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23)화 (123/144)
  • #120

    식사량이 적어서 큰일이라거나 갖고 싶은 게 없냐는 물음 정도는 양반이었다. 네가 자는 사이 애를 보고 왔는데 그새 또 자란 것 같다는 뜬금없는 소릴 할 때도 있었고, 저 보란 듯이 침실 문가에 기대어 서서 육아 관련 서적을 읽고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인격이 바뀐 수준은 아니었다. 남자는 똑같이 무뚝뚝했다. 거칠고 성긴 마음을 다감함인 양 포장해, 폭격처럼 쏟아부었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의 욕망은 조금도 포기할 줄 몰랐다.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버릇도 여전해서, 이 와중에도 새싹이가 쓸 육아용품은 끝도 없이 사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예전과 확실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감정을 구태여 숨기려 들지 않는다는 것 정도일까. 기태정은 그 마음을 애정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고, 저는 소유욕 비슷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더는 자신을 필요로써 대하지 않았고, 쓰고 버릴 소모품 취급을 하지도 않았다.

    남자는 요즘처럼 행동과 속내가 일치했던 적이 없다고, 이런 자신이 낯설다고 간혹 중얼거리곤 했다. 글쎄. 그거야 세화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아…. 그가 밖에서 잠시라도 일을 보고 오면 슬쩍 풍기던 희미한 시가 향은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추긴 했다. 해롭고 어둑어둑한 것을 모조리 치워버린 남자의 체향은 제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화사했고 또 청량했다. 확연히 달라진 기태정을 체감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갈까?”

    세화는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어도 어깨가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기태정도 분명 봤을 텐데… 딱히 핀잔이 날아오지 않았다. 그저 곁에 바투 붙어 서서는 느리고 서툰 자신의 걸음에 맞춰줄 따름이었다.

    이런 식이니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2환으로 도망쳤던 이후로 기태정과 저 사이에는 아슬아슬한 거리감 같은 것이 있었다. 정확히는 남자와 거리를 둘 수 있는 핑곗거리가 다양했다.

    수상쩍게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는 건 재판에서 이기고 싶어서일 거야. 오선란 대장이 꼴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걸 수도 있고, 또 속궁합은 잘 맞으니까…. 그런 식으로 저를 아프게 하는 기태정을 호도하고, 밀어내고, 거리낌 없이 미워하는 게 가능했다. 그를 마음이 없는 못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쪽이 속이 편하기도 했다. 그래야 기태정으로 인해 생긴 상처와 우울이 명쾌하게 설명이 됐다.

    그런데 요즘의 기태정은 더이상 세화의 회피를 두고 보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굴었다. 실수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눙치고 넘어가려 들질 않았다. 이럴 땐 제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는지,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정답인지 계속해서 물고 늘어졌다.

    그러면서도 정식으로 그를 거부할 빌미는 주지 않는다. 이전처럼 뻔뻔하게 자기 합리화나 하고 있으면 화라도 내겠는데, 잘못했으니 기회를 달라고 자꾸 조르니 딱히 적절한 선택지가 없었다.

    불편함과 답답함이 쌓이고 쌓여 숨이 턱 막힐 것 같으면 그땐 또 재빠르게 물러선다. 세화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마음속 경계선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곤란한 상황은 쏙쏙 피해갔다.

    한마디로 요즘의 기태정은 세화에게 멋대로 다정하게 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세화는 요즘 들어 기태정을 보면 괜히 악을 쓰고 싶어졌다. 사람은 원래 누울 자리 보고 뻗는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그에게 이 정도도 바라지 않던 때가 있었다. 2환에서 저를 개처럼 끌고 오던 때에 이 반의 반만큼만 다정하게 대해주었더라면, 숨겨진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됐을 때 곧장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더라면, 앞으론 태도를 바꿔보겠다고 이렇게 말이라도 해주었다면…. 그러면 결국은 마음이 녹았을지도 모른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구멍이 뻥 뚫린 사람들이 다사다난했던 연애. 계급 차가 빚은, 뻔한 선형적 관계. 언젠가는 기태정과의 사이를 그리 정의 내리며 체념했을 거다.

    그러나 기태정이 어느 정도는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애써 수면 아래 감춰두었던 해묵은 찌꺼기들이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어제 기태정은 난데없이 세화가 기억을 잃었던 순간을 회고했다.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고, 그걸 그제야 깨달았다고 했다.

    세화는 반대였다. 노력하는 기태정의 모습 같은 거, 영영 모르고 싶었다. 계속 몰랐다면 이렇게 속상하지 않았을 텐데….

    말마따나 조금만 더 솔직했으면 정말 초개처럼 당신에게 모든 걸 다 내던졌을 텐데 왜 계속 거짓말을 했어. 왜 날 그렇게 멋대로 다룬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놈으로 있든가 할 것이지, 이제 와서 앞으로 잘하겠다고? 두 번째 사랑인 것으로 하자고? 그런다고 온몸에 스민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몰랐던 걸 알게 해서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들어.

