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22)화 (122/144)

#119

“그게 다야?”

추궁의 의중을 알 수 없다는 듯 세화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슨, 말씀을….”

“또 변명만 늘어놓고 있잖아, 나.”

“네…?”

“넌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울거나 질색했고.”

처음엔 가볍게 굴었던 거 맞는데 이후론 진심이었다, 난 타고 나길 그런 개새끼고 심지어 이따위로 자라났는데 어떡하겠느냐, 이 위치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투는 조금씩 부드러워졌어도 요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빈곤한 핑계를 매번 내밀곤 했다. 방금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안 우는 게 신기해.”

“…….”

“아, 울리고 싶었던 건 아니야. 그냥 차이가 뭔지 궁금해서.”

세화는 온순히 눈만 슴벅였다. 그러다 살이 내려 이전보다 훨씬 커다래진 눈이, 희게 질린 채 굳게 다물려 있던 입매가 아주 약간 휘었다. 갓 찐 떡이 푹신푹신하게 찌그러지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아. 기태정은 작게 침음을 냈다. 이세화가 웃었다. 어이가 없는지 탄식하듯 툭 내뱉은 웃음이긴 했어도, 어쨌든 웃는 건 웃는 거였다. 매우 찰나의 순간이긴 했어도 그게 어딘가.

기억을 잃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저를 향해 작게 웃어주던 세화가, 훨씬 이전에 사과를 집으며 저를 돌아보던 환한 얼굴이 그새 딱딱하게 굳어버린 지금의 모습 위로 환영처럼 겹쳐졌다. 기태정은 저도 모르게 세화의 뺨으로 홀린 듯 손을 뻗었다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물러섰다.

“…알려 줘. 왜 이번엔 안 울고 웃었는지.”

제가 듣기에도 등신 같은 물음이었다.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답을 달라고 졸라댔다. 준장님. 이제는 까마득해진 그 명랑한 부름을 되돌리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찌하면 되는 거냐고.

속으로만 핑곗거리를 올려보자면,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질기게도 살아남은 본능이 속삭이고 있다. 지금이다. 이 차이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에 맞춰 고치려는 시늉이라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세화를 환히 웃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목걸이와 사슬 같은 걸로 구속하지 않아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세화.”

멋대로 세화의 손을 움켜쥐는 대신 커다란 환자복 소매 끝을 잡고 흔들어댔다. 아프지 않게. 놀라지 않게. 살살…. 노력은 하고 있는데 쉽지는 않았다.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솜사탕을 들고 선 무뢰배가 되면 이런 기분일까? 아주 약간의 물기로도 다 녹아버리는 그 여린 것을 장대비가 퍼붓는 하늘 아래서 무사히 지켜주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찢고 부수는 건 식은 죽 먹긴데 아끼고 조심하는 것은 어려웠다. 세화를 마음대로 취하던 때에도 벗기고 울리기 바빴다. 수고했다는 칭찬이나 꺼내서 괜히 이세화 속에 응어리만 지게 했었고….

“…….”

세화는 곤란한지 눈썹을 까딱이며 눈만 굴렸다. 입을 열면 당장이라도 자신을 향해 쏘아질 듯 장전 중인 남자가 부담스러운지, 몇 번이고 입만 벙긋거리다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기태정은 그것만으로도 발끝이 다 저릿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세화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덜덜 떨며 제 눈치만 보지도 않고, 저 때문에 울거나 토하지도 않고, 뒤를 대줄 테니 친권은 포기해달라는 요구도 꺼내지 않는다.

갖은 일을 겪은 끝에 깎이고 닳아 무덤덤해진 것에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요 며칠 보였던 태와는 확실히 결이 달았다. 가지고 꺼지라며 아기 신발을 들고 주저앉아 울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어쩌면 앞으로 뭔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실낱같은 가능성이 놓치고 싶지 않아, 기태정은 집요하게 세화를 졸라댔다.

