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아. 아아.”
세화는 목을 길게 울리며 의미 없는 소리를 반복해서 내 보았다. 자고 일어나면 목구멍에 유리 조각이 박힌 것처럼 따끔거렸는데, 며칠 전부터는 그런 통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더는 아프지 않으니 잘된 거 아닌가 싶었으나, 이건 고통이 가신 게 아니라 그야말로 마비라도 온 듯 감각이 조금씩 소실되는 느낌에 가까웠다. 이젠 따뜻한 물을 마셔도 온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어쨌든 썩 좋은 현상 같진 않아서, 담당인 나 중위에게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심했다.하루에도 몇 번씩 습격해 오는 기억에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입원하게 된 계기는 아직도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서 머무른 지 얼마나 됐더라. 수술을 받고 일주일 넘게 사경을 헤맸다고 했으니, 그 시간까지 다 합치면 한 달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가만히 앉아 숨만 쉬고 있어도 돈이 줄줄 새어 나가는 와중인데, 별로 효과도 없는 것 같은 검사를 받느라 의미 없는 비용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무슨 수술이었지….”
세화는 망연한 기분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기억이 좀 돌아올 성싶으니 이번엔 몸뚱어리가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대체 무엇을 잊고 싶었기에 제 몸은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생을 거부하는 것일까. 그 누구보다 살아남겠다는 욕구가 강했던 저로선 지금 이 상황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물론 현재 세화의 가장 큰 의문은 기태정 그 자체였다. 그 사람은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것일까.
처음엔 장기라도 떼어 갔나 의심했다. 혹은 그럴 예정이거나.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이런 좋은 곳에 데려와서 비싼 밥 먹여 가며 보살펴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세상에 이유 없이 베푸는 호의 같은 건 없다. 심지어 외모부터 계급까지, 놀랍지 않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그가 뭐가 아쉽다고 저에게 잘못한 것이 많다느니 그런 소릴 한단 말인가. 높으신 분들 손짓 한 방에 하층민들이 벌레처럼 압사당하는 건 드문 일도 아닌데.
분명 제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병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걸 텐데…. 그렇다고 도박이나 마약을 즐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준장님.’
‘어.’
‘혹시 제가 준장님께 그… 다른 방식으로 접대라도 했던… 걸까요?’
최대한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그간 당신에게 몸이라도 팔았냐는 뜻이었다. 1년 후에 대체 어떤 진창에서 구르게 되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지만… 남자가저에게서 취할 수 있는 건 몇 개 되지도 않는데, 제일 굵직한 두 가지를 지우고 나니 남는 건 이것뿐이었다.
‘…뭐?’
‘약이 필요하신 것 같지는 않아서….’
‘…….’
‘그렇다고 화투를,’
‘이세화.’
‘…….’
‘너 몸 파는 애 아니라고 했잖아.’
그리고 기태정은 어렵게 꺼낸 세화의 물음에, 드물게도 낯을 얼리곤 날카롭게 대꾸했다.
‘수지도 안 맞는 장사고, 사람들한테 그런 취급 받는 것도 싫다며. 그게 네 장사 철칙 아니었나?’
‘아… 네, 그렇긴 한데….’
‘그런데 왜. 나 보고 있으면 그런 상상밖에 안 떠올라?’
차분한 남자의 음성에선 뭐라 설명 못 할 감정이 묻어났다. 화를 내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상처 입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런 일이 아니고서야 제가 어디 가서 준장님 같은 분을 만나겠어요.’
‘…….’
‘혹시 그래서, 제 몸이 어딘가 망가져서 수술한 거라면… 아니,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준장이신 분이 굳이 절 돌봐 주실 이유는 없지만….’
‘그런 거 아니야. 넌 그런 적 없어.’
‘…….’
‘…내가….’
