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14)화 (114/144)
  • #111

    “…그래서 이 모드를 작동시키면 성장통을 크게 느끼지 못합니다. 아기가 칭얼거리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요즘 가장 많이 찾고 계신 제품이기도 하고요.”

    세화는 반쯤 넋이 나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최신식 기술이 탑재되었다는 요람인지 뭔지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설명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기태정은 그걸 긍정의 의미로 해석했는지 직원에게 곧장 카드를 내밀었다. 새카맣고 두꺼운, 세화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연방 은행의 카드였다. 그가 저에게 건네줬던 것과 차이점이 있다면 가운데에 공군 표식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 말라는 뜻으로 도리질을 쳤으나, 기태정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알면서도 무시하는 걸 수도 있고…. 그렇게 오늘도 어디에 쓰면 좋을지 알 수 없는 물건이 세화의 앞으로 차곡차곡 쌓여 갔다.

    “색상은 이게 전부인가?”

    “맞춤 제작 가능합니다. 따로 원하시는 색상이 있으십니까?”

    “글쎄, 아이가 이 사람과 똑 닮아서… 좀 더 밝고 화사한 계열이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어머, 사모님과 닮으셨다니 아기도 너무 예쁠 것 같아요. 그럼 사모님 피부톤에 어울리는 색으로 찾아보겠습니다.”

    직원은 컬러칩을 추려 준장님의 개인 정보로 보내 드리겠다며 공손히 인사했다.

    아기들 낮잠 잘 때 추천한다는 침대랑 내 피부색이 대체 무슨 상관인데. 세화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기태정은 매일같이 저와 연회장을 돌며 특별전에 전시된 고가의 장비를 쓸어 모으고 있었다. 제가 부담스러워한다는 이야기가 퍼졌는지 이제 직원들은 가격도 말해 주지 않고 기태정에게서 카드만 받아 갔다. 바로 그런 점이 세화를 더더욱 부담스럽게 한다는 걸 모르고… 아니, 직원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겠지. 중요한 손님은 준장인 기태정일 테니까.

    오선란 대장이 다녀간 이후로 확실히 기태정이 이상해졌다. 원래도 자기 멋대로 폭격처럼 선물을 퍼부어 주긴 했지만, 요즘은…. 뭐랄까, 설명은 하기 어려웠지만 저를 대하는 느낌도, 방식도 이전과는 다르다.

    일단 옷이나 시계 같은 사치품 같은 게 아니라 아기 용품만 사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저에게 새싹이에 관해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꼭 저에게 잘 보이려는 것처럼.

    “…….”

    세화는 소심하게 기태정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만하자는 나름의 신호였다.

    “왜 이렇게 욕심이 없어.”

    기태정은 혀를 차면서도 옆의 부스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멈춰 주었다.

    “일주일 조금 넘게 남았어. 2차 재판. 이번엔 반드시 사건 종결할 거고….”

    연회장 입구로 돌아서며 기태정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나면… 관사에 필요한 물건 전부 들여다 놨으니까 한번 살펴봐. 적어도 아이 키우면서 불편할 일은 없을 거야.”

    어떤 반응을 바라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어렴풋이 알 것 같긴 하다. 오선란 대장에게서 뭔가 자극을 받은 건 확실해 보였다.

    최근의 기태정은 저에게 명령을 내리듯 제안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말을 내뱉다가도 이게 아니라는 듯 입술을 꾹 깨물거나, 어미를 슬쩍 흐리는 걸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습관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서, 여전히 약봉지와 비싼 육아 용품을 함께 건네주며 협상하려고 들긴 했지만….

    “더 필요한 건 없나? 뭐 나도 애를 키워 봤어야 말이지.”

    “…….”

    세화는 묵묵히 기태정을 따라 걸었다. 체한 것처럼 명치 아래가 묵직했다. …꿈에도이런 걸 바란 적 없었다. 오선란 대장이 주고 간 책이나 배냇저고리 같은 걸로도 충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역시 새싹이에게 최고로 좋은 걸 해 주고 싶었다. 아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수준에서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를 말하는 거지, 장기를 골백번 떼어다 팔아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고가의 물품을 쟁여 놓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 시터도 찾고 있어. 보호실에서 나오려면 아직 멀긴 했지만… 미리 수배해 둬야 좋은 사람 섭외할 수 있다고 하길래.”

    시터…? 세화는 한숨 대신 침을 크게 삼켰다.

    기태정이 주는 것들은 결국 다 빚이다. 그의 목적은 재판에서 이기는 것이니, 이후론 쓸모를 다한 저와 굳이 엮일 이유가 없다. 지금이야 변덕 부리듯 이것저것 퍼부어 주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그땐 또 어떻게 변해서 사람을 쥐어짤지 모를 일 아닌가.

    물론 예전에는 그 이후로도 그가 저에게 질리지 않는다면 기꺼이 만남을 이어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세화는 뜨거운 물을 삼킨 듯 목 안이 쓰려, 목울대를 톡톡 두드렸다. 기태정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모습이 전부 거짓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캄캄한 분노로 눈이 반쯤 뒤집혔을 땐 그것도 다 연기였던 거라고 파르르 떨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 사람은 저 같은 사람에게 없는 마음을 연기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다.

    기태정에게 약을 먹이고 돌아섰을 때 했던 말 그대로다. 진정성의 문제였을 뿐, 어쨌든 저를 좋아하긴 했던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결국 특수한 목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자신이 품었던 마음과는 다르다.

    게다가 새싹이를 4환에 버리느니 마느니 했으면서, 왜 난데없이 아이를 챙겨 주는 건지 모르겠다. 더욱 황당한 건 자신이 관사로 들어와 살 것이라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거였다.

