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21)화 (121/144)

#118

“그… 렇지만….”

세화는 스크린과 태블릿 화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 예전의 의사, 도 그렇고… 며칠 전에 나타났던 꼬마도 그렇고…. 김 소위 쪽에서 그런 평범한 사람들까지 고용해서 저를, 흠, 절 흔들려고 하는 이유가 있는 것… 아닌가요?”

다행히도 이제 세화는 말을 크게 더듬지 않았다. 대신 듣는 사람이 괴로워질 정도로 말하는 중간중간 힘겹게 기침을 했다. 저러다 목청이 다 찢어지는 건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거야,”

“처음으로 선수랍시고, 쿨럭, 판에 끼었을 때도 그랬어요.”

박 소위와 최 원사도 당장의 일은 둘째치고세화의 목 상태가 염려된다는 듯 바라만보고 있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히 자신의 어린 날을 떠올렸다.

“공사 계획은 그럴싸했고, 호, 흠, 호구도 거의 넘어온 참이었는데… 다른 선수들이 초를 쳤어요.제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깎아내리는, 뭐 그런 뒷담 같은 거였는데…따지고 보면 제 말이 앞뒤가 맞는데도, 쿨럭, 손님, 손님들은 갑자기 끼어든 선수들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였어요.”

손님들이 변심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설펐던 어린 선수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걸 수도 있고, 귀가 얇아서 다른 꾼들이 살살 지핀 불에 홀라당 넘어간 걸 수도 있고… 핏덩이 같은 놈이 하는 말을 들어주자니 괜히 배알이 꼬여서 사실은 세화가 옳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을 수도 있다.

손님들은 그날의 기분과 선수들의 태도, 하다못해 오늘의 운세 같은 것까지 들먹이며 세화를 부정하려고 들었다. 진정 옳고 그름을 가리고 싶어서 꼬장을 부렸던 게 아니란 소리다.

세화가 매번 피죽도 못 얻어먹고 두들겨 맞았던 이유는 그따위 초라한 것들이었다. 그냥 너 하는 짓이 재수 없다고, 생긴 게 기생오라비 같아서, 주제도 모르고 나대니 기강 좀 잡아 보겠다고….

어쨌든 설명을 들어 보니 군사 재판이나 김 소위네 집안에서 주도하려는 여론전이라는 것도 여태 세화가 겪었던 화투판과 딱히 다른 것 같지 않았다.

“이것저것 늘어놓는 것보다, 가장 충격적인 하나를,꺼내는 게 훨씬… 나아요.”

김 소위가 하우스를 드나들었다는 것, 손 사장에게 거래 대금을 지불한 내역서가 있다는 것…. 이런 건 반대편에서 트집 잡기 딱 좋다. 원래 빨던 약이나 구하러 갔을 뿐, 천민들을 부려 수상쩍은 약물을 개발하려던 게 아니었다고 우기면 그땐 어떡하려고? 장교가 마약에 손을 댔다는 건 추문 거리에도 들지 못할 텐데 말이다.

“김 소위가 마약 중독자라고, 그거 확실히 하고 싶어서… 고발장 쓰신 거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만든 약물이, 위험하니까, 그래서 재판 여신 거고….”

세화는 불편한지 목울대를 쓸며 눈을 두어 번 찡긋거리다, 콜록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면 1환에서 가지고 온 그 샘플, 새, 쿠, 쿨럭, 샘플 성분이… 그… 문서에 적힌 제조법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거, 그거랑… 김 소위와 오랜 시간 거래한 제가, 그 약을 만들 줄 안다는 게, 제일… 그럴싸한 증거가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

“실제로도… 제가 그 약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된 거잖아요.”

기태정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주제였다. 심지어 당사자인 세화조차도.

세화 또한 일부러 이 얘길 꺼내 기태정의 심기를 들쑤시려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에게 물어보는 거였다. 가장 효과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퍼포먼스가 있는데 왜 굳이 빙빙 돌아서 가려는 걸까.

“너조차 곧장 떠올린 방법을 내가 고려 안 해 봤을 것 같아? 그걸 몰라서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

“…….”

“그래, 원래는 그런 용도로 너 쓰려고 했어. 그래서 대피소에서 그 지랄, 아니 그 난리를 피워가며 Z2 안에 약물 덜어 왔던 거고.”

