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11)화 (11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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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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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그건 물음이 아니었다. 형식만 빌려 온 확신이었다.

    “…….”

    지글지글 끓는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고 갔다. 세화의 전신을 배회하던 남자의 집요한 눈길이 멈춘 것은 꾹 다물린 입술 부근이었다.

    “…아!”

    눈 깜빡하는 사이 몸이 번쩍 들렸다. 기태정은 저를 안아 들고선 긴 복도를 되돌아갔다. 제대로 된 언어가 되지 못한 울음, 비명… 그런 추잡스러운 것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혼자서는 목구멍을 울리는 것조차 어려웠는데, 기태정의 손이 닿자 이토록 쉽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으, 으으…!”

    세화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몸을 뒤척였다. 내려놓으라고, 나는 새싹이를 볼 거라고, 당신과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남자의 팔을 할퀴고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쳐 봐도 등과 무릎 뒤를 받치고 있는 커다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제가 미는 대로 밀려났던 건 어린 애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이. 혹은 더는 봐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검사받으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

    “네가 나랑 말도 섞기 싫어서 입 다물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아니면, 뭐. 이번엔 병원 사람들 데려와서 총 들이밀려고? 세화는 온 마음을 담아 얼굴을 찡그렸다.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서 노려봐 봤자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겠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곤 이것뿐이었다.

    기태정 또한 낯을 쨍하니 얼리고선 저를 내려다보았다. 빨고, 핥아, 씹어 삼킬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의 태는 여전히 화려했다. 쓰러지기 이전 보았던 모습보다 턱선은 훨씬 더 날카로워졌고, 눈매는 깊어졌다. 신경질적인 느낌이 섞인 약간의 우수가 그를 더욱 그림처럼 보이게 했다. 사람이 아니라, 그림으로….

    한참 동안 세화를 바라보던 기태정은 하순을 세게 짓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검사받아.’라고 위협에 가깝게 재차 명령했다. 어찌나 잇새에 힘을 주고 있는지, 한 글자 한 글자 발음할 때마다 그의 혀가 이를 죄 밀어내, 툭 부러질 것만 같았다.

    버둥거리던 세화는 이내 힘에 부쳐 축 늘어졌다. 그러나 눈을 감아 시야를 차단해 봐도 기태정의 잔상은 사라지질 않았다. 오히려 그의 체온과 체향이 선명해져, 괴롭기만 했다.

    ***

    “왜 안 먹어, 약을.”

    “…….”

    “누가 억지로 밥 먹으라고 했어? 약만 먹으라잖아, 낫고 싶으면.”

    기태정은 알약 몇 개가 들어간 약봉지를 코앞에 들이밀었고, 세화는 고집스레 외면했다. 바닥엔 잔뜩 구겨진 검은 패치가 눈처럼 소복이 쌓여 있었다.

    검사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체력이 저하되어 신체 기능이 전반적으로 둔해지긴 했으나, 모두 정상이라고 했다. 뇌와 성대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 중위를 비롯한 의료진은 한참을 고민하다, 아무래도 심리적인 이유로 잠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는 시시한 결론을 내렸다.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아프지도 않은 오른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실제로도 나 중위가 얇은 쇠막대로 혀 이곳저곳을 눌렀을 땐, 자극을 따라 말캉말캉한 살덩이가 유연하게 움직였다. 혀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고 느꼈던 것도 순전히 저만의 생각이었던 거다.

    어쨌든 당분간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고, 이전과 똑같이 영양제와 순한 신경 안정제가 처방되었다.

    어젯밤엔 뭐든 주는 대로 잘 받아먹었다. 식욕은 여전히 없었다. 하지만 몸이 좋아질 수 있다면 약이든 주사든 가리지 않기로 했다. 새싹이를 불러 주고 싶었으니까. 아이가 제 목소리를 알아듣고 반가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세화.”

    저 약을 먹었더니 무방비하게 잠이 쏟아졌다. 기태정이 옆에 누워, 저를 끌어안고 눈을 감은 것도 까맣게 모르고서 쿨쿨 잠들어 버렸다.

    무엇보다 멍한 기분이 되는 것이 싫었다. 일어나자마자 새싹이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마음과 관계없이 고장 난 차처럼 푹 퍼져서 계속 누워만 있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머릿속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뚝 떼어진 기억들이 자갈처럼 굴러다니며 온갖 요란을 떨어 댔다. 그게… 싫었다. 뭘 애써 정리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그저 온종일 아이만 바라보고 싶었다.

    “그럼 써.”

    기태정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너 글 쓸 줄 알잖아.”

    “…….”

    “약 먹기 싫은 이유, 쓰라고. 나 중위한테 말해서 처방 바꿔 볼 테니까.”

