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16)화 (116/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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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

    “단순히 네 성 붙여 주고 싶어서 이러는 것 같진 않고.”

    “…….”

    “이세화.”

    어쩐지 기색이 심상치 않아서 이번엔 또 어떤 식으로 사람을 난도질하려나, 작게 움츠러들어 있던 참이었다. 한데 어이없게도 제 이름을 부르는 기태정의 음성에선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나왔다.

    그가 이런 종류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심지어 표현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던 터라, 세화도 조금 놀랐을 정도였다.

    “뭘 사다 바치고 무슨 주젤 던져도 내 앞에선 입 꾹 다물고 있더니, 내 성 가져다 쓰지 말란 얘긴 쉽게 나와? 그것도 다른 사람 앞에서?”

    인큐베이터만 주시하는 척 눈을 내리깔고 있었어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간호사들의 움직임은 고스란히 다 읽혔다. 특히 정보를 수정 중이던 사람은 마지막 입력 완료 버튼을 차마 누르지 못한 채 우물쭈물 바깥쪽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애한테 기씨 성을 주든, 이씨 성을 주든 그건 관계없어. 그런데….”

    세화의 눈길이 따라가는 곳을 그제야 확인한 기태정은 말을 하다가 말고 벽 어딘가를 세게 내리쳤다. 둔탁한 파열음이 나는 것과 동시에 유리로 된 벽이 우윳빛으로 뿌예졌다. 차단 버튼 같은 걸 누른 건가? 어쨌든 그 바람에 창 너머론 사람들의 실루엣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고,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반대편도 상황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간호사들은 양손을 떠밀 듯 휘휘 내저으며 크게 손짓했다. 신경 쓰지 말고 둘이서 편히 이야기 나누라는 신호 같았다.

    “애한테 내 흔적 묻히기 싫어서, 그저 그 이유로 네 성 쓰겠다고 고집하는 것 같은데.”

    “…….”

    “묻잖아. 간호사한텐 잘만 말해 놓고 왜 내 앞에선 입을 안 열어. 어?”

    용케도 욕설까진 내뱉지 않은 남자가 세화의 어깨를 붙들었다. 힘을 주어 몸을 튼 것도 아니고, 그저 손을 얹는 수준이었는데도 기력이라곤 조금도 없는 몸뚱어리는 그를 향해 쉽게도 돌아갔다. 바람이 부는 대로 눕는 하찮은 풀도 이보다는 기운이 세지 않을까 싶었다.

    “왜…, 중요, 해요? 이 얘기… 가….”

    “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제… 아이잖아요. 준장님한, 테는 중요한… 일 아니, 잖아요….”

    “이세화!”

    일부러 기태정의 복장을 터지게 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였다.오히려 자신이 새싹이에게 기씨 성을 붙여 주겠다고 하면 건방지게 굴지 말라고 화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알아서 당신에겐 피해 주지 않겠다는데 왜 저렇게 정색하는 거지?

    그는 아이가 평생을 남루하게 사는 꼴 보기 싫으면 잠자코 따라오라고 했다. 그건 저에게든 아이에게든 소중함이라곤 한 움큼도 없으니 할 수 있는 소리였다.

    한 계절도 다 못 쓰고 버릴 게 분명한 비싼 육아 용품을 미친 듯이 쓸어 담는 것도 예전처럼 배 뒤집어 까고서 꼬리치며 살살 웃는 제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서….

    “…후, 그래.네 성으로 등록부 올려. 그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렇지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 네 입으로 직접 설명해.”

    “…….”

    “아니면 수정 못 하게 할 테니까.”

    “…그러니까, 왜, 요?”

    말 안 하면 새싹이에게 계속 기씨 성을 붙여 두겠다는 겁박에, 세화는 속으로만 차곡차곡 쌓아 두던 물음을 기어이 토해 냈다.

    말이 어려운 것과 별개로 경련하듯 손끝이 떨렸다. 기태정은 더는 그 무엇도 강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유하게 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기태정이 취하는 태도는 세화에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협박으로 느껴졌다.

    “…사람들, 다… 죽인대서 안, 안 숨고 나왔… 어요.”

