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커다란 손이 늑골이며 명치 아래에 찐득하게 엉겨 붙었다. 이젠 꼭꼭 숨어 버린 세화의 감정을, 그 부스러기라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기태정은 마른 몸을 연신 집요하게 더듬었다. 능숙하게 쓰다듬으며 성감을 달구던 때와 달리 서툴고 투박한 손길이었다.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는지…, 이제는 알아.”
“…….”
“아니, 예전부터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는데… 그때는 그런 감정을 정확히 뭐라고 부르는지 몰랐던 것 같아.”
기태정은 세화의 귓불이나 목덜미 같은 곳을 유심히 살피며, 되도록 부드럽게 말을 이어 나가려 노심했다. 기분이 좋을 때, 부끄러울 때 혹은 서러워 눈물을 떨굴 때…. 세화는 옅은 빛으로 몸을 물들이곤 했다. 수채화처럼 잔뜩 물을 머금은 것 같은 이세화를, 그의 몸이 보여 주는 다채로운 색을 좋아했다. 아니, 저로 인해 그런 예쁜 반응을 보인다는 게 좋았다.
“어디에서도 배운 적 없어서 너는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조차 내 감정을 제대로 설득하려 들지 않았는데….”
그러나 세화는 이전과는 다르게 종잇장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제 입술이 닿았던 곳을 제외하곤 온몸이 버석하게 말라 있다. 바싹 메마르다 못해, 작은 불티라도 튀면 기다렸다는 듯 화르르 다 타 버릴 것만 같았다.
원래는 그의 몸 어디를 짚어도 팔딱팔딱 뛰는 맥을 느낄 수 있었다. 저에게 온통 마음을 내어 준 덕에 세화는 자신의 앞에선 호흡조차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 닿아 있는데도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너 쓰러지고 나서 많이 생각했어. 기억 잃었던 동안엔 더 많이… 생각했고.”
기태정은 조금 더 힘을 주어 세화를 당겨 안았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걸 거다. 큰 수술을 겪었으니 혈색을 잃은 게, 생기가 없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손끝에 느껴지는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평생을 이따위로 살아와서 지금도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을 못 하겠는데….”
“…….”
“내가, 심했어. 너한테도 아이한테도.”
“…….”
“말해 주고 싶었어, 아니, 말해야겠다고 내내 생각하고 있었어. 너 아팠던 동안.”
아마 세화가 들으면 어이없을 수도 있겠지만, 실수를 인정하거나 잘못했다고 시인하는 일이 군인에게는, 특히 스스로의 힘으로 이 자리까지 온 기태정에게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전쟁터에서 오판을 수복하는 방법은 승기를 쥐는 것뿐이다. 회고와 반성 같은 건 언제고 저를 물어뜯으려는 사람들에게 먹잇감을 자처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 잘못했다는 고백….
군부로 끌려와 처음 훈련에 임하던 날, 습관적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던 소년병 하나가 자신의 입버릇을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는지 목도한 이후론 지금껏 진심으로 입에 올려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세화야.”
“…네.”
이후로 어떻게 말을 이어 가야 할지 막막해 불러 본 이름이었는데, 작은 목소리였지만 대답이 돌아왔다. 기태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세화의 정수리에 이마를 기대었다. 당장 예전처럼 그가 웃어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천천히 두드리면 꽝꽝 언 세화의 마음도 조금은 녹지 않을까, 조그만 희망이 그야말로 새싹처럼 움트기 시작했다.
“…더 하실 말, 씀 없으신 거면, 저는… 가 볼게요.”
그러나 찰나 품었던 기태정의 상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화는 덤덤히 멀어졌다. 불렀으니 대꾸했을 뿐, 그는 이름을 불러 주는 제 목소리에 더는 감격하지 않았다.
기태정은 옴짝달싹도 못 하고서, 세화의 하얀 손이 몸통을 휘감고 있던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 내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준장님 얘기를 무시, 하거나… 쿨럭, 그런 건 아니, 에요. 그냥… 어려우셨, 을 거라고, 생각해요. 준장, 이라는 위치에서… 또 준장님이, 처, 처한 상황… 에서는….”