    세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일부러 그의 속을 태우려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기태정은 제 의도대로 움직일 위인도 아니고, 이런 자잘한 일로 상처를 받을 사람도 아니다. 그저… 지쳤을 뿐이다. 기태정의 뜻대로 휘둘리는 것도, 그간의 일이 별것 아니었다는 듯 예전처럼 맞닿으려고 드는 것도… 지금의 저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너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

    “소리 지르지도, 윽박지르지도, 협박하고 싶지도 않고.”

    “……”

    “약 먹어. 내 결심에 예외를 두게 하지 마.”

    기태정은 새 패치를 꺼내 다시 손목에 감아 주었다. 그러곤 멋대로 풀 수 없도록 복잡하게 매듭을 지었다. 이전에 외출을 허락해 준답시고 귀두에 끈을 동여맸을 때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세화는 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스르륵 잠들었던 것과 별개로 저 약이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당장 몸에는 이상이 없다는데 약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러는 거지.기태정이 저를 껴안고 자든, 붙들고 섹스를 하든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식의 강요는 오히려 스트레스만 키울 뿐이었다.

    “실례합니다.”

    지긋지긋한 실랑이가 되풀이되려던 찰나, 담당 매니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기태정은 조금 지친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회복실에 자리가 생겼는데 혹시 그쪽으로 옮기실 의향이 있으신지 여쭈러 왔습니다.”

    “회복실?”

    “예, 호텔 수준까진 아니지만 나름대로 잘 꾸며 두어서 요양이 필요하신 분들이 자주 이용하세요. 본동과 바로 이어져 있는 옆 건물이라 비상시 환자 이송도 편리하고요.”

    위치를 듣자마자 기태정은 혀를 작게 찼다. 거절하려는 것 같았다. 산부들이 몸조리하기 좋아서 자주 이용한다는 담당자의 덧붙임이 있기 전까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좋다는 거지?”

    “병실에서 머무르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느끼시는 분들을 고려해, 회복실은 최대한 일상생활 공간처럼 꾸며 두었습니다. 또한 마사지는 물론이고가벼운 운동 코칭부터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는 교양 강좌 개설까지 전부 산부님께 맞춤으로 제공해 드립니다.”

    “옆 건물이라고 하면… 별관 말하는 건가?”

    “예, 정확히는 A관입니다. 1층부터 7층까지는 편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어, 자주 이용하시는 고객님들께선 병원보다 거대한 몰이나 리조트 같다고 평하시곤 합니다.”

    “옆 건물이어도 무슨 일 생기면 위험하지 않나? 1초만 늦어져도 잘못될 수 있는 일인데.”

    “물론 별관에도 전문 의료진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개관 이래 응급상황으로 인한 그 어떠한 의료 사고도 없었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잠시 턱을 쓸던 기태정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담당자는 공손히 태블릿을 내밀었고, 그는 성의 없이 서명을 마쳤다.

    “방금 준장님께서 등록해 주신 정보로 간단한 안내서 전송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손목시계의 판이 깜빡이더니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기태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넘겨 보았고, 어느 대목에선 제법 오래 눈길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세화의 뜻과 관계없이 병실을 옮기는 것이 결정되어 버렸다.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산부 맞춤 특별전? 이건 뭐야.”

    기태정이 홀로그램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아, 외출이 아직 어려우신 산부님들을 위해 별관 5층 연회장에 작게나마 행사를 열어 드리고 있습니다. 아이 옷은 물론이고 각종 도구까지 편리하게 쇼핑하실 수 있고, 산부님과 보호자께서 다양한 육아 정보를 얻어 가실 수 있는 섹션 또한 함께 준비해 드리고 있어 선호도가 높은 서비스 중 하나입니다.”

    그 말에 세화의 고개가 휙 들렸다. 쇼핑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다만 ‘다양한 정보’라는 건 조금 궁금했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세화의 시선에서 긍정적인 호기심을 읽었는지, 담당자가 친절히 부연 설명해 주었다.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대처하는 방법이라거나, 산부와 아이의 정서 안정을 위한 돌봄 강의 등… 그야말로 신생아에 관해 궁금한 모든 것들을 알려 드리고 있습니다.”

    세화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상류층들만 공유하는 고급 정보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것이어도 충분했다. 초반에 아이를 거부하고 밀어내기 바빴던 터라, 안 그래도 관련 상식이 지극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앞으로는 홀로 새싹이를 돌보고 키워야 한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아이가 아플 때 대처하는 방법 같은 건 꼭 알고 싶었다.

    “언제부터 갈 수 있는 거지? 그 특별전.”