    세화는 자꾸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춰 보려 괜히 환자복 소매를 쥐어뜯었다. 다시는 대들지 않겠다고 기태정에게 약속했지만, 이 문제만큼은 납작 엎드려 기는 척할 수 없었다.

    “모, 목에 줄 달고서… 개처럼 끄, 끌고 가도… 가만히 있었, 어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준장님이 4환으로 아이 치우겠다고, 나처럼 살게… 할 거라고 했으니까….”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뒤섞인 기억들이 제멋대로 부유하는 통에 정보를 제대로 나열하는 것조차 힘겨운 지경이었다.

    이제 세화는 제가 어떤 사람이었고, 정확히 어떤 존재였는지 그조차 희미했다. 이럴 때 기태정에게 무슨 감정을 느끼는 것이 맞는지, 또 반대로 제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에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좋은 선택지를 판단할 기력도, 의지도, 확신 같은 것도 없었다. 하나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속이 바짝 말라 버렸다. 텅 비어, 메마른 땅 같았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광경이, 당시 기태정의 목소리가 예고도 없이 덮쳐 오면 세화는 그때마다 매번 새로이 마음을 베였고, 매번 아득히 먼 곳으로 추락했다. 피가 철철 나고 열이 푹푹 끓어서 하염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었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는 걸까? 뒤늦게 속내를 털어놓으면, 네가 내 약점이라서 그랬다는 변명만 내밀면 과거는 전부 없었던 것으로 해도 되는 건가? 나는 아직도 당신이 던진 모진 말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그래서 이제는 준장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잖… 아요… 곁에서 조용히, 있는데… 그런, 데 왜… 화를, 내시는 거예요?”

    기태정이 저를 속였다는 걸, 가지고 놀았다는 걸 견딜 수 없어서 도망쳤던 건 맞다. 하지만 지금처럼 세화를 무엇도 아닌 사람으로, 아니 사람도 아닌 숨만 쉬는 하나의 덩어리로 전락시킨 것은 과거의 그가 아니다. 현재의 기태정이 그렇게 만든 거다.

    “어차피… 저를 버린 것도, 아이를 버린… 것도… 준장님이, 신데….”

    “…뭐?”

    세화의 말을 잠자코 들어 주고 있던 기태정은 버렸다,는 대목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세화, 누가 버린 사람을 그런 수까지 쓰면서 되찾아 와.”

    “…….”

    “그땐… 너 습관처럼 자해하려 드는 꼴 보기 싫어서 심하게… 말했어, 지금도 아이보단 네 상태를 최우선으로 두고 지시 내리고 있는 것도 맞아. 그런데….”

    기태정은 바람 빠지는 것 같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연신 중얼거렸다.

    “버렸다고? 내가 널?”

    훗날 조금 자란 새싹이가 스스로 다른 친부를 찾아 떠나겠다고 한다면, 가슴은 아파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 구실 못 하는 혈연이 사는 내내 얼마나 큰 짐이 되는지 지겹도록 봐 왔다. 그런 사람들이 하우스를 먹여 살리는 일등 호구들이었으니까.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어서 저를 떠나는 거라면 아이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순간이 지금은 아니었다. 차라리 오선란에게 보내고 말지, 기태정에게 새싹이를 내어 주진 않을 것이다. 아이는 세화가 간신히 붙들고 있는, 다 놓아 버리려다가도 차마 그럴 수 없게 만든,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하나였다.

    “…예전에 저희, 내기한 적이… 있었죠.”

    다 갈라진 목소리는 듣기 싫었고, 마비된 것 같은 감각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라 천치처럼 더듬거리곤 있었어도… 막상 입을 여니 제법 편안하게 말이 흘러나왔다. 새싹이의 이름마저 남자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절박함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서로에게 도움을 줄 때마다, 1점씩 가져가서… 3점 먼저 채우는 사람이, 이기는… 내기요.”

    “안 돼.”

