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20)화 (120/144)
  • #117

    어슷한 시선으로 글자의 생김만 대강 더듬었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인데 이 하찮은 종잇조각에 살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기태정은 한참을 망설이다, 구겨진 종이의 표면을 쓸어 보았다. 접힌 선을 따라 하얀 보풀 같은 것이 일어났다. 손끝에서 보들보들하게 흩어지는 그 감촉은 어쩐지 이세화를 닮은 것도 같았다.

    헤스타 7밀리, 알리온 15밀리, 티란정 9밀리 물 630밀리 넣어서 희석한 다음

    약병 용량만큼만 옮겨담았어요

    첫 줄을 읽어 내려가던 기태정은 잔뜩 낯을 굳혔던 것이 무색하게 짧게 웃고 말았다. 처음엔 히석이라고 썼던 건지 올바르게 쓰인 단어 왼쪽에 까만 줄이 몇 개나 죽죽 그어져 있었다.

    불빛 아래에서 읽으니 지워진 글자가 다 들여다보이는데…. 이 생각은 못 했나?하긴.이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었을 리가. 제가도착하기 전까지 감시역들의 눈을 피해 약도 제조하고, 이것저것 숨겨 두느라 바빴을 테니 이런 귀여운 실수를 꼼꼼히 감출여유 같은 건 조금도 없었을 거다.

    해열제를 먹으면 불편함이 좀 덜해요 (특히 눈안이 뻑뻑하고 입이 바싹 마를 때)

    아리스민이나 케론 성분이 들어간게 좋아요

    그리고 당분간 몸 뎁히는 약이나 음식은 피하세요

    나 중위님이 보시면 좋은 회복제 잘 챙겨드릴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알려드려요

    글귀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갈수록 기태정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마지막 문장 다음에도 새카맣게 줄이 처져 있었는데, 위에서 단어 몇 개 지웠던 것과는 달리 여기엔 거의 네모나게 칸을 그려 놓다시피 했다.

    천장 쪽으로 종이를 들어 조명 아래 비추어 봐도 원래 무슨 글자를 썼던 건지 읽을 수 없었다.

    세화가 꼭꼭 숨긴 말은 무엇이었을까. 날 떠날 준비를 하면서 어떤 원망을 쏟아 냈으려나. 기태정은 꼼꼼하게 칠해 두었지만 영 어설프게 보이는 검은색 네모 칸에 오래도록 눈길을 주었다.

    차라리 입에도 담지 못할 저주였으면 좋겠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지만 살인자가 되는 건 찝찝하니 이런 걸 남긴다, 하다못해 그런 이야기였으면 좋겠는데….

    아마도 세화는 본인 성격대로 부드럽고 다정한 말을 썼다 지우지 않았을까 싶다.독한 약을 만들면서도 끝까지 그악스럽게 굴지 못하고 이렇게 상냥한 쪽지를 남기고 간 사람이다. 저를 두고 돌아서면서도 다른 사람이 생기면 나한테 그랬듯 아프게 대하지 말라고 했던 이세화다. 그러니 분명….

    “…음.”

    아. 기태정은 침음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마른 얼굴을 쓸고, 팔꿈치를 무릎에 툭 괴며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코끝에 쪽지의 귀퉁이가 닿아 호흡할 때마다 바랜 종이 특유의 냄새가 났다.

    본 적도 없는 그날의 이세화가 뚜렷하게 그려졌다. 울음 범벅이 되어 할딱이는 숨결, 열이 오른 살결에서 풍기는 따끈따끈한 훈기, 붉어진 눈가, 물기 어린 젖은 얼굴에서 훅 올라오는 체향. 제 감정을 못 이겨 잔뜩 웅크린 채로 파들파들 떨렸을 가느다란 몸…. 그 설움이 절로 전이되는 것만 같다.

