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오선란 대장? 세화는 저도 모르게 기태정의 시계를 빤히 바라보았다. 뒤늦게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물쭈물 고개를 숙였지만, 기태정은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약을 먹으라며 날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경호 인력만 추가 배치하고 들여보내.”
박 소위에게 무심히 지시를 내리며 세화를 찬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
- 그렇지만 준장님,
“김 중령과 먼저 선 긋고 여기까지 온 사람과 척진 모습 보여 봤자 우리 쪽에 득 될 거 없어.”
- …예, 알겠습니다.
박 소위의 음성이 툭 끊기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병실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서 바깥의 소란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다.
기태정은 세화를 덥석 안아 들어 침대 위에 앉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거부할 틈도 없었다.
“약 안 먹는 이유가 뭐냐고 했어.”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아닌 다른 이를 반가워했다는 책망이나 꾸짖음이 아니라 왜 약을 거부하냐는 추궁이 계속되었다. 여전히 고압적인 기운이 뚝뚝 흐르긴 했어도 기태정의 평소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방향성이 다소 의외로운 물음이긴 했다.
“어디 불편한 거면 그게 뭔지 알려 줘야 바꿔 주지.”
“…….”
“내가 수저 들고 입에 들이민 것도 아니고, 비싼 선물 꾸역꾸역 안겨 준 것도 아니잖아.”
“…….”
“너도 빨리 낫고 싶은 거 아니었나? 그래야….”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아이를 돌볼 수 있을 텐데.
깊게 생각하지 않고 세화를 어르고 달래려던 기태정은 한 박자 늦게야 아차 싶었다. 또 아이를 걸고넘어지려고 했다. 몰아세우려던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항구에서처럼 협박하려던 것도 아니었으나, 세화에겐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세화에게선 대꾸가 없었다. 바로 입을 다물긴 했지만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것인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당신 아이기도 하지 않냐고 울며 화내던 때가 거짓말 같을 정도다.
“…이세화.”
기태정은 답답한 마음에 침대 근처에 놓인 스툴을 끌고 와, 세화의 앞에 자리했다. 정강이가 기태정의 몸을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시야에 온통 들어차는 남자를 피할 재간이 없어 세화는 동그랗게 등을 말았다.
“화내려는 거 아니야.”
“…….”
“…처음엔 너 쉽게 여겼던 거 맞고, 김 소위의 공범 취급했던 것도 맞아.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원래 누구에게도 진지했던 적 없어. 책임지겠다는 말? 농담으로도 해 본 적 없고.”
그간 분위기를 살피느라 내내 속으로만 삭이고 있던 이야기였다. 투박하게 내던지고 싶지 않아서 계속 구절을 고르는 중이었는데, 더는 미뤄선 안 될 것 같았다. 이미 몇 번이고 타이밍은 어긋나 버렸다. 여기서 골이 더 깊어진다면, 유려하게 잘 가다듬은 고백을 내민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제 와서 이런 얘길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확신은 없었다. 온전한 정신이 되면 세화가 받아들여 줄 때까지 속말을 들려주겠노라 다짐은 했지만, 지금 그는 제가 주는 것이라면 몸에 좋은 약도 싫다고 하는 참이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굳어 버린 저 얼굴을 움직이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
처음이었다. 이처럼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전투에 임하는 것도, 그러다 못해 패배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뭐든 상관없으니까 이세화가 아무 반응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다. 저렇게 망연한 얼굴로 멍하니 있는 게 아니라, 차라리 울고 화라도 냈으면 한다.
“그래, 내가 너한테 심하게 대한 적 있었던 건 사실이긴 한데…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기태정은 세화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가만가만 겹쳐 보았다.
“네가 내 유일한 예외가 됐다는 거.”
“…….”
“영상 얘기는… 오해야. CCTV 있는 거 알면서도 너 안은 건 맞지만 네 약점 같은 거 잡을 목적으로 장비 설치한 적은 없어.”
