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오선란은 세화가 편히 누울 수 있도록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책들을 협탁으로 옮겨 주었다. 세화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책등만 하염없이만지작거렸다.
“뭐 사다 줄까? 먹고 싶은 것 있어?”
오선란의 다정한 물음에 세화는 가볍게 도리질만 했다. 똑같은 무표정이었어도 저를 바라볼 때와는 온도가 달랐다.
기태정은 속에서 천불이 나는 기분이었다. 오선란 대장이 다짜고짜 백화점으로 찾아왔던 날, 이세화는 멀리서부터 저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신을 부르는 건지 계속 입을 뻐끔거리다, 다가가 손을 꽉 잡아 주니 애정이 뚝뚝 흐르는 낯으로 연신 저를 흘끔거렸다.
그런데… 분명 그랬던 세화가 저를 타인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오선란을 보며 경계했듯 이젠 저를 향해 가시를 세우고 있다.
“나가지.”
꼼꼼히 이불을 여며 준 오선란이 쌩하니 병실을 나섰다. 기태정은 어물어물 제 눈치만 보는 세화를 빤히 쳐다보다 발을 뗐다. 그 얼굴에 서린 걱정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다. 제가 혹시라도 오선란 대장에게 무슨 짓을 할까 봐 불안해하는 게 틀림없었다.
“너….”
오선란 대장은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허리에 손을 짚은 채 크게 호흡했다. 그는 너, 기태정, 그렇게 몇 번이고 씨근거리다 불시에 주먹을 내질렀다.
젖은 수건을 내려치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기태정의 고개가 팩 돌아갔다. 그래도 대장은 대장이라고, 오선란은 제법 효과적으로 매타작을 할 줄 알았다.
기태정은 볼 안으로 혀를 굴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임관 이후론 누구에게도 맞아 본 적 없었던 터라 기분은 더러웠지만, 새겨진 상흔을 발견하고 이세화가 걱정이라도 해 준다면 그건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후로 오선란은 얼굴이 아니라 배나 정강이처럼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 부위만 골라서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 댔다. 점점 강도가 세지는 것을 보니 더 해 보라는 듯 삐딱하게 구는 저의 태도가 그의 성질을 긁는 데 일조한 것 같았다.
“치료제 먹고 들어오라고 해도 네놈이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난데없이 팅팅 부은 낯짝으로 나타나면 세화가 놀랄 테니까 이 정도로 끝내는 거다.”
투레질하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오선란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힘들어서 도망까지 친 애를 기어이 잡아다 옆에 주저앉힌 결과가 결국 이건가? 고작 이거야?”
어찌나 세게 이를 악물고 있는지 까드득 갈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혹여나 문 너머로 대화가 새어 들어갈까, 한껏 목소리를 죽인 채였다.
“지금 네놈이 누구 아이를, 감히 누구의 아이를…!”
그리 말하는 오선란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누구의 아이? 기태정은 의아함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오선란이 냅다 손부터 올린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건… 좀 이상했다. 친우의 아들을 대하는 태도라기엔… 너무 절절하지 않나?
“오선란 대장님.”
“…….”
“이세화를 낳았다던 그 사람… 정말로 오선란 대장님의 지인분이 맞으십니까?”
“…뭐?”
오선란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감쳐물다가, 이내 냉하니 표정을 얼렸다. 그제야 자신의 태도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격정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알 거 없네.”
아하. 오히려 방금 그 부정으로 기태정은 숨겨진 사연이 있다는 걸 확신했다. 세화를 낳은 사람과 오선란 대장이 보통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설마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친권을 주장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저에게 귀속되는 권리를 주장까지 해야 합니까?”
“너 이,”
“지금은 세화가 힘들어하지만,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겁니다. 제가 계속….”
기태정은 잠시 말끝을 흐리다, 곧 별일 아니라는 듯 턱을 당기고 자세를 바로 했다.
“계속, 곁에 있어 주면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때도 오겠죠.”
“허, 허허…. 세화가 그러던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자기 곁에 있어 달라고? 그러길 원한다고 해?”
오선란 대장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만 터트렸다.
그렇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사실 기태정도 조금 자신이 없었다. 이세화는 이제 날 예전처럼 바라보지도 않는데… 그 역시 같은 마음일 거라 멋대로 대꾸해도 되는 건가.
“내가 어째서 세화에게 무엇도 묻지 않는지 알고는 있나? 나의 양자로 들어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 애가 앞으로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 지금 당장 세화에게 넘어간 자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런 얘기를 왜 늘어놓지 않는지 알기는 해?”
“그건,”
“세화가 많이 아프기 때문일세.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이런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는 게 어이가 없다는 듯 오선란은 픽픽 실소했다. 그러다 다시 힘껏 이를 사리물고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세화는 평생을 험한 곳에서 내쫓기듯 살아왔어. 지금도 고작 스물한 살인 어린 애고. 세화가 무슨 마음으로, 무슨 생각으로 그 하우스에서 꾸역꾸역 버텼다고 생각하나?”
‘이미 세화는 자네를 만나기 이전부터 무너지기 직전이었을 거야.’ 하고 오선란이 한탄했다.
“자네는… 세화가 자네를 볼 때 어떤 눈빛을 하는지 모르겠지.”
“…….”