    “여기 잠시 앉아 있어.”

    기태정은 마실 것 좀 사 오겠다며 연회장 앞에 꾸려진 쉼터에 세화를 데려다주었다.

    혼자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숨어서 지키고 선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걸 알고 있다. 어차피 새싹이가 인큐베이터 보호실 안에 있다. 아이만 두고 홀로 도망치지 못할 거라는 거 뻔히 알면서 왜 그러는 걸까.

    세화는 소파에 털썩 앉아 허벅지며 무릎을 통통 두들겼다. 나 중위 말로는 걷는 건 조금 좋아진 것 같다던데, 제가 느끼기론 똑같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목은 아까부터 계속 따끔,

    “…….”

    …아. 세화는 놀라 목 부근을 꼬집듯 눌러 보았다. 그래 봤자 겉의 살갗만 괴롭히는 것에 불과했지만, 안쪽에서 확실히 통각이 느껴졌다.

    오선란 대장이 다녀간 이후로 감각이 예전보다 풍부해진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한데 그 덕에 목청까지 조금씩 뚫릴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 사람이 딱히 뭘 해 준 건 아니었다. 거창한 위로를 건네지도, 앞으로의 반짝이는 청사진을 들려주지도 않았다. 당장 며칠 전에 다시 들렀을 때도 사다 준 책을 같이 읽고, 모르는 말이 나오면 검색해서 보여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왜….

    세화는 어리둥절해져 자신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모르겠다, 나도.

    의미 없이 텅 빈 복도에 눈길을 주던 세화는, 바닥에 떨어져 팔랑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생김이나 크기를 보아하니 영수증 같았다.

    혹시 기태정이 흘리고 간 건가? 알 바 아니라며 뚱하니 외면하려던 세화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래, 챙겨 두면 나중에 몰래 환불이라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삐걱거리는 다리를 달래 가며 상체를 숙였는데,

    “아야!”

    어디서 솟아났는지 이쪽으로 맹렬하게 달려오던 꼬마와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놀란 세화는 나동그라진 아이 쪽으로 쭈뼛쭈뼛 다가갔다.

    꼬마가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바지춤에 엉망으로 뭉개졌으나, 이거야 빨면 되는 일이고… 제법 큰 소리가 났는데 많이 다치진 않았으려나? 당황한 세화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여기가 병원이라 다행이었다. 혹시 아픈 곳이 있다고 하면….

    “손대지 마!”

    그런데 꼬마는 눈을 뾰족하게 치켜뜨고는 세화의 손등을 짝 쳐 냈다.

    “…….”

    “나 당신 누군지 알아! 준장님 아이 가져서 팔자 고친 하층민!”

    아이가 무안하지 않도록 다감하게 재차 손짓하려던 세화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5성엔 발도 못 들이는 하층민 주제에 이젠 우리 엄마 영수증까지 멋대로 훔쳐 가려고?”

    아, 기태정의 것이 아니었구나. 하긴. 이런 걸 챙길 사람이 아니었다. 챙겼다고 하더라도 흘릴 성격은 더더욱 아니고….

    세화는 씁쓸한 얼굴로 아이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꼬마애까지 저에게 하층민 운운하며 삿대질하는 게 당황스럽긴 했지만, 예상 못 했던 일은 아니다.

    5성은 좁다. 심지어 이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계층은 그중에서도 일부인 것으로 안다. 이 꼬마도 아마 김 소위 못지않게 귀한 대접 받으며 자랐을 거고, 자신이 가진 특권으로 남을 깔아뭉개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고 있을 거다.

    “하층민이면 여기가 아니라 보호 시설에나 가란 말이야!”

    어린 애가 뭘 알까 싶었다. 부모나 주변 어른들이 하는 얘기 듣고서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거겠지. 그래도 기태정 덕에 팔자 고쳤다는 평은 좀 억울하다고 생각하며, 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 테니까,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으아악!”

    그런데 뺨 옆으로 돌연 훅 뻗어 나온 커다란 손이 아이의 옷깃을 쥐곤 가차 없이 쭉 당겼다.

    “다시 말해 봐.”

    기태정이었다.

    소리도 없이 불쑥 나타난 그는 버릇없는 어린 짐승 다스리듯 꼬마를 덜렁 들어 올렸다. 반대편 손으론 음료 두 잔의 바닥을 한꺼번에 움켜쥐고 있었는데, 어찌나 차분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안에 든 액체가 조금도 찰랑거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보라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기태정은 남녀노소 가려가며 패악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기태정이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공평하게 모든 사람을 좆같아 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린 꼬마를 어쩜 저렇게 거칠게 다룬단 말인가. 제가 어디 다친 것도, 아니 다쳤더라도 겨우 대여섯 살은 됐을 법한 어린애한테 왜….

    “씨발, 이건 부모한테서 뭘 배웠길래 벌써부터 말본새가 그따위야?”

    “으, 으아앙…! 엄마…! 아빠아아…!”

    기태정은 공중에서 아이를 휙휙 돌려 보았다. 그러다 미아 방지용 목걸이에서 익숙한 표식을 발견했는지 차게 웃었다.

    “이 새끼들이 아주….”

    세화는 더 잴 것도 없이 기태정에게 덥석 매달렸다.

    “…….”

    거의 그를 끌어안는 것 같은 모양새로 허리춤을 붙들었다. 갑옷처럼 단단한 남자의 몸이, 촘촘하게 짜인 근육이 꿈질거리는 세화의 손끝에 눌려 움찔 튀었다.

    “……,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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