    물론 언제까지 우울함을 곱씹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스무 살 이후로 기억이 사라졌다던 저도 결국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나. 이 순간에도 시간은 착실히 앞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잘 알면서도 세화는 좀처럼 평온해질 수가 없었다. 혼자서만 속이 문드러졌던 예전이 더 나았던 것도 같다. 어느덧 마음은 돌처럼 굳어지는 중이었다. 분명 순조로이 홀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의 말대로 못돼 처먹은 이 남자는 남루한 안식마저 끝끝내 허락하려 들지 않았다.

    “어디 불편해?”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기태정이 조심스레 세화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재판 시작 전에 간단히 검사라도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대꾸 없이 고개를 팩 돌리며 슬금슬금 옆으로 몸을 물렸다. 그래봤자 차 안이라 멀어지는데 한계는 있었지만, 최대한 차창 쪽으로 붙으며 그와 거리를 벌리려 했다.

    갑자기 날카롭게 굴자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는지 기태정은 이후론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곁눈질로 몇 번이고 손을 들었다 내리는 걸 봤다.

    머리라도 쓰다듬게? 아니면 어깨를 끌어안으려고?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고 등을 둥글게 굽히자, 그가 아무 짓도 안 한다며 픽 웃었다. 괜히 듣는 사람의 배 속을 찌릿찌릿하게 울리는, 버석하게 다 마른 그런 웃음이었다.

    “편하게 있어. 안 만져.”

    “…….”

    “계속 말했지만, 만약 네가 입 열어야 할 일 생기면 휴정 요청하고 대본 같은 거라도 정리해서 줄 테니 속상해도 멋대로 나서지 말고… 늙은이들이 뭐라고 하든 그러려니 하고 참아. 너더러 개소리한 새끼들은 이 일 끝나고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니까.”

    세화는 한 뜸 정도 텀을 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박 소위와 최 원사가 재판에서 예상되는 폭언을 일러준 바 있는데, 하우스에서 숱하게 들었던 말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이긴 했다.

    아, 김 소위가 저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건 좀 놀랍긴 했다. 아니지. 마음이 있다는 표현도 좀 그렇다. 기태정의 감시 아래 하우스에 갇혀 지내던 동안 김 소위가 저에게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걸 며칠 전에야 전부 확인할 수 있었는데… 글쎄. 구구절절한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잘 쳐줘 봐야 첩으로 들이고 싶다는 수준이었다.

    하여튼 계속된 무시로 약이 바짝 올랐을 김 소위가 손님을 대하는 제 방식이 난잡했다거나, 스폰이 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맥락 없이 흠집을 내려고 들 수 있으니 그 순간을 제일 조심하라고 했다. 기태정은 아직도 제가 몸 팔았다는 오해를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줄 아나 보다. 이제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는데….

    “정문 통과했습니다. 5분 후 별관 앞에서 정차하겠습니다.”

    차는 어느덧 국방부 정문을 지나쳤다. 일전에 들렀을 때도 경비가 삼엄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와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기태정은 준장이라서 재판장이 있는 별관 앞에 잠시 차를 댈 수 있는 것 같고, 대부분은 초입에서 멈춰 서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저 아래에 있는 검문대에 차를 세우고, 나란히 줄을 지어 제법 먼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2분 후 정차합니다.”

    조수석에 앉은 박 소위가 신중히 카운트했다. 그러고 보니 분 단위를 헤아려가며 사전 고지를 해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싶었다.

    1분 남았다는 알림에 기태정은 정복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타이를 단단히 조이고, 소맷부리를 정돈하는 일련의 과정엔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세화는 그제야 조금씩 긴장이 몰려왔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될, 아주 중요한 재판이 곧이었다.

    커다란 차는 고요한 수면 위를 항해하듯 부드럽게 멈추어 섰다. 무전을 받고 대기 중이던 군인들이 절도 있게 다가와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밖으로 나오자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특수군들이 기태정에게 경례를 올렸다. 충성, 아랫배에서부터 끌어올린 묵직한 목소리의 군락은 언제 들어도 위압적이어서 세화는 저도 모르게 쭈글쭈글 움츠러들고 말았다.

    “겁먹을 거 없어.”

    저 새끼들 다 내가 부리는 놈들인데 뭐가 무섭냐며 기태정이 뚱하게 말했다.

    “아무도 너한테 손 못 대.”

    그러면서 그가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세화가 선 위치에선 기태정이 어떤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길이 흐르는 대로 자리한 군인들의 입꼬리가 애매하게 올라갔다.

    긴장을 풀어주려던 의도였다면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 눈은 조금도 웃지 않으면서 이만 활짝 드러내고 있는 군인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괴하게 느껴져서 자꾸만 흠칫 몸을 떨게 됐다.