    복도의 쨍한 불빛 아래 기태정이 가슴팍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각종 표식이 번쩍였다. 눈길만으로 가만히 그를 되짚어 보는 세화의 허무한 시선에서, 끝내 무언가를 예감한남자는 무작정 거부부터 하고 봤다.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저, 1환 대피소에서… 김 소위가 만든 약, 찾아냈고, 끝까지 약이 든 통… 무사히, 옮겼… 어요…. 그리고 곧 있을 재판에서도, 제가… 제가 증언할게요. 김 소위가 계획했던, 것들 다… 말할 테니, 까….그러면 3점, 맞잖아요.”

    “이세… 아니, 세화야.”

    “그러니까… 아이 친권, 포기해 주세요. 제… 소원은, 그거 하나예요.”

    “…….”

    기태정은 이제 숨 쉬는 방법조차 잊은 사람 같았다. 잔뜩 굳어서 얼핏 동상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미동조차 없었다.

    “질릴 때까지… 저한테 마음대로 하시는, 건… 쿨럭, 그건 상관없어요. 진심이에, 요. 지금껏 뭘, 뭘 하셔도 저 잠자코… 있었잖아요….”

    새싹이의 친부는 기태정이었고, 친권 또한 그에게 있다. 아무리 오선란이 선의를 베풀어 준다고 한들 타인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여태 세화는 기태정이 원할 때마다 아이를 보여 줘야 하는, 그런 막연한 정도만 예상하고 있었다. 한데 친권자인 남자의 동의가 없으면 처리 불가한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지금도 그렇다. 아이의 성조차 제 뜻대로 정할 수 없지 않은가.

    그가 먼저 놔주기 전까지 어쩔 수 없이 끌려다녀야 할 처지라면, 그렇다면… 아이의 미래라도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빼앗기고 시작할 순 없다.

    “당장은 아니라도… 얼마 후에라도 그렇게 해 주겠다는, 약속만 해 주, 시면….”

    “…….”

    “아, 아니면… 계약서에 그 대가로, 거, 거부하지 않고 준장님에게 다리를 벌, 벌린다는… 그런 조항이라도, 넣는다면… 어떨까요.”

    기태정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하다못해 머리를 쓸어넘긴다거나 하지도 않고 한숨을 쉬지도 않으니 기분을 읽을 수도 없다. 그저 꾹 쥔 주먹에 벌컥 핏줄이 일어서는 것만 슬쩍 보였을 따름이다.

    부술 수 없는 성벽처럼 자신을 가로 막고 선 남자의 몸과 불투명한 유리 벽을 몇 번이고 번갈아 바라보던 세화는 결국 느릿느릿 발을 뗐다. 새싹이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태정이 대화를 이어갈 의사를 보이지도 않으니 우선 돌아가서 쉴 생각이었다.

    방 안에 아직 읽지 못한 육아 관련 서적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리고 간호사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새싹이라고 부를 수 없으니 진짜 이름도 생각해 봐야겠다….

    어찌어찌 말문은 트였으나 오른쪽 발목은 아직도 완전히 말을 듣지 않아서, 다소 엉성한 걸음으로 기태정을 스쳐 갈 때였다.

    “내가….”

    고장 난 차처럼 세화의 몸이 덜컹 멈추어 섰다. 뒤에서 손목이 덥석 붙들리는 바람에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한데 뭉친 두 사람분의 그림자가 보호실의 복도 끝까지 길게 내달렸다.

    “이세화.”

    “…….”

    “세화야.”

    “…….”

    “세화… 야.”

    불쑥 다가온 기태정이 제 허리를 세게 조여 안았다. 뱀 같은 손길이, 불이 붙은 것 같은 뜨거운 체온이 세화를 칭칭 감쌌다.

    그는 내가, 하고 몇 번 반복해서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세화의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곳에 입술을 묻은 채 얼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애 걸고넘어진 건…, 내가 실수했어.”

    거칠게 내쉬는 숨결로 드러난 살갗이 축축해질 때쯤, 기태정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길어온 것 같은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징징 골을 울려 댔다.

    “버린 적 없어.”

    불안하게 쿵쿵 뛰는 남자의 심장 박동이 등을 타고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기태정은 온몸으로 세화를 안은 채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내가 널 왜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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