이후로도 기태정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가 삼킨 뒷말이 궁금했으나, 세화는 더 캐묻지 못했다. 남자에게선 이 주제로는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뭐,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찝찝함과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뭐라도 좋으니 이 호사스러움을 납득할 수 있는 엄청난 잘못이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후로도 기태정은 기억을 되찾으라며 독촉하지도 않았고, 기약이 없어 보이는 제 상태를 보고서 답답해하지도 않았다. 딱 한 번, 무너지듯 제 손등 위로 이마를 대고 길게 뒤채듯 숨을 몰아쉬던 때를 제외하곤 아무 일도 없는 듯 저를 대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눈을 뜨면 기태정이 보였다. 그러면 잘 잤냐고 인사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었다. 그는 가끔 생소한 과일의 맛이 어떤지 물었다. 병원에서 쓰는 것이 아닌 침구를 들고 와서 촉감이 괜찮은지 묻기도 했다.정확히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고 나란히 앉아 창밖만 바라본 적도 많았다. 그럴 때면 어쩐지 명치 아래 우묵한 곳이 징징 울렸다. 연유를 알 수 없는 서글픔과 표적을 잃은 미움이 왈칵 밀려왔다. 그럴 거면. 그럴 거였으면. 뒤의 중요한 대목은 모조리 날아간 너덜거리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나부꼈다.
“이세화 씨.”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간의 틈을 두고서 문이 벌컥 열렸다.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서 끌고 왔다던 군의관 나 중위였다.
“점심 먹고 한 바퀴 산책하고 왔는데 밖이 참 더워요.”
과연 나 중위에게선 바싹 마른 햇볕의 냄새가 났다. 계절마저 잊은 세화는 그렇구나, 할 따름이었다.
“나가 보지 않을래요? 잠깐이어도 좋으니까.”
“…아뇨.”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꾸하자 나 중위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음, 불편한 곳은 없고요?”
“…….”
“그래도 조금씩 일상적인 일을 수행해 보는 게 좋을 텐데….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책을 읽고 싶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그런 대단한 취미 같은 게 있을 리가. 세화의 일상은 화투패 돌리고 약을 마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손이 굳지 않게 연습할 시간을 준다면 고맙긴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군인들 앞에서 불법적인 일을 선보여선 안 될 것 같았다.
“소아 병동에서 아이들 읽는 동화책이 있는데 오늘은 그거라도 볼래요?”
나 중위가 시계 버튼을 꾹 누르며 화면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군인들만 쓸 수 있다던 저 시계엔 평범한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기능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물론 준장인 기태정이 찬 시계는 나 중위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한 생김이었다.
시계….
판 위로 작게 떠오른 홀로그램을 바라보던 세화는 어쩐지 목덜미가 싸해지는 느낌에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봐선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는데 저 시계를 보고 있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번엔 내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내일은 이세화 씨가 직접 가서 골라 봅시다. 서가가 병실에서도 멀지 않거든요. 어때요?”
정말 나가고 싶지 않은데…. 머뭇거리며 거절할 말을 고르는 사이 문이 벌컥 열렸다. 최 원사… 라고 했던가. 하여튼 그 사람이 헉헉거리며 책을 한 아름 끌어안고 있었다.
“벌써 왔어?”
나 중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놀란 건 세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더 가지고 올까요?”
“뭐야, 이건.”
때마침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지, 기태정이 문가에 서서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콱 찌푸렸다.
“환자 있는 병실에서 대체 무슨 소란들이지?”
“아, 준장님. 죄송합니다, 지금 손이 없어서….”
“이세화 씨가 읽을 책 좀 가지고 오라고 제가 부탁했습니다.”
재빨리 경례를 올린 나 중위가 최 원사의 짐을 나눠 들었다. 분명 뭐라 지적하려던 것 같던 기태정은 그 말에 미미하게 눈썹만 까딱이고 말았다.
세화는 괜한 마음에 부스스한 옆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남자는 무슨 난리가 벌어지든 저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괜찮은 것처럼 보였다.
“다녀왔어.”
언제부터인가 그는 저를 보고 덤덤한 얼굴로 다녀올게, 다녀왔어, 그런 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군복 재킷을 벗으며 자신의 일과를 짤막하게 들려주었다.