    그 설움이 절로 전이되는 것만 같았다. 독한 약 먹어도 안 뒈지는 괴물인 거 안다고 했으면서. 차라리 김 소위 손에 잡혀 죽는 게 낫겠다고 해 놓고는… 왜 이런 걸 준비했어. 뭐하러 적어 놓고 가. 나는… 네가 어떻게 감히 날 떠날 생각을 했냐고, 그 사실에만 눈이 뒤집혀 있는 통에 네가 남겨 준 이야기도 이제야 알게 됐는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심상치 않은 기색에 최 원사가 진지하게 제 상태를 살피려 들었다. 기태정은 됐다고 손을 내저으며 굽히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소파의 헤드레스트에 목을 뉜 채 잠시 조명을 직시했다. 눈이 멀 것 같은 불쾌한 따끔거림은 오히려 기꺼웠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날을 찬찬히 헤집어 보니, 아주 간신히…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주머니 안에 대충 쑤셔 넣고 하우스 사무실을 나섰던 순간이 떠올랐다. 버리지 않고 챙긴 걸 보면 나중에라도 확인해야겠다고, 그 당시에도 분명 그리 생각했던 것 같은데… 왜 지금껏 잊고 있었을까.

    물론 변명거리야 많았다. 약에 함락된 육신이, 뇌가 뭉개지는 것 같은 그 기분은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 약도 약이었지만 이세화가 저에게 한 말이, 그가 자신을 죽일 각오로벌인 짓이 저를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게 했다. 문자 그대로 눈에 뵈는 게 없던 상태였다. 그리고….

    “…하.”

    습관처럼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던 기태정은, 이내 픽 조소를 흘리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침에 세화가 지적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전부 다 들어주겠다고 해 놓고, 다 바꿀 수 있다고 큰소리쳤으면서 이 와중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 들고 있다.

    “준장님. 이세화 씨 왔습니다.”

    자조하던 기태정은 헛기침을 하며 셔츠 포켓 안으로 쪽지를 숨겼다. 이번엔 네모반듯하게 잘 접어 보려고 했지만, 대충 욱여넣었던 형태 그대로 제법 오래 밀봉되었던 종잇조각은 구겨진 흔적을 고스란히 달고 있었다.

    종이는 빨 수도 없고, 다리미로 펼 수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처음처럼 되돌릴 순 없다. 여기저기 금이 간 것 같은 이 실선을 없었던 것처럼 하는 건 불가능하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왔어.”

    의문문도 평서문도 아닌, 어미가 이상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마중이 당황스러웠는지세화는 흐릿한 낯으로 입술만 우물거리다, 발을 살짝 끌며 거실로 들어섰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살이 많이 내렸다. 쓰러지기 직전보다야 좀 나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형편없이 마른 몰골이다. 세화의 도드라진 손목뼈를, 툭 불거진 복사뼈를 훑어보던 기태정은, 문득 무작정 세화를 안고 싶어졌다. 정욕 따윈 하나도 일지 않았다. 다만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꼭 붙어 있고 싶었다.

    네가 남겨 준 이야기도 지금에야 알았다고, 온몸으로 그를 끌어안고 떼를 쓰고 싶다.이젠 뭐가 문제인지 알았으니까,늦었지만 널 소중히 하겠다는 것정도론 부족한 건가. 다시는 애 목숨 가지고 못된 말 안 하겠단 각서 같은 걸 써도, 원한다면 공증을 받아 올 수 있다고 해도… 그래도 안 되는 걸까.

    이전까진 그래도 되돌릴 방법이 있을 거라 여겼다. 모르는 척 세화의 곁에서 뭉개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끝이 부드럽게 늘어지는, 부드러운 그 음성을 들을 날이 다시 올 거라고 믿었다. 저와 달리 세화는 착하고 다정하니까. 언제나 정에 굶주려 있고, 그래서 타인의 체온에 약하니까… 예전처럼 자신의 품 안에서 편히 쉴 날이 오리라 그리 기대했다.

    그런데 이 쪽지를 읽고 나니… 자신이 없어졌다. 세화는 이런 것까지 남겨 줬는데, 제가 퍼부은 것은 네 곁의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는 협박과 보석으로 빚은 개 목걸이, 그리고 장고 끝에 세화가 품겠노라 결심한 아이마저 나락으로 처넣겠다는 빈정거림이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이걸 그 당시에 봤다고 하더라도, 제 천성은 글러 먹어서 똑같이 세화를 구속하려 들었으리란 것이다. 무작정 꺾어서 곁에 두고, 예전처럼 날 보고 웃으라고 강요하다가 결국은 지금처럼 아프게 만들었을 게 뻔하다.