    “안녕하십니까. 증인 인적 사항 기재 부탁드립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견장 하나를 더 달고 있는 군인이 다가와, 큼지막한 태블릿을 내밀었다. 준장과 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사전에 당부를 들었는지 더없이 공손한 태도였다. 기태정이 아니었더라면 소명할 기회도 없이 개죽음이나 당했겠지? 세화는 씁쓸함을 삼키며 기기를 받아들었다.

    연습했던 것과 똑같아서 어렵진 않았다. 사회 보장 번호를 입력하자 기본 정보가 떴다. 거주 구역을 비롯한 등록 정보가 올바른지 확인하고 아래의 버튼을 눌러 이동했다. 새로이 첨부된 페이지에는 얼마 전 태어난 아이와 양부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선란 대장 부분은 딱히 어려운 것이 없었다. 고위직이라 그런지 대부분 마스킹 처리가 되어 있어서, 그의 홀로그램과 이름 같은 것이 맞게 쓰였는지 확인만 제대로 하면 끝이었다.

    문제는 새싹이의 페이지다.

    그제 박 소위가 작성 양식을 보여준 이후로 저도 나름대로 아이 이름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새싹이라는 태명을 지을 때부터 바라던 의미가 있긴 있었던지라, 정말로 지어줘야겠다 마음을 먹고 나니 의외로 쉬웠다.

    새싹이의 이름은, 해림이라고 결정했다.

    “이해림?”

    “…….”

    “언제 정한 거야?”

    비스듬히 뒤를 지키고 서 있던 기태정이 물어왔다.

    새싹이는 저처럼 작고 하찮은 꽃이 아니라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숲이 되었으면 했다. 그리고 드넓은 바다 같은 사람으로 자랐으면 했다.

    그래서 오선란 대장이 사다 준 책에 코를 박고서, 의미에 부합하는 글자들을 골라냈다. 그중에서도 발음이 예쁜 것을 이리저리 조합해본 끝에 최종적으로 선택한 거였다. 바다 해, 수풀 림. 해림.

    “무슨 뜻이지?”

    “…….”

    “이해림…. 예쁘네.”

    이씨라고 적은 걸로 한소리 하면 어쩌지. 왜 하늘이 아니라 바다를 의미하는 글자를 가져다 썼냐고 물을까 봐 세화는 잔뜩 졸아붙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태정은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새싹이에게 잘 어울린다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주고 말았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제 앞에선 그리 굴었다.

    세화는 어쩐지 큰 산을 넘은 것 같아 숨을 훕 들이켰다. 이제는 또 다른 친권자, 기태정에 관한 정보를 입력할 차례였다.

    이 또한 사전에 설명을 듣기는 했다. 박 소위는 기태정과의 관계를 선택하는 항목이 뜨면 ‘사실혼’을 고르라고 했다. 그래야 재판에서 유리할 거라고 했다.

    한데 선뜻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법적 배우자, 사실혼, 양육권 협의 중인 동거인, 양육권 협의 중인 혹은 협의를 마친 별거 상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아이를 낳았을 때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좌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해림이의 이름이 어떻다 추임새를 넣던 기태정은 이번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세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세화는… ‘기타’를 고르고 싶었다. 그리고 사유를 적는 칸에는 ‘알 수 없음’ 그렇게만 적고 싶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최선을 다해 기태정의 재판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 주제만 나오면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굴었지만, 3점을 먼저 내면 그 대가로 해림이의 친권을 전부 넘겨받기로 했다. 이 약속만큼은 꼭 지켜달라고 기태정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고, 그가 어떻게 나오든 세화는 이것만은 제 뜻대로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비겁하지만 재판 과정 일체를 비밀로 해줄 테니 내 말대로 하라고 협박할 생각이었고, 여차하면 오선란 대장까지 이용할 각오도 되어 있었다.

    어차피 다 짜고 치는 거짓말인데. 이걸 선택한다고 해서 기태정과 정말로 그런 사이가 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떨리고 무서워. 불안정하게 날뛰는 호흡을 다스리며 세화가 손가락을 막 들었을 때였다.

    “야, 사쿠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세화는 저도 모르게 경련하듯 잘게 몸을 떨었다. 사쿠라. 삼월이. 들을 일이 없어 까맣게 잊고 지냈던 자신의 별명이 심장을 푹푹 찔러댔다.

    “씨발, 저 걸레 같은 새끼…. 야, 너 갈아탄 사람 애까지 낳았다며?”

    기태정에게 그랬듯 군인들이 경례를 올리는 소리가 현관을 가득 메웠다. 돌아보니 예전보다 시커멓게 낯이 죽은 김 소위와 아마도 그의 부친인 것 같은 중년의 남자, 그리고….

    “뭐… 상판대기야 여전하네.”

    같은 화투 선수인 매조가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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