란하게 하려던 질 낮은 수작질이나 선동같은 게 아니었다. 제가 아이에게, 그리고 기태정이 저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가늠해 본 거였다.
실현 여부와 관계없이 아이를 끌고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기태정이 한발 물러설 수 있는지, 자신과 아이가 기태정에게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인질이 맞긴 한 건지… 김 중령은 그걸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