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
세화는 목 주변을 어설프게 더듬어 보았다. 목청이 단단한 줄로 묶인 것만 같다. 고작 세 치 크기의 살덩이가 굳었을 뿐인데 생경한 감각이 몸 구석구석 빠듯하게 들어찼다.
있는 힘을 다하면 아아, 이런 의미 없는 소리 정도는 작게라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단어와 문장을 읊는 것은 어려웠다. 크게 의식도 하지 않고 사용하던 신체 기관이었던 터라 이럴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뭐, 코에서 피를 쏟든 말문이 막히든 눈이 멀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당장 아이의 상황을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할 뿐이었다.
“일단 지혈부터 하고….”
그러면서 기태정이 다소 엄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목을 감싸고 있던 세화의 손을 떼어 냈다.
“위험하잖아.”
혹시 자해하려는 건 아닌가 걱정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세화는 무심히 기태정을 응시했다. 극에 흥미가 떨어진 관객 같은 시선이었다.
남자의 가지런한 눈썹 끝이며 손끝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기도 했다. 그래, 그는 정말이지 온몸으로 저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목줄을 채우며 비틀린 웃음을 짓던 사람이었다. 지금 자신의 손짓은 살갗을 쓰다듬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무력했다. 겨우 그걸로제 몸이 상할 거라 염려하는 건가?
아아…. 하긴. 뒤에 박힌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질질 끌고 갔었지, 개처럼. 기태정에게 저는 사람이 아니고 소유물이었으니, 저조차도 그 몸뚱어리를 함부로 다룰 수 없노라 경고하는 게 분명하다. 걱정 같은 게 아니라 이 또한 다른 형태의 위협일 뿐인 거다.
“너 수술했을 때도 피가 안 멎어서 위험, 이세화!”
다시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세화를 막아서며 기태정이 매섭게 다그쳤다.
“위험하다는 말 안 들려? 너 죽다 살아났다고!”
너 코피가, 안 그래도 정신없을 텐데, 일단 검사부터, 지금 네 상태, 그리고 그때, 너에게 묻고 싶은, 하려던 말이…. 남자는 무어라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고장 난 스피커처럼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했다.
이런 비슷한 느낌을 예전에도 받았던 적 있는 것 같은데…. 잠시 눈만 깜빡이던 세화는 이내 차오르는 생각을 멀리 밀어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다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기다려.”
당장 세화에게 필요한 사람은 검사와 진료 준비를 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나 중위였다.기태정이 아니라, 아이에 대해 명확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의사를 만나고 싶었다.
기태정에게 이와 비슷한 정도로 상처받고 너절하게 앓았던 날이 언제였는지… 헤아려서 뭐 하겠는가. 이제 세화는 그에게 무언갈 따져 묻고 싶지 않았다. 해명이든 설명이든 전부 필요 없고 궁금한 것도 없으니,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만 알고 싶었다.
세화는 다시 한번 앞을 향해 돌진했다. 저리 비키라고 금속처럼 단단한 남자의 몸을 몇 번이고 들이받았을 뿐인데, 어깨가 벌써부터 너덜거렸다.
“최 원사, 휠체어 가지고 와.”
더는 세화를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한 기태정은 결국 뒤에서 대기 중이던 최 원사를 불렀다.
“아래 들렀다가 바로 검사실로 갈 테니까 나 중위한테도 그렇게 전하고.”
“예, 알겠습니다.”
최 원사가 바람같이 병실 안을 나섰다.
“아이 보여 줄게.”
그 다급한 발소리를 좇던 세화의 시선이 그제야 느릿느릿 기태정을 향했다.
“무사해. 수술 잘됐어.”
과연 이 주제가 정답이었는지, 약에 취한 짐승처럼 비틀대던 세화가 조금은 차분해졌다.
“지금은 인큐베이터 안에 있고.”
기태정은 소매 끝으로 세화의 코 아래와 인중을 꾹꾹 눌러 피를 닦아 주었다.다행스럽게도 코피는 조금씩 멎어 가는 듯했다.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해.”
“…….”
“가장 좋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순조롭게 발달 과정 밟아 가고 있으니까, 아이는 하나도 걱정할 것 없어.”
그제야 세화는 잔뜩 굳어 있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긴장으로 바짝 일어서 있던 어깨 끝이 둥근 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려앉았다.
반대로 기태정은 입술을 감쳐물며 짧게 침음을 냈다. 세화가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수술 직후로 저와 보냈던 시간을 까맣게 잊었을 수도 있다. 혹은 전부 머리에 담아 둔 채 조용히 화를 삭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확실한 건, 이제 세화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이라는 거였다.
