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19)화 (119/144)
  • #116

    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저도 모르게 투정을 부리듯 얼굴을 비비던 세화는 몇 초 후에야 그것이 침구의 감촉이라는 걸 깨달았다. 일순 목 뒤가 싸해지는 기분에 눈만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침대 위였다.

    왜 여기 누워 있는 거지? 분명 바닥에 쭈그리고서 청승맞게 울다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세화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트 가장자리가 슬쩍 팬 것을 애써 무시하며,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었다. 까무룩 잠든 자신을 침대까지 안아 옮겼을 사람, 곁자리에 앉았다 간 흔적이 남을 정도로 오랫동안 저를 바라보다 일어섰을 사람…. 말해 무엇할까, 기태정이었겠지.

    “그래서 오선란 대장이….”

    다급히 움직여 조심성 없이 침실 문을 팍 열어젖혔다. 거실에서 정복을 걸치고 있던 기태정과 그에게 보고 중이던 박 소위가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때.”

    기태정은 저를 무시하지 않았다.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오를 법한 껄끄럽고 부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여느 때와 비슷한 가벼운 말을 던질 뿐이었다. 지난밤 겪었던 소란은 꿈이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밖에서 오선란 대장 좀 만나고 올 거야.”

    “…….”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아. 이후론 계속 여기에서 업무 볼 생각이고.”

    세화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어본 남자는 소맷부리를 마저 정돈했다. 대충 보기에 큰 이상이 없는 것 같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뭐 필요한 거 있나? 먹고 싶은 거라든지.”

    제가 잠깐 기억을 잃었던 동안, 기태정에겐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그는 자리를 비울 때마다 꼬박꼬박 무슨 일을 할 거고 언제쯤 돌아올 것인지 저에게 짧게 들려주곤 했다. 마지막은 항상 바라는 것이 있냐는 물음이었다.

    세화는 멀뚱히 눈을 슴벅이다, 손등으로 마른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없었던 일로 할 순 없다.

    그제와 어제, 며칠에 걸쳐 기태정에게 남은 것을 전부 꺼내 보였다. 형편없기 짝이 없는 만듦새의 문장이긴 했어도 가슴속에 가장 크게 얹혀 있던 돌덩이는 들어냈고, 찌꺼기처럼 눌어붙은 울음과 원망도 얼추 다 긁어냈다. 재판만 끝나면 더는 연을 이어 가고 싶지 않다는 의지도 명확히 표명했다.그런데도 기태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태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고 있었다. 세화는 볼 안쪽으로 바람을 훅 불어 넣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도 이렇게 넘어갈 순 없다. 이대로 흐지부지 두면 이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제가 관사에서 들어와 살 것이라 여길 거고, 인큐베이터에서 새싹이를 꺼내는 순간에도 친부로서 곁에 자리하려 들 것이다. 새싹이의 출생 신고며 거주지 신고… 그 모든 순간에 자연스레 함께하려 할 게 뻔하다.

    끝나지 않을 도돌이표를 끊어 내야 한다. 바로 지금, 이 남자와의 마침표를 제대로 찍어야 할 때였다.

    “다녀와서… 알려 주세요.”

    중간중간 염소처럼 소리가 떨리긴 했어도 어제보다는 훨씬 더 매끄러워진 말씨였다. 기태정과 박 소위가 조금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저를 바라볼 만큼.

    “재판에서… 제가 할 일이요. 며칠 후라고, 하셨잖아요.”

    타이의 매듭을 조이던 기태정의 손이 잠시 느려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세화의 말은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본인 할 일에만 집중했다.

    “준장… 님.”

    나름대로 보폭을 크게 벌려 그의 앞으로 다가가 서자, 기태정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고 있는 건지 그림처럼 뻗은 아이홀에 깊은 선이 패었다가 사라졌다.

    “어쨌든 제 이야길 빼놓곤, 김 소위의 그… 약물에 관한 설명은 어려울 거고….”

    “신경 쓸 거 없어.”

    무뚝뚝하게 툭 대꾸한 기태정은 아차 싶었는지, 좀 더 길게 말을 덧붙였다.

    “네가 나설 일 없게 이쪽에서 알아서 준비하고 있으니까, 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예전처럼 무섭게 나오진 않았어도, 세화는 기태정이 이렇게 나올 때 어떻게 굴어야 하는지 잘 알았다. 그 어떤 애원도 조름도 통하지 않으니 자신이 먼저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세화는 물 먹은 눈으로 한참 기태정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뭐든 들어주겠다고? 알려 주면 고칠 수 있다고? 아기 신발 같은 거 들고 왔다고 울컥 심란해했던 제가 등신이었다. 이런저런 조건 달면서, 결국은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인데….

    저 또한 소풍이나 가는 기분으로 재판에 출석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제 이름이 오가는 자리에서, 어쩌면 제 인생이 바뀔 수도 있을 순간에서 배제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어도 좋으니 거기 서 있고 싶기라도 했다. 그뿐이었다.

