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세화는 신 것을 씹은 사람처럼 한쪽 어깨를 기울이며 작게 눈을 찡그렸다. ‘잘못’이라는 표현이 조금 낯간지러운 모양이었다. 잠시 그러다가,
“아….”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방금 그 말….”
처음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담은 인사였지만, 반복된 구절에 무언가 떠오른 것도 같았다.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
세화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려던 기태정은 순간 움찔해서, 주먹을 꽉 쥔 채로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또 이런다. 제 말과 행동이 세화의 무의식중 트리거를 당기는 건 아닐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욕심만 앞서 멋대로 굴게 된다.
“…불편한 곳 있으면 참지 말고 말해. 너 큰 수술 했으니까.”
“수술이요?”
당황한 세화가 자기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당장 기억나는 것이 없으니 답답한 듯 한참을 그러다, 헐렁한 환자복 소매를 꾹꾹 잡아당겨선 병원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어.”
“왜?”
“이거 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생각난 건데, 잊어버려선 안 되는 게 있었어요.”
절대 잊어선 안 되는 것, 소중한 것… 그런 감각만 남아 있다며 세화가 어쩐지 먹먹한 얼굴을 했다.
“이쪽에선 다 잊으라고 하얀 물감을 뿌려 대는 것 같고… 또 반대쪽에선 어떻게 다 잊을 수 있냐고, 강제로 뭘 보여 주려고 하는 것 같고….”
세화는 검지로 양쪽 관자놀이를 번갈아 가며 짚었다. 그러곤 손을 툭 떨구고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뭐였지….”
훅 가라앉은 시선이 발치로 떨어졌다. 기태정은 잠시 망설이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다감한 음색을 골랐다.
“일단 쉬어. 수술 이전에도 너 많이 아팠어.”
“아, 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허무할 정도로 단출한 감상이었다.
기태정은 그 낯선 태도에서 세화가 정말로 자신을 잊었음을 실감했다. 평소였다면 볼을 붉히면서 감격했을 텐데. 게다가처음부터 지금까지, 제 손아귀에 잡혀 있는 동안 이세화는 이런 식으로 짧게 대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순히 단답형으로 답을 해서 놀란 게 아니다. 그의 안에서 저는 구태여 성의껏 대답할 필요가 없는 모르는 사람, 그렇게 분류된 것이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속내를 감추려고 해도 훤히 다 읽혀서 대체 그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갔을까 의아했는데… 착각이었다. 이세화가 허락해 줘서 전부 다 보였던 거였다. 처음엔 저를 무서워해서, 이후엔 마음을 다 내주어서.
“이세화.”
“…네?”
“넌 스무 살이 아니라 스물한 살이고….”
기태정은 홀린 듯 말을 덧붙였다. 고요하고 덤덤한 그의 눈동자 속, 이방인처럼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나 때문에 네가 많이 아팠어. 내가… 널 속이고, 이용해서.”
“…….”
“…사실대로 말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네가 날 좋아해 주는 게 좋아서.
나도 널, 좋아해서.
나를 보고 황홀해하던 너의 눈빛이 변할까 봐 거짓말했어.
그러나 기태정은 이어질 말을 고스란히 삼킨 채 눈을 돌렸다.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변명을 들어야 할 사람은 눈앞의 이가 아니라, 쓰러지기 직전 자신을 놓아 버린 그 이세화다.
“좀… 얼떨떨하네요. 절 속이고 이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그걸 미안해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라.”
세화는 뭐라고 반응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애꿎은 소매만 만지작거렸다.
“…너한테 이런 말 처음으로 말하는 거야. 이전엔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어. 그게 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뭐…어쨌든 지금은 말해 주셨잖아요.”
뒷짐을 지고 있는 손이 크게 움찔거렸다. 괜찮다는 답은 지금의 세화에게 들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 기태정은 일순 구명줄이라도 붙든 것처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럼이렇게… 시작하면 되는 건가?”
“그렇… 겠죠?”
미안하다고, 미안했다고 곁에서 계속 사과하면. 마음이 녹을 때까지 언제고 그렇게 말해 주면. 그러면 우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나? 함께 장을 보고, 앞으로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잠을 청할 수 있던 그때로, 다시.
“어… 죄송한데요. 저 갑자기 조금 졸려서.”
“아, 어…. 쉬어.”