다만… 이 주제론 반쪽짜리 진실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제 마음 편해지자고 대충 이세화를 속여 넘기려는 건 아니었다. 그가 안다면 이 역시 변명처럼 느끼겠지만, 마음의 문을 닫아 말도 못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네가 나랑 씹질하면서 좋아 죽는 기록이라도 있으면 누구라도 강제라고 흠잡진 못할 거란 생각을 한 적 있는 건 맞다. 그렇지만 이세화가 쓰러지기 직전 다급히 설명했듯 CCTV 설치는 시설물을 점거할 때 기본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혹여 김 소위의 사람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일까 봐 하우스 전체를 감시망에 넣은 것에 불과했다.처음부터 세화를 타깃으로 짠 작전 같은 게 아니었다.
이 서버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접근 가능한 사람도 저뿐이긴 했으나 그런 건 세화에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 기태정은 침음을 삼키며 눈을 깊이 감았다가 떴다. 출구가 없는 미궁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이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세화를 속여 넘길 수도 없고, 강제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어도, 이제 세화는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약해 보여서 함부로 솔직할 수도 없게 됐다.
과거 가볍게 내뱉었던 거짓말은 기태정의 의사와 관계없이 홀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이젠 멋대로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고 있었다.
“이세화. 나 너한테만 약해.”
“…….”
“사방에 네가 내 약점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거나 다름없다는 거 알면서도 이렇게 병원에서 내내 죽치고 있을 정도로.”
“…….”
“총도, 칼도, 무슨 독을 써도 안 죽던 나 같은 괴물 새끼의 약점이 네가 됐다고.”
기태정으로선 모든 패를 다 꺼내 보인 고백이었다. 미안하다거나 좋아한다거나… 그런 상투적인 표현은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서 고심 끝에 고른 문장이었다. 이전에 벙커에서 이세화를 조롱하며 그래, 너 좋아한다고 가벼이 지껄인 적 있으니, 그 얘긴 되도록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태정은 세화가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자신의 마음을 묵직하게 전하는 순간을 좋아했다. 이름을 불러 줄 수 없겠냐고 물었을 때나, 제 구멍이 준장님께 걸레처럼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말갛게 웃었을 때라거나…. 이세화는 오직 자신만이 해석할 수 있는 언어로 그의 마음을 속삭여 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기태정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래서 세화의 방식을 나름대로 따라 해 본 거였다. 죽여도 죽지 않는 놈의 약점이라는 말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이세화는 알아줄 거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모든 속내를 털어놓았는데도 지친 낯을 하곤 이어질 이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좋은 말만 하고 대화를 마칠 리가 없다는 듯이. 어떤 조건을 붙여 자기를 괴롭히려나, 그리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
기태정은 입술만 달싹였다. 성격대로 가자면 세화가 기억을 잃었을 때 오히려 기뻐했을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잘해 주면서, 차라리 이대로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길 바랐겠지. 백지가 된 것처럼 편안한 새 시작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기태정은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픈 세화에게 나름대로 잘해 주긴 했으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진 않았다. 또세화를 끌고 오면서 호언장담했듯 목줄을 걸어 두지도, 족쇄를 채워 놓지도 않았다.
물론 그걸 잘한 일이랍시고 세화에게 어필하려는 건 아니다. 그만큼이나 자신이 약해졌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럼 내가 뭘 해 주면 되는 건데.”
맞닿은 손이 작게 움찔거렸다.
“뭘 해 줬으면 좋겠어.”
세화의 검지를 쥐고, 자신의 손바닥 위로 끌어당겼다.
“다 들어줄 수 있으니까, 말해.”
“…….”
“내 곁에 있기 싫다는 거, 네 몸 상하게 하는 것만 빼고.”
내리깐 세화의 속눈썹이 느리게 팔랑거렸다. 그 감촉이 절로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키스할 때 볼이나 눈가를 살랑이던 간질간질한 느낌, 꼭 끌어안고 있으면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자신의 상의를 스치며 작게 울리던 사락거리는 소리….
“이세화.”
목소리가 안 나오면 손바닥에 쓰기라도 하라며 재차 종용하자 그제야 세화가 어렵사리 눈을 들었다. 그러곤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기태정은 숨도 쉬지 못하고 굳은살이 박인 손끝이 움직이려는 모양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래, 욕이라도 좋으니까. 뭐든 써. 말하라고.