    “너 다칠까 봐 그러는 거잖아.”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세화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기태정이 다급히 붙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군사 재판이 뭔 줄은 알아? 사람 불러서 가운데 앉혀 놓고늙은 꼰대들이 멋대로 장난질이나 하는 곳이라고.”

    “…….”

    “저 새낀 생긴 게 기분 나쁘니 죽이자, 쟤는 내가 아는 동생한테 부탁받았으니 내버려 둬라… 배심원이랍시고 앉은 새끼들이 이딴 소리나 늘어놓다가 거수로 투표 받아서 그 자리에서 재미로 사람 죽이고 살리는 거, 그게 군사 재판이야.”

    “…….”

    “완장 찬 새끼들이 너한테 무슨 개소릴 퍼부을지 뻔히 보이는데, 거기에 어떻게 널 내보내.”

    세화는 필요 없다는 듯 붙들린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새싹이의 숨결만도 못할 것 같은 그 하찮은 움직임에도 기태정은 쉬이 구속을 풀어 주었다.

    “그런 곳에서 이기고 싶어서, 김 소위 망하게 하려고… 저 끌어들이신 거였잖아요.”

    “…이세화.”

    “흐흠, 그, 이세화 씨. 굳이 직접 출석하지 않으셔도 증언할 방법이야 많습니다.”

    뒤에서 진땀만 빼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박 소위가 이때다 싶어 슬쩍 끼어들었다.

    “이건 예전에도 한번 나왔던 말인데, 오선란 대장 입회하에 증언 내용이 담긴 홀로그램을 촬영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거기서 김 소위가 제조한 약물이나 유통 과정에 대해서 짧게 말씀해 주시면,”

    “촬영… 이요.”

    아까보다 더 가라앉은 세화의 목소리에, 자기 딴엔 분위기를 띄워 보겠다고 보기 드물게 미소까지 띠고 있던 박 소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세화가 이 지경으로 몸이 축난 이유가, 지금 회복실에 머무르게 된 원인이 이제야 떠오른 탓이다.

    “아, 그… 죄송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던 건….”

    “그럴 일 없을 거야.”

    기태정은 박 소위의 어설픈 변명을 자르며, 코끝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오선란 대장과 다른 방법을 논의하려던 참이었고….”

    “…….”

    “네가 나서서 촬영, 같은 그런 일 굳이 안 해도 되도록 마무리 지을 테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요. 어쨌든 제 존재 자체가… 준장님께 유리한, 증거가 되는 건 맞죠.”

    “그 얘기는,”

    “그럼 약속만… 지켜 주세요.”

    증인으로 출석하긴커녕 재판장에 따라가지도 못하게 할 것 같은 분위기다. 홀로그램 촬영 같은 게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이미 멋대로 자신의 처우를 논의하고 있었고, 늘 그렇듯 저에겐 결정권이 주어질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제가 취할 수 있는 것이라도 확보해 두고 싶다. 아이는… 새싹이는 절대로 이렇게 살게 하진 않을 거다. 이전에도 차라리 같이 죽었으면 죽었지, 저 같은 팔자론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세화는 하도 울어 팅팅 부은 고무 같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돌아섰다. 보려고 본 것은 아니었는데, 기태정이 아득 이를 사리무는 것이 눈에 흘끗 들어왔다. 그마저도 아주 찰나여서 확신할 순 없었지만….

    그리고… 놀랍게도 그게 전부였다. 남자는 제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고, 건방지다며 돌려세우지도 않았다. 실낱같은 바람이 손목 어딘가를 스치고 갔을 뿐이다.

    기태정이 뒤늦게 저를 조심스레 붙들려고 했다는 걸, 뻗은 손끝의 움직임 덕에 이처럼 공기가 팔랑인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세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꿋꿋하게 앞만 보고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

    “이세화는.”

    기태정은 정복 모자를 내던지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인큐베이터 보호실에 계십니다. 호출 넣었으니 나 중위가 모시고 올 겁니다.”

    박 소위는 태블릿 여기저기를 눌러 보고, 스크린이며 홀로그램이 잘 작동하는지 거듭 확인했다. 어려운 이야긴 빼고, 최대한 간략히 세화에게 재판 진행 상황을 설명해 줄 예정이었다.

    재판장에 이세화를 세운다는 게 미친 짓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세화를 향한 돌팔매질을 피할 순 없을 거다. 제 뒤에 숨겨 모난 것에 맞을 일 없게 하겠지만, 뾰족한 말이 무차별적으로 날아다니는 천박한 풍경 그 자체가 세화에겐 괴로운 일이 될 게 뻔했다.

    “정말… 이세화 씨를 증인으로 내보내실 계획이십니까?”

    “…그래.”

    그래, 알고는 있는데…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를 촬영할 거냐고, 어떻게 저에게 또 그런 수단을 내밀 수가 있느냐고, 또 당신 멋대로 내 이름과 삶을 휘두를 작정이냐고…. 감정이 훅 꺼진 이세화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하곤 무언으로 그리 물어 와서, 결국 기태정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세화가 궁금해하는 건 전부 말해 줘. 김 중령이 세화를 어떤 식으로 몰아가려 하는지… 예상되는 건 모조리 다.”