“그냥 솔직하게, 말씀, 하셔서….”

기태정이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라 직감한 세화가 어물어물 말을 꺼냈다.

“이번엔, 네 상황이 어떻든 내 사정은 이랬다고… 통보하신 게 아니라, 미안하다고… 실수였다고 곧장 해명해주셨으니까….”

세화는 조금 민망한 듯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준장님 말씀이 좋았다거나… 이해할 수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알아, 당장 뿌리치고 싶을 정도로 역겹진 않았다는 거지?”

“…….”

“그래. 그거면 됐어.”

미미하게나마 세화의 반응을 끌어내는 방법은 너무 간단해서 허탈할 지경이었다.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주거나, 자신이 무엇으로 보상해줄 수 있는지 대안 같은 걸 제시해주는 것보다 이렇게 투박하게나마 그의 시선에서 자신의 말과 태도를 해석해보는 것. 제 감정에 못 이겨 아기 신발 같은 거나 내미는 게 아닌, 정말로 아이의 삶을 바꿀 방안을 고민해보는 것. 그런 작은 것들….

하긴 세화는 원래도 대단치 않은 것들을 좋아했다. 자산 가치가 상당할 고가의 사치품보다 케이크 상자를 내밀 때 행복해하며 웃던 사람이었다.

“그런 태도와 화법이 좋은 거라면….”

기태정은 성큼 움직여 세화가 물러선 만큼 다시 거리를 좁혔다. 아니, 아까 전보다 더 가깝게 붙어 섰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토록 쉬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온 것 같아 잠시 회한이 밀려오긴 했으나, 허탈해할 시간도 아까웠다. 기초 공식을 배웠으니 이번엔 응용해볼 차례였다.

적시에 진격해야 이 영역은 내 것이라 깃발을 꽂을 수 있다. 그리고 기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승리를 원했다. 상대가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 좆같긴 했어도,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나한테 남기고 간 쪽지에 뭐라고 썼다가 지웠어?”

세화는 입 모양만으로 ‘쪽지….’하고 중얼거리다가 이내 아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전과는 확연히 방향으로 심장이 지끈거렸다. 왜 이미 다 잊은 것처럼 구냐고 어린 애처럼 떼라도 쓰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그 마음 하나로 또 불쑥 유치하게 굴려던 자신을 겨우 견뎌냈다.

음, 어쩌면 세화가 제 앞에서만 점점 어리게 풀어졌던 것도 이런 마음에서 기인한 걸지도 모르겠다. 좋아해서, 그리고 상대방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해서. 효율성이나 적합성 같은 걸 따질 수 없는 감정이라 막무가내로 저에게 매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테니까….

“욕이어도 괜찮으니까 말해. 아니, 말해줄 수… 있어?”

명령이 아니라 청유로, 온유하게 말끝을 고치자 세화의 미간에 먹구름이 잔뜩 꼈다. 기태정은 그 고민과 망설임에서 오히려 긍정을 읽었다. 제가 밉고 싫어서 울고, 정신을 놓고, 그러다 말문까지 걸어 잠갔어도… 이세화는 여전히 이세화였다. 고작 이만큼 숙이고 들어간 것으로도 저에게 모질게 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람들 말이….”

그러나 세화가 머뭇거리며 꺼낸 말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라,

“그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썼다가, 지웠어요.”

기태정은 멍하니 그를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첫사랑? 살면서 들어 볼 거라곤 짐작도 못 했던 표현이 무너진 둑처럼 기태정을 덮쳐왔다.

“원래 그런 건 상대방의 허락을 받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쓰고 나니까 좀, 우습기도 하고, 저 혼자… 그렇게 진지한 마음이었다고, 그걸 준장님께 굳이 말해서… 마지막까지 비웃음을, 살 필욘 없을 것 같아서….”

세화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혼자서 숨어 울었을 그 순간을 뒤적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지웠어요.”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거의 숨소리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분명 민망해하고 있긴 한데 그러면서도 어쩐지 후련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첫사랑.