똑똑.
세화가 눈을 꾹 감고 손바닥 위로 획을 그어 내리려던 순간,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뜩이나 경계심이 높아진 그는 크게 놀라 저에게서 몸을 떨어트렸고, 기태정은 간신히 욕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선란 대장님.”
문을 열자 예상했던 손님이 앞에 서 있었다. 품 안에 이것저것 차곡차곡 쌓아 올린 그가 간신히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가장 위에 놓인 몇 가지를 예의상 들어 주자, 그제야 오선란 대장의 얼굴이 보였다.
저를 직시하는 오선란 대장의 낯은 한없이 무표정했다. 그러나 들끓는 분노를 감출 순 없는지, 시퍼런 핏대가 이마며 목에 발끈 서 있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탓에 물건을 쥐고 있는 손끝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세화야.”
오선란 대장은 크게 숨을 고르고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기태정을 무시한 채 세화에게로 곧장 다가갔다.
“정신 차렸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급히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바로 들르진 못했다. 너도 충분히 쉬어야 할 것 같았고….”
세화에게서 인사도 대꾸도 없는데도 의아해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황은 대충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오선란 대장 하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 정도로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픈 곳은 없느냐,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수선을 떨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세화의 옆에 자신이 들고 온 물건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넌 태블릿도 없으니 종이로 된 책을 더 편하게 느낄 것 같았다. 늙은이가 고른 거라 최신 유행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지만….”
오선란이 가장 먼저 내민 것은 육아 상식이 담긴 책이었다. 기태정을 볼 때와는 다른 의미로 몸을 움츠리고 있던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우적거리며 손을 내밀어 책을 펼쳐 보더니, 목을 쑥 빼고선 침대 위를 살피기도 했다. 2환에서 데리고 온 이후 세화의 눈동자에 생기가 도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이건 인큐베이터 안에서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지, 무슨 과정을 거치는지 적혀 있는 책이고… 이건 퇴원 이후로 신생아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알려 주는 책이야.”
“…….”
“아, 이건 산부 몸조리하는 법에 관해 적힌 책인데 대충 넘기지 말고 꼭 읽거라. 물론 곁에서 전문적인 사람들이 도와주긴 하겠지만, 그래도 네가 대충이라도 숙지하고 있는 것과 하나도 모르고 있는 건 전혀 다르니까 말이다.”
“…….”
“네가 건강해야 아이도 챙길 수 있어. 그렇지?”
세화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빌이 그려진 파스텔톤의 책 표지를 쓸며 살짝 웃기도 했다.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옅은 미소였으나, 틀림없이 웃고 있다.
기태정은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로 그런 세화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조금 전 저와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진행 중인 일들이 많긴 한데… 당장 너무 많은 얘길 들어 봤자 네 머리만 아플 테니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주마.”
“…….”
“지금은 네 건강과 아이만 생각하기에도 벅찰 테니까.”
세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목소리에 최선을 다해 감응하고 있노라 전하려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기태정은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이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속 좁게 느껴졌지만, 저 또한 그가 건강부터 챙겼으면 해서 어떻게든 약을 먹이려고 했던 거였다. 당연히 그 특별전이라는 행사에도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세화는 오선란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너 아니면 날 죽일 수 있는 게 없다며 어렵게 털어놓은 이야기도, 무엇이든 다 해 줄 수 있다는 약속도… 불과 몇 분 전에 들려주었는데, 그런 건 조금도 모른다는 듯이.
“이전에 통화했을 때 더는 누구도 믿고 싶지 않다고 했지.”
“…….”
“충분히 이해한다. 뒤늦게 자기 마음 편하자고 돈이나 펑펑 뿌리는 아빠 친구, 그냥 아는 아저씨… 나는 그 정도로만 여겨다오. 넌 아이에게만 기대어서 살고. 알았지?”
“오선란 대장님.”
기태정은 뭔가, 더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오선란 대장을 불렀다.
“밖에서 잠시 얘기 좀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