    “예? 그렇지만….”

    원래는 아주 간략하게, 김 소위 집안에서 너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만 읊어 주고 말 생각이었다. 더러운 선동질에 이골이 난 새끼들이니 무슨 말을 들어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재판 당일까지 계속 그 점만 강조하고 끝내려 했다.

    그러나… 병원으로 돌아오며 이세화가 저 모르게 겪어 왔을 상실의 층위를 헤아려 보니, 그마저도 기만일 것 같았다. 제멋대로 베풀려 했던 다정함에 어제의 이세화는 또 무릎을 꺾으며 오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이세화 씨가 예상 못 할 방향으로 튀어 나갈 가능성도 큽니다. 변수를 최대한 줄이려면,”

    “그래도 김 소위 유리한 쪽으론 돌아서지 못해.”

    아이를 위해서라도 본인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편이, 자신이 이끄는 대로 임하는 것이 낫다는 걸 세화도 결국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도….

    “물론 대비책이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 방향을 일부 수정하긴 해야겠지.”

    “방향을 수정한다고 하심은….”

    “내가 조금은 양보할 수 있는 것들, 조정할 수 있는 것들 있으면… 일단은 준비해.”

    박 소위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서 기태정을 바라보았다.

    “준장님….”

    “김 중령 측에 한 수 물러 주겠다는 건 아니야. 거긴 씨발, 끝까지 다 부술 거고… 다른 새끼들 있잖아. 이세화가 혹여 삐끗하는 소릴 하더라도 내 쪽으로 확실히 표를 실어 줄 수 있는 놈들이 있다면….”

    기태정은 이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이런 자신의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조소를 흘렸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데. 이럴 각오까지 되어 있는데…. 이전에는 왜 그렇게 이세화를 울렸던 걸까.

    “제대 늦추고, 그 새끼들이 하는 사업 같은 거 약간은 도와줄 수도 있다고 말 흘려.”

    내가 더는 널 울리고 싶지 않아서 무엇을 내려놓으려는 건지 너는 알까. 아니, 이젠 알고 싶지도 않겠지.

    “…이런 정도까진 나도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

    “준장님.”

    망연히 입만 뻐끔거리는 박 소위 뒤로 최 원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사로 주문하신 물건들 배치 제대로 됐는지 확인 마쳤고, 쌓인 우편물이 많아서 가지고 와 봤습니다.”

    회복실의 열린 문틈으로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곤, 최 원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한 번 확인은 해 보셔야 할 것 같은 것들만 추렸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관의 선언에 얼어붙은 박 소위를 내버려 두고, 기태정은 시큰둥한 낯으로 최 원사가 건네주는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굳이 우편을 보내는 목적이야 뻔했다. 기부금 좀 내 달라는 읍소, 군부 내 사교 모임에 초청하겠다는 개소리….

    “뭐야, 이건.”

    심드렁하게 봉투를 휙휙 넘겨 보고 있는데, 사이에 끼워져 있던 무언가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겉면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조그만 크기의 봉투였다.

    “아, 이전에 준장님 정복 세탁할 때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세탁실 영상 확인해 보니 담당자가 발견 즉시 보관 봉투에 밀봉했고, 이후로도 딱히 손은 대지 않은 것 확인했습니다.”

    “내 옷에서 나온 물건이라고?”

    주머니에 뭘 넣고 다닌 기억이 없는데. 기태정은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작은 봉투를 살펴보았다. 크기도 생김도 너무나 수상쩍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예를 들어 폭발물 같은 걸 심어 뒀더라면 제 손에 닿기도 전에 관사 내의 우편물 보관함 안에서 진작 터졌을 테니 별건 아닐 것 같지만….

    “열어 봐.”

    기태정에게서 도로 물건을 받아 간 최 원사가 스캐너를 꺼내 신중히 살펴보다, 전용 장비로 겉면을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아무 이상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검사를 마친 최 원사가 건네준 것은 허탈할 정도로 별것 아니었다. 내용물은 괴상한 모양으로 찌그러진 종이 쪼가리였다.

    “혹시 모르니 이세화 환자복이나 식사에도 특별히 신경 써.”

    “아, 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내 옷 주머니에도 이딴 걸 집어넣는 놈들인데, 이세화는 가만히 두겠어?”

    설마 5성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병원에 폭탄 같은 걸 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 기분 잡칠 만한 투서 같은 거야 슬쩍 흘려 넣고도 남을 놈들이다.

    기태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바닥보다도 조그만 종잇조각을 펼쳐 들었다. 어찌나 꼬깃꼬깃 구겨져 있었는지, 이리저리 접힌 선을 따라 하얀 빗금이 우묵하게 파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건….

    “준장님? 왜 그러십니까?”

    작게 혀를 차던 기태정이 돌연 둥그렇게 눈을 뜨곤 종이 쪼가리만 응시하자, 당황한 최 원사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

    거기엔…, 엉망으로 구겨진 메모지 안엔…. 이세화가 쓴 것이 분명한 삐뚤빼뚤한 글씨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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