세화는 훅 밀려온 잠기운이 당황스러운지 이마를 연신 문지르며 침대에 누웠다. 뭐랄까. 잠이 들었다기보다, 방전되어 전원이 꺼지듯 풀썩 쓰러진 것에 가까웠다.
기태정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결국 손을 뻗었다. 이불을 잘 여며 주고, 수액 팩을 체크했다.
이대로 세화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문제고, 돌아와도 문제였다.물론 세화가 당장 내일 정신을 차린다고 하더라도 이전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단 하루라도 달라진 처음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결국 죽을 뻔했던 이에게 뒤늦게 잘해 주고 있다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기억이 돌아온 세화가 이 순간을 더 큰 기만으로 여긴다면…. 그럼 그때는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침대 옆 스툴에 앉아 세화의 마른 등을 굽이굽이 바라보던 기태정은, 스르륵 몸을 기울여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씨발, 하나도 모르겠다.
이세화가 자기 몸까지 해치면서 도망쳤을 땐 어떻게든 잡아다 묶어 놔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침대에 걸어 둔 목줄을 채우지도, 그렇다고 치우지도 못했다.
그러다 오해… 아니, 솔직히 완전한 오해라고도 할 수 없는 얘길 듣고 이세화가 기절했을 땐, 그리고 그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그야말로 눈이 돌아갔다.
이딴 식으로 세화를 잃고 싶은 건 아니었다. 무사히 깨어나면 적어도 이런 식으론 울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그 ‘뭐라도’를 채울 수 있는 말과 행동이 좀처럼 떠오르질 않는다. 이런 전략은 어디에서도 체득한 적이 없다. 배우지도 못했다.
기태정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오래된 신화 속, 끝이 보이지 않는 형벌을 짊어지게 된 거인이 된 기분이었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 없었다. 뇌는 물론이고 수술 부위도 전부 멀쩡했다. 손상도, 출혈도 없으니 상태가 호전되길 바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세화는 자꾸만 졸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훅훅 차오르는 낯선 기억들에 괴로워했다. 막 정신을 차렸을 땐 스무 살의 첫 달로 알고 있더니, 며칠 전엔 봄은 사납금을 내기 힘들다며 중얼거렸고, 그러다 갑자기 여름이 오면 해야 할 일을 읊었다. 쉽게 비유하자면 머릿속에 달력이 있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마구잡이로 뜯어 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어제는 침대에 웅크리고서 뭔가를 열심히 쓰길래 슬쩍 들여다보았더니, 삐뚤빼뚤한 글씨로 떠오르는 마약 제조법을 전부 적고 있었다. 남은 빚 갚으려면 한참 더 일해야 하는데 이것마저 잊어버리면 큰일 난다면서.
저에 대한 원망도, 소중히 여기던 아이마저 다 지운 그는 자신을 하우스의 삼월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 외엔 자신에게 어떠한 가치도 없다는 듯 오직 약과 관련한 일만 되새기려 애썼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기태정은 지금 세화가 스무 살 시절의 기억조차 온전하지 않다고 확신했다. 본인이 하우스 실장이고 화투 기사이며 마약 유통을 주로 맡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떠올리지 못했다. 예를 들면 김석철과 관련한 일 같은 것들.
당시에도 김 소위와 거래하고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깡그리 잊은 듯 그 일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관련된 얘길 꺼내려다가도 금세 말문이 막힌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오셨어요.”
병실로 들어서니, 아침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세화가 인사를 건넸다.
“…어, 다녀왔어.”
기태정은 한 뜸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화가 기억을 잃기 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렇게 인사를 나누는 일일 것이다.
며칠 전, 병실 안에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해 잠시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하자, 세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잘 다녀오시라고 말해 주었다. 그 말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 있던 기태정은 아주 어색하게 다녀오겠노라 답했다.
시시하고 평범한 인사는 이후로 조금씩 몸집을 불려 갔다. 다음 날 세화는 무슨 일이 있으시냐 슬쩍 물어 왔고, 기태정은 청사에 결재할 문건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생각해 보니 세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나눈 정사로 곤죽이 된 탓에 아침에도 축 늘어져 있었고, 저는 그런 세화를 내버려 두고선 할 일을 하러 갔다. 급한 볼일이 있으면 이렇다 할 말도 없이 며칠간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하우스에서든 관사에서든, 세화에게 간단히 언질이라도 주려던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 없었다. 세화가 저를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순종적으로 저만 바라보는 그 얼굴을 보면서 솔직히 즐기고 있었다.