기태정은 순간 벌컥 치미는 초조함에 참지 못하고 세화를 당겨 안았다.
“아이가 아니라 네가 문제야.”
“…….”
“이세화, 네가 많이 아팠다고.”
자신을 보지도 않으려고 하는 세화에게서, 2환에서 그를 질질 끌고 왔던 날이 겹쳐졌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세화는 침실에서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속삭였다. 새싹아, 움트는 생명을 부르던 목소리는 다디달았다. 독서등의 조명이 둥글게 번져 있는 침대 위는 한없이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다. 그리고 저는 빛과 설탕으로 빚어진 그 다정한 세상에 영영 초대받을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왠지 그때와 비슷한, 아리고 싸한 느낌이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이세화에게서 느껴지는 건 확연한 거부뿐이다.
“아이는 언제든 보러 갈 수 있으니까, 지금은 잘 있는지 확인만 하고 검사부터 받아.”
“…….”
“…우리 얘기도 그 이후에 하고.”
“…….”
“나한테 따지고 묻고 싶은 거, 있잖아.”
“…….”
“나도 너한테 설명하고 싶은 것 많으니까.”
형편없이 마른 세화의 등을 쓸어 주며 천천히 팔을 풀었다.
구름의 움직임을 따라 창으로 투과되는 빛줄기가 핀 조명처럼 병실 안을 훑고 갔다. 빛무리가 너울거릴 때마다 세화의 눈동자 색이 조금씩 달라졌다. 동공도 확장되었다 좁혀지길 반복했다.
그 때문일까. 어쩐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세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눈길은 정말로 처음 받아 보는 거였다. 저를 보며 울고 악을 쓸 때도, 겁에 질려 올려다보지도 못했을 때마저 이렇게 유리알 같은 텅 빈 눈을 한 적은 없었는데….
기태정은 일순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네, 아니오. 그런 단답형이어도 좋으니 세화에게서 무슨 답이든 듣고 싶어졌다. 그러면 이 불편하고 껄끄러운 기분도 조금은 덜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영 의중을 읽을 수 없는 세화를 보고 있자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준장님.”
기태정이 적당한 화제를 고르는 사이,최 원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문가에 휠체어를 대령했다.
그러나 세화는 그를 외면하며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거동할 수 없는 것도 아닌데, 남의 손에, 정확히는 기태정에게 의지해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세화.”
“…….”
“너 중증 환자라고 했지. 그렇게 무리하면….”
그 와중에도 자꾸만 팔이며 어깨를 붙들려고 하는 그의 손길이 싫어서, 참다 못해 있는 힘껏 뿌리치고 말았다. 놀란 최 원사가 헉, 하고 숨을 삼켰을 정도로 짝 하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그래도 세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남자에겐 잇자국도 들어가지 않을 하찮은 힘이었을 테니까. 하나도 안 아플 거라는 거 다 안다.
물론 약간의 각오는 하고 있었다. 건방지게 군다고 머리채를 잡는다거나, 질질 끌고 가 침대로 내던진다거나… 그런 것들. 뭐, 하고 싶으면 하라지. 세화는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화가 몇 걸음이나 발을 떼는 동안 기태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최 원사는 연신 침만 꿀꺽 삼켰고, 뒤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길 잠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기태정이 제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다만 뭘 어쩌진 않고, 그렇게 자신의 속도에 맞춰 느릿하게 걷기만 했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성질대로라면 저에게 온갖 지랄을 퍼붓고도 남았을 텐데.뭐가 됐든 부축해 주겠다며 멋대로 몸에 손을 대진 않으니 다행이었다.
어쨌든 세화는 오른쪽 다리를 절룩이며 혼자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다. 몸이 안 좋아지긴 했는지,고작 이만큼 걷고서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만큼 힘들었다.기태정은 몇 번이나 손을 움찔거리긴 했지만, 저를 함부로 붙들지는 않았다.
“…음, 이름이 아직 없으면 태명이라도 알려 달라고 하던데.”
차곡차곡 쌓이는 침묵이 껄끄러웠는지기태정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걸어왔다.
“물론 인큐베이터 코드로 등록은 마치긴 했지만….”
“…….”
“새싹이, 가 태명 맞지.”
목이 멀쩡했더라도 굳이 대꾸해 주지 않았을 물음이었다. 왜 자꾸 아이에 대해 궁금해하는 걸까. 재판에 필요해서? 그렇다고 한들 아이의 이름이나 건강 문제 같은 건 기태정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을 텐데. 갑자기 왜 새싹이에게 대단히 관심이라도 있는 거처럼 구는 거지?
“따로 생각해 둔 이름은 없고?”