“…….”

“그런데 너 아프잖아, 지금.”

세화는 수술 이후… 아니, 기태정과 엮이게 된 이후로 몸도 마음도 터무니없이 약해진 상태였다. 하도 마음을 베여서, 충격이 커서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을 정도다.

더 큰 문제는 수술 당시 A7을 다량으로 복용했다는 거다. 과장 좀 보태서 현재 세화의 몸 절반은 피가 아니라 A7로 채워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몸뚱어리를 하고선 마약에 손을 대겠다고? 제조를 위해 혀끝으로 맛만 보는 정도라고 하더라도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준장님은… 꼭 이기고 싶으실… 테니까,”

“널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 않더라도 이길 거야. 그 정도로 무능했으면 준장 배지 달고 있지도 못했어. 무엇보다….”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세화를 말리려던 기태정은 한 박자 늦게야 방금 자신이 고른 표현이 썩 좋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널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 않겠다 어쩌고 했던 대목은, 세화의 입장에선 자신을 이 일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겠다는 건가 그리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젠 널 한낱 소모품 같은 걸로 여기지도 않고.”

잠시 말문이 턱 막혀 한 호흡 정도 망설이던 기태정은, 결국 부드러움 같은 건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부연 설명을 멋쩍게 덧붙였다.

어차피 저는 오선란 대장처럼 별것도 아닌 말로 세화를 웃게 할 수 없다. 제가 퍼부은 소소한 선물과 오선란 대장이 들고 왔던 책이 뭐가 그렇게 다른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럴 거면 적어도 세화가 멋대로 넘겨짚을 여지는 없도록 똑바로 말해 주기라도 하자 싶었다.

“네가 이 이상 다치는 거 보기 싫어.”

무던한 선언에 세화는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박 소위와 최 원사, 나 중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지금 같은 방식으로 기태정이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던 적은 없었다. 말씨는 분명 투박하기 그지없었으나, 툭 내던진 그 덤덤한 말은, 뭐랄까… 여태까지 세화가 들었던 기태정의 갖가지 핑계 중 가장 진심으로 느껴졌다.

“이세화. 잘 알겠지만, 난….”

나직한 기태정의 부름에, 눈치 빠른 부관들은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다가 슬금슬금 현관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세화는 갑작스레 둘만 남게 된 것이 당황스러운 듯 목을 쭉 빼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벙긋거리는 입 모양을 보아하니 나 중위를 부르려는 것도 같았다.

기태정은 습관처럼 자신의 대의명분을 들먹이려다, 아차 싶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노라 이미 여러 차례 그리 소명했으나 세화는 제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을 불러주고 짐짓 다정한 척 굴수록 괴로워하기만 했다.

“…그래서 넌 아무렇지도 않았어?”

좀 더 솜씨 좋게 이세화에게 다가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자기중심적인 변명이 아닌, 고압적이지도 않은. 또 군인 같지 않고 살육 기계 같지도 않은 그런 표현법을 배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무뚝뚝한 말투에서 거칠고 천박한 욕설만 덜어낸 것이 아니라, 약물 배합과 해독 방식을 적어둔 것만으로도 그 순간 그가 품었던 감정을 모조리 느끼게 할 줄 아는 이세화처럼….

“다른 새끼들이 네가 짰던 판 파투 내고, 손님들 빼앗아 가고, 널 안주 삼아서 개소리 지껄일 때마다 매번 겪는 일이라 괜찮았어?”

기태정을 피해 소파 끝에 거의 대롱대롱 매달려 앉은 세화는 양 주먹을 꾹 쥔 채로 자기 발끝만 바라보았다.

“아니잖아. 괜찮다고 말은 해도, 사실은 하나도 안 괜찮았잖아.”

“그건, 예전 일인데 지금… 왜….”

“네 말대로 군사 재판도 그와 다를 바 없으니까. 넌 이번에도 똑같이 괜찮지 않을 게 뻔해.”

“…….”

“다만… 이번 일은 내가 멋대로 짠 판이니, 네 눈으로 직접 재판 보면서 상황 확인하고 싶은 것도 이해가 갔어. 그 후에야 나한테 할 수 있는 말도 분명 있을 테고…. 무엇보다 촬영 같은… 그딴 얘기 오가서 너 또 까무러치는 거 보고 싶지도 않고.”