기태정은 어쩌면 세화가 저에게 이걸 깨닫게 하려고 스스로의 머릿속에 불을 놓은 것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던 건 산처럼 쌓은 고가의 사치품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이런 소소한 것들이었다고, 솔직한 말 한 마디였다고….
“어디 안 좋아?”
유독 힘이 없어 보여 조심스레 묻자, 세화는 멍하니 눈만 슴벅였다.
“…잘 모르겠어요.”
숙이고 있는 옆얼굴에서 고단함이 배어났다. 세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하게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사 오길 잘했네.”
뒷짐을 지고서 감추고 있던 선물을 내밀자, 세화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네가 좋아하던 거야.”
하늘색과 분홍색 구름이 그려진 작은 케이크 상자를 보자, 미미하게나마 눈동자에 이채가 서린다.
사실은 더 대단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세화가 기뻐했던 건 케이크나 과일 쪼가리 같은 것들뿐이었다. 거액이 들어간 체크카드, 비싼 옷, 장신구… 그 무엇을 건네도 감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버거워하며 울기만 했다.
“와….”
역시나 세화는 옅은 분홍색 크림이 덕지덕지 발린 체리 케이크를 보고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감사합니다.”
포크를 찾아 꺼내 주었지만, 세화는 먹기 아깝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뭔가 떠오른 듯 기태정을 휙 돌아보았다.
“더 필요한 거 있어?”
“아, 그런 건 아닌데….”
“편히 말해. 뭐든.”
“으음…. 어차피 준장님은 잘 모르실 것 같기도 한데….”
“뭔데?”
“혹시 1년 사이에 새싹이라는 선수가 들어왔나요? 하우스에.”
기태정은 스툴에 앉으려다 말고 잠시 쩡하니 얼어붙었다. 새싹이. 습격처럼 쏟아진 그 부름에 턱 근육이 뻣뻣하게 경직되어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난데없이 머릿속에 그 문장만 둥실둥실 떠다녀요. 이거 새싹이 주고 싶다고.”
“…….”
“제가 아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하우스 선수들 아니면 손님들뿐인데… 보통 선수 이름은 새싹이 같은 걸로 안 지으니까 좀 이상해서요.”
“…아, 그래?”
“아무래도 그렇죠. 하꼬 선수가 그런 별명 달고 있으면 영업 하나도 안 될걸요.”
그런 별명. 기태정은 새싹이란 이름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세화의 목소리에 흠씬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제가 먹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세화는 포크로 크림 장식을 콕콕 찌르기만 했다.
“새싹이가… 이걸 먹고 싶어 했어?”
“글쎄요? 그 사람이 누군지도 기억이 안 나는 와중이라 그런 건 생각이 안 나요.그냥….”
“…….”
“아, 조금 더 정확히는… 음, 알려 주고 싶었어요. 네… 그런 것 같네요.”
“…….”
“이게 무슨 맛인지 새싹이에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어요. …당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건 그런 느낌이에요.”
어쨌든 아이를 가졌을 때 이게 먹고 싶었다는 소린데…. 체리가 아니라 체리 맛이 나는 케이크가 당겼던 걸까?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지? 군소리 없이 생과일만 먹어서 조금도 짐작하질 못했다.
2환으로 도망쳤던 때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이전엔… 청사 내의 솔라리움에서 입을 맞춘 이후론 제법 부드러운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저 또한 세화에게 달라진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내보이고 있다고, 그리 여겼는데.
“…넌 정말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었구나.”
“네?”
사람 포 떠 달라는 것도 아니고 먹을 거 사다 주는 게 뭐가 어렵냐고, 그리고 만약 누구 포 뜨고 싶은 거라고 해도 그냥 말하라고 했잖아.내가 널 위해 그 정도 수고도 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 곁에서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던 그때에도?
“준장님?”
기태정은 견디지 못하고 세화의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곳에 유일한 숨길이 있는 것처럼, 널따란 어깨를 숙이며 조심스레 이마를 가져다 댔다.
“아까도 보고 왔는데.”
“…….”
“짝눈은 확실히 아니었어.”
“…뭐가요?”
내가 모르고 있는, 놓치고 있었던 너의 숨은 이야기가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 그걸 전부 알 기회가 오기는 할까?
“준장님?”
이세화.