“…….”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준장님은… 저를 버리, 신 게 맞아요.”
세화가 제 아랫배에 걸쳐져 있던 새끼손가락마저 들어내자, 기태정의 손은 그대로 힘없이 툭 떨구어졌다.
형편없는 악력이었으나 일거에 기태정을 무력화시킨 세화는 다시 묵묵히 발을 옮겼다. 언젠가 제가 놀렸던 것처럼 형편없이 느린 걸음으로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다, 머뭇머뭇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이참에 전부 마무리 짓고 말겠다는 결연함마저 느껴지는 낯이었다.
“준장님은….”
“…….”
“준장님은… 준장님께 좀 더 소중한 걸… 고르신 걸 테고… 저는 멋대로 준장님을 좋아해서, 혼자서 들뜨는 바람에… 준장님의 그 방식이, 그 선택이, 아주 많이… 아팠어요. 그것뿐, 이에요.”
아니야. 이세화. 나는 정말 몰랐어. 기태정은 입술만 달싹였다. 속말로는 몇 번이고 세화를 부르고 있는데도 어쩐지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저를 보는 표정이 낯설어서, 정말로 끝을 고하는 것 같은 지금 그 말이 믿기지가 않아서….
“밉다는 말로도, 쿨럭, 부족할 정도로 준장… 님이, 미웠, 는데요. 이젠…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기태정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미미했던 그 움직임은 세화가 움찔 놀랄 정도로 점차 거세졌다. 아래턱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세화가 깨어나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제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뭘 느꼈는지 고스란히 꺼내 보여 주고 싶었다. 아니라고, 널 버린 적 없다고. 그럴 생각 해 본 적도 없었다고. 처음부터 너에게 이렇게 평범하게 대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내내 그런 생각만 했다고… 어떤 곡해도 없이 똑바로 전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세화는 이미 무엇도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예전에는, 그랬던 것 같아요, 준장님이… 한마디만, 미안했, 다고… 그 한마디만 말해 주면, 그러면 아마도….”
어떻게든 당신을 다시 마음에 담아 보려 애썼을 것 같다고, 그랬던 적도 있었노라고 세화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기태정이 이제 그 어떤 적확한 언어로 자신의 심리와 정황을 서술해준다고 한들 소용없다는 완곡한 거부이기도 했다.
“재판은, 도와, 드릴게요… 꼭 이기고 싶어서, 하우스까지… 오셨던 거잖아요.”
“…….”
“대신 새싹, 아니, 아이의 친권은… 포기해 주세요.”
“세… 화야.”
“이 약속은, 지켜 주셨, 으면, 좋겠… 어요.”
구태여 더 물을 것도 없이 피부에 와 닿았다. 이게 마지막이다.
세화가 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자, 유일하게 소원하는 바는 아이와의 연결 고리를 완전히 끊어 내는 것이다. 다 무너진 신뢰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싶다면 그렇게라도 해 달라고, 이세화는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
세화는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기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몸을 돌렸다.
모든 걸 다 포기한 것 같은 주인의 걸음을 쫓아, 기태정에게 메여 있던 세화의 조그만 그림자도 톡 떨어져 나갔다. 새카맣게 뭉쳐져 있던 그것은 세화의 몸짓을 따라 동그랗고 가느다란, 사람 같은 형상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복도의 코너를 돌아 세화의 몸이 기태정의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아직까지 바닥에 걸쳐져 있던 그의 작은 그림자가 다급히 몸을 옹송그렸다. 어깨가 굽고, 마른 등이 파르르 떨린다. 그 서러운 들썩임은 사무치도록 익숙한 것이었다.
…또 나 때문에 우는구나.
그런데 이제 넌 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도 않네.