세화는 눈은 고집스레 대시보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후로도 기태정이 몇 번 더 말을 붙였지만, 세화는 불가항력과 고의가 엉킨 묵언으로 응수했다. 다행히도 인큐베이터 보호실은 그리 멀지 않아 어색하고 아슬아슬한상황은 금방 끝이 났다.
문이 열리자마자 큼지막하게 안내가 쓰여 있어서, 세화는 기태정의 안내 없이도 홀로 새싹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자신의 뒤에 감시하듯 딱 붙어 있었지만.
복도를 지나니 큼지막한 유리창이 달린 보호실이 여럿 나왔고, 뒤따르던 기태정의 발걸음 또한 어느 한 지점에서 느려졌다. 여기 어딘가에 새싹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세화는 아직 찔끔 흐르는 피를 소매로 쓱쓱 훔쳐 냈다. 그러곤 눈을 빠르게 깜빡여 최대한 시야를 선명하게 해 보려 애썼다. 아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 기태정 준장님 오셨습니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첫 번째 보호실이었다.안에 있던 간호사가 남자를 알아보고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무슨 원리인진 모르겠지만 저렇게 두꺼운 유리 벽이 세워져 있는데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 어머, 혹시 이세화 산부님 되시나요?
세화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 몸은 좀 어떠세요?
안에서 돌돌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세화는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목을 길게 빼고 간호사의 뒤만 갸웃거렸다. 미안하게도 온 신경이 모조리 아이에게 쏠려, 친절히 맞아 주는 사람에게 짧은 눈인사를 건넬 여유조차 없었다.
- 하하, 많이 궁금하셨구나. 들으셨겠지만 건강합니다. 아드님이시고요.
아. 간호사가 확인해 보라며 몸을 비끼자, 크림색 인큐베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색 왜건에 실린 뽀얀 알 같은 것이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세화는 어쩐지 목이 메어 유리창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다고 새싹이를 안거나 만질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몸이 저절로 그리 움직였다.
- 위에 떠 있는 홀로그램은 인큐베이터 속 아기의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하는데요, 보시다시피 아주 활발합니다. 발달 상태도 매우 좋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홀로그램 속에선 새싹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선 열심히 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아래엔 대략적인 수치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다른 건 잘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아봤다. 초음파 화면에서 자주 봤던 심장 박동 그래프가 너무도 멀쩡히 움직이고 있었다.거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마지막과는 전혀 달랐다.
아…. 세화는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이마를 벽에 쿵 기댔다.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끅끅 쇳소리를 내며 울었다. 약해 빠져서 풀썩 쓰러지기나 한 못난 아빠를 떠나지 않아 줘서,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건강하기까지 해서… 그저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의식을 잃었을 때 수술해서 그런지 아직도 아이를 꺼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지금도 새싹이를 품고 있을 때처럼 배 속이 콕콕 쑤시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성장 예상도 속에서 보았던 그 아이가 홀로그램 속에서 꼼질꼼질 움직이는 것을 보니… 새싹이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만큼은 실감할 수 있었다. 아이는 무사하다. 게다가 건강하다. 저 팔딱이는 심장 박동이, 내 아이의 것이 맞다….
-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이세화 산부님.
태아들이 취하는 가장 흔한 자세를 하고선, 새싹이는 쉴 새 없이 발을 꼬물거렸다. 조그만 것이 까딱이는 움직임이 사랑스러워서, 세화는 저도 모르게 작게 입까지 벌리곤 인큐베이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건강한 거 확인했으니까 이제 검사받으러 가야지.”
무아지경이었던 세화를 현실로 끌어낸 것은 단단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내일 또 보러 와도 돼.”
“…….”
- 네, 담당이 24시간 상주 중이니 언제든 보러 오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산부님. 태명은 안 지으셨어요? 한번 불러 주세요. 아가도 좋아할 거예요.
아…. 세화는 그제야 사색이 되어 손을 툭 떨구었다.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제 몸이 어떻게 망가지든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태라면… 영영 새싹이를 부를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간 고생했다거나 사랑한다는 근사한 말을 건네주기는커녕,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 줄 수 없는 한심한 사람이 아빠라니…. 태를 빌 사람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새싹이는 제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아.”
꽉 막힌 목구멍을 힘껏 비틀어 보았지만, 겨우 길어 올린 건 말이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없는 탄식이었다. 그나마도 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형편없이 작은 소리에 불과했다. 속으로 몇 번이나 애를 써 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세화.”
다급한 부름과 동시에 몸이 반쯤 휙 돌아갔다. 여태 잠자코 곁에 서 있던 기태정이 새파랗게 굳은 얼굴을 하고선, 한참이나 제 얼굴을, 특히 입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너 왜 아무 말도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