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18)화 (118/144)
  • #115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도로 베개 위에 뺨을 떨어트렸다. 보잘것없는 움직임이긴 했으나 기태정이 그 기척을 읽지 못했을 리 없다. 세화는 눈으로만 조그만 신발을 몇 번이고 덧그렸다. 아직 잠들지 않았노라 대놓고 알리는 꼴이라는 걸 알면서도 절로 움찔거리는 몸을 멈출 수 없었다.

    그냥 장식품일 거야, 아니면 장난감 같은 걸 수도 있고…. 뒤늦게 그런 식으로 외면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확신을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아기들이 신는 신발이 맞았다.

    왜 갑자기 이런 걸 사 온 거지? 놀라움과 얼떨떨함, 그리고 당황스러움이 가라앉고 나니 새카만 의문이 파문처럼 차랑차랑 번졌다.

    물론 기태정이 매일 같이 고가의 육아용 장비를 사들이고 있긴 하지만, 그건 아이를 위하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 의사는 묻지도 않고 돈을 물처럼 써 가며 부담을 주는데, 어떻게 그걸 아이를 아껴서 하는 행동이라 해석하겠는가.

    그런데 이건.

    근사한 포장 같은 것도 없이, 기태정이 직접 손에 쥐고 온 저 아기 신발은….

    “얼른 자.”

    여태 들었던 것 중 가장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술에도 잠에도 취하지 않은, 나지막하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기태정은 그만 자라고 속삭였다.

    그리곤 팔을 길게 뻗어 굳은 세화의 몸 이곳저곳을 짚어 보다가, 조심스레 손등을 쥐었다. 정수리 위로 작은 무게감이, 조금은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턱을 얹고 있는 건지 볼을 묻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매번 그랬던 듯 몸을 포개고 잠들려는 모양이었다.

    “너 내일 아침에 검사 있잖아.”

    세화는 숨을 멈춘 채로 눈을 감았다. 이러다 얇은 살갗이 안구에 쩍 달라붙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게 힘을 주었다가, 번뜩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이불처럼 덮여 있던 기태정을 밀쳐 내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세화야.”

    어슴푸레한 어둠 속, 뻔뻔하게도 또 제 옆에서 눈을 붙이려던 남자는 돌발 행동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친권을 포기해 달라고 부탁했던 게 바로 어제였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넝쿨처럼 몸을 얽으려 들고, 심지어 이젠 저런 걸 가지고 와서….

    이제 자라고, 내 품 안에서 편히 잠들라고…. 발끝에서 뽑아낸 것 같은 기태정의 낮은 목소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들이 세화의 심장을 세게 치고 갔다.

    어떻게든 상기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감정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비우고 덜어 내려 애쓰고 있었는데….

    기태정은 힘도 들이지 않고 세화가 간신히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쑥 끌어 내렸다. 너 혼자만 초연해지지 말라고, 같이 엉켜 이 지옥을 구르자는 듯… 내내 외면하려 들었던 곪아 터진 여러 가지 감정을 쿡쿡 쑤시려고 들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세화는 잘게 경련하듯 떨리는 손으로 상의의 단추를 풀어 내려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뭐 하려는 거냐고.”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아 볼썽사납게 허우적거리는 세화의 손을 붙들며, 기태정이 아연한 얼굴을 했다.

    “해요. 섹스. 그거 좋아하시잖아요.”

    “뭐?”

    “이럴… 거 아니면, 준장님이랑 내가, 제가, 왜… 같이 누워서 자요?”

    과격하게 구는 세화를 따라 일단 몸을 일으킨 기태정은… 이어지는 말에 얼어붙어선, 그저 그러고서 있었다. 손목을 붙들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도 않고, 잠자코 잠이나 자자고 허리에 팔을 감지도 않았다. 그리고 세화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기태정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애인처럼 꼭 안고, 자는 거… 그런 건 우리, 아니 준장님과 저 같은 사이에선…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잖아요.”

    이제 와서 저런 걸 사다 주면, 조금이라도 아이를 생각하는 척 굴면… 그러면 제 마음이 달라질 거라 여겼나? 예전처럼 감격하지 않을까 기대라도 했나 보지?

    아기 신발 같은 걸로 저를 달랠 수 있으리라 여긴 기태정도 싫고, 무슨 수작인지 다 알면서도 저 조그만 것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심장이 지끈거린 스스로에게도 신물이 났다.

    “그냥, 해요. 어울리지도 않는, 거 하지 마시고… 다리 벌리고, 박으, 세요.”

    2환으로 숨을 때만 해도 기태정에게 작은 흠집이라도 내 보려 눈이 뒤집혀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말이 화살이 되고 창이 되어 제 몸에 푹푹 내리꽂혔을 땐, 미움마저 잊었다. 어설프게 뿜어내던 독은… 그냥 삼켜 버렸다. 차라리 자신의 안으로 들여, 다 뭉개 버리자고 생각했다. 속이 죄 녹아 깎여 나가면… 그럼 아픈 것도 모르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고 나서야, 머릿속을 엉망으로 휘젓고 목소리마저 잠시 잃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지금에야, 겉으로 보기엔 무던해질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기태정은 그마저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힘겹게 두른 평온을 멋대로 벗겨 내고는 생각도 못 했던 방향으로 사람 속을 또 뒤집어 놓는다.

    “이러지 마.”

    “하자고요, 왜, 안 해요.”

    세화의 격한 몸부림에 환자복 제일 위에 달려 있던 단추가 뜯겨 나갔다.

    “이러지 마, 세화야.”