    이러니 세화도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걸 테다. 제가 이따위 인간이라는 걸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저승 문턱까지 밟은 꼴을 보고 나서야, 기억도 잃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지경까지 가서야 뭔가를 깨닫는, 글러 먹은 성정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게… 뭐예요?”

    “자리 앉으시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리번거리던 세화는 박 소위가 스크린으로 김 소위의 증명사진을 띄우자, 목을 뒤로 당기며 후다닥 소파에 앉았다. 무릎과 무릎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저에게서 거리를 벌리는 세화를,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기태정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세화 씨의 재판 출석에 회의적인 입장인 것은 변함없습니다만…준장님께서 지시하셨으니 지금 상황에 대해 간략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꾸물거리던 세화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와 동시에슬쩍 자신의 옆얼굴을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설마하니 재판에 참여하고 싶다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아, 제가 회의적인 건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준장님 말씀처럼 이세화 씨가 다칠 가능성이 커서 그렇습니다.”

    박 소위는 세화에게 군사 재판의 진행 방식을 대략 설명한 뒤, 현재 김씨 집안에서 부리려는 수에 대해서도 정리해 주었다.

    “이전에 이세화 씨에게 접근했던 의사도 그렇고, 얼마 전 그 꼬맹이 일당도 그렇고… 김 중령은, 아, 김 소위의 아버지는 이런 종류의 협잡질에 매우 능합니다. 별것 아닌 치사한 수로 보이지만, 가벼이 쓰고 버릴 수 있는 패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그를 활용해 선동하는 일에도 능숙하죠.”

    “그러니까… 김 소위의 잘못을 저에게 떠넘, 흠, 떠넘기고 싶어 하고,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제가 원래도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여론을 만들려는 중이라는 거죠?”

    “예, 정확합니다. 이세화 씨의 혐의와 별개로요. 그래서 오선란 대장이 이세화 씨를 양자로 들이겠다고 했을 때 크게 난리가 났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세화 씨의 출신과 배경이 그들에겐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으니까요.”

    세화는 어떤 흐름인지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공사 따낸… 신인 선수 죽이고 싶을 때, 도 비슷해요. 손님들 다 떨어지, 라고…. 잘하든 못하든 재수, 쿨럭, 재수가 없다고 소문나면… 다들 지명 안 하니까요….”

    김 소위의 신약 제조에 대한 심문보다는, 너 개인을 향한 인신공격이 주를 이룰 거라고 일러 줬는데도 세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작 그런 이유로 재판에서 저를 숨기려고 했던 거냐며 조금 어이없어했다.

    “어차피 저희는 하우스와 손 사장을 증거 및 증인으로 확보한 상황이니, 이를 전면으로 내세우면 됩니다. 김 소위가 생각보다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더군요. 손 사장에게 약식으로 된 거래 내역서도 써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맞아요. 김 소위가 저한테 바로 대금을, 쿨럭, 대금을 줬는데… 그걸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요구했더니 써 줬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걸로, 끝이에요?”

    “예?”

    세화는 박 소위가 띄워 준 스크린을 유심히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1환에서 빼돌린… 약물 샘플도, 있지 않나요?”

    “아, 예. 물론 그것도 증거물로 제출할 겁니다. 기밀문서에 적힌 성분과 정확히 일치할 테니 그 또한 강력한 증빙 물품이될 거고,”

    “군사 재판은… 여론전이라고 하셨잖아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세화가 화면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허우적거렸다. 최 원사가 그 몸짓에 맞추어 페이지를 앞뒤로 넘겨 주었다.

    “그럼 제가, 그 약을, 그 자리에서 직접 만드는 게… 김 소위가 시켜서 오랫동안 이 작업을 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일 것 같은,”

    “안 돼.”

    세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태정이 단호하게 저지했다.

    “너 재판장 나가는 거, 그걸로 충분해.”

    “그렇지만….”

    “사경 헤매다 겨우 눈 떴으면서 어디 마약에 손을 대.”

    “제가… 복용하겠다는 게 아니, 고….”

    “너 몸 멀쩡한 거 아니야. 부작용은 없는지 아직 추적 관찰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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