국방부에 다녀왔다, 공군 청사에서 회의가 있었다, 새로운 전투기를 도입한다고 해서 검토했다…. 대화를 나눈다기보단 오늘의 주요 업무를 요약해 주는 것에 가깝긴 했지만, 세화는 하루 중 그 순간이 가장 좋았다.
덤덤한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를 망설이듯 아주 살짝 찡긋거리는 눈매, 낮은 목소리, 무언가를 기대하듯 저를 슬쩍 훑어보는 눈빛….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기태정의 모든 행동이 좋았고,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서글퍼졌다.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잔뜩 고였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자, 하나 골라 봐요.”
나 중위와 최 원사가 뒤로 물러서며 수납장을 가리켰다. 세화는 머뭇거리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에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걷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얼마 전부터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뚝거리는 것 같다며, 기태정도, 나 중위도… 하여튼 병실을 오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걸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목 상태가 좀 이상해서 그렇지 다리는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빤히 지켜보는 시선에 옆얼굴이 따가워질 지경이었다. 세화는 조금 주눅이 든 채로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사람들 눈초리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순간 길게 훅 뻗어온 그림자에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크게 떨고 말았다.
“…아.”
검은 뱀처럼 감겨 오던 손길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기태정이었다.
“죄송… 합니다.”
거센 거부 반응에 허공에 잠시 멈춰 있던 커다란 손이 이내 자신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도와주려다 몹쓸 취급이나 당했으니 무안할 법도 한데, 그는 아무런 타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가 수월히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부축해 줄 뿐이었다. 한데 엉킨 두 사람분의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속이 울렁거려서, 세화는 애매하게 고개를 틀었다.
텅 빈 수납장에 자리한 책들은 크기도 색도 제각각이었으나, 알록달록해서 병실 안이 화사하게 느껴지긴 했다. 세화는 한 권을 꺼내려다 말고 기태정을 슬쩍 돌아보았다. 어쩐지 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될 것 같았다.
기태정은 나 중위와 입 모양만으로 뭐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눈동자만 흘끗 움직여 세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깊이 감았다가 뜨며 한숨을 삼켰다.
“…편하게 읽어.”
“…….”
“내 눈치 보지 말고.”
“거….”
거짓말.
세화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속으로만 중얼거린다는 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그리고 거짓말이라니…. 편히 읽으라고 좋게 말해 줬는데, 대체 그 말의 어디에 분개할 구석이 있다고 이렇게 울컥하는 건지 모르겠다. 세화는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무도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가장 얇은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읽기 싫다고 미적거렸던 게 무안할 정도로 수월하게 페이지가 넘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재미있었다.
잠시 그 앞을 서성이던 세화는 조심조심 다른 책을 꺼냈다. 그림이 대부분이어서 그런지 끝까지 읽기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소아 병동에 있는 책이라고 했나? 그래서 그런지 권선징악 같은 교훈보다 주인공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 소원이라는 건 하나같이 소박하기 짝이 없어서, 꿈에서 강아지와 모험을 떠난다거나 초콜릿을 산처럼 쌓아 두고 먹는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인지 능력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 것 같네요.”
뒤에서 지켜보던 나 중위는 이대로 조금씩 다른 일도 시도해 보자고 했다. 싫어도 산책하러 나가고, 슬슬 상담도 시작하자고.
“계속 안에만 있으면 더 안 좋아져요.”
불퉁한 기색에서 거부를 읽은 나 중위가 살살 달랬다. 세화는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로 다른 동화책을 꺼냈다.
모순적인 행동이라는 건 안다. 특실에서의 생활은 부담스럽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진 않았다. 다시 하우스로 돌아가 선수 생활이나 하는 게 싫어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몸을 방 밖으로 내밀고 싶지 않았다. 그 한 걸음이 이상하게 무서웠다. 문을 열고 나가면 어쩐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아직 몸이 불편해 보이는데. 특히 다리가.”