    “준장님께선 별도의 절차 없이 바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별관 5층에 가셔서 장교용 아이디 카드를 스캔해 주시면 됩니다. 시계에 등록된 바코드로도 출입할 수 있으십니다.”

    아, 장교용…. 세화는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기태정만… 갈 수 있는 곳이구나.

    하긴. 무려 5성 병원에서 제공해 주는 맞춤 서비스인데 하층민인 제가 혼자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었다. 이 좋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새싹이가 인큐베이터 보호실에서 지극한 보살핌을 받는 것도… 전부 기태정의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혹시 지금 방문 예정이신가요?”

    “음.”

    기태정은 눈동자만 흘긋 움직여 세화를 보았다. 입가에 슬쩍 머문 미소는 웬만해선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진했다. 물론 담당자는 주요 고객이 보낸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담당자에게 준장님 내외 방문하실 거라 전달해 두겠습니다.”

    다녀오신 이후에 회복실로 모시겠다며, 담당자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

    세화는 과장 좀 보태어 발치에 작은 산을 이루고 있는, 못 쓰게 된 패치들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는 대로 약 먹을 걸 그랬나. 당연히 가 보고 싶었지만… 기태정이 없으면 입장조차 못 할 곳인데…. 그가 순순히 데리고 가 줄 것 같지 않았다.

    어떡하지. 순식간에 열이 훅 올랐다. 정돈되지 않은 기억이 뒤죽박죽으로 펼쳐졌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겪었던 일과 기억을 잃은 이후의 단편적인 조각들이 엉망으로 맞물려, 자꾸만 어지러웠다.

    그렇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뒤적여 봐도 기태정에게 내밀 수 있는 패가 없었다. 4환에 아이를 던져두고 저처럼 비참하게 살도록 하겠다는 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남자였다. 오직 산부와 아이만을 위해 준비되었다던 행사에 그가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가고 싶어? 특별전인지 뭔지 하는 거.”

    그런데 놀랍게도 기태정은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세화는 얼떨떨한 마음에 눈만 슴벅이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협상의 여지가 있는 걸까?

    “알잖아, 그럼 지금 뭘 해야 하는지.”

    뭘… 하라고? 내가 뭘 하면 되는 건데?

    세화는 널따란 소매 끝만 구기다가 어렵사리 기태정이 좋아할 만한 일을 떠올렸다. 입으로라도… 해 주면 되려나.

    순간 눈꺼풀 뒤쪽으로 뜨거운 것이 훅 차올라서, 세화는 바닥을 바라보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너 알아서 하라는 걸 보면 역시 그런… 걸 바라는 거겠지. 예전에 하우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세화?”

    잠시 망설이던 세화는 결심이라도 한 듯,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느리게 기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다. 비참하긴 했지만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아이만 무사히 낳으면 마음대로 몸을 사용하라고 했던 것도 저였으니까….

    기태정의 다리 사이로 떨리는 손을 뻗으며 폐부 가득 숨을 밀어 넣었다. 별것 아니다. 이 사람과 매일같이 했던 일이니까 하나도 무서울 게….

    “이세화!”

    서툰 몸짓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기태정이 대경하며 세화를 붙들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용케도 욕설은 집어삼킨 남자를 보며 세화는 고개를 기울였다. 기태정은 대가를 받고 싶어 했고, 그가 저에게서 취할 수 있는 건 몸뚱어리뿐이었다. 다 뭉개진 기억 속에서도 기태정과 나누었던 섹스는 뚜렷했다. 그가 유일하게 칭찬해 줬던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화를 내는 거지. 섹스, 좋아하는 거 맞잖아…. 영상 같은 걸 찍어 놓고 지금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난 그런 뜻으로… 하.”

    게다가 당황스럽게도, 미간에 잔뜩 골을 팬 남자는 조금… 괴로워 보였다.

    “…됐으니까 약 먹어.”

    “…….”

    “고집부리지 말고 약 먹으라는 뜻이었어. …좆이나 빨아 달라고 하려던 게 아니라.”

    세화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턱을 뒤로 쭉 당겼다. 그게 전부라고? 약이야 당장이라도 제 입 안에 욱여넣으면 그만이다. 그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거다. 그런데 내 손으로 먹으면 특별전에 데리고 가 주겠다고? 왜?

    “나는….”

    어쩐지 쓰린 얼굴로 기태정이 뭐라 입을 떼려는 순간, 그가 찬 시계에서 요란하게 알람이 울렸다. 군의 체계를 잘 모르는 세화가 보기에도 긴급 상황을 뜻하는 것 같았다.

    - 준장님.

    알람을 보낸 사람은 세화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급해 보이는 박 소위였다.

    “왜.”

    - 혹시 병실에 계십니까?

    “그러니까, 왜.”

    - 그… 오선란 대장이 방금 막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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