미안, 해.
기태정은 익숙하지 않은 문장을 몇 번이고 혀끝에 올려 보았다. 지금이라도 말했으니 되지 않았냐고, 계속 그렇게 해 보라던 스무 살의 이세화에게 비겁하게 기대어 할 수도 없는 고백을 몇 번이고 연습했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거지, 앞으로도.
“…앞으로도 몇 번이고 말해 줄게.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
그러니까 이제 그만 돌아와.
돌아와서 들어줘.
그 끔찍했던 순간을 네 마지막 기억으로 두지 마.
***
“아이를 낳았다고? 예상보다 시기가 이르지 않나?”
모니터에 떠오른 홀로그램을 훑어보며, 김 중령이 엄지와 검지로 뾰족하게 인중을 훑었다.
“그래서 오선란이 바쁘게 움직이는 건가? 법적 보호자가 사라져서?”
“예. 양자 입적은 확정됐고, 지금은 거주지를 변경하려는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뭐?거주지를 변경해? 어디로?”
“5성 안으로 편입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 기가 차서 절로 헛웃음이 튀었다. 이번 일 마무리 되고 나면 구역 정비를 다시 하자는 의견을 내야겠다. 성 밖에서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사는 거야 알 바 아니지만, 천것이 5성 땅을 밟게 할 수는 없지.
“어쨌든 잘됐네. 증인 소환장 제출해. 애 낳았으면 이제 거부할 핑계도 없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기태정도 그렇고 오선란 대장이 과연 순순히,”
“독고다이로 설쳐 대는 기태정 그 새끼가 골치 아팠던 거지, 오선란이 이세화의 방패막이로 나선다면 오히려 일이 쉬워져.”
김 중령은 손을 휘저어 홀로그램을 사라지게 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책상 위로 척 올리고 있던 짤따란 다리가 흥겹게 흔들거렸다.
“오선란 같은 장성급 장교가 자기 핏줄이랍시고 재판장에 출두도 못 하게 하는 걸, 우리 위대하신 원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 것 같아?”
“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거야.”
늙은 독재자는 고위직 인사가 조금이라도 불온한 기미를 보이면 병적으로 발작했다. 오선란에게 국외 체류를 허락해 준 것도 장교들의 결탁을 막아 주겠다는 물밑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선란이 결혼도 고사하고 있고 자식도 없다는 점 역시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다른 곳과 연을 맺으며 서로 밀어주고 끌어 주고 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 오선란이 난데없이 웬 개뼈다귀 같은 놈을 양자랍시고 데려와선, 간이든 쓸개든 다 내줄 것처럼 굴고 있다.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그 천것의 부모가 20여 년 전 있었던 화학 실험과도 관계가 있다고도 했다.
그 실험은 지배자의 지우고 싶은 실패이자 모두가 쉬쉬하는 치부였다. 그런데 그와 관련이 있는 사람을 후계로 들여, 권력을 방패 삼아 휘둘러 대는 걸 과연 좋게 봐줄까? 김 중령은 오선란이 결국 군복을 벗게 될 거란 것에 거액을 걸 용의도 있었다.
“늙은이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게 이상하지. 하여튼 이제부턴 초점을 그쪽으로 돌려. 소위도 고발을 당해 군사 재판에 섰는데, 대장의 양자라는 이유로 민간인이 증인 출석을 거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예, 알겠습니다.”
김 중령은 기름진 얼굴을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어차피 이름뿐인 재판에 불과하다. 잘만 하면 그 하층민을 이용해서 기태정은 물론이고 오선란의 세를 꺾는 것까지 노릴 수 있지 않을까.여론을 몰아가면 이세화에게서 증언을 듣는 자리가 아니라 심문하는 자리로 만드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좋은 본보기가 되겠어.”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거슬리는 놈들도 치워 내고, 우리 가문에 반기를 들면 끝이 좋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똑똑히 보여 줘야겠다.
“이세화를 진범으로 몰아가는 게 제일 최선이긴 하다만, 분위기 봐서 정 안 될 것 같으면 공범으로라도 몰아가자고. 그 정도야 승산 충분하잖아?”
“맞습니다. 그 정도야 전혀 문제없을 겁니다.”
“그래.사형 선고 끌어내는 건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잡아 처넣기만 하면 돼.”
뭐…감옥 안에서 수감자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 건 제법 흔한 일이니까 말이다.