“…….”

“그래서 너 재판 출석하는 거 허락, 아니 출석해도 어쩔 수 없겠다고 결정한 거야. 어차피 거기선 큰 문제 생기기 전에 내가 막아 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야. 그 이상으로 너 아파하는 꼴 보고 싶지 않아.”

세화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다랗게 뻗은 속눈썹이 반 박자 정도 늦게 그 움직임을 따라 팔랑거렸다.

…이번에도 오답이었나. 가슴 언저리가 뜨겁게 달구어지는 기분이었다. 쪽지를 넣어둔 셔츠 포켓 부근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아팠다.

너는 제대로 된 글자도 아닌 검은색 네모 칸만으로도 사람 속을 쥐어짜는데, 나는 널 위한답시고 고른 말들도 전부 다 틀리기만 해. 나름대로 마음을 담아 보려고 해도 너에겐 진심으로 전해지지 않아.

“…어쨌든 재판은 3일 후고, 넌 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마. 네가 얼굴 내비치고 묵비권 행사하는 것만으로도 그쪽에선 충분히 압박을 느낄 거야.”

“…….”

“아, 그리고 오선란 대장이 널 이미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인적 사항 제출할 때 그 부분 유의해서 표기해야 해. 재판 전에 다시 일러 줄 테니까 이 부분만 숙지하고 있어.”

“그, 처리가… 다, 됐어요?”

“어. 지금은 너랑 네 아이 5성 주민으로 편입시킬 거라고 아주 바빠, 그 사람.”

줄곧 기태정의 눈길을 외면하던 세화도 방금 그 말만큼은 도무지 초연할 수 없는지 고개를 팩 돌렸다.

“5성 주민이, 되, 될 수 있어요? 아이가?”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어느새 제 쪽으로 몸을 틀고 이야기에 집중하는 세화의 모습이 반가워서, 기태정은 자신도 모르게 관련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양자 입적 과정부터 해서 거주지 변경 신고하는 법, 그 이후로 해야 하는 부수적인 절차들…. 솔직히 애 같은 건 관심도 없던 기태정으로선 크게 관심 두지 않았던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괜히 아는 척 상세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아, 아이는 아직 이름도… 쿨럭, 없는데, 그게 가능, 해요?”

오랜만에 세화의 볼에 약간의 홍조가 피어올랐다. 예전과 비교하면 표백제 안에 담갔다가 꺼낸 것처럼 창백한 수준이었지만, 아주 옅게나마 꽃물이라도 든 것처럼 생기가 도니 보기 좋았다. 자신의 상황 따윈 알 바 아니고, 아이의 신분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인 모양이었다.

“인큐베이터 번호 등록은 되어 있고, 생물학적 친부는 나니까. 네 신분 바꾸는 것보다야 쉬울 것 같은….”

동그랗게 올라붙은 세화의 뺨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입을 열었던 기태정은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뒤늦게 깨닫고서, 볼 안쪽 살을 세게 짓씹었다.

아, 씨발. 친권 포기해 달라고, 그 약속은 꼭 지켜 달라고 세화가 엉엉 울었던 게 하루 전이었다. 정확히는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밝은 그의 모습을 보니 괜히 들떠서 또 배려 없이 편하게 말해 버렸다.

“이세화, 그… 조금 전엔….”

“네?”

“…일부러 그런 얘기 꺼낸 건 아니야.”

“…예? 어떤….”

“내가 애의 생물학적 친부니 뭐니 했던 거.”

“…아.”

“네 부탁 무시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객관적인 상황이 그렇다고.”

또 초점 잃은 눈으로 저를 보다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겠지. 그리곤 비척비척 자리를 뜰 거고…. 이제 침실에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으니, 저는 이대로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할 거다. 세화가 내던지려 했던 아기 신발과 오늘에야 읽어보게 된 쪽지만 멀거니 바라보면서.

“아… 네.”

한데, 이상하게도 세화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떨떠름한 낯이긴 했어도 알겠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뭐야. 기태정은 조금 당황해서 엄지로 눈썹뼈를 두어 번 문질렀다. 여느 때처럼, 아니 평소보다 훨씬 더 구차하게 주절주절 말을 덧붙였는데… 또 저도 모르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번엔 울지 않는 거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