“그렇게 자네만 좋아하던 애가, 아마 자네를 그 각박한 생의 유일한 기쁨이라 여겼을 애가 이런 일을 겪고서 제정신일 수 있을 것 같나? 지금 미치지 않은 것도 아이가 있기 때문이야. 닥친 일이 견딜 만해서 버티고 있는 게 아니라, 아이 때문에 여기서 무너질 수 없어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거라고!”
작정하고 쏟아지는 비난에도 기태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걸 모르진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모든 일이 다 터졌다면 나았을 거다. 믿고 마음 줘야지, 하던 것이 믿진 않아도 마음은 줘야지, 하는 체념으로 바뀌었을 거고… 다 봉합된 줄 알았던 사건이 줄줄이 터져 나오니, 놔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멍한 눈으로, 입조차 꾹 닫고서 저를 외면하는 걸 테고.다만….
“나 또한 이 재판에서 자네가 이기길 바라고 있네. 나름대로 뒤에서 애쓰고 있기도 해. 예전에 세화가 했던 일들도 전부 김 소위 탓으로 돌리고, 이후로 세화는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니까. 과거는 다 잊고, 다른 스물한 살 또래들처럼. 그야말로 평범하게.”
“…….”
“그리고 그 과거엔, 당연히 자네도 포함되어 있어.”
친권 포기 소송을 바로 걸지 않는 건 오직 그 이유 하나뿐이라며 오선란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 말은, 재판이 정리되고 시간이 적당히 흐르고 나면 그땐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네를 걸고넘어져 봤자 재판에서 김 소위 쪽에 어떤 트집이 잡힐지 모르니 가만히 있는 거야. 그러니 세화를 조금이라도 위한다면 자네가 알아서 물러나게.”
“…….”
“2차 재판이 2주 후였지? 세화 잘 달래서 증언 촬영은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네. 그건 그 애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대신 이후론 세화가 조금이라도 평화롭게 살 수 있게, 자네가 먼저 놓아주게.”
놓아주라고?
앞으로도 이세화가 조용히 잘 살려면, 내가 놓아주기만 하면 된다고?
빠르게 깜빡이던 기태정의 눈이 어느새 서느렇게 벼려졌다.
“제가 왜 놓아줘야 합니까, 이세화를.”
겨우 눈 떠서 이제야 나를 보고 있다고. 반응은 없지만 살아 숨 쉬고 있어. 그러면 된 거잖아. 살아 있으면 아직 늦지 않은 거잖아.
“자네는 정말…!”
“대장님께서 염려하시는 일 없도록, 세화에게 부족함 없이 잘해 줄 겁니다. 물론 아이에게도.”
곁에서 계속해서 잘못했다고 말해 주면 되지 않겠냐고, 확신을 주면 될 거라고… 스무 살의 이세화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 1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지금도 그 가치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아직은 여지가 있다. 위태롭게 너덜거리는 부분은 이어 붙일 수 있을 거다.
…그리 믿고 싶었다.
“기태정 준장, 자네는 정말… 군인처럼 사고하는군. 이 순간에도.”
일단 고지부터 점령하고, 승기를 꽂은 다음 나중을 도모하는.
그 과정이 폐허였대도 이겼으면 그걸로 됐다고 여기는.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 조건부터 내미는 것이 관대한 처사라고 믿는.
이유 없는 포용이나 승리를 위한 희생 같은 건 조금도 고려해 본 적도 없는….
“충고를 해 줘도 알아듣지 못하는 인사에게 괜한 시간을 낭비했어.”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다는 듯 오선란이 절레절레 도리질을 했다. 그러곤 병실을 향해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굳은 턱을 매만지며 아까 전처럼 인자한 얼굴을 그려 보려 노력했다. 몇 번이나 그러다가 끝내 울컥 치솟는 감정을 누르기 어려웠는지, 돌연 이마를 짚으며 목을 푹 떨구었다. 외모로는 실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강고하고 훤칠한 노장의 어깨가 격하게 떨렸다.
“…왜, …뭐하러, 그런 것까지, 닮아서….”
기태정은 물론이고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경호 인력들까지 주춤하며 물러설 정도로 위압적인 그러나 조용한 울음이었다. 흐느끼며 오선란 대장이 무어라 연신 중얼거리는 말은, 누군가의 이름 같았다.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이세화가 아닌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죽었다던 세화의 친부를 부르는 게 아닐까? 당장은 기태정도 자세한 사정은 추측하기 어려웠지만 어쩐지 그렇게 느껴졌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고서 한참을 그러고 있던 오선란 대장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울었던 시간만큼이나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을 다스리던 그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연신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 본인이 뭘 잃은 건지도 모르는 것 같은데…. 자네도 나중엔 알게 되겠지.”
“…….”
“내 앞에서 했던 말들, 뼈에 사무치게 후회할 날이… 아니지, 그래 봤자 그땐 아무 소용도 없을 텐데 더 말해 봤자 뭐하겠나.”
오선란은 멀거니 선 기태정을 내버려 두고 문을 열었다. 세화야,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는 울음기가 전부 걷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기태정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문이 서서히 닫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병실 안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둥근 각을 그리며 바닥을 비추었다가,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한낮인데도 기태정 홀로 남은 복도는 고요했고, 또 어둑어둑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