기태정은 몇 번이나 그 단어를 곱씹었다. 입 안에서 짓이기고, 씹어 뜯으며, 혀끝으로 그 아련한 감촉을 더듬었다.

사랑.

첫, 사랑.

“…그럼 처음 아닌 걸로 하면 되겠네.”

기태정은 조심스레 저를 떼어내려는 세화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이 또한 불가항력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마른 팔뚝을 꽉 쥐고서 도로 돌려세우고 말았다.

“준, 장님….”

“너 죽다가 살아났잖아. 기억도 잠깐 잃었고. 그러니까 처음은 그때 끝난 걸로 하자고.”

서툴러도 최대한 부드럽게, 세화가 부담스럽지 않게…. 막 익힌 접근 방식 같은 건 결국 다 집어치우고는 두서없이 그에게 매달렸다.

“잘할게, 내가. 지금처럼 알려주면 고칠 수 있어.”

“그런, 게….”

“다시 태어난 것처럼 달라질 테니까, 이제 두 번째인 걸로 해.”

동그래진 세화의 눈동자에 얼핏 놀라움이 번졌다. 하지만 그건 기태정의 돌발 행동에 놀라 보인 반사적인 반응에 불과했다. 이내 씁쓸한 체념이 가득 들어차고, 허연 모가지를 단두대 위로 올리듯 툭 떨군다. 뒤이을 반응이야 뻔하다. 거부일 거다.

“아이, 5성 주민으로 올리는 건 지금부터 절차 밟아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이건 재판 끝나면 자세히 얘기하는 걸로 하지.”

세화의 부정을 듣지 않는다고 뭔가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태정은 고집을 피웠다. 먼저 선수를 쳐서 거절의 말을 꺼낼 틈도 없도록 만들었다.

저는 못돼 처먹은 새끼라서 이 정도론 만족할 수 없었다. 웃게 해주고 싶다. 나로 인해 웃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괜찮으니까 예전처럼 제 품에 안겨드는 이세화를 보고 싶었다.

“아이 거주 구역 문제는… 일부러 안 해주려던 건 아니고 너 눈 뜨는 거 기다리느라, 이후론 부작용 살펴보느라 정말 생각을 못 했어.”

“…….”

“그래, 난 아이가 너보다 중요하지 않아.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그래도 예전에 네 앞에서 했던 그 개소리는 만회할 수 있게, 이젠 나도 애한테 신경 쓸게.”

“…….”

“그래도 이걸론 아직 많이 부족하겠지? 네 두 번째 남자가 되기엔.”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은근히 졸라 여운을 남기고 싶었을 뿐, 지금은 물러날 때가 맞았다. 기태정은 더는 강제하지 않겠다는 듯 가볍게 두 손을 들고 뒤로 물러섰다.

세화는 애꿎은 하순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고개를 툭 떨구었다. 동글동글한 정수리만 보여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진 알 수 없었다. 그저 저에게 붙들렸던 팔뚝을 몇 번 쓸기만 할 뿐이었다. 힘없는 그 손짓을 따라 소매가 하느작거릴 때마다 벌건 손자국이 희끗희끗 드러났다 사라졌다.

***

드디어 재판 당일이었다. 환자복 상태로 출석하는 것이 유리하리라 판단해, 세화는 위에 큼지막한 카디건만 하나 걸친 상태였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세화는 꺼벙하게 보이는 제 몰골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다, 이내 체념하고선 거실로 나갔다. 뭘 어떻게 하겠는가.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데다 지금은 처지도 좋지 않은데….

“일어났어?”

침실 문을 열자마자 기태정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향해 다가왔다. 함께 대기하고 있던 박 소위와 최 원사도 당황스러운 낯으로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야말로 재판이 코앞인데, 최근 그는 저 말고는 무엇에도 관심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게다가 그답지 않은 간지러운 말을 자꾸만 늘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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