기태정은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제 것일 줄 알았던 온기는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괜히 몇 번 목을 울리다 고개를 드니, 홀로 남은 자신의 그림자는 여전히 길게 뭉개져 있었다. 벽에 걸린 팻말이며, 창틀이며… 이런저런 것들과 뒤엉켜 복도 끝까지 다리만 쭉 늘어난 괴물 같은 모양새였다.
기태정은 이마를 짚은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괴물.
그래, 그건 정말로… 괴물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
환자복을 입고 생활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여기가 병원이라는 걸 잊었을 거다. 회복실은 침실과 거실도 분리되어 있고, 약욕을 할 수 있는 널찍한 욕조가 설치된 욕실은 방보다도 커다랬다.
물론 기태정의 관사에 비할 바는 아니긴 했다. 그래도 거긴 높은 계급의 군인이 사는 곳이지 않은가. 여긴 집도, 호텔도 아닌데…. 어떻게 병원 안에 딸린 시설이 이렇게 호화로울 수 있는 거지?
세화는 퉁퉁 부은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읽던 책을 제자리에 두며, 5성 안에 집을 마련해 주겠다는 오선란 대장의 제안은 역시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 거다. 분수에도 맞지 않는 걸 가져 봤자 체하기밖에 더 하겠어.
태블릿의 버튼을 눌러 불을 전부 끄고, 푹신한 침구 속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음. 내일은 새싹이의 이름도 정하고, 재판에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도 정리해 봐야겠다. 제가 김 소위에게 들었던 얘기와 하우스 상황을 적어서 주면… 기태정이 알아서 추려 주지 않을까? 아, 이미 다 알고 있으려나. 그럼 재판장에서 제가 읊을 각본이라도 짜 달라고 해야겠다.
재판이 며칠 뒤라고 했더라. 손가락을 꼽으며 날짜를 헤아리고 있는데 멀찍이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기척을 숨기긴 했으나, 침실 가까이 다가올수록 향수 냄새가 확 퍼지는 통에 기태정이 왔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깜짝 놀란 세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무겁고 느린 걸음으로 침실 안에 들어선 기태정은, 테이블 위로 뭔가를 툭 올려 두었다. 그러고서도 한참 후에야 침대의 빈 곳에 털썩 앉았다.
그제야 세화는 기태정이 술을, 그것도 제법 마셨다는 걸 깨달았다. 향수 냄새에 물기가 어린 것을 보니 씻고 온 것 같은데도 옅게 뒤엉킨 술 내음이 느껴졌다.
방 안은 캄캄했고 눈도 꾹 감고 있었는데도 이쪽을 향한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찌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이러다 표현 그대로 뺨이 뚫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잠시 앉은 자리만 지키던 기태정이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그는 이불 끝을 젖히며 기어이 안으로 들어와서는, 늘 그랬듯 뒤에서 세화를 꼭 끌어안았다.
머리칼에 매달린 물기가 세화의 뒷덜미를 축축하게 적시는 바람에 잠든 척한 보람도 없이 몸이 반사적으로 얕게 튀었다.
그런데도 기태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자는 척하는 거냐고, 내가 그렇게까지 굽혀 줬는데도 아직도 뻣뻣하게 구냐며 화를 내지도 않았고, 뜻대로 친권 포기할 테니 이후로 어떻게 처신하라는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제안도, 협상도, 명령도 없었다. 어제 무엇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기태정은 세화를 그저 품에 안고만 있었다.
세화는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얼마간 그러고 있으니 눈꺼풀이 움직이는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쉽게 지치는 나약한 몸뚱어리는 익숙하게 감기는 체온을 기꺼워했다. 제발 좀 자라고, 이제 좀 자자고 여기저기서 소리라도 질러 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물어물 수마에 끌려가기 직전이었다. 마지막으로 크게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어둠에 익숙해진 시선 끝에 뭔가 이상한 것이 걸렸다. 세화는 지금 뭘 본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눈가를 세게 비볐다.
차곡차곡 놓인 책의 탑 위에 제 새끼손가락 길이만큼은 될까 싶은 자그마한 신발 한 쌍이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