    망설이던 기태정은 결국 세화를 품에 안았다. 제 겨드랑이 아래에 세화의 팔을 끼워 넣고는 옆구리와 등을 꼼꼼히 감싸, 마음대로 손을 쓸 수 없게 했다. 그 묵직한 양감에 일순 말문이 막혔던 세화는, 이내 숨을 할딱이며 도리질을 쳤다.

    “왜, 왜 안 해….”

    “한참 전에 사 놨던 건데, 네가 보면 좋아할 것 같았어.”

    “…….”

    “근데 내 생각이 짧았네.”

    흩트리는 남자의 말끝에서 깊은 한숨이 묻어났다.

    표면을 다 깎아 낸 돌처럼 윤채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세화의 눈동자에 조금씩 물기가 어렸다. 이미 다 으깨진 줄 알았던 심장이 또다시 밟힌 듯 지끈거렸다.

    “…준장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또 무슨 심정으로 당신에게 약을 먹이고 떠날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어제 보호실 앞에서 아이 친권 포기해 달라고 부탁했을 땐 또 얼마나….

    “지금도 주, 준장님 멋대로, 굴고 있잖아요. 내키는 대로 위해 주는 게, 그게 잘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다 해결이 되는 거예요?”

    빛을 잃은 밤이라 기태정의 표정이 정확하게 읽히진 않았다. 높은 콧대 덕에 음영이 짙게 져, 더더욱 식별은 어려웠으나 그가 계속 입술을 달싹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럼… 전부 없었던 일이 되나요?”

    “…맞아, 나 하나도 몰라. 그러니까 네가 알려 줘.”

    “…….”

    “고쳐 볼게, 아니 고칠게. 전부, 다.”

    “…….”

    “알려 주면, 앞으론 너도, 아이도 아프게 할 일 없을 테니까….”

    가시가 돋아난 것처럼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쌕쌕 밭은 숨만 몰아쉬던 세화는 다시 버둥거렸다. 꿈쩍도 안 할 것 같았던 그의 몸은 의외로 쉽게 떠밀렸다.

    “아, 으으, 윽….”

    세화는 울음도 구역질도 아닌, 컥컥대는 이상한 호흡을 내뱉으며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곤 곧 죽을 자리를 찾는 나약한 짐승처럼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누가, 이런… 이런 거….”

    기태정이 상 위에 올려놓은 물건을 냅다 집어 들었다. 낚아채듯 거칠게 움켜쥐려 했는데, 패악을 부리고 싶어도 손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걸….”

    이딴 거 필요 없으니 도로 가지고 가라고, 기태정에게 힘껏 던지려고 했다. 내 아이니까, 당신이 백 개를 사다 줘도 새싹이에게 신길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사람 들쑤시지 말라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거….”

    세화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팔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기태정은 여전히 침대 위에서 정물처럼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던지면 된다. 그러면… 되는데….

    “누가 이… 런, 걸….”

    방전된 로봇처럼 세화의 손이 툭 떨구어졌다. 밤톨만 한 신발은 바닥으로 고요히 추락했다.

    …차마 던질 수 없었다. 손안의 신발은 너무… 조그맸다. 조그만데, 또 커다랬다.

    새싹이는 아직 인큐베이터 안에 있다. 나오는 건 한참 뒤일 거고, 걸음마 연습 삼아 신발을 신겨 볼 수 있는 시기는 그보다도 이후일 테니 아직도 멀었다.

    그런데 이 신발은 대충 보기에도 돌은 지나서야 신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생아의 발육 상태 같은 건 관심도 없으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가 좋아할 것 같다고 덜렁 아기 신발이나 사 들고 온 기태정이 어이없었고, 그리고….

    움켜쥔 신발의 이곳저곳에 오랜 시간 동안 손을 탄 흔적이 느껴져서… 속이 울렁거렸다. 흐물거리는 장식들, 손자국이 남아 통통하게 벌어진 안쪽… 멋대로 죽어 버리면 아이를 4환에 처박겠다고 했던 남자가 가져온 조그만 신발엔, 하루 이틀 매만진 것으론 생길 수 없는 결이 잔뜩 남아 있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바스락거리며 침대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태정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술기운 탓인지 거침없었던 예전보다는 조금 느린 동작이었다.

    “쉬어. 앞으론 내가 밖에서 잘 테니까.”

    남자는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아기 신발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이건….”

    엄지로 신발 앞코를 쓱 쓸고는, 기태정은 잠시 침실 이곳저곳에 시선을 주었다.

    그게 전부였다. 뭐라 설명을 덧붙일 줄 알았는데 기태정은 어떤 변명도 없이 그대로 천천히 돌아섰다.

    방문이 닫히고 거실을 향해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린 건 기태정이 시야에서 멀어진 이후로도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세화는 문이 닫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흐으… 으….”

    조그만 신발이 나뒹굴던 자리만 한참 바라보던 세화는 작게 몸을 웅크렸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울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뒤엉킨 기억과 온갖 감정들이 뾰족하게 뭉쳐 심장을 쿡쿡 찔러 댔다. 기태정이 저에게 퍼부었던 말, 저질렀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갑게 굴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아기 신발이 다 뭐라고, 그것 좀 가지고 온 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자꾸만 속이 아렸다. 한참이나 늦은, 사과 같지도 않은 남자의 서툰 사과가 묵직한 탄환이 되어 심장을 쏘고 갔다.

    목적을 잃은 눈물이 지겹게도 흘렀다.

    그렇게 누구도 잠들 수 없는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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