“여태 아무렇지도 않다가 기억이 돌아오면서 절기 시작했으니, 심리적인 부분이 큰 것 같습니다. 정신과 전문의의 지도 아래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나 중위와 기태정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세화는 새로 꺼낸 책의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하늘을 날고 싶었던 꼬마의 모험을 담은 책이었는데, 마침 펼쳐 든 장에는 새파란 하늘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아랜 초록색 풀이 깔려 있었고, 저 멀리엔 연둣빛 산봉우리도 드문드문 보였다.
“…아.”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던 세화는 저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니, 탄식이라고 해야 하나. 앓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비틀거리는 소리가 길게 흘러나왔다.
“아, 으….”
분명 어디에선가 이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세화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속이 죄 뭉개지는 것만 같았다.
“이세화!”
이상을 눈치챈 기태정이 제 이름을 불렀다. 손에서 놓친 책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고, 그와 동시에 몸 안에서 무언가 파삭 부서지는 느낌이 났다. 칭칭 두르고 있던 얇은 유리 벽이 전부 깨지는 것 같았다.
퍽 으깨진 유리 알갱이가 사방으로 튀고, 정신없이 산란하는 빛을 따라 낯선 그림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건 분명 세화도 겪어 본 언젠가의 기억이었다.
그래…, 기태정과 함께 이렇게 푸른 하늘을 날았다. 그 아래엔 빛이 바랜 잔디가 깔려 있었고, 고개를 돌리면 땀에 젖은 머리칼을 털며 웃는 그가 보였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니 전복된 하늘은 땅으로 죄 쏟아져, 새파란 물이 되어 찰랑이고 있었다. 세화는 하얀 물보라에 둘러싸여 기태정과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는 저에게 정복 모자를 씌워 줬고, 일이 전부 끝나면 진짜로 저 바다를 보러 가자고 속삭였다.
바다.
입 안으로 그 말을 웅얼거리자 아름다웠던 물결 위로 순식간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비강 가득 들어찬 은은하고 시원한 향은 어느새 매캐한 탄내로 바뀌어 있었다.
“흐, 어….”
이세화, 세화야. 저를 부르는 남자의 음성이 아득했다.
그림자조차 지지 않을 것 같은 새하얀 빛이 눈앞에서 펑펑 터졌다. 사람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중년의 여자가 끊임없이 흐느끼기 시작한다. 죽고 싶지 않아. 총각, 제발 살려 줘. 그 울음 섞인 애원이 세화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야.
익숙한 목소리가 말도 안 되는 호칭으로 저를 불렀다.
아니. 넌 못 죽어.
너랑 똑같이 살게 할 거야.
남자의 뾰족한 말끝이 뇌를 푹푹 쑤셔 대는 것만 같았다. 아, 세화는 범람하는 기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가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왜.
“고개 들지 말고. 너무 숙이지도 말고, 그래. 그렇게 있어.”
어느새 성큼 다가온 기태정이 세화의 뒷덜미를 받치고는 턱을 붙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의식하고 나니 입 안에서 쇠 맛이 확 번졌다. 그렇지만,
“……, 싹… 이.”
피가 나든 말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새싹이….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 세화는 형편없이 떨리는 손으로 배를 더듬었다. 두들겨 맞는 것처럼 속이 아프긴 한데, 아이가 있을 때 느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감각이었다. 제 몸뚱어리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그건 상관없었다. 그저 아이가….
“아…, 새, 싹….”
숨을 헐떡이다 밀려 나온 말에, 기태정은 잠시 얼어붙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강한 힘으로 저를 조여 안았다. 숨 쉬라는 듯 손바닥을 오목하게 만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기도 했다.
그는 오래도록 이 순간을 기다렸던 사람 같았다. 그러면서도 제발 이때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던 사람 같기도 했다.
“…기억, 나?”
“…….”
“이세화.”
기태정은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이후론 아차 싶었는지 뭔가를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소매로 코끝을 막아 줄 뿐이었다.
세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감각이 둔해진 것 같았던 목구멍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울리질 못했다. 뻣뻣하게 혀뿌리가 굳어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 내기 어려웠다. 새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공허하게 입 안을 맴돌았다. 소중한 아이를 지켜 내지 못한 벌이라는 듯, 무형의 손